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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3세와 4세

영국신사77 2007. 6. 1. 09:26

                            안티오코스 3세[Antiochus III]

 

 

 


  본문


  별칭은 Antiochus the Great, Antiochus Megas.[안티오코스 대왕]

  BC 242~187 이란 수사 근처.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재위 223~187, 36년간).
 
 그는 안티오코스 2세와 라오디케의 손자로, 셀레우코스 2세(BC 246~225 재위, 21년간)의 차남이다.[형인 셀레우코스 3세(BC 225~223 재위, 2년간)는 불과 재위 2년만에 암살 당했다.]

 
 동쪽인 이란 지역에서 제국을 재건한 반면,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주(州)의 크기를 줄여 제국을 행정적으로 개혁하고, 군주숭배 의례(자기와 부인 라오디케를 신으로 받드는 것)를 창시했으며, 주변 국가의 군주들과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관계를 개선했다.

 
 안티오코스는 총리에 헤르미아스, 소아시아 총독에 아카이오스, 메디아와 페르시스 등 동부 속주들의 총독으로, 몰론과 그의 형제 알렉산드로스를 선왕(先王)이 임명했던 대로 유임시켰다.
 
 이듬해 몰론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참칭하자, 안티오코스는 헤르미아스의 충고에 따라, 남부 시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벌렸던 이집트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몰론으로 기수를 돌렸다.
 
 BC 220년 멀리 티그리스 강의 제방에서 몰론을 격파하고, 메디아의 북서부 지역인 아트로파테네를 정복했다. 그 직후 안티오코스는 헤르미아스를 죽임으로써, 전대(前代) 통치의 영향력 대부분을 제거했다.
 
 같은 해 아카이오스가 소아시아에서 왕을 자처했지만, 자기 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안티오코스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이란사).

 
 이제 안티오코스는 소위 제4차 시리아 전쟁(BC 219~216)을 벌이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셀레우키아인 피에리아, 티레, 프톨레마이스와 같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 항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BC 218년 코일레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손에 넣었다.
 
 BC 217년 시리아의 가장 남쪽 도시인 라피아에서, 헬레니즘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의 군대(7만 5,000명 추정)와 접전을 벌였다. 그의 군대는 6만 8,000명이었다.
 
 안티오코스는 이집트군의 좌익을 패주시켰지만, 그의 군대는 중앙의 방진(方陣:중무장한 보병의 밀집대형)이 이집트의 새로운 방진에 의해 격파당했다. 뒤이은 평화조약에서, 안티오코스는 셀레우키아인 피에리아를 제외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했다.

 
 시리아 전쟁 이후, 아카이오스의 반란에 대처했다. 페르가몬아탈로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코스는, BC 213년 아카이오스를 그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사로잡아,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안정시킨 뒤, 그는 유명한 동방 원정(BC 212~205)에 착수하여,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다.
 
 BC 212년, 안티오코스는 여동생 안티오키스를 아르메니아의 크세르크세스 왕과 결혼시켰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쳤다.
 
 파르티아아르사케스 3세의 수도 헤카톰필로스(카스피 해의 동남부)를 점령하고, BC 209년 그에게 동맹을 강요했다.
 
 이듬해에는 박트리아의 에우티데모스를 격파했지만, 그의 칭호와 통치권은 인정해주었다.
 
  BC 206년, 안티오코스는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카불 계곡으로 진출하여, 인도의 왕 소파가세노스와 우호관계를 새로이 했다.
 
 아라코시아·드란지아나·카르마니아 등 이란의 속주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귀환한 그는, BC 205년 페르시스에 도착했으며, 페르시아 만 동부 해안의 상업국가 게르하의 시민들로부터 은 500탈렌트를 조공으로 받았다.
 
 거대한 봉신국 체계를 수립한 안티오코스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후, 안티오코스는 헬레니즘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필리포스 5세와 비밀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두 사람은 이집트 밖의 프톨레마이오스 영역을 분할할 것을 꾀했다. 안티오코스는 남부 시리아, 리키아, 실리시아, 키프로스를, 필리포스는 서부 소아시아 지방과 키클라데스 제도를 차지하기로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코일레시리아에 침입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 스코파스를 BC 200년에 요르단 강의 발원지 근처인 파니온에서 격파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유대인의 신전국가에는 특별한 권한을 허용했다.
 
