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베 [The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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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티아에 있던 옛 도시. 그리스어로는 ‘Thebai’라고 하며, 이미 BC 3000년부터 주민이 산 흔적이 있다.
BC 2000년부터 그리스인 제1진(陣)이 이곳에 들어와 선주자를 밀어냈다. 신화에서는 페니키아계(系)의 카드모스가 이곳에 성을 쌓고 카드메이아라고 명명하였다. 페니키아 문자의 그리스 문자화(文字化)가 먼저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 이야기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오이디푸스 및 ‘테베를 공격하는 7인(人)’ 등 그리스 비극의 소재가 된 신화 ·전설이 이곳을 무대로 많이 생겨, 그리스 초기에 이 곳이 번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곳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적을 방비하기에 적합하고, 농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역사시대에 들어와, 민주정(民主政)의 아테네와는 적대 관계에 있었고, 스파르타와는 가깝게 지냈다.
페르시아전쟁 중에는 페르시아 편을 들었고, 펠로폰네소스전쟁 뒤에는 아테네 편에 들어 스파르타와 대립하였다.
에파미논다스가 나와, BC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무찌르고, 한동안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으나 오래 계속하지 못하고, BC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패권을 잃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BC 316년 카산드로스에 의해 도시는 재건되나, 왕년의 번영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테베공략 7장군 [Seven Against The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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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에서 에테오클레스로부터 테베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테베를 공격한 7명의 장군한 또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
테베 왕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친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뒤,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1년씩 번갈아 테베를 다스리기로 하고, 먼저 에테오클레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에테오클레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리네이케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거부하였다. 아르고스로 간 폴리네이케스는, 왕의 궁전 입구에서 칼리돈 왕 오이네우스의 아들로서 살인죄를 짓고 쫓겨난 티데우스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한편 두 딸을 각각 사자와 멧돼지에게 시집보내라는 신탁(神託)을 받은 아르고스 왕 아드라스토스는, 두 사람의 행색을 보고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다.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는 각각 사자 가죽과 멧돼지 가죽을 몸에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드라스토스는 두 딸 데이필레와 아르게이아를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아드라스토스는 두 사위가 차지하여야 할 테베와 칼리돈의 왕권을 되찾기로 하고, 먼저 테베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아드라스토스가 총사령관이 되고,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를 비롯하여 파르테노파이오스·카파네우스·히포메돈·암피아라오스 등 7명의 장수가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7장군에는 총사령관 아드라스토스를 빼고, 이피스의 아들 에테오클로스를 넣기도 하고, 폴리네이케스 대신 아드라스토스의 형제인 메키스테우스를 넣기도 한다. 예언자 암피아라오스는 이 전쟁에서 질 것이고, 전쟁에 참가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가담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에리필레가, 폴리네이케스로부터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와 결혼 예복을 뇌물로 받고 부추기는 탓에 참전하게 되었다. 아드라스토스는 군사들을 이끌고 테베를 포위한 뒤 공격에 앞서 티데우스를 협상 사절로 보냈으나, 에테오클레스가 왕위를 양보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하여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티데우스는 테베에 머무는 동안, 테베인들과 운동시합을 하여 모두 이겼다. 화가 난 에테오클레스는, 티데우스가 돌아가는 길에 50명을 매복시켜 죽이려 하였다. 티데우스는 이들과 싸워 49명을 죽이고, 하이몬의 아들 마이온만 살려 주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테네 부근 코로노스에 살고 있던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찾아가, 테베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이는 오이디푸스의 지지를 받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아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 있는 오이디푸스는, 축복 대신 저주를 내렸다. 이에 반하여 테베 측은 승리를 보장하는 예언을 들었다.
7장군의 공격이 한창 치열할 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스파르토이의 자손으로서 동정을 지키고 있는 남자가 희생해야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에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가 성벽에서 용의 동굴로 몸을 던져 희생하였다. 이는 테베를 건설한 카드모스가, 군신(軍神) 아레스의 아들인 용을 죽여 신의 저주를 산 데 대한 속죄의 의미였다.
