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4-2] 그리스(헬라) 문명(BC3000- BC338)

영국신사77 2007. 5. 27. 23:08

[4-2] 그리스(헬라) 문명(BC3000- BC338)

아테네(아덴), 스파르타, 코린트(고린도), 도시국가와 크레타 (그레데 ) 


         1. 아테네
[그리스지도]
전 세계인이 문명의 발상지로 떠올리는 도시국가이며,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룩한 곳이 아테네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는 파르테논(처녀의 뜻)신전은 유엔에서 지정한 문화재 1호이다.
스파르타와 대조되는 인간적인 교육방식과 유명한 철학자가 많은 곳으로 우리는 기억된다.
신화 속에는 신들이 인간하고 한집에 산 것같이 느껴지는 도시로 누구든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아테네를 성경에서는 *아덴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음을 따서 한자화한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 니케, 에레크테이온 3개의 신전이 있다.
1. 파르테논(Parthenon)신전은 고전 초기의 뛰어난 건축으로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감사의
뜻으로 수호여신 아테네에게 바친 신전이인데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감독을 맡아 BC 447-BC 438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조각 중에는 격투기 판크라티(치)온 (pankration)의 조각도 있는데 판크라티온은 '모든'이란의 뜻인
판(pan)과 '힘'이라는 뜻의 크라토스(kratos)가 합성된 말이다.
복싱과 레슬링을 합한 것 같은 형태의 맨손경기로 눈의 공격 또는 물어뜯거나 음량을 차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허용되며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는 거친 경기로 BC 648년부터 고대올림피아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나 그리스 멸망과 더불어 사라졌으며 이 경기에서 복싱과 레슬링이 파생되었다고 한다.
크기는 동서로 8기둥(30.8m), 남북으로 17기둥(69.5m), 총 13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외부기둥은
도리아양식이나 내부 기둥이나 들보는 우아한 이오니아양식을 채용하고 있다.
1687년 베네치아군 포격으로 투르크군이 두었던 화약이 폭발하여 28기(基)의 기둥 등이 붕괴되었다.
2. 니케의 신전은 아크로폴리스 남서쪽 끝에 세운 작은 신전으로 승리의 여신 니케에게 바친 신전은
BC 427년- BC 424년 무렵 완성되었으며 이오니아식 신전이다.
여신 니케는 날개를 가지고 있으나 여기는 날개 없는 '니케 아프테로스'인데 이유는 아테네시민들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잘라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아크로폴리스 북쪽에 있으며 이오니아식 신전인데 이곳에는 아테네 전설의 왕
에레크테우스와 여신 아테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 3명의 신을 모시는 복합신전으로 BC 421- BC 407년
무렵에 완성되었다.
이 신전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장식은 파르테논신전과 함께 고전기 그리스건축물을 대표하고 있다.
이야기1
도시이름을 짓기 위하여 공모하였는데, 응모한 신은 아테네와 포세이돈 이다.
아테네는 올리브를 포세이돈은 풍부한 물을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주민은 올리브를 택하여 아테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때문이지는 몰라도 지금도 올리브는 풍부하나 물은 부족하다고 한다.
포세이돈은 화풀이로 해상에 나올 수 없게 하였다고 한다.
이 신을 달래기 위하여 수니온 곶(뾰족한 곳)에 신전을 짖고 달래어 해상에 진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여신을 모신 곳으로 '아테네 파르테논(처녀 아테네)' 신의 이름서 유래한다.
이야기2
영국의 대영 박물관은 입장료가 없는데, 이유는 여기에 전시된 것들이 각 국에서 강탈(도둑) 해온
것이라, 양심상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나..
이야기3
그리스 여행시 주의 사항은 집시들의 소매치기를 조심하여야 하며, 집시들에게 선물을 주려면 헌 것을
주어야 무사하지 새것을 주면 못 받은 집시들의 횡포에 시달린다고 한다.
위험이 닥치면 태권도를 조금 흉내만 내면 된다고 하는데,
이유는 그들은 태권도 위력을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는 한국 제품의 문구류를 최상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선물은 문구종류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엘긴마불 (Elgin marbles - 엘긴 대리석)
엘긴이 터키 공사로 있을 때에 그리스 정부로부터 매입하여, 영국으로 가지고 갔는데(AD1801-3),
이것을 영국 정부가 사드리고, 대영 박물관에 '엘긴 마불(대리석)' 실이 따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이 중 유명한 것으로 에레크테이온(에레크티온) 신전의 조각 1체와 파르테논신전의 군상조각이다.
파르테논신전의 군상조각은 대영박물관 외에도 일부는 아크로폴리스미술관과 파리의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덴과 베뢰아 (성경) (행17:15-34) [
지도]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레아까지 쫓아와 바울을 박해하였으나, 베뢰아의 많은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받들이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으며,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
였다.
실라와 디모데를 베레아에 두고 이 성안사람인 소바더와 동행하여 아덴으로 향하였다.
아덴은 바울이 2차 전도 중에 들려, 아테네의 당대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바울이
쟁론하였다가 *아레오바고에 잡혀와 변론하였다.
부활 진리를 전하였으나 큰 소득이 없고, 헬라사상에 가장 냉대를 받아 3차 전도여행 때는 들리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철학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외로움에 실라와 디모데를 빨리 오라고 하였고, 아고라(시장이 있는 인간동네)에서 전도하여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이라고 하는 여자와 여러 사람이 믿게 되었다.