 계속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진군하던 필리포스 5세는, 로도스, 페르가몬과도 전쟁을 벌리게 되었다. 그러자 두 나라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로마의 도움을 호소하면서, 두 헬레니즘 왕 사이의 동맹 사실을 알렸다.
 
 로마는 헬레니즘 국가간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개입해왔다. 그리하여 벌어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00~196)에서, 필리포스 5세는 로마에게 패하게 된다.
 
 이때 안티오코스는 그를 돕지 않고, 도리어 로마가 필리포스와 싸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집트에 침입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BC 195년의 평화조약에 의해,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100년 동안 각축을 벌렸던, 남부 시리아 지방과 소아시아의 이집트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12세인 딸 클레오파트라 1세를, 7세 아래면서 불과 5살의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다. 그리하여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보호국이 되었다(→ 로마사).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팽창욕에 휩싸인 안티오코스 3세는, BC 198년에 페르가몬 왕국 일부, BC 197년에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를 점령했다.
 
 BC 196년에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일찍이 셀레우코스 1세가 BC 281년에 획득한 바 있었던 트라케에 진출하여, 이곳의 종주권을 선언함에 따라, 로마와의 지겨운 소모전과 외교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로마는 안티오코스에게 여러 번 사절을 파견하여, 유럽에서 물러날 것과, 소아시아의 모든 자치 공동체들을 자유롭게 놓아둘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사실상 셀레우코스 제국의 서쪽 영역의 해체를 의미했으므로, 안티오코스는 당연히 거절했다.
 
 이러한 로마와의 긴장상태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한 후 카르타고에서 도망하여, BC 195년 안티오코스 3세에게 와서, 그의 고문이 되었던 것이다.

 
 안티오코스는 이전에 자신이 저버렸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뿐만 아니라 필리포스·로도스·페르가몬, 그리고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와 결합했다.
 
 다만 그리스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만을 가진 아이톨리아 동맹만이, 유일하게 안티오코스에게 자신들의 해방자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면서, 그를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들에게 의지해, BC 192년 가을, 단지 1만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데메트리아스에 상륙하여, 에우보이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중부 그리스에서는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인 BC 191년, 2만 명 이상의 로마군이 트라케에서 안티오코스의 지원병력을 차단했고, 테르모필레(그리스에 있음) 고개에 있던 그를 포위공격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잔존부대와 함께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도망했고, 이곳에서 바다를 통해 에페수스로 건너갔다. 또한 그의 함대는, 로마·로도스·페르가몬 연합해군에게 완전히 괴멸당했다.
 
 로마군은 BC 190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넜다. 안티오코스는 이제 로마가 이전에 제시했던 조건에 따라 협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는 그에게 먼저 타우루스 산맥 이서 지방에서 철병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안티오코스는, 시필로스 산 근처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잡다하게 끌어모은 7만 명의 병력으로, 로마와 그 동맹군 3만 명을 맞아 싸웠다.
 
 동부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있었지만, 그는 아파메아 평화조약을 맺고, 유럽과 타우루스 이서 지방의 소아시아에 위치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했다. 아울러 보상금으로 12년 동안 1만 5,000탈렌트를 지불해야 했고, 그의 코끼리와 함대를 양도했으며, 그의 둘째 아들인 안티오코스 4세를 포함한 인질을 바쳤다.
 
 그의 왕국은 이렇게 하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서부 이란으로 축소되었다.
 
 BC 187년 안티오코스는 크게 부족한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공물을 강요했던 수사 근처의 한 바알 신전에서 살해되었다.

 

 

                                                                         H. Volkmann 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Antiochos IV, BC 215?~BC 164, 11년간재위]

 
  요약
 시리아의 왕(재위 BC 175∼BC 164, 11년간).
   본문

  안티오코스 3세의 둘째 아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라고도 한다.   로마에서 14년간 볼모생활을 하였으며, 형 셀레우코스 4세[BC 187~175, 12년간 재위]가 암살 당한 뒤에 즉위하였다.

