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비세스 1세의 아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이라고도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어머니는 메디아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BC 559년 안샨왕이 되었으며,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에크바타나로 수도를 옮겼다. BC 546년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켰고 소아시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다시 또 박트리아 · 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고, 이번에는 바빌로니아로 전진하여 BC 538년 10월 키루스의 나이 46세 때, 나보니도스[* 당시 바벨론은 그의 아들 섭정왕 벨사살이 통치하고 있었음-관리자 주]를 무찔러 칼데아(신 바빌로니아)를 멸하였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키루스 2세 [고레스 대왕, Cyrus II]
성서에서의 별칭은 고레스[키루스] 대왕.
개요
BC 590(~580) 메디아(또는 페르시스)~529경 아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을 창건한 정복자. 이 제국은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에게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근동지역을 포괄했다. 그리스의 군인이며 저술가 인 크세노폰이 자신의 저작 〈키로파이디아 Cyropaedia〉에서 최초로 기록한 키루스 전설의 주인공으로,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백성의 아버지로 불렸던 인자하고 이상적인 군주이며, 성서에서는 바빌로니 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의 해방자로 기억되고 있다(→ 유대교).
생애와 전설
BC 590~580년 메디아가 아니면 페르시스(지금의 이란 파르스)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키루스라는 이름이 개인의 이름인지, 군주가 되었을 때 부여된 왕호(王號)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의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아케메네스 제국이 창설된 뒤에, 이란과 관련된 자료에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이름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키루스 대왕이 그 이름을 사용한 페르시아 통치자로는 최소한 2번째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아카드어(그리스도교 이전 시대 메소포타미아 언어)로 된 한 설형문자 문헌에는, "그는 항상 왕권을 행사해온 가문 출신으로, 안샨 왕 테이스페스 대왕의 후손이며, 안샨 왕 키루스 대왕의 손자이고, 안샨 왕 캄비세스 대왕의 아들이다. 어쨌든 키루스는 오랜 통치자 가문 출신인 것이 분명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해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작이다. 크세노폰이 쓴 이상화된 전기는, 역사논문이라기보다 이상적 통치자에 관해 그리스인들을 교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키루스가 페르시아의 자기 나라 백성들만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다른 민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은 키루스를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후의 아카이메노스 왕조 군주 가운데 그렇게 존경 받은 인물은 없었다.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 그리스의 사가인 테시아스 등이 이야기하는 키로스의 어린 시절은 키루스 전설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명백히 한 왕조의 창건자에 대해 거의 초인적인 자질을 지녔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정형(定型)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란 역사에 등장하는 후기 왕조의 창건자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믿음이 존재한다.
전설에 따르면 메디아인의 왕이며 페르시아인들의 대군주인 아스티아게스가, 자기 딸을 페르시스에 있는 자기 신하인 캄비세스라는 군주와 결혼시켰다. 이들 사이에서 키루스가 태어났다. 그 아기가 자라서 자기를 멸망시키는 꿈을 꾼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수석고문관이 아기를 죽이는 대신, 양치기에게 주어 기르게 했다.
10세가 된 키루스는 뛰어난 자질 때문에 아스티아게스에게 발각되지만,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꿈에 개의하지 않고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살려주었다. 페르시스에서 성인으로 자란 키로스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이며 대군주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스티아게스는 군대를 이끌고 키루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BC 550년 그의 군대가 그를 배신하고 키루스에게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키루스의 정복
메디아인의 제국을 계승한 뒤 키루스는, 먼저 이란 고원에 사는 이란 부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한 뒤, 서방으로 확대해나갔다.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는 아스티아게스가 몰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메디아인을 희생시켜 자기 영토를 확대했다.
키루스는 메디아 왕의 후계자로서 리디아를 치러갔다.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는 BC 547(또는 546)년 에 함락되고 크로이소스는 살해되거나 분신자살했다. 어떤 자료에는 그가 키루스의 포로가 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도 나온다. 리디아 왕의 신하국이던 에게 해 해안지방 그리스의 이오니아 도시들은 이제 키루스에게 복속되었으며, 대부분이 평화적으로 굴복했다. 몇 군데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들은 나중에 가혹하게 진압당했다.
그 다음에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로 화살을 겨누었다. 그곳의 군주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구실로 그는 평야지대를 침략했다. 거대도시 바빌론의 민족신인 마르두크를 섬기는 제사장들까지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정복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BC 539년 10월 고대 세계의 가장 큰 도시였던 바빌론이 페르시아인의 수중에 떨어졌다.