*아레오바고 (아레오파고스, 행17:19-32)
'아레스 언덕'의 뜻이로 아레스 군신이 자기의 딸을 겁탈하려고 한 사람을 죽인것 때문에 재판 받은
장소로 군신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불렀다. [
아레스 신화편 참조]
이곳은 고등재판소로 건물은 없고 바위 위에서 피고를 중앙에 세우고 재판관이 심문하고 판결한 곳이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바울이 잡혀와 너희가 위하는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부활하여 증거한 예수님이라고 전하자 그들이 떠났다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다.

2. 스파르타
[그리스지도]
엄한 교육 방식을'스파르타식'이라고 한다.
아테네는 살라미스 전쟁 후 다른 도시국가를 속국처럼 다루자 불만을 품은 도시가 나타 났으며,
대립하던 스파르타는 이들과 합쳐 아테네를 공격한 것이 펠로폰네소스(BC431- 404)전쟁이다.
스파르타의 승리로 30년 간 패권을 쥐게 되었다.
그 후 중부 폴리스 *테베가 스파르타를 누르고 패권을 잡았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쇠퇴하면서
국토는 황폐하였으며,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프리 렌서가 많이 생겨 대립이 심하여 혼란하였다.
BC338 북방계통 마케토니아의 필립포스2세가 남하하여 전 도시국가을 점령하였다.
그의 아들이 유명한 알렉산더이다.
스파르타는 엄한 군주국으로 노예가 시민보다 20배 많아 시민 전체가 강력한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다.
건강한 사내아이를 얻기 위하여 건강한 어머니는 건장한 남자들에게 대여 되였는데
이 때문에 '대여 부인'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결혼 장려와 아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건장한 젊은 남, 여가 나체로 춤과 게임을 하였는데,
규율은 엄격하였다고 '풀다크 영웅전'에 기록되어 있다.

*테베: 이곳에 알파벳을 전한 카드모드가 건설한 도시로 신화의 중심지이다.
알렉산더에게 반란을 일으켜, 시민전체가 노예로 팔려가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프리 렌서(free lencer): '프리'는 자유를 말하며, '랜서'는 무기 또는 군인을 뜻하여,
이를 합성하면 '자유용병' 또는 '일 당쟁이 용병'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은 자유업자 또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전쟁 때 무기는 자기 것을 다 쓰고 나면 주워서 썼다고 한다.


