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압볼리와 빌립보에서 하루를 지내다보니 7월이 가고 8월의 첫날이 되었다. 일찍부터 서둘러 전날 들렀던 빌립보를 지나 사도 바울의 유럽 전도 여정을 따라 차를 몰았다. 당시 바울이 걸었던 에그나티아 가도는 현재 포장도로 좌측에 일부만 남아 있었다. 암비볼리(Amphipolis)는 빌립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60㎞ 떨어진 스트리몬(Sterimon) 강 유역에 있으며 에게해부터는 약 4.8㎞ 지점이다. 로마로 향하는 에그나티아 가도에 있던 이곳은 마게도냐 첫번째 지방의 수도였다.
고속도로를 따라 해변을 달리다가 스트리몬 강의 다리를 건넌 뒤 오른쪽으로 1㎞ 정도 가니 BC 4세기께 만들어진 사자상이 서 있었다. 바울 이전에 세워진 것이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석방된 후 형제들을 위로하고 이 길로 데살로니키로 갔기 때문에(행 17:1) 바울도 이 사자상을 보았을 것이고 바울이 본 그 사자상을 나도 보았다는 사실에 더욱 흥분되었다. 이곳은 BC 480년 파사(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침공을 받았는데 그는 이때 이곳에 다리를 놓고 강을 건넜다. 이곳은 당시 아홉길로 알려져 있었다.
다리를 건너 암비볼리 마을을 찾았다. 지난번에는 사자상 앞에서 차를 돌려 바로 아볼로니아로 갔으나 이번에는 박물관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을에 들어서자 입구에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는 특별히 금으로 만든 면류관이 전시돼 있어 문득 고린도전서 9장 24∼25절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말씀이 머리에 스쳤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박물관의 유물들을 둘러보고 유물 발굴지인 언덕 위에 올라가니 비잔틴 때의 회당 구조와 비슷한 교회터가 두 곳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바닥에 태극 모양의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었다.
암비볼리는 BC 497년에 다리오로부터 도주해온 밀레도 출신 아리스타고라스가 살해된 곳이다. 그리고 32년 후에 아테네인들은 1만명을 보냈으나 그들도 멸절되었다. 마침내 BC 437년에 니키아스의 아들 하그논이 또 다른 아테네인들을 데리고 와서 애도니족을 몰아내고 성읍의 이름을 암비볼리(성읍의 둘레)라고 불렀으며 동편을 가로질러 성벽을 쌓았다. BC 167년 마게도냐가 로마인에 의해 4개 지방으로 분할될 때 암비볼리는 스트리몬 강에서부터 네스토스까지 해당하는 첫번째 지역의 주요 도시로 선정되었다. 암비볼리에서는 초기 기독교 바실리카의 초석들이 발견되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공회당과 마차 경주장까지 갖추었던 큰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백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
암비볼리에 대한 자료를 챙기고 나는 계속해서 바울이 찾았던 아볼로니아로 차를 몰았다. 아볼로니아(Apollonia)는 암비볼리로부터 48㎞,데살로니키로부터 61㎞ 정도 떨어져 있는 볼레(Borle) 호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에그나티아 가도에 접해 있는 이곳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도시와 구별하기 위하여 믹도니스의 아볼로니아라고 불린다.
바울은 암비볼리를 떠나 데살로니키로 가던 도중 이곳에 잠시 들렀다. 조금은 찾기 어려운 아볼로니아에 도착하자 별다른 유적은 없고 작은 바위에는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키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라는 사도행전 17장 1절 말씀이 새겨진 비마(강단의 일종)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로마시대 목욕탕이었다고 전해지는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다.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나오는데 바로 옆에 현대에 세워진 바울기념교회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바울이 이곳을 들렀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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