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마케도니아(Macedonians) 共和國... FYROM

영국신사77 2007. 5. 27. 12:57
 
                       마케도니아(Macedonians)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의 문화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융합되어 이루어진 흥미롭고 독특한 문화를 지닌 나라이므로, 스쳐가면서 가볍게 한번 보는 보다는 자세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중세 수도원들, 오래된 터키시장, 그리스 정교회 성당, 최신의 상가 등이 있다. 백파이프의 저음소리, 터키식 다진 고기구이, 발칸 부레크 (치즈나 고기파이) 등도 있다. 믿을 없을 만큼 녹지가 많고 숨막힐 정도로 매혹적인 나라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여행객들에게 호의적이다.

 

  과거 유고슬라비아의 남쪽 끝에 위치했던 지독하게 빈곤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여행지로 더없이 즐거운 곳이 것이다. 최근 세르비아와 나토의 격돌처럼 발칸반도는 분쟁이 잦은 불행한 지역이었고, 알바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등에 끼어 있는 마케도니아는, 위치 때문에 정치적인 화약고였다.

 

  다행히 코소보에서 있었던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이 이곳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알바니아 난민의 대규모 유입으로 인해 나라가 심각하게 불안정해졌다.

 

마케도니아 지도(9K)

 

 


통계 자료

국명: 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공화국

면적: 25,700평방km

인구: 200만명

수도: 스코피예(Skopje)

인종: 마케도니아 슬라브인(66%), 그리스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터키인, 세르비아인, 집시

언어: 마케도니아어

종교: 대부분의 알바니아인과 터키인은 이슬람교,

        슬라브인은 그리스 정교

정체: 신생 민주주의

대통령: 키로 그리고로프(Kiro Gligorov)

지리 및 기후

  국토의 많은 부분이 600~900m 높이의 고원지대이다. 국토의 중앙을 가로 지르는 바르다르(Vardar)강은 수도 스코피예를 지나서, 그리스 테살로니키 근처의 에게해로 흘러간다.

 

  남서쪽의 오흐리드(Ohrid)호수와 프레스파(Prespa)호수는 알바니아를 지나 아드리아해로 물이 빠진다. 이들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호수들이고, 오흐리드 호수는 가장 깊다. 북서쪽의 사르 플라니나(Sar Planina) 코소보와 국경을 이루는데, 지역에 있는 티토프 브르흐(Titov vrh) 마케도니아 최고봉으로 높이는 2750m이다. 비톨라(Bitola) 서쪽 펠리스테(Pelister), 오흐리드호수와 프레스파호수 사이의 갈리치차(Galicica), 오흐리드와 테토보 사이의 마프로보(Mavrovo) 군데의 국립공원이 있다.

 

  마케도니아의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겨울에는 에게해의 따뜻한 바람이 바르다르 (Vardar) 계곡까지 불어오므로, 마케도니아 북쪽 나라들의 전형적 기후인 대륙성기후를 누그러뜨린다. 기온은 북쪽에 있는 나라들보다는 높지만, 11월에서 2 사이에 눈이 많이 내린다.

역사

  역사적으로 마케도니아(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세계를 정복했던 때부터) 대부분은, 오늘날 그리스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현재 마케도니아가 사용하는 국명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항상 논란을 제기한다.

 

  로마인이 고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을 기원전 2세기중반에 정복했었고, 기원4세기 로마제국이 분열할 ,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이 지배하는 동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슬라브족은 이곳에 7세기에 정착하여, 지역의 민족성을 바꾸어버린다.

 

  이 지역은 9세기, 불가리아인 짜르 시메온(tsar Simeon) 의해 점령당한다. 짜르 사무엘(Samuel) 지배하에서, 마케도니아는 강력한 불가리아 국가의 중심이 된다.