<서 있는 바위가 '아레스 언덕'
이고 뒤편 아래가 '아고라'
이며 먼 곳은 아테네 시>

*결혼
결혼식은 옛날에는 문서(호적) 같은 것이 없어 사람들에게 부부임을 각인시키기 위하여 하던 관습이
지금까지 남았으며, 더러는 호화스럽게 되었다.
이제는 호화스러운 결혼식에서 의미 있는 결혼식이 되었으며 하는 생각이다.
결혼은 1부1처의 원칙으로 당사자 권리가 중요하나, 풍습, 빈부 격차가 방해요인이다.
1부 일처제를 법률로 규정하여도 대개는 묵인되었다.
결혼을 하면 혼자 사는 것이 아님으로 본인들과 가족합의가 가장 이상적이다.
결혼에는 애정이론과 편리이론이 있다.
애정이론이 우선인 것 같으나 이것은 너무 이상적이다.
또 편리이론이 우선하면 삭막한 가정이 되기 쉽다.
애정과 편리가 합하여진 결혼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은 애정 이외에도 경제가 중요하여 직업을 따지며 또 성 생활 때문에 건강과
아름다움을 살피게 된다.
대개는 건강과 경제력이 없으면 결혼을 못하거나 늦어지게 된다.

(결혼 종류)

1.공동결혼:
원시시대는 공동생활이라 부부라는 개념이 없었고, 자식도 내 것 없이 모든 것이 공동이다.
남자는 생활과 보호를 하였으며 여자는 자녀를 양육하였다. 철하자 디오게네스가 주장하기도 했다.
성의 무질서, 무제약, 극단의 자유와 방종, 난혼 등이 갈등과 투쟁 속에 오랜 세월과 시행착오 후에
1부1처제가 생겼다.
에스키모인은 1부1처로 결혼하나 공동생활과 사냥 등으로 남은자가 대리로 관리하였고,
손님이 오면 손님이 차지하여 성의 독점 개념이 없었다.

2.매매결혼: 여자를 금품, 곡물, 가축 등 현물로 사거나, 노동을 대가로 하는 경우도 있다.
부자는 여러명을 살수 있어 1부 다처가 되었고, 딸을 선호하였으며, 가격은 미모, 맵시, 기술(노래, 자수,
옷 짜기), 노동력 등이 좌우하게 됨으로 값을 잘 받기 위하여 가르치고 다듬었다.
중동에는 처녀성을 증명해야 계약이 성사 되며, 처녀성을 증명되지 못하면 처녀 몸 값의 2배로 부모가
배상하기 때문에 화가난 부모는 딸을 죽이는 일이 많았다.
반대로 티베트에서는 처녀가 아버지나 형제로부터 아이를 낳아서 처녀가 출산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
증명 되어야 시집을 갈 수 있다.

3.가족결혼: 왕권유지 위해 이집트, 영국, 신라, 로마 등 고대에는 많은 나라가 행하였느나,
오늘 날에는 나쁜 유전 때문에 경원시 햐였고, 또 도덕성에 문제가 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 남매, 4촌, 3촌이 결혼하였는데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티베트, 남미인디오의 경우 한 여자에 형제전부가 남편이 되는 1처다(多)부제는 여성이 중심이다.
남자는 교대로 봉사하고, 보호하며 모든 것은 공유하였다.
회교권은 지금도 같은 족속하고만 결혼한다.

4.약탈결혼: 전쟁의 전리품으로 또는 마음에 품은 여자를 강탈 하거나 여자가 부족하여 약탈하였다.
그리고 풍습 등에 의하여 여러 이유로 행하였으나 약탈은 유혈이 동반됨으로,
매매결혼제도로 옮겨가게 되었다.

5.정략결혼 :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가, 왕족, 귀족들은 다반사이었으나 일반인은 적었다.

<비극으로 끝난 찰스황태자와
다이애나의 결혼>

(결혼식의 종류와 대입권)