 

  BC 169년 이집트에 침입,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하였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이집트에서 철수하였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 심취하여 헬레니즘문화에 입각한 제국주의 국가의 통일을 꿈꾸어, 유대교를 박해하여 마카베오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유대에 하스몬 왕조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만년에 박트리아파르티아를 회복하기 위해서 동방원정을 계획, BC 164년 원정 도중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뒤 셀레우코스왕조는 쇠퇴하였다.

 

 

안티오코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Antiochos Epimanes('狂人')라고도 함.

   (Epiphanes는'신의 顯現'이라는 뜻)

   BC 215경~164 이란 타바에.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재위 BC 175~164, 11년간).
 
                                    [개요]

  그리스 문화와 제도를 장려한 군주로 가장 유명하다.
  유대교를 억압한 결과 마카베오 전쟁을 야기했다(→ 헬레니즘, 이스라엘, 마카베오가).
 

                                  [초기 치적]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의 셋째 아들로, BC 190~189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아버지가 패배하자 BC 189~175년 로마에서 인질생활을 했다. 이때 로마의 제도와 정책을 배우고 그것에 경탄했다. 그의 형 셀레우코스 4세는 자신의 아들 디미트리오스와 그를 교환했다.
 
  셀레우코스 4세가 반란자 헬리오도로스에게 살해되자, 안티오코스 4세는 그를 내쫓았다. 시리아의 정정(政情)이 불안했던 이 시기에, 이집트의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후견인들은 코일레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등 이전에 안티오코스 3세가 정복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시리아와 이집트 양측은 모두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BC 173년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와 안티오코스 3세가 맺은 아파메아 조약(BC 188)에서 주기로 한 전쟁 배상금 나머지를 모두 갚았다(→ 로마사, 고대 이집트).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먼저 침략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공격에 선수를 쳤다. 펠루시움과 카시온 산 사이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정복했다.
 
  BC 169년에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을 점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 4세의 조카였으며(안티오코스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했음), 안티오코스는 로마가 간섭할 아무런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보호자 자격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형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게, 대항 정부를 세우도록 간청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시리아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펠루시움에 강력한 부대를 배치하여, 이집트에 대한 접근에 안전을 기했다.

 
  BC 169(또는 168)년 겨울,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는 안티오코스에게 모든 헬레니즘 왕국들에게 위험한 존재인 로마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한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의 형제, 누이와 제휴를 맺고 로마에 새로이 원조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안티오코스는 전쟁을 준비했다.
 
 안티오코스의 함대가 키프로스에서 승리를 거두자, 키프로스의 총독은 그에게 섬을 넘겨주었다.
 
  안티오코스는 BC 168년 이집트에 재차 침입하여, 키프로스와 펠루시움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하(下)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기반은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같은 해인 BC168년 6월 22일, 로마군이 피드나에서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세우스의 군대를 물리치자, 안티오코스가 거둔 승리는 빛을 잃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외 엘레우시스에서, 로마 대사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놀란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안티오코스가 서 있는 땅 주위에 원을 그리고, 그 원을 벗어나기 전에 명확한 답변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이같은 공개적인 모욕에 당황한 왕은, 곧바로 로마의 요구에 따르기로 동의했다.
 
  그리하여 로마의 개입으로, 다시 현상유지가 이루어졌다. 이집트가 지배권을 주장했던 남부 시리아의 영유권이 허용됨으로써, 안티오코스 4세는 영토의 상실을 피할 수 있었다.
 

                            [왕국의 헬레니즘화 노력]

 

  그는 동방인들, 즉 비(非)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소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에,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여 육성함으로써, 경제적·사회적으로 왕국을 부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즉위하기 전에도, 이미 안티오코스는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건설과 극장 장식에 헌금을 냈다. 그는 오론테스의 안티오크에 에피파니아(그의 이름을 본떴음)라는 구역을 새로 건설하여 시를 확장했다. 이 구역에다 도수관(導水管), 공회당, 시장,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게 바치는 사원을 세웠다. 그를 아시아의 '소테르'(해방자, 구제자)로 숭배하는 바빌론은, 그리스인 식민도시가 되어 자유가 보장되었다. 또다른 에피파니아가 아르메니아에 세워졌다. 엑바타나(페르시아에 있음)도 에피파니아로 불렸고, 그리스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여러 도시들은, 그 내부에서 통용되는 동전을 주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페르시아 만에 있는 안티오크의 조폐소는,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강 어귀 지역 사이의 해양무역에 기여했다(→ 바빌로니아).
 