테베의 성에는 7개의 문이 있었다. 폴리네이케스는 에테오클레스가 지키는 힙시스타이 문, 티데우스는 멜라니포스가 지키는 프로이티다이 문, 파르테노파이오스는 악토르가 지키는 보라이아이 문, 카파네우스는 폴리폰테스가 지키는 에렉트라이 문, 히포메돈은 히페르비오스가 지키는 온카이다이 문, 암피아라오스는 라스테네스가 지키는 호모로이다이 문, 에테오클로스는 메가레우스가 지키는 네이스타이 문을 각각 공격하였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격투를 벌이다 모두 죽어 오이디푸스의 저주가 이루어졌다. 티데우스는 멜라니포스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그를 죽였으나, 자신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티데우스는 여신 아테나의 뜻으로 불사신이 될 수도 있었으나, 암피아라오스의 방해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자신을 끌어들인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를 증오한 암피아라오스가, 여신의 의도를 눈치채고 멜라니포스의 목을 잘라 티데우스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티데우스는 잘린 목의 골을 파먹었고, 이 광경에 아테나도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밖에 파르테노파이오스는 페리클리메노스가 던진 돌을 맞고 죽었으며, 카파네우스는 제우스도 자신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한 말을 한 벌로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 죽었다. 암피아라오스는 페리클리메노스의 창에 찔리려는 순간, 제우스가 벼락으로 갈라 놓은 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결국 7장군의 테베 공략은 실패로 끝났으며 아드라스토스만이 살아서 아르고스로 돌아갔다.
10년이 지난 뒤, 암피아라오스의 아들 알크마이온 등 7장군의 후예들인 에피고노이(단수형은 에피고넨)가 다시 테베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테베공략 7장군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인기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테베공략 7장군 Hepta epi Thēbās》, 안티마코스의 서사시 《테바이스 Thebais》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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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목표
그 다음 이야기는 무서운 죄를 지음으로써 요카스터, 오이디푸스, 안티고네의 파멸을 초래한 라이어스(Laius)를 다루고 있고, 마지막 이야기는 에피고니(Epigoni)의 성공적인 공격을 묘사한다. |
유로파
캐드머스
외디프스
테베를 공격한 아르고스의 일곱 영웅
안티고네
에피고니
티레시아스
출처:XIII. 테베 이야기
초기의 경력은 불분명하다. 피타고라스학파의 류시스에게 사사하였고, 뛰어난 변설의 재능과 기지(機知)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BC 371년 보이오티아 연맹위원에 선출되어 스파르타의 평화회의에 참석하였고, 그 회의에서 보이오티아연맹의 해체를 노린 스파르타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에 반감을 사 침입한 스파르타군을 레우크트라에서 맞아 싸웠는데, 새 전술인 사선진전술(斜線陣戰術)을 사용하여 적군 1만에게 결정적 타격을 줌으로써 스파르타의 패권을 빼앗았다. 이듬해 펠로폰네소스에 원정하여 아르카디아와 메세니아를 스파르타로부터 독립시켰고, 그 뒤에도 친구 펠로피다스와 협력하여 테베의 패권 확립에 노력하였다. BC 362년 4번째의 펠로폰네소스 원정 때 만티네이아전투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테베의 패권도 잃게 되었다.
*펠로피다스 [Pelopidas, BC 410?~BC 364] 민주화를 꾀한 탓으로 스파르타군(軍)으로부터 테베를 점령당해(BC 382) 아테네로 망명했다. BC 379∼BC 378년 겨울 동지들과 함께 아테네에서 기습하여, 테베의 과두파(寡頭派)와 스파르타군을 쫓아내었다. 그 후 친구인 에파미논다스와 같이 테베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신성대(神聖隊)’를 이끌고 테기라에서 싸웠고(BC 375), 레욱트라에서는 결정적으로 스파르타에 이겼다(BC 371). BC 370∼BC 369년에는 펠로폰네소스에 원정하고, BC 367년 페르시아로 가서 스파르타를 원조하지 못하도록 대왕을 설득하였다. 테살리아의 키노스케팔라이를 페라이의 참주(僭主)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키노스케팔라이에서 싸워 이겼으나(BC 364), 그는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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