1.가정식- 전통양식, 식장, 야외 등 편리 한대로 하였으며, 가장 보편적이다.
2.종교식- 교회, 회당, 절, 식장, 야외 등에서 하며 절차는 종교 예식으로 한다.
3.문서식- 관공서 담당자 앞에서 서약과 서명하며, 주로 서양식이로 예식을 하기도 하고 않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혼식 때 깡통을 달고 요란한 것은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함이며,
씨앗이나 열매를 던지는 것은 자손을 많이 보라는 주술적 의미이다.
실이나 끈으로 묶거나 같이 톱질을 하는 것은 오래 같이 살고 협력을 잘하라는 뜻이다.
(대입권)
대입권을 초야권 또는 삽입권이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기독교사상에 의하여 생겼다.
첫 열매, 첫 새끼 등이 하나님(주인) 것이라는 생각을 사람에게도 적용시켜
농민의 딸도 영주 또는 지주의 몫이 되었으며, 시집가는 것도 주인의 허락이 필요하였고,
첫 순결도 영주 또는 지주에게 받친 후에 결혼 할 수 있었다.
대입권은 영주와 지주 외에도 성직자나 신관도 가지고 있었다.
동양의 티벳지방에서는 아버지나 형제가 가지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초야권을 행사한 사람은 답례로 돈을 주거나, 엉덩이 크기의 치즈나 모피 또는 옷 등을
주었다고 하며, 결혼도 세금을 내야 가능하였다고 한다.

(배우자 선택시 유의사항)
결혼 당사자들은 사랑 때문에 현재의 좋은 점만 보고 훗날의 일들을 예측하지 못한다.
흔히들 이것을 '콩깍지가 끼었다.'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것이 결혼조건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빠르면 3개월 길면 3년의
유효기간을 가진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환경여건에 의하여 결혼을 지속하거나 이혼을 결정하게 된다.
좋은 결혼의 조건을 살펴보면
1. 성격(평생 변하지 않으므로 가장 중요하나 알기가 힘든다. 온유하며 절제와 책임감이 있어야함)
2. 건강(질병과 유전 그리고 소질유전)
3. 경제력
그러므로 자녀에게 유전되는 모든 것 중에 질병을 제외하고
1. 체형(비만, 키, 외모, 피부)
2. 두뇌
3. 혈액 AB형과 AB형은 가능하면 피할 것
또 결혼당사자와 부모와의 이견이 많은 것은
1. '콩깍지가 끼었다.'라는 말은 '제 정신이 아니다'는 뜻으로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 부모는 결혼당사자들보다 바램이 더 크다.
3. 결혼당사자들은 장점만 생각하나 부모들은 단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4. 부모들은 바램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만 결혼당사자들은 경험이 없어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모가 된 후에 안다고 하며, 자녀의 고통은 자녀보다 부모가 더 고통스럽다고 한다.

<1966년 51세의 가수 후랭크
시나트라와
나이 어린 영화배우
미아 패로우의 결혼식>

(결혼전망)

미래는 독신자 또는 이혼이 많아 질것이며, 자녀를 낳지 않는 가정이 늘어 날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이유는 여성도 경제력으로 독립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도의 자기 중심적이고, 헌신과 봉사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은 풍조 때문이다.
자식도 이제는 노후대책이 되지 못하며, 자녀 교육의 부담도 한 이유가 될것이다.
성도 자유롭게 되며 또 상품화 되거나 하여 성에 대한 불편함이 줄어 들게 되는 것도 한 이유이다.
결혼생활에서 얻는 편리함보다 불편함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미혼자 또는 이혼도 많아지게 될 것이다.
자식과 성도 오락으로 취급 되며, 성은 권리가 아니고 의무(게으르면 이혼사유)가 된다.
결혼의 연령과 선택도 누구의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롭게 될 것이다.
결혼의 1부1처가 된 큰 요인은 기독교의 힘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가 위축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마저 위축되어 기독교의 힘으로
가족을 지키는 힘이 많이 위축 되었다.
그러나 가족의 붕괴를 막아 줄 마지막 보류은 애정과 높은 도덕성을 가진 하나님 밖에 없다.
결혼 전에는 하나의 장점이 아홉개의 단점을 덮고도 남았으나,
결혼 후에는 하나의 단점이 아홉개의 장점을 덮어 버려 장점은 보이지 않고 단점만 남아 가슴에
엉어리가 되어 서로가 미워하게 된다.