 

  1014 사무엘이 비잔틴제국에 패배함으로써, 마케도니아는 비잔틴제국,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의 국가에 의해 번갈아 지배되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1389 터키가 세르비아에 대승하여, 발칸국가들은 오토만 제국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지역문화 또한 변하였다.

 

  1878 러시아는 터키를 패배시킨 , 스테파노(San Stefano) 조약에 의해,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이양한다. 러시아가 발칸반도의 중심에, 그들의 강력한 기지를 세우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서방 강대국들은, 불가리아에게 마케도니아를 터키에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1893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터키로부터 독립투쟁을 위해 마케도니아 혁명기구(IMRO: 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sation) 조직하며, 1903 5 일린덴(Ilinde) 봉기로 투쟁의 절정을 이룬다. 3개월 동안 잔인하게 억압 당한다. 민족지도자였던 고체 델체프(Goce Delcev) 반란이전에 죽었지만, 그는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1912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연합하여 터키에 대항했던 1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1913 2 발칸전쟁 때는, 그리스와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배척하고, 마케도니아를 분할했다.

 

  이런 결과에 실망한 IMRO는, 세르비아 왕권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한다. 이에 대해 베오그라드의 전시정부는, 마케도니아 언어는 물론, 마케도니아란 이름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응한다. 일부 IMRO 요원들이 2 세계대전 당시, 마케도니아에 대한 불가리아의 점령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티토의 빨치산에 가담하다. 전쟁 마케도니아는 미래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완전한 공화국의 지위를 갖게 된다는 것에 1943 동의한다.

 

  1952 최초로 마케도니아 문법이 출판되었고, 독자적인 마케도니아 정교회의 설립이 허가되었다. 마케도니아인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인종집단이라는 것을 인식한 베오그라드 정부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불가리아의 요구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91 9 8 마케도니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 74% 독립을 원하였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정부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처음 베오그라드는 마케도니아 주둔 연방군대를 철수하도록 협조를 했고, 분할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도로와 철로 등이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3 중반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경지대, 특히 잠재적인 화약고인 코소보와 가까운 지대를 감시할 목적으로, 여명의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은 그리스북부 지방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른 국명을 사용하도록 요구하며, 마케도니아의 외교적 승인을 미루었다. 그리스는 만일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마케도니아란 국명을 사용하면, 그들이 오늘날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대 마케도니아 영토에 대한 권리의 실질적인 합법성을, 마케도니아인들이 제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정부의 지속적인 입장에 따라, 마케도니아는 하는 없이 1993 4, '잠정적으로' 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FYROM)이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유엔이 재가해 것을 신청한다.

 

  2 동안의 혼란기를 지나, 1993 12  그리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유럽연합의 6개국과 외교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1994 2 미국도 FYROM 인정한다.

 

  그러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경제통상 금지를 선언하고, 마케도니아와의 무역항인 테살로니키 항구를 폐쇄한다. 마케도니아가 국기를 바꾸고, 국호에 관해 그리스와 협의에 들어 간다는 동의를 후인 1995 11월, 통상금지령은 철회된다. 이어 협의가 시작되었으나,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이 차량폭발에 의해 암살될 뻔했다. 지금까지 난제 해결을 위한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코소보사태를 기억한다. 1999 3월부터 6월까지 계속되었던 나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코소보 폭격은,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피난처를 찾는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로 넘쳐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분쟁을 한번에 종식시키겠다는 위협과 함께, 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의 군부대를 폭격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난에 허덕이는 마케도니아에 수십만의 난민이 들어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심각한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경제

국내총생산: US$ 20억불

일인당 국내총생산: US$ 960

주요산업: 석탄, 기계 장비, 식품, 담배

문화

  현재 마케도니아 인구의 66% 마케도니아 슬라브인들로, 이들은 그리스어를 말하던 고대 마케도니아인들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많은 인종학자들은 마케도니아인을 불가리아인종으로 여기며, 불가리아정부의 공식 입장도 마케도니아인을 불가리아인으로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소수의 마케도니아인만이 지지한다.