성서(에즈 1:1~4)에서 키루스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고향에 돌아가게 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바빌론 유수). 또한 바빌로니아인과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마르두크 신을 존중하고 지방 관습을 지지하는 한편 지방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 지방 주민들을 무마했다.
바빌론의 점령으로 키루스는 메소포타미아 뿐만 아니라, 이전에 바빌로니아인들이 정복했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까지 수중에 넣었다. 소아시아에 있던 실리시아의 왕은 키루스가 크로이소스를 공격할 때 키루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실리시아는 키루스의 제국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군사력과 외교적 수단까지 동원해 키루스는 당시 유례가 없었던 최대 제국을 건설했다.
키루스는 몇 군데에 도읍을 두었던 것 같다. 하나는 예전에 메디아인의 수도로 오늘날의 하마단에 해당 하는 엑바타나 시였고, 다른 하나는 페르시스에 지은 제국의 새 수도 파사르가다에로, 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에게 승전을 거두었던 터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유적은 얼마 안 되지만 방문객들의 찬탄을 자아낸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겨울 수도로 삼았다.
결코 페르시아 국수주의자가 아니었던 키루스는 피정복민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메디아인을 무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페르시아인과 결합해 두 민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이원적 인 왕국을 꾸렸다.
키루스는 페르시아인들을 신하로 거느리고 제국을 통치했던 메디아인들에게서 왕권의 전통을 빌려와 야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들은 아마도 메디아인 한 사람을 총리대신 비슷한 고문관으로 삼는 것이 관례였던 것 같다. 다리우스 시대 이래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후기의 부조를 보면, 한 메디아인이 대왕과 나란히 있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또한 페르시스 토착민이던 엘람인 들도 여러 면에서 페르시아인의 스승이었다. 예컨대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석재 부조에 페르시아인 들이 엘람인의 옷을 입고 엘람인이 만든 물건을 들고 있는 모습이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부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새로운 것이 없이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다. 키루스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내는 데서뿐만 아니라, 아카이메노스 특유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서도 지도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키루스의 가정생활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인 캄비세스가 그를 계승했다. 다른 한 아들 바르디야(그리스인들이 부르기는 스메르디스)는 캄비세스가 집권한 뒤 비밀리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오빠인 캄비세스와 결혼한 아토사라는, 딸과 그밖에도 두 딸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에 자취 를 남기지 않았다.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를 무찌르고, 메디아인이 소유한 동부 이란의 영토도 물려받았 다. 그러나 이 지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는 많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뒤 그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했다.
헤로도토스는 카스피 해 동쪽에 사는 유목민족들을 상대로 그가 벌인 원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처음에 마사게타이족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의 여왕을 무찌르고 그녀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아들이 포로로 있다가 자살하자 어머니가 복수를 맹세하고 키루스를 무찔러 죽였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키루스가 중앙 아시아를 정벌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인 것 같다. 멀리 변방에 있는 소그디아나에는 키레스카타 또는 그리스어로 키로폴리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는 키루스의 동방 정복이 얼마나 먼곳까지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
키루스의 유산
아케메네스 제국이 그 창건자인 키루스의 사후에도 끊임없이 확대되어, 2세기가 넘게 존속했다는 사실 은 그의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키루스는 위대한 정복자이며 행정가였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인들의 마음 속에서 로마의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스라엘의 모세 같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의 무용담은 세부내용에서 고대세계의 다른 영웅이나 정복자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갓난아기 키루스를 양치기가 맡아 기른 이야기는 이집트에서 모세가 강가의 갈대 사이에 버려진 이야기를 연상 시키며, 폭군 할아버지를 타도한 이야기는 다른 신화와 전설에도 흔히 나온다. 키루스 전설은 일찍이 페르시아인들에게서 생겨나 그리스인들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페르시아인들의 키루스에 대한 존경이나 외경의 감정은 그대로 그리스인들에게 전달되었다. 