3.코린트(코린토스)
[그리스지도]
펠레포네소스 반도 북서쪽에 있는 도시국가로 아드리아(이오니아) 바다가 있고 반대편에는
*겐그리아 항구가 있으며, 에게해(마르마르)바다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있다.
두 바다를 연결하기 위하여 AD1893년에 길이 6.4Km의 운하를 판 것이 코린트 운하이다.
BC164년 코린트는 로마에 멸망하였고, 운하를 처음시도한 사람이 로마황제 네로라고 한다.
로마시대에 석조도로를 건설하였으며, 당시는 운하가 건설되지 않아 노예를 동원하여 배를 현재의
운하 위의 도로로 통과하였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노력이었다.
그결과 뱃사람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단을 도는 험난한 항해를 하지 않고도 배와 화물이
두 만 사이를 쉽게 통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부를 코린트가 누렸다.
항구와 만을 가지고 있어 산업의 중심지와 교역으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인구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다음이 이 도시로 40만 정도 살았다고 한다.
건축 방식인 '코린트식'은 이곳에서 많이 쓰는 방식이라 주어진 이름이다.
카란토란 '코린트의 건포도'란 뜻이며 또 유명한 아프로디테을 모신 *포르네 신전이 있었다.
이 도시에 유명한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살았다.

*디오게네스 [
그림 ]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어떤 권위에도 굽히지 않았으며, 무(無)욕심으로 통속에서 산 철학자다.
그는 금욕적 자족을 강조하였고, 향락을 거부하는 그리스 철학 '견유학파'의 전형적 인물이다.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다니면서 정직한 사람을 찾았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비록 자신은 가난하게 살면서 구걸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어려운 처지에서도 행복과 자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단순한 자연생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며, 가족이라는 제도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남녀가 자유로이 성 관계를 갖고 어린이가 모든 이의 공동보호를 받는 자연상태를 주장하였다.
알렉산더와의 대화는 [
알렉산더 이야기 ]에서 하기로 한다.




<코린토스 유적지>

*포르네
'포르노' 어원은 포르네 신전 이름에서 왔다.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최초의 창녀라고 함)가 있었으며,
신전에 헌금한 후 신전을 2 바퀴 돌고(여유를 가지라는 의미) 난 후에 지정된 여사제와 관계를 맺었다.
이 도시의 별명은 '선원도시'로 선원들이 방탕하고 타락 한것에서 연유한다.
또 '코린트인 같이 행동한다'는 말은 지금의 '오렌지족'같은 의미로 방탕과 타락의 대명사로 쓰였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이 증명하는데, 집에 두고 쓰는 용기가 성기모양이었고,
당시의 여자 자위기구가 전시 되고 있어 당시의 성 문란 보여주고 있으며, 성경이 이를 증명 한다.

*고린도(성경) 2차 전도(행18:1-18), 3차 전도(행20:1-2) [
위치지도(페르가몬)]
로마 황제 글라디오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부유하였다.
집은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상류층으로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바울이 유대인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으나, 욕하고 대들자 옷의 먼지 털고 이방인만 전도하기로 결심했다. 바울이 천막을 만들면서 1년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전도하였고, 유대인이 고소하였을 때에 재판때
호의를 가진 *갈리오 도움으로 무사하였다.
이곳에 2권의 서신을 보낸 것이 고린도 전후서 이다.
고린도 전서는 에베소에서, 고린도 후서는 마케도나아에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내용은 결혼, 우상제물, 부활에 대한 견해와, 분열(아볼로, 베드로, 바울 3개 파), 음란, 동성애를
하지 마라고 권유하였고, 로마서를 여기서 기록하였으며, 3차 전도때 3개월 유하였다.

*갈리오
네로의 스승으로 후에
네로의 미움을 사 자살한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의 동생이 갈리오이다.

