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의 사도바울 설교강단*
성서의 지리적배경이된 도시들을 방문하면 성서배경당시의 건축물들은 극소수로 남아있고 대부분이 로마시대의 것이나 아니면 중세기때의 것들이 남아 있다. 이 도시들에서 대부분의 고대 도시들은 로마의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각각의 고대도시들에 남아 있는 로마의 건축물에는 원형극장, 공회당등 많은 것이 있지만 문화제국 그리스와 구별되는 것은 도로이다. 그리스의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지리지"를 쓴 스트라보는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은 3가지를 제공했다. 길, 수도, 하수도가 그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로마의 도로는 로마지배당시 무척이나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듯 한 나라의 특징이 되며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로마도로에 대해 알아보고 성서와 관련된 로마도로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의 도로는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는 로마가 자국을 방어하며 국력을 키워 나간 것이 아니라 개방적으로 타국을 공격하며 국력을 키워 나가는 것을 선택한 국가방침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로마는 통일된 특정 지역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기보다 속도전 개념에 입각한 신속이동 배치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로마는 제국의 군대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으로 변환 배치할 수 있도록 도로망을 네트워킹하고 이것을 시스템으로 완성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방침에 입각해 군사적 용도로 도로가 만들어 지고 사용되었다.또한 로마의 도로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신도로 개통은 해외전쟁에서의 승리나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뒤지지 않는 공적으로 평가되었고, 이러한 도로에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처럼 제국을 휩쓸었다는 점이다. 또한 진압한 반란군 (기원전 71년 노예 검투사 스팔타쿠스와 그의 동료 6천명)을 로마제국의 1번 도로라 할 수 있는 ‘비아 아피아’를 따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방식으로 선전하면서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여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용도외에 로마의 도로는 동맹도시와의 연결을 용이하게 하여 단순히 영토적 의미에서의 통합이 아닌 문자와 종교, 로마법, 통화, 건축술, 과학, 예술, 의술, 패션, 사상, 발명품 등 최고급의 문명이 거의 그대로 전지역에 동일하게 전파되어 사회문화 정치경제적으로 통합을 가져왔다. 이러한 통합은 훗날 로마제국 붕괴 뒤 형성되어지는 유럽에 동일한 정체성을 가져다 주었으며 문명적 동질성이 유지하여 갖가지 요소가 활발하게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경합하여 서구문명의 발전 단계를 제공하는 역활을 하게 되었다. 이 뿐만이니라 로마의 도로는 종교적으로 사용되어졌는데 이는 도로를 따라 고대신을 모시는 갖가지 시설물이 들어선 것이라든지, 묘지가 늘어선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렇게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되어진 로마의 도로는 그 제작방법이 독특하고 견고하여 오늘날 까지 남아 성서고고학과 성서지리학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독특한 로마의 도로의 제작 방법은 우선 도로가 될 곳의 땅을 1~1.5m 깊이로 파고 큰 돌을 가지런히 놓는다. 그위에 석괴(石塊) 또는 쇄석(碎石)을 올놓은 다음 다시 자갈이나 일정한 크기의 사암(砂岩)을 깐 후 이를 화산회(火山灰)로 굳혔다. 판석(板石)을 깔아놓은 돌을 잘라서 서로 물리게 하여 움직이지 않도록 짜맞추되 가운데를 볼록하게 만들었고 직선을 이룬 길 양쪽에 배수구가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도로의 폭은 보통 5∼10m, 산악지대인 경우는 2∼2.5m 정도인데, 군용도로의 목적상 대량수송을 위해 개발한 사륜마차가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도록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가로수는 심지 않았다.
이와같이 독특하며 견고하게 만들어지고 수많은 용도로 사용되어진 로마도로에는 로마와 동부 아드리아해의 염전도시를 연결하는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가 있으며 그리스를 향한 타렌툼에서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그리스인 식민자들에 의해 건설된 비아 아피아(Via Appia)가 있고, 알프스-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이베리아반도까지 이어지는 ‘비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가 있다.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관통하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있다.
처음에는 군사적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로마도로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무역의 교류를 담당)으로 되어 도로가 지나는 수많은 도시들에게 팽창과 발달을 가져다 주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주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언급되어진다. 신약성서에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 가 경유되는 도시들 중 종종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의 시작점인 아폴로니아와 혼동되는 아볼로니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하겠다.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한 지역은 마케도니아이고 이 마케도이아에 있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를 이용하여 다녔다. 이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는 기원전 130년 무렵 건설되었고 브룬디시움에서 배로 아드리아해를 건너면 항구도시 아폴로니아에서 바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이어진다. 이 도로는 디라키움을 거쳐 마케도니아를 종단해 그리스 북부 항구 데살로니카를 경유하며 암피폴리 필리피를 거쳐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가면 마침내 비잔틴(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이르게 된다.
성서 사도행전 17장 1절에 나오는 도시들 중 아볼로니아는 아폴로니아를 말하는데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의 시작점인 아폴로니아와 동명의 도시이다. 여기뿐만 아니고 아폴로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들은 또 있다.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를 경유하는 도시들은 오늘 날 많은 유적지와 유물을 제공해주고 있고 현재에도 번성한 도시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유달리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의 시작도시와 동명인, ‘파괴, 아볼로에 속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는 역사의 흔적을 깊은 전원의 고요함에 묻어두고 있다. 이 도시는 암피폴리(암비볼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데살로니카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반경 6km내외에 인접한 곳에 신 아폴로니아가 있어 성서의 기록과 그들의 전승으로 겨우 사도바울이 다녀갔다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옛 과거의 도시명성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곳이다. 또한 이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는 아폴로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다른 성읍들과 구별되는 지명이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주장의 내용은 마게도냐에 있는 미그도니아(Mygdonia)에 있는 한 촌락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발견되었던 동전들로 근거를 삼아 마을의 기원을 B.C. 432경으로 추정하며 위의 주장에 더욱 힘을 주고 있다.
로마의 신들 가운데 태양의 신인 아폴로의 이름에서 가져왔다는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만들어 졌을 당시 로마도로가 관통하는 다른 도시처럼 번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암피볼리스보다 더 작은 마을로 5백명 내외가 살고 있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시끌벅적한 로마 군사들의 칼과 발자국소리가 듣기싫어 귀를 막고 흥청망청 흐느적거리는 춤사위가 싫어 눈을 감아버린 것처럼 모든 로마 도로의 혜택을 무색하게 만든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는 성서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역사속에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관통했다는 사실조차도 상실하였을 것이다고 생각되어진다.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의 사도바울이 필립보에서 데살로니카로 가는 길에 이 마을을 통과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교회와 마을 중앙의 오래된 고목 앞 샘터에는 바울로의 강단과 그가 들러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의 대리석 안내판만이 스산한 겨울추위와 싸우고 오는 순례단을 무관심한 표정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