크세노폰이 그리스인 동포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키루스를 통치자의 모범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키루스는 제국 창건자 이상의 존재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그는 고대 사람들이 통치자에게 기대한 탁월한 자질의 상징이 되었으며, 용맹하면서도 관대하고 아량 있는 정복자로서의 영웅적 특질을 지녔다. 그의 인품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져, 그들 자신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영향을 미쳤고, 로마인들이 전하는 전설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71년 이란은 키루스의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R.N. Frye 글
참고문헌
고 레 스
고레스 2세 (Kyrus Ⅱ)
1. 역대하 36:2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23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 에스라 1: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詔書)도 내려 가로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3. 에스라 1: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8 바사 왕 고레스가 고지기 미드르닷을 명하여 그 그릇을 꺼내어 계수하여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에게 붙이니 9 그 수효는 금반이 삼십이요 은반이 일천이요 칼이 이십 구요 10 금대접이 삼십이요 그보다 차한 은대접이 사백 열이요 기타 기명이 일천이니 11 금 은기명의 도합이 오천 사백이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 때에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다 가지고 왔더라"
4. 이사야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5. 이사야 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2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꺽고 3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4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구약의 "고레스"는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적도 없거니와, 성전건축을 허락은 했지만 그의 손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중건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고레스라 함은 이사야 44:28의 말씀대로,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신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 곧 예루살렘이 중건되는 역사는, 고레스의 손에 의해 마무리되지 못하였었다. 이스라엘 동족들의 방해와 참소문이 고레스왕 때부터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를 거쳐 바사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성경을 참고해보라! ☞ 에스라 4~5장.
고레스왕에 의해 성전중건 명령이 내려진 것은 사실이나, 구약의 고레스를 통해 성전 역사가 완성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했던 구약의 바사 왕 고레스가 이사야 44:28절과 45:1~의 예언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예루살렘 성전 역사는, 오히려 다리오왕 6년에 필역되었기 때문이다(스 6:15). 또한 그 전의 성곽은 느헤미야 6:15절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그러하니 우리는 이사야서의 고레스에 관한 예언을 1~2차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고레스"라는 이름의 사명자는 1차로는 표면적 구약 성민(이스라엘)을, 표면적 마귀국가(바벨론)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쓰임받은 사명이요, 2차로는 이면적 이스라엘(영적 야곱=예수님의 피로 산 백성)을 마귀 지배하에 있는 현 세상(이면적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켜 새 시대(천년왕국=다윗의 왕국=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금 인도할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말세종 또는 단체가 되야하는 것이다. 예언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요, 영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성경은 한 나라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하고 이루는 책이 아니요, 오직 지구와 온 우주를 회복시키는 거대한 에덴동산 회복 설계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종 "고레스"의 사명을, 오직 구약으로만 국한시켜 볼 것이 아니라, ①무신론 공산주의(붉은말) ②자본주의 경제권(검정말) ③기독교 협상주의(청황색말=쑥물)가 성행하는 이 혼란한 시기에, 하나님의 택한 종들, 택한 이스라엘들을 끌어내어 주 앞으로 인도할 매우 귀중한 사명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을 바로 보는 눈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고레스"는 하나님의 모든 예언의 말씀(철장권세)으로 이 악한 세상의 혼란한 바벨사상을 파하여 없이하고, 재림 예수를 영접도록 이 시대의 백성을 인도할 목자적 사명을 가진 자요(사 44:28), 21세기에 곧 인류 종말에 와서 타락한 기독교회 곧 "무너진 성읍(성전)을 중건하며 새로 기초를 세우는" 사명자가 될 것이니(예언의 참뜻을 볼 줄 알자), 당연히 종말에 있을 사명자요, 하나님이 택하여 기름부어 모든 예언의 말씀을 환히 밝힐 수 있는 사명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본 제단은 증거한다.