*겐그리아(켄크레아이)
2차 전도(행18:18)때에 바울이 서원 때문에 단발하였고, 겐그리아에서 에베소로 가는 배를 탔다.
신앙자매 뵈뵈의 고향으로 그들을 사역자로 추천하였다. [
위치지도(페르가몬)]
겐그리아 이야기
겐그리아 항구 쪽으로 고린도 운하를 건너가는 나무와 철로 만든 다리가 있는데,
가이드가 상품을 걸고 '이 다리는 배가 지나 갈 때에 어떻게 될까?'라는 문제를 냈으나
아무도 알아 맞추지 못한 특이한 다리가 있다.
답은 '물속으로 들어간다'이다.
100년이 더되는 지금도 기름 한 방울 세지 않는다고 하며, 그들의 자연 사랑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4. 크레타(그레데) 문명
[그리스지도]
터키와 그리스 중간에 있는 섬으로 에게해에 있다.
크레타문명의 발상지로 미노스 왕이 전체를 지배 하였고,
크노소스 궁전은 복잡한 설계로 미노스의 미궁(迷宮-라빈토스)이 유명하며,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가 괴물 소를 물리치고 왕녀 아리아드네와 섬의 탈출은 그리스 신화이야기 이다.
페니키아(베니게 )인들이 건설하였고, 동양인의 문화가 그들의 뿌리이다.



<물속으로 들어 가는 다리>

그레데(크레타 성경 행27:8)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 이곳의 미항(아름다운, 행27:8 )이라는 항구에 들렸다가 갔다.
이곳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고, 디도가 지도자(딛1:5)로 있었다.
바울이 디도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 디도서이고 목회자서신이다.
디도서는 장로의 자격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곳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하여 '거짓된 인종'이라 불렀다.
이곳에 사는 유대인이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왔다. (행 2:10-11)

가우다(행 27:13-16, 현재 가우도 섬) [
위치지도(페르가몬)]
바울이 광풍 '드라굴리온'이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하여 현재 몰타(성경: 멀리데, 행27:41-44)라는
작은 섬나라에서 독사에게 물리고도 살아나 신으로 대접받은 곳이다.
이곳의 바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드리아(베네치아가 유명)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문화와 예술
이 시대의 문화는 신과 인간의 혼돈문화로 뒤에 다룰 신화와 트로이 전쟁은 우리생활 깊숙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좀더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여기서 유럽 여행 중에 자주 만나는 건축방식을 이야기하려고 하며, 이 방식은 기둥 방식이다.
도리아식: 도리아인이 쓰는 양식으로 테베가 중심이며,
이 방식은 간결하고 무게가 있는 방식으로 파르테논 신전과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이 대표적이다.
이오나아식: 이오니아인이 쓰는 방식인데 에페소스인과 아테네가 중심이며,
이 방식은 아름답고 간결한 방식으로 도라아식과 코린트식의 중간에 해당한다.
코린트: 아름답고 화려한 방식으로 지금의 예식장 기둥이 이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코린트식 건축 무늬로 지중해 연안지방에 야생하는 다년초식물 아칸서스 잎을 도안화하여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BC 5세기 아테네 조각가 칼리마코스가 기둥머리(주두-柱頭)에 사용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이 3가지 방식을 다 사용하여 만든 건축이 베네치아 마르코 광장에 가면 있다.
그리스의 기둥방식은 약점은 인장력(늘어지는 힘)이 약하여 많은 기둥이 필요하였으나,
후에 로마는 돔을 첨가하여 공간이 넒은 건축이 가능하게 하였다.
문학으로는 우리가 잘 아는 '이솝의 우화'가 있으며, 유명한 서정시인 사포가 있다.
조각 이야기
조각에는 팔, 다리 없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몸통보다 약하여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한
이유도 이지만, 다른 민족을 침략하면 가장 먼저 한 일중에 문화의 파괴였는데 이것을
반달리즘이라고
하며 가장 손쉽게 부실 수 있는 것부터 파괴하였기 때문에 약한 팔 다리가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조각의 3대 거장은 그리스의 페이디아스,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프랑스의 로댕이다.