  안티오코스의 헬레니즘화 정책이 번성하고 있던 동양의 사원 조직, 특히 유대 사원과 갈등을 일으켰다.
 
  안티오코스 3세 시대 이래, 유대인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다. 유대인은 두 파벌, 즉 종교적인 정통 하시드파(독실한 자)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했다.
 
  그러나 재정상의 이유 때문에 안티오코스 4세는 개혁파를 지지했고, 상당한 자금을 받은 대가로 대제사장 야손에게 예루살렘에 김나시온을 세우고, 젊은 층의 교육에 그리스 방식을 도입하도록 허락했다.
 
  BC 172년 안티오코스는 더 많은 공납을 받고, 야손의 자리에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BC 169년 안티오코스가 이집트에서 전쟁중일 때, 야손은 성채만 빼놓고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경쟁자 메넬라오스의 지지자들을 많이 죽였다.
 
  BC 167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강습하여 탈환하고, 헬레니즘화를 강화했다. 예루살렘은 특권을 박탈당하고 시리아군이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유다스 마카베오의 반란]

 

  그리스인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안티오크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야훼 숭배와 유대인의 모든 의식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올림피오스의 제단을 세우고, 왕의 조상(彫像)을 우상으로 세우며, 그 발 밑에 제물을 놓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신성 모독에 대항하여 반(反)그리스 유대인 지도자 유다스 마카베오는 게릴라전으로 하시드파 봉기를 일으켰고, 수차에 걸쳐 안티오코스가 진압하라고 보낸 장군들을 무찔렀다. 유다스는 부분적인 사면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의 아크라 지구를 제외한 유대 지역 전부를 장악했다.
 
  마침내 BC 164년 12월, 제우스의 제단을 부수고 사원을 다시 정화할 수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확실히 하시드 운동의 힘을 과소 평가했다. 그 힘이야말로 약 1세기에 걸쳐 독립 유대 국가를 유지하도록 만든 배경이었다.
 
  마카베오가 반란을 일으킨 BC 166년은, 안티오코스가 안티오크 근처 다프나이에서, 장대한 군사 열병식을 벌여 세상에 그의 힘을 과시했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당시  반란이 시작된 것을 보면 유대인의 투쟁정신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열병식에는 2만 명의 마케도니아 방진군(方陣軍)과 로마 무기로 무장한 500명의 용병을 포함한 4만 6,000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8,500명의 기병과 306기의 장갑코끼리 부대가 따랐다. 그뒤 안티오코스는 제국의 동쪽을 위협하던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을 벌여 그 지역에서 세수입을 회복했으며, 그에게 등을 돌린 아르메니아의 아르탁시아스에게 종주권 인정을 강요했다. 또한 페르시아 만에 안티오크라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아라비아 해안에 원정대를 보냈다.
 
  그는 BC 164년말 페르시스의 타바에(또는 가바에:지금의 에스파한으로 추정됨)에서 병으로 죽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엘람(지금의 이란에 있음)에서 나나이아 신전을 약탈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벌로 죽었다고 믿었다.

 

 

                                                                              H. Volkmann 글

 

 

                                      안티오쿠스4세 에피파네스 
http://blog.naver.com/weddingkgm/140019789667 윤요셉
  안티오쿠스4세 박해에 대하여..