 

  알바니아인도 소수민족 커다란 하나의 그룹을 이룬다. 북부 그리스에 거주하는 5 명의 마케도니아인들은, 스스로를 '슬라브말을 쓰는 그리스인: Slavophone Greeks' 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정부에 의해, 동화압력을 받고있다.

 

  마케도니아어는 남부 슬라브언어의 일종으로, 서부와 동부 방언으로 나누어진다. 마케도니아 문학언어는 벨레스(Veles), 프릴레프(Prilep), 비톨라(Bitola) 등에서 말해지는 중부 방언에 근거한다.

 

  마케도니아어는 불가리아어와는 연관성이 많아, 다른 슬라브어와 구별되는 불가리아어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많이 쓰이는 키릴문자는, 테살로니키 출신의 형제 키릴(St Cyril) 메토디우스(St Methodius) 의해, 9세기에 개발된 알파베트에 근간을 두고 있다. 문자는 오흐리드의 수도원에서 규율을 가르치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슬라브를 거쳐 전파되었다.

 

  거리이름은 키릴문자로만 쓰여져 있고, 도로표시는 키릴과 라틴어 모두로 표기되어 있다. 마케도니아 민속음악에서 백파이프의 일종인 가예다(gajda) 저음과 줄에 의한 탐부라(tambura)현은, 플류트의 일종인 카발(kaval) 커다란 원통모양의 타판(tapan) 배경음을 연주한다.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마케도니아 민속무용을 테스코토(Teskoto)라고 부른다. 이것은 남성무용으로 타판과 커다란 관악기 주르라(zurla) 맞추어 춤추는데, 매우 느리게 시작하여 갑작스럽게 빨라진다. 춤은 마케도니아 국민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것을 상징하며, 전통의상을 차려 입은 무용수들이 공연한다.

 

  터키식의 다진 고기구이는 전국 어디에서든지 먹을 있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재미는 덜하지만 셀프서비스 음식점이 있다. 치즈나 고기파이인 발칸부레크 (Balkan burek) 요구르트는 값싼 아침 식사용으로 적합하다. 프라이팬에 콩을 요리한 마케도니아식 그라브체 타브체(gravce na tavce) 오흐리드 송어는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

                                                                                                        출처: 신발끈여행사

 

 

 

 

 

 

                     마케도니아의 역사               

 

 

 

                                   그이름 내거야” 그리스 화났다

                                                                                             [한겨레 2004-11-08 17:30]

[한겨레] 미국, ‘마케도니아 공화국’ 국가이름 인정
  지난 4일 미국은 옛 유고슬라비아연방 가운데 하나였던 마케도니아의 공식 국가 이름을 ‘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마케도니아는 국제사회에서 ‘옛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으로 불렸다. 1993년 유엔 가입 당시에도, 그리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FYROM’라는 이름을 썼다.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마케도니아의 개방과 안정, 민주주의 발전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이 시점에 적절하고 정확한 조처”라고 말했다.

  마케도니아는 이번 미국의 인정을,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이후 최고의 외교적 승리라며 환영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라는 고유명사는 자국의 유산이라고 주장해 온 그리스는, 그리스 주재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등 크게 반발하고 있다. 유럽연합도 회원국인 그리스를 고려해, 마케도니아의 이전 이름을 공식적으로 바꿀 계획이 없다고 4일 밝혔다. 미 국무부는 이번 일로 그리스내 반미 감정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그리스를 방문하는 모든 미국인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그리스 유산의 일부인데‥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 영유권 분쟁 휘말릴라” 발끈


■ 그리스 반발=미국의 결정이 발표된 뒤 그리스는 극도의 불만을 표시했다. 페트로 몰리비아티스 그리스 외무장관은 즉시 토머스 밀러 그리스 주재 미국 대사에게 “미국의 그런 일방적 결정은 많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항의했다. 그는 유럽연합 회담 참석도 취소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이 역사적으로 그리스 유산의 일부라며,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마케도니아가 이 이름을 쓰는 것을 반대해 왔다. 그리스 북부에도 마케도니아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에서 기원전 4세기께 발칸반도를 지배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났다.