에덴동산 이후 타락한 이 지구성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신창조하는 거대한 역사에 있어서 세계를 살릴 한 나라가 있어야 할 것은 당연지사요(대한민국), 거짓선지 음녀교회를 말씀으로 파하고 주님의 피로 산 수많은 교회를 살릴 책임 있는 한 교회(촛대)가 있어야 할 것도 당연지사다(애굽 땅 중앙제단). 모세의 지팡이에 임한 권세를 위임 받아 대행할 증인권세자들이 종말에 등장한다는 것 역시 계시록과 온 예언서가 증거하는 바이니..... 우리는 고레스의 역사를 잘 알고, 고레스의 사명 감당을 청해야 할 것이다. 우리로서는 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니, 오직 일곱 영의 강권역사로 기록된 모든 예언의 말씀을 이루실지로다. 아멘! ☞ 새일성가 53장
"고레스(키루스) 2세"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2k1115b
1. 생애와 전설
BC 590~580년 메대(메디아)가 아니면 페르시스(지금의 이란 파르스)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고레스라는 이름이 개인의 이름인지 군주가 되었을 때 부여된 왕호(王號)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의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아케메네스 제국이 창설된 뒤에 이란과 관련된 자료에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이름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레스(키루스) 대왕이 그 이름을 사용한 페르시아 통치자로는 최소한 2번째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아카드어(그리스도교 이전 시대 메소포타미아 언어)로 된 한 설형문자 문헌에는 "그는 항상 왕권을 행사해온 가문 출신으로 안샨 왕 테이스페스 대왕의 후손이며 안샨 왕 고레스(키루스) 대왕의 손자이고 안샨 왕 캄비세스 대왕의 아들이다. 어쨌든 고레스(키루스)는 오랜 통치자 가문 출신인 것이 분명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해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작이다. 크세노폰이 쓴 이상화된 전기는 역사논문이라기보다 이상적 통치자에 관해 그리스인들을 교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레스(키루스)가 페르시아의 자기 나라 백성들만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다른 민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은 고레스(키루스)를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후의 아카이메노스 왕조 군주 가운데 그렇게 존경 받은 인물은 없었다.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 그리스의 사가인 테시아스 등이 이야기하는 키로스의 어린 시절은 고레스(키루스) 전설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명백히 한 왕조의 창건자에 대해 거의 초인적인 자질을 지녔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정형(定型)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란 역사에 등장하는 후기 왕조의 창건자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믿음이 존재한다. 전설에 따르면 메대(메디아)인의 왕이며 페르시아인들의 대군주인 아스티아게스가 자기 딸을 페르시스에 있는 자기 신하인 캄비세스라는 군주와 결혼시켰다. 이들 사이에서 고레스(키루스)가 태어났다. 그 아기가 자라서 자기를 멸망시키는 꿈을 꾼 아스티아게스는 고레스(키루스)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수석고문관이 아기를 죽이는 대신 양치기에게 주어 기르게 했다. 10세가 된 고레스(키루스)는 뛰어난 자질 때문에 아스티아게스에게 발각되지만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꿈에 개의하지 않고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살려주었다. 페르시스에서 성인으로 자란 키로스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이며 대군주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스티아게스는 군대를 이끌고 고레스(키루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BC 550년 그의 군대가 그를 배신하고 고레스(키루스)에게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 고레스(키루스)의 정복역사
메대(메디아)인의 제국을 계승한 뒤 고레스(키루스)는 먼저 이란 고원에 사는 이란 부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한 뒤 서방으로 확대해나갔다.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는 아스티아게스가 몰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메대(메디아)인을 희생시켜 자기 영토를 확대했다. 고레스(키루스)는 메대(메디아) 왕의 후계자로서 리디아를 치러갔다.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는 BC 547(또는 546)년에 함락되고 크로이소스는 살해되거나 분신자살했다. 어떤 자료에는 그가 고레스(키루스)의 포로가 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도 나온다. 리디아 왕의 신하국이던 에게 해 해안지방 그리스의 이오니아 도시들은 이제 고레스(키루스)에게 복속되었으며 대부분이 평화적으로 굴복했다. 몇 군데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들은 나중에 가혹하게 진압당했다.
그 다음에 고레스(키루스)는 바빌로니아로 화살을 겨누었다. 그곳의 군주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구실로 그는 평야지대를 침략했다. 거대 도시 바빌론의 민족신인 므로닥(마르두크/렘 50:2)를 섬기는 제사장들까지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정복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BC 539년 10월 고대 세계의 가장 큰 도시였던 바빌론이 바사(페르시아)인의 수중에 떨어졌다.
구약 에스라 1:1~4절에서 고레스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고향에 돌아가게 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바빌로니아인과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므로닥 신을 존중하고 지방 관습을 지지하는 한편 지방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 지방 주민들을 무마했다.
