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도코이 [Diado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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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으로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대왕의 유족들이 무력한데다가, 대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급사하였기 때문에, 대왕의 유장(遺將)들은 각기 자기가 후계자라고 자칭하여 서로 싸웠는데, 이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을 가리켜 '디아도코이'라 부른다.
즉, 안티고노스 1세, 안티파트로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뒤를 계승한 제2대를 ‘에피고노이’라 부른다.
그들 상호간의 전쟁(디아도코이 전쟁)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약 4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을 ‘디아도코이 시대’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유장들은 각각 왕이라 호칭하였는데, BC 301년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등 4명의 연합군이 안티고노스를 공격하여 패사(敗死)시킴으로써, 4왕국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사실은, 세계 통일제국의 건설이라는 대왕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디아도코이 (diadochoi) 요약
설명 원래 <후계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BC 32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갑자기 죽은 뒤, 제각기 대왕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그가 남긴 영토를 차지하려고 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을 가리킨다. 또한 그 항쟁을 '디아도코이 전쟁(BC 323∼BC 280년경, 43년경)'이라고 부른다.
항쟁은 우선 중심세력이었던 페르디카스 및 에우메네스, 섭정 안티파트로스와 안티고노스 1세 사이에 되풀이되었으나, 이 단계에서는 영토의 일체성을 보전하려고 하는 이념(통일파)이 강했다. 이 무렵에, 대왕의 아우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태후 올림피아스가 살해되었다.
이어서 항쟁에서 승리한 안티고노스에게, 리시마코스·카산드로스·프톨레마이오스 1세·셀레우코스 1세 등의 분리파가 대항, BC 301년 소아시아전쟁에서 이들이 승리하여, 옛 제국(帝國)을 보전하려는 꿈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동안에, 대왕의 비(妃) 록사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독살되어 대왕의 왕통이 끊어지자, BC 306년 이후 디아도코이들은 모두 후계자로서의 왕호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계에서, 왕조 형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항쟁은 또 분리파 상호간에 치열하게 계속되고, BC 281년 크루페디온(소아시아 서부)에서 리시마코스가 패하여, 과도적인 트라키아왕국은 멸망하였다.
마지막으로, 안티고노스 2세의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이집트, 셀레우코스 1세의 시리아라는 헬레니즘 3국이 확정되었다.
디아도코이 시대를 여기까지로 보는 설도 유력하지만, 그것을 더 연장하여 BC 298년 카산드로스의 죽음으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와 그 일족이 마케도니아에서 세력을 회복하고, 셀레우코스가 리시마코스를 패사시키고 유럽까지 그 세력을 넓힌, 이른바 3왕국의 정립 때까지를 이 시대의 하한(下限)으로 보는 설도 타당하다. |
알렉산더 사후 헬레니즘의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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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indllove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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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의 상황은 어쩌면 서로의 야심으로 둘러싼 권신간의 대립으로 보셔야 될듯합니다. 전에 카페에 기고한 글이 있기에 올렵봅니다. 이 글은 "역사속의 전쟁사"라는 카페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은 지 14년 내에,
그의 적자인 알렉산더 4세와 그의 서자인 헤라클레스가 모두 암살당하였다.
그의 동생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 3세는 7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기원전 317년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사주에 의해 살해 당하였다.
알렉산더의 아들 알렉산더 4세는 기원전 311년까지 통치하다가,
그 해에 아버지의 장군 중의 한 사람인 카산드로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알렉산더의 서자인 헤라클레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통치하려고 해보았지만,
기원전 309년에 살해당하였다.
그래서 알렉산더 왕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301년쯤에는 알렉산더의 장군 네 사람이
자기들의 사령관이 세운 거대한 제국에서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카산드로스장군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지배하게 되었다.
리시마코스장군은 소아시아와 트라키아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리카토르 1세에게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가 돌아갔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라고스 즉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더가 세운 하나의 위대한 왕국에서,
네 개의 그리스왕국이 생겨나게 되었다.
네 개의 그리스 왕국중에서, 카산드로스의 통치가 가장 짧았는데...