  하지만 그리스가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마케도니아가 역사적 기원을 따지며, 바로 인접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것이다. 마케도니아 독립 이후, 그리스는 줄곧 유럽연합과 주변국들에게, 현 국경선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수년간 써온 국명인데‥
마케도니아 “외교적 승리”
미 “대테러전 동참 답례”


■ 마케도니아 이름 분쟁 역사=그리스는 1991년 9월 마케도니아가 옛 유고연방에서 독립할 때, 이름 사용은 물론 독립 자체도 반대했다.

 

  반면 마케도니아 정부는 과거 수백년 동안 사용해 온 이름이고, 옛 유고연방 때도 썼던 이름인 만큼, 이름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결국 그리스는 1992년 11월 인접국가와 유럽연합에,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사이 현 국경선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93년 4월 마케도니아가 유엔에 가입할 때는, 그리스 반대 때문에 ‘옛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이라는 이름을 써야 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국제기구가 이 이름을 쓰고 있다.

  그리스의 공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94년 2월에는 마케도니아 소속 선박이, 자국의 살로니카 항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봉쇄 조처했다. 그동안 원유와 식량 등 수입품과 농산물, 철강 등 수출품을 주로 살로니카 항구를 통해 운반했던 마케도니아는,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유럽연합은 그리스의 무역봉쇄 조처가 지역 안정을 해친다고 보고, 그리스를 유럽연합 재판소에 제소하기도 했다.

  그 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와 분쟁을 계속 끌게 되면 전세계 여론이 자국에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1995년 9월 두 나라 사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 왜 미국은 지금 이 시점에 나섰나=미국의 한 관계자는 이번 조처를 두고, “다민족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고, 대 테러전에도 동참한 마케도니아 정부에 사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이 그리스의 반발이 뻔히 예상되는 사안을, 왜 굳이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결정된 다음날 발표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마케도니아는 자국내 민족 갈등이 내전으로 번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에도, 미국이 주도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 ‘대 테러전에 동참한 마케도니아 정부에, 사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는 미국 관리의 설명은 이와 맥이 닿는다.

  하지만 미국은, 동시에 이번 조처가 미 대선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거듭 강조했다. <아에프페> 통신은 지난 4일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이 몰리비아티스 그리스 외무 장관에게 ‘그리스 처지를 이해하며, 이번 결정은 2일 있었던 미 대선 결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 통신은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도 몰리비아티스에게 전화를 걸어 ‘미 대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조처’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주재 서방 관리들은, “마케도니아에서 지난 7개월동안 지속됐던 민족 분쟁을 끝내기 위해, 알바니아계 소수민족에게 더 많은 자치권을 주는 것을 내용의 국민투표를 앞두고, 미국이 지역내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내린 처방일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윤진 기자 mind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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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 세계의 헤드라인
                                                                                        [내일신문 2004-11-09 15:45]

                                                                           [내일신문]

 

          미, 마케도니아 공화국 국가명 인정 <그리스>

  미국은 4일 ‘마케도니아 공화국’명칭을 공식 인정했다. 국제사회에서 마케도니아는 ‘옛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으로 불렸다. 미국의 마케도니아 인정으로 수도 스코페 (Skopje)에는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리스에게는 외교적으로 큰 충격이다. 마케도니아의 독립은 올해로 13년째로, 그리스 정부는 이 신생국을 ‘마케도니아 공화국’ 명칭으로 부르는데 반대해 왔다. 왜냐하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북부 지방 명칭이며, 기원전 4세기 무렵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성 대변인은 “이번 결정은 아테네를 불쾌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케도니아 정부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마케도니아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지속적인 파트너로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에 참가했다”고 발표했다. 코스티스 스테파노풀로스 그리스 대통령은 미 부시의 재선당선을 축하하는 메시지에서, ‘그리스 국민들의 실망’을 전달했다.