<세계의 건축 양식이 된
상:코린트식,
중:이오니아식,
하:도리아식>

이솝이야기 [그림]
그리스어로 '아이소포스'라고 부르는 우화작가이며, 아주 못났고 어리석게 생겼다고 한다.
BC 6세기의 사모스사람 이라고도 하고 혹은 '프리기아 사람'이라고도 한다.
주인 이아드몬의 노예시절에 있었던 우화 같은 이솝 자신의 이야기 3가지를 하려고 한다.
1) 어느 날 주인과 노예들이 긴 여행을 하게되었다.
가져갈 짐 중에 무거운 짐 하나가 있었는데
이 짐은 식량이었다.
아무도 지려고 하지 않았으나 이솝은 이 짐을 먼저 선택하여 다른 노예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긴 여행이라 노예들은 지치기 시작하였으나 이솝의 짐은 갈수록 가벼워져
다른 노예들이 이솝의 지혜에 탄복하였다.
2) 아주 나쁜 식당주방장이 있었다.
주인이 아주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주방장이 먹고는 못나고 어리석게 보이는 이솝에게 죄를 씌웠다.
주인이 이솝을 곤장 치려하자 자기의 손가락을 입에 넣어 먹은 것을 다 토하여 놓고
주방장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주인에게 청하자 주방장은 사실을 고백하였다.
곤장은 주방장에게 돌아갔다.
3) 주인이 너무 술에 취하여 의식 없이 큰 실수를 하였다.
그것은 바닷물을 모두 마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여 전 재산을 걸고 시합 날자와 증인까지 정한 것이었다.
술에서 깨어난 뒤 이 사실을 알고는 몸져 누워버렸다.
시합 날이 되자 이솝은 주인에게 이길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주인은 시합을 구경하려 많이 모인 군중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나는 바닷물을 모두 마신다고 하였지 강물까지 마신다고는 하지 않았소,
상대방은 지금부터 바다로 들어오는 모든 강물을 오늘 하루 동안 한 방울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오,
그런 후에 나는 바닷물을 마실것입니다.
만일 강물을 막지 못하면 시합은 상대방이 포기 하는 것으로 여기고 승리는 나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궁중들이 그의 말에 하자가 없으므로 옳게 여기었다.
승리는 주인에게 돌아가고 주인은 그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다.
그 뒤로 이솝우화를 집필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델포이에서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인생도 우화 같은 삶이었다.
사포(Sappho)이야기
BC 610- 580년경 소아시아 레스보스 섬에서 활동한 유명한 서정시인이다.
여성의 경우는 동성애에 빠졌던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의 이름을 따서 사피즘(sapphism),
또는 사포의 출생지 레스보스섬의 이름을 따서 '레스비언 사랑 (lesbian love)'이라고 한다. [
지도]
당시 레스보스에는 양가집 여성이 격식을 따지지 않는 사교모임을 갖고 한가하게 우아한 오락을
즐기며, 특히 시를 짓고 읊으면서 소일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녀는 신부학교의 교장으로 살아 있는 '지상 뮤즈(뮤직)'신으로 칭송 받았다.
그녀의 시의 주된 주제는 그러한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무르익던 애정, 질투, 증오 등이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 견줄 만한 미인으로 이상화된 모습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리스에서는 그녀를 10번째의 시여신(詩女神)이라 칭송하며,
호메로스와 더불어 대표적 시인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죽음은 젊은 제자(여인)의 다리사이에서 질식해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젊은 청년을 사모하다가
바다에 투신 자살했다는 설도 있어 정확하지는 않다.
사포는 레스비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철학-소크라테스, 과학-아르키메데스
스토아 철학이 발전하고 자연계를 설명하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피다고라스(수학자 이기도하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 등이 활약하게 되었다.
플라톤(BC428- 348)은 절대왕이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예언하였다.
또 철학과 과학(수학)의 교육과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아카데메이아(아카데미)를 창설하였다.