카산드로스는 권력을 잡은 지 3년후, 그의 다음 후계자가 없었으며,
기원전 285년에 리시마코스가 카산드로스의 그리스 제국의 유럽지역을 장악하게 되므로,
카산드로스장군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4년 뒤, 리시마코스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와 싸우다가 전사하여,
그에게 아시아 영토의 반 이상이 셀레우코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셀레우코스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태조로, 시리아제국을 형성한다.
그는 시리아에 '안티오크'[안디옥]를 창건하여, 그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에 암살당하였지만,
그가 세운 왕조는 기원전 64년까지 계속 권력을 잡았는데,
그 해에 시리아는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제국에서 나뉜 네 왕국 중에서 가장 장수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05년에 왕의 지위에 올라,
이집트를 다스리는 마케도니아 왕 즉 마케도니아 출신의 파라오 1세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즉시 도시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그가 추진한 가장 위대한 건축 공사 중 하나는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웅대한 공사를 감독하도록,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저명한 학자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오스를 데려와서
건축의 전임을 맞겨, 계속 진도를 높여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기원 1세기에
그 도서관은 100만개의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함락될 때까지, 계속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자세한 부분은 다음카페 "역사속의 전쟁사(http://cafe.daum.net/historywar)"를 찾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헬레니즘 시대
헬레니즘시대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 4명의 왕들이 헬레니즘 국가를 만드는것에 기초를 두고있습니다.
알렉산더의 4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쿠스, 카산드로스가
알렉산더 대왕 사후, 4개의 지역인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및, 시리아를 차지하면서
헬레니즘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그들간의 세력경쟁이 일어났는데,
이중에 첫째로 무너진 왕국이 카산드로스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지역이었습니다.
그는 자손하나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그 지역을 기원전(B.C.) 281년에 리시마쿠스가 차지하게 되었고,
이 문제를 두고 시리아를 담당했던 셀레우코스와의 전쟁으로
리시마쿠스가 가지고 있던 소아시아지역을 셀레우코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원래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 사이에는,
커다란 사막이 존재 하였기 때문에 서로간에는 마찰이 없다가,
셀레우코스의 시리아 왕조가 통합이 되면서
역사에서 말하는 시리아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시리아 전쟁은, 단순히 몇년에 걸친 전쟁이 아니라,
수십에서 백수십년을 이어 오는 지루한 전쟁이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이집트가 시리아를 이기질 못하자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죠...
이렇게 해서 시리아와 로마간의 전쟁으로,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등장과 함께 시리아의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동맹과, 옥타비아누스간의 전쟁이 나면서,
결국 헬레니즘의 마지막 왕조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하고
로마의 속주로 변하면서,
기원전 30년 헬레니즘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헬레니즘 시대
제목 :
헬레니즘 세계 출처 :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설명 :
헬레니즘 세계(BC 188경) |
후계자 전쟁(디아도코이)
Macropaedia| 金碩禧 옮김
헬레니즘 : 동서문화의 교류
동서문화의 교류의 역사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을 살펴보려면 우선 서양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기에
한창 일어나고 있던 동서문화의 교류,
이른바 헬레니즘 문화를 들 수 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그리스 내부의 만성적 항쟁과 정치적 혼란은
그리스의 자멸을 초래하였고,
이 때 북방의 마케도니아왕국의 필리포스 2세(359~336B.C)는
폴리스 문화세계를 정복 지배하고,
중앙 집권제의 왕국을 건설하는 동시에,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암살되었다.
그의 유업은 아들 알렉산더 대왕(336~323B.C)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걸출한 인물로서,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 헬라스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올라,
먼저 소아시아, 페니키아,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일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
이어 페르시아제국을 멸하고,
동진해서 인더스강을 넘어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알렉산더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은
지중해 정복의 웅지를 펴 보지 못한 채,
바빌론에 개선한 다음 해(323B.C)에 병사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건설한 대제국은
서로는 마케도니아, 동으로는 인더스 하구,
남으로는 이집트를 포함하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영역이었다고 한다.