                                                                                  유에스에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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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아닌유럽’ 발칸을 가다]

 

                       <下>기구한 운명의 마케도니아

                                                                                       [동아일보 2005-07-08 04:47]
[동아일보]

  ‘마케도니아 전 유고연방 공화국(FYROM·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 고대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 지배의 발판으로 삼았던 마케도니아의 공식 국가명칭이다.

  유럽연합(EU)은 물론 유엔이 공식 인정한 이 기묘한 명칭에는, 1991년 구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마케도니아가 걸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이 그대로 담겨 있다.

  코소보에서 마케도니아로 넘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5일 오후 늦게 국제이주기구(IOM)의 초청장을 가지고 국경에 도착했지만, 국경수비대는 “IOM이 직접 서류를 보내야 한다”며 입국을 막았다. 결국 코소보의 프리슈티나에서 남쪽으로 1시간 반 넘게 자동차로 달려간 길을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다시 하루를 묵은 뒤 6일 오후에야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수도 스코페는 평화스러운 유럽의 여느 작은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난과 혼란에 찌든 알바니아나, 아직도 어디서 뭐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감도는 코소보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하지만 마케도니아는 발칸지역 내에서도 인신매매와 조직범죄로 악명 높은 나라. 암살은 슬라브계 마케도니아인의 ‘특기’로 여겨질 정도다. 독립 이후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인구의 65% 정도인 슬라브계와 알바니아계 세르비아계 등 여러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마케도니아는, 유고연방 붕괴 후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이른바 ‘네 마리 늑대’의 먹잇감처럼 취급됐다.

  특히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민족’은 슬라브계 공산주의자들의 발명품일 뿐, 슬라브인들이 ‘그리스인 알렉산더 대왕’의 왕국명을 사용할 수 없다며, 마케도니아를 옥죄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독립 직후, 국경 봉쇄조치를 취했고, 유럽국가의 원조금까지 막았다.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마케도니아를 그저 ‘스코페’라고 부른다.

  1998∼99년 코소보 분쟁은, 마케도니아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알바니아계 코소보인 60여만 명이 일시에 국경을 넘어오면서 마케도니아 서부 지역은 난민촌이 되어 버렸고,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 주둔 이후, 스코페는 코소보 주재 외국인들의 섹스 관광지로 전락했다.

  2001년 인구의 20%가 훨씬 넘는 알바니아계 반군세력의 봉기로, 내전 일보 직전의 위기를 맞은 뒤엔, 어딜 가나 무기와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취약 국가’가 돼 버렸다.

  알바니아계 반란 이후, 마케도니아 정부는 EU가 제시한 중재 조건에 따라, 총리는 슬라브계, 부총리는 알바니아계가 맡고, 장차관도 양측이 나눠 맡는 기묘한 동거(同居)를 하고 있다.

  일단 위기를 넘겼지만 마케도니아의 갈 길은 험난하다. 뿌리 깊은 부패가 특히 문제다. ‘프로 미디어’라는 언론단체를 이끄는 클리메 바분스키 씨는, “국경을 넘나드는 인신매매나, 마약·무기밀매에는 범죄조직이 개입돼 있기 마련이고 그 뒤엔 경찰과 정치인 등 권력층이 비호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마케도니아의 다민족 동거 실험은, 비록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긴 하지만, 앞으로의 진전 여부에 따라 같은 문제를 지닌 주변 국가에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지난해 미국은, 전 세계에선 최초로 ‘FYROM’이 아닌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인정했다. ‘민주주의를 약속한 마케도니아에 대한 보상 조치’라는 얘기가 많았다.

 

 

                                                                스코페(마케도니아)=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