소크라테스 이야기 1
소크라테스(BC 470?-BC 399) 당대 소피스트들에게 한번도 말로는 이긴 적이 없다고 한다.
소피스트란 원래는 처세술, 변론술, 선을 가르치는 '현자(현명한 자)'란 뜻이나 실제로는 가르치는
것이 없이 선한 체하며 '설득의 기술'만 가르쳤다.
'설득의 기술'만 가르치는 자들을 레토릭(Rehtoric)이라고 한다.
이들의 잘 못을 지적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다.
그 뒤 이들을 현자 대신 '궤변론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에게 신을 믿지 않게 미혹한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을 받게 하였다.
궤변론(소피스트): 예를 들면 a__b__n, a에서 n점을 가려면 b점을 지나야하고, b__c__n, b에서 다시
c 지점을 지나야하는데 b, c 같은 지점은 무한대로 많음으로 n 지점을 결코 갈 수 없다는 이론이다.
이런 억지가 수학 발달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야기 2
소크라테스의 옆집 부자가 자기가 땅이 많음을 자랑하자, 소크라테스는 지금의 작은 수첩 뒤에 있는 세계지도와 같이 생긴 작은 세계지도를 보여주며 부자 땅을 표기를 요구하였다.
할말을 잃은 부자는 떨어진 옷 소매가 보이자 반격의 기회를 잡은 부자는
'당신은 가난을 입고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무식으로 화려하게 사치하고 계십니다'라고 비꼬았다.
그리고 악처의 대명사로 쓰이는 부인 '크산티페'로 소크라테스가 만년에 결혼한 것 때문에
더러는 후처라고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아 잔소리를 하여도 아무 말 없자 화가 난 그녀는 물을 퍼부었다.
소크라테스는 '벼락이 치더니 소나기가 오는구나' 하였다.
하루는 집사람이 몸을 꾸미자 '어디가시요?' 물었다.
구경 간다고 대답하자 '구경가는 것이 아니라 구경시키려 가는 것 아니요?'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돈을 받지 않고 제자를 가르쳐 가난한데 3명의 첩까지 거느리고,
그리고 엄청난 나이차이(소크라테스가 70살로 죽을 때에 그녀는 어린아이를 가진 젊은 이였다.)에서
오는 불만, 이런 것들은 그녀가 악처의 대명사가 되기엔 너무 억울한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내면을 바라본 최초의 철학자로 영혼을 사랑하고 지식(아는 것)을 사랑하며,
겸손, 용기, 절제와 덕을 가르쳤다. 그리스의 이후 역사는 [
그리스의 독립과 역사]에서 다룬다. 

 아르키메데스(BC 287?-BC 212) 이야기
아르키메데스의 고향은 시라쿠사(행28:2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 3일간 유한 곳) 출신으로
지금의 시칠리아 섬인데 당시는 카르타고 지배하에 있었다. [
지도(페르가몬)]
그는 천문학자 피디아스의 아들로 태어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유학 가서 수학자 코논에게
기하학을 배우고 시라쿠사로 돌아와 많은 수학책을 썼다.
그의 일화 중에 시라쿠사왕 히에론 앞에서 '긴 지렛대와 지렛목만 있으면 지구라도 움직여 보이겠다'고
장담하여 왕이 해변 모래톱에 올려놓은 군함에 무장병을 가득 태우고 이것을 물에 띄우라 하였다.
그는 지렛대를 응용한 도르래를 써서 이를 쉽게 해냈으며 또 왕이 갓 만든 금관이 순금인지 감정하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 일로 골몰하던 중에 그는 우연히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물 속에서는 자기의 몸의 부피에 해당하는
만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을 문득 알아냈다.
너무 흥분한 그는 옷도 입지 않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알아냈다, 알아냈다!(유레이카: Heurka)'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금관과 같은 분량의 순금덩이를 달아보니 저울대는 비중이 큰 순금덩이 쪽으로 기울어 금관이
위조품인 것을 알아내었다.
이 원리을 응용하여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시 로마군이 쳐들어 왔을 때 70세를 넘은 고령으로 그는 거울로 빛을 모아 로마군의
선박을 불태우고, 바위 투석기 발명하여 로마 군을 괴롭혔다고 한다.
로마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에 그는 모래판에 원을 그려놓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중에 로마군이
원을 밟자 '그 원을 밟지 마라'고 소리쳤으며,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로마병사는 화가 나서 죽였다는
이야기와 연행을 거부하여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명성을 알고 있는 로마장군 마르켈루스는 그를 죽이지 말고 꼭 살려두라고 명령하였지만
실행되지 못하였다.
대학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생전에 원한대로 '원기둥에 구가 내접한' 모양의 묘비를 세워주었다.
이것은 그가 고심 끝에 발견한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부피는 그 구 부피의 1.5배이다'라는 것을
정리(定理)한 것이다.[
포에니 전쟁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