이때 동양에 포함되는 오리엔트 세계는
서방 세력에 정복되어,
이후 지배는 로마몰락까지 계속되어
서양문화가 이지역에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서 오리엔트(Orient)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일출’,‘해뜨는 지방’,‘동방’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사에서 오리엔트라 하면,
오늘날 나일강을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 문명권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양하 지방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서남아시아)를 합쳐서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오리엔트는 옥시덴트(Occident:서양)에 대한 말이나,
현대 사회에서 ‘동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헬레니즘 문화의 의미와 특색을 살펴보자.
알렉산더 대왕의 여러 정책은 그의 후계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도처에 그리스식 도시가 건설되고, 많은 그리스인이 식민되어 그리스어와 그리스식 생활 양식이 퍼졌다. 이리하여 그리스 문명이 널리 동방 세계에 퍼져, 여기에 그리스 문명과 동방문명이 융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를 Hellenism이라 한다.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그리스에서 동방으로 옮아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페르가몬, 로도스 등이 그 중심지로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은, 민족적 차이를 초월하고, 인류는 다 갈은 동포이며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세계동포주의가 유행하고, 이와 동시에 국가, 민족보다 개인을 더 존중하는 개인주의가 유행하였다.
헬레니즘 문화는 실로 이 세계주의와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헬레니즘 문화는 세계 문화에 여러 가지 큰 영향을 주었다.
올림피아스
Olympias
BC 375경~316.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내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열정적이고 전제적인 성품의 소유자로서,
남편과 아들이 죽은 뒤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피로스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인 그녀의 본명은 미르탈레였으나,
후에 필리포스가 BC 356년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올림피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필리포스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올림피아스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 것은
BC 337년 그가 마케도니아 명문 태생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올림피아스는 이피로스로 물러나 있다가
BC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젖먹이 딸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로 원정을 간 처음 몇 년 동안,
마케도니아 섭정 안티파트로스와 거듭 싸웠고,
마침내 BC 331년경 다시 이피로스로 물러났다.
BC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자(알렉산드로스는 BC 323년에 죽었음),
그를 계승한 폴리페르콘은 올림피아스에게
그녀의 어린 손자 알렉산드로스 4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들)의 섭정이
되어달라고 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BC 317년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정신박약자 필리포스 3세(아리다이오스)를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세우자,
폴리페르콘의 청을 받아들였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도왔으며,
올림피아스는 카산드로스의 형제와
100여 명의 그의 추종자들 뿐만 아니라,
필리포스 3세인 아리다이오스와 그의 아내도 처형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올림피아스가 있던 피드나를 봉쇄하고,
BC 316년 봄 올림피아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카산드로스의 병사들은 이를 집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처형했던 사람들의 친척들에게
살해당했다.
록사네
Roxane
?~BC 310경 트라키아 암피폴리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내.
박트리아족의 추장 옥시아르테스의 딸로,
아시아 원정중이던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혀
BC 327년 그와 결혼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난 뒤,
그의 둘째 부인인 스타테이라(바르시네)를 죽였으며,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알렉산드로스 4세)을 낳았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그녀의 아들을
백치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형제)와
공동 왕으로 받아들였다.
BC 319년 에페이로스에서 시어머니 올림피아스와 연합했으나,
BC 316년 마케도니아에서
카산드로스(뒤에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함)에게 붙잡혔다.
카산드로스는 그녀를 암피폴리스에 투옥했다가,
BC 310년에 그녀의 아들과 함께 처형했다.
* 디미트리오(Dimitrios of Phaleron, (영)Demetrius)
BC 350년 아테네 근처 팔레론~? 아테네의 웅변가·정치가·철학자. 마케도니아 장군 카산드로스에 의해 아테네 통치자로 임명되었다(BC 317). 귀족계급 편을 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초기 정치이론가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BC 307년 민주정치가 부활하자 테베로 도피했고, 그후에는 이집트로 가서 웅변가로 높은 명성을 누리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명사가 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의 역사
출처 : 세계사의 진실
위의 그림은 알렉산더 사후에 알렉산더 부하들의 세력도입니다. 일부는 후에 나오는 세력도 집어넣어 봤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뒤, 그의 뛰어난 부하들은 그의 알렉산더제국을 분할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뒤 그의 유족들은 힘이 없었고,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급사했기 때문에, 알렉산더의 부하들은,
서로를 대왕의 후계자라고 자칭하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켜서 디아도코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안티고노스1세, 셀레우코스1세, 프롤레마이오스1세,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등입니다.