 

헬레니즘의 생성은, 실로 유럽세계와 전세계에 주요한 사건이 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 헬레니즘 세계는, 당시 유럽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문화를 동방의 문화와 접목시킴으로써,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이 문화는 고대 유럽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통치하기 훨씬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가운데는 철저한 헬라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부자들과 제사장들이었다. 이들은 그 사회적인 지위 덕택으로, 왕궁을 드나들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더욱이 이 기간에는 토비아스와 오니아스 사이에 심한 경쟁이 있어,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 특히 대제사장직에 대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대제사장 오니아스 2세는 "돈을 아주 사랑하는 자"로서, 프톨레미 2세에게 매년 내는 20달란트 세금내기를 거부하였다. 더욱이 토비아스의 아들 요셉은, 전국의 세리로서 자청하고 나섰다. 요셉과 그의 가문은 많은 돈을 벌었으며, 나라에서도 인정하는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 두 가문은 나라에서 최고의 직책들을 맡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대제 때에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은 프톨레미에서 셀류커스에게로 이양되었고, 이에 따라 요셉과 그의 추종자들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이 새 왕조에 그들의 충절을 맹세하였다. 예루살렘에는 돈을 주고 권좌를 얻으려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토비아스가의 시몬이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셀류커스 4세 때에 총리대신을 충동질하여,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몰아내고, 성전의 성금을 가로채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일어났으며, 오니아스 3세는 셀류커스 궁정으로 달려가, 이 소요를 평정해 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기 까지 하였다. 이 두집안의 반목은, 형 셀류커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안티오쿠스 4세때 그절정에 달하였다.

 

  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 특히 친 시리아파 귀족들은 안티오쿠스가 등극하자, 그들의 목적을 이룰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친 이집트파인 합법적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그들에게는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니아스 3세가 잠깐 딴 나라에 간 사이에, 안티오쿠스 정부의 찬동을 얻고 왕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동생인 예수, 즉 여호수아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물론 안티오쿠스는 그의 임명이 정치적으로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즉시 예루살렘을 헬라적인 양식에 따라, 재정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는 경기장이 세워지고, 많은 유대인들은 그리스풍의 의복을 입게 되었다.

 

  정통 유대인들, 특히 핫시딤이나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몹시 분노했으며, 헬라주의의 영향이 커지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제사장의 임명은 하나님의 소관으로서, 이방 왕이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위로는, 그래도 대제사장 야손이 정통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상황은 변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때에 대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가, 토비아드가문의 도움과, 보다 많은 뇌물을 왕에게 바침으로써, 야손을 몰아내고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넬라우스의 추종자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의 생활방식을 고취하며 정통파에 대항했다.

 

  이 두 파의 적대 감정은 더욱더 심화되어, 마침내 헬라파와 정통파 사이의 싸움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졌다. 이때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중에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자, 야손은 예루살렘으로 달려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잇따라 일어나는 싸움들은 "유대인 대 시리아인"의 싸움이 아니라, "유대인 대 유대인"의 싸움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일어섰고, 모든 헬라화 정책에 항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티오쿠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와, 그가 이미 공포한 대로 헬라 문화와 종교를 통하여 그의 왕국을 통일시키겠다는 정책을 계속 밀고나가며, 팔레스타인도 이 정책대로 다스리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심은 로마의 권세가 날로 커져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그의 왕국을 통합시키겠다는 필요에서 더욱더 굳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메넬라우스를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직에서 몰아내려 한 것은, 그의 왕권을 모독한 행위로 간주하고 철저히 복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메넬라우스를 복직시켰다. 그리고 군인들을 풀어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토록 했다. 그들은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 기명들을 훔쳐냈다.(제1마키비서 1:20-28)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주의자들의 후원을 얻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의 헬라화 정책은 대부분의 유대민중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특히 그들은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드디어 그는 유대교를 소탕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바빌론 포로 때부터 유대교 신앙의 대표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온 유대교의 제도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유대교의 희생제사를 금지하고, 할례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안식일과 절기들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게다가 토라(즉 율법서)를 찢고 불살랐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리를 먹도록 했으며, 전국 각처에 건립되어 있는 우상제단에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러한 그의 악랄한 행동은, 성전 뜰에 제우스 제단을 건립함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는데, 거기에 안티오쿠스 자신의 모습을 담은 신상도 세웠다

 

  이 제단이 바로 다니엘서에 있는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있은 후 혹독한 박해가 뒤따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제 2마카비서 6-7장에 있는 "엘르아살과 7형제의 순교 이야기"가 바로 이 당시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신앙을 말살시키려는 정부 기관원들을 피하여, 도시와 마을들을 떠났다.

 

 



                                          발췌..신구약 중간시대(출판사: 컨콜디아사, 임태수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