바빌론의 점령으로 고레스(키루스)는 메소포타미아 뿐만 아니라 이전에 바빌로니아인들이 정복했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까지 수중에 넣었다. 소아시아에 있던 실리시아의 왕은 고레스(키루스)가 크로이소스를 공격할 때 고레스(키루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실리시아는 고레스(키루스)의 제국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군사력과 외교적 수단까지 동원해 고레스(키루스)는 당시 유례가 없었던 최대 제국을 건설했다. 고레스(키루스)는 몇 군데에 도읍을 두었던 것 같다. 하나는 예전에 메대(메디아)인의 수도로 오늘날의 하마단에 해당하는 엑바타나 시였고, 다른 하나는 페르시스에 지은 제국의 새 수도 파사르가다에로 고레스(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에게 승전을 거두었던 터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유적은 얼마 안 되지만 방문객들의 찬탄을 자아낸다. 고레스는 바빌론을 겨울 수도로 삼았다.
결코 페르시아 국수주의자가 아니었던 고레스는 피정복민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메대인을 무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페르시아인과 결합해 두 민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이원적인 왕국을 꾸렸다. 고레스(키루스)는 페르시아인들을 신하로 거느리고 제국을 통치했던 메대(메디아)인들에게서 왕권의 전통을 빌려와야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들은 아마도 메대(메디아)인 한 사람을 총리대신 비슷한 고문관으로 삼는 것이 관례였던 것 같다. 다리우스 시대 이래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후기의 부조를 보면 한 메대(메디아)인이 대왕과 나란히 있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또한 페르시스 토착민이던 엘람인들도 여러 면에서 페르시아인의 스승이었다. 예컨대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석재 부조에 페르시아인들이 엘람인의 옷을 입고 엘람인이 만든 물건을 들고 있는 모습이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부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새로운 것이 없이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다. 고레스(키루스)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내는 데서뿐만 아니라 아카이메노스 특유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서도 지도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고레스(키루스)의 가정생활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인 캄비세스가 그를 계승했다. 다른 한 아들 바르디야(그리스인들이 부르기는 스메르디스)는 캄비세스가 집권한 뒤 비밀리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오빠인 캄비세스와 결혼한 아토사라는 딸과, 그밖에도 두 딸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에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고레스(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를 무찌르고, 메대(메디아)인이 소유한 동부 이란의 영토도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그는 많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뒤, 그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했다. 헤로도토스는 카스피 해 동쪽에 사는 유목민족들을 상대로 그가 벌인 원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고레스(키루스)는 처음에 마사게타이족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의 여왕을 무찌르고, 그녀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아들이 포로로 있다가 자살하자 어머니가 복수를 맹세하고 고레스(키루스)를 무찔러 죽였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고레스(키루스)가 중앙 아시아를 정벌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인 것 같다. 멀리 변방에 있는 소그디아나에는 키레스카타 또는 그리스어로 키로폴리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는 고레스(키루스)의 동방 정복이 얼마나 먼곳까지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다.
3. 고레스(키루스)의 유산
아케메네스 제국이 그 창건자인 고레스(키루스)의 사후에도 끊임없이 확대되어 2세기가 넘게 존속했다는 사실은 그의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레스(키루스)는 위대한 정복자이며 행정가였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인들의 마음 속에서 로마의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스라엘의 모세 같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의 무용담은 세부내용에서 고대세계의 다른 영웅이나 정복자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갓난아기 고레스(키루스)를 양치기가 맡아 기른 이야기는 이집트에서 모세가 강가의 갈대 사이에 버려진 이야기를 연상시키며, 폭군 할아버지를 타도한 이야기는 다른 신화와 전설에도 흔히 나온다.
고레스(키루스) 전설은 일찍이 페르시아인들에게서 생겨나 그리스인들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페르시아인들의 고레스(키루스)에 대한 존경이나 외경의 감정은 그대로 그리스인들에게 전달되었다. 크세노폰이 그리스인 동포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고레스(키루스)를 통치자의 모범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고레스(키루스)는 제국 창건자 이상의 존재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그는 고대 사람들이 통치자에게 기대한 탁월한 자질의 상징이 되었으며, 용맹하면서도 관대하고 아량 있는 정복자로서의 영웅적 특질을 지녔다. 그의 인품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져 그들 자신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영향을 미쳤고, 로마인들이 전하는 전설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71년 이란은 고레스(키루스)의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R.N. Frye 글 참고문헌 The Heritage of Persia : R. N. Frye, 1963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 A.T.E. Olmstead, 1948 "고레스(키루스) 2세"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Copyright (c) 2002 Mahershalalhashbaz All rights reserved.
이사야 48장의 고레스왕에 대한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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