이들의 전쟁은 알렉산더 사후, 40여간이나 지속됩니다.
BC301년 카산드로스그리스, 프롤레마이오스이집트, 셀레우코스시리아, 리시마코스트라키아의 연합군은, 안티고노스마케도니아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를 입수수 전투에서 패사시킴니다.
(색깔글씨는 세력기반입니다.)
이로써 알렉산더대왕사후 5개의 세력은 4개의 세력으로 줄어들고,
안티고노스의 마케도니아 왕위는 카산드로스가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3년뒤인 BC298년 카산드로스가 죽음을 틈타,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1세가 마케도니아에서의 세력을 회복하였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는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를 패사시키고 트라키아까지 세력을 넓힙니다.
그리하여 4개였던 세력은 다시 3개의 세력으로 최종적으로 줄어들게됩니다.
디오도투스1세(???~BC228?) 박트리아
디오도투스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1세와 2세 밑에서 박트리아 총독을 지내다, BC256년 시리아가 혼란한 틈을 타 박트리아왕을 칭하였지만 , BC 246년 셀레우코스2세의여동생과 결혼함으로써 시리아와 우호를 다짐니다. 또한 파르티아와는 늘 적대관계였습니다.
아르사케스1세 파르티아
시리아의 박트리아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가 다스리던 지역의 총독이었던 아르사케스1세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서쪽으로 도망간뒤, 시리아와 이집트의 전쟁을 틈타 파르티아를 세우고, 박트리아와 경쟁하고 결국 박트리아를 멸망시킵니다.
후에 시리아의 혼란을 틈타 건설되는 폰투스와 아르메니아도 파르티아 왕족이 세우는 나라입니다.
이렇듯 알렉산더 사후 로마와 파르티아에 의해 오리엔트
세계가 정리되기전까지, 알렉산더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세력들로 군웅할거 합니다.
입수스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안티고노스 세력의 중심이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옮겨져, 이후에는 세력이 마케도니아로 국한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뒤를 이어 강성해지는 셀레우코스의 시리아... 또 셀레우코스1세를 살해하고 에게해와 키프로스 유대지역 키레나이카로 전성기를 맞는 프톨레마이오스 세력...
입소스 전투 [Battle of Ipsos]
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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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BC 32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자, 그의 후계 지명을 받았다고 자칭하는 후계자들은 20여 년간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입소스 전투는 그 오랜 분쟁상태에 결말을 짓게 하였다.
프리기아를 다스리고 있던 애꾸눈 독안왕(獨眼王) 안티고노스 1세와 그의 아들 공성자(攻城者) 데메트리오스는 다른 후계자들의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안티고노스는 전사하였다.
입소스 전투(Battle of Ipsos)
프리지아의 입소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두 '후계자들'(디오도코이) 사이에 벌어진 전투(BC 301).
이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그의 제국이 와해되는 과정을 촉진시킨 권력투쟁의 일환이었다.
302년에 트라키아(트라케) 왕 리시마코스와 바빌론의 셀레우코스 1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를 대표하는 연합군이, 소아시아 왕 안티고노스 1세와 그의 아들 디미트리오스 1세를 치기 위해 나섰다.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코스의 연합군은, 병력 면에서 안티고노스의 보병 7만과 기병 1만보다 다소 열세였지만, 코끼리 부대의 우세에 힘입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디미트리오스는 적군의 기병대를 격파한 뒤, 지나치게 멀리 추격했다가 코끼리 부대에 가로막혀, 아버지를 구원하러 돌아오지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살해당하고 디미트리오스는 달아났으며, 소아시아는 리시마코스의 영토로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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