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노스 王朝 (Antigonid dynasty) |
안티고노스 王朝(Antigonid dynasty,
BC 306~168, 138년간 존속)
-안티고노스 [Antigonos] 1세, 2세, 3세 ,
디미트리오스 [Dimitrios] 1세, 2세-
안티고노스 왕조(王朝)는 BC 306~168년까지 138년동안 고대 마케도니아를 다스린 가문으로,
1대 :안티고노스 1세
2대:디미트리오스1세>>
3대:안티고노스2세>>
4대:디미트리오스2세>>
5대:안티고노스3세>>
7대:필리포스5세>>
8대:페르세우스
등 8명의 왕이 마케도니아를 지배하였다.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는, 카산드로스가 임명한 아테네 총독인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를 쫓아내고,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여, 에게 해와 지중해 동부 및 바빌로니아를 제외한 중동지역 전역의 지배권을 아버지에게 바쳤다.
이 지역의 군대는, BC 306년에 안티고노스 1세를 왕으로 추대해, 안티고노스 왕조가 수립되었다.
디미트리오스는 안티고노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마케도니아에서 갈라티아 침략자들을 몰아내어, 마케도니아 왕국을 강화했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BC 240년경에 죽었지만, 회복력이 빠르고 빈틈 없는 그의 일솜씨 덕분에, 마케도니아는 건전하고 튼튼한 정부를 갖게 되었다.
안티고노스 2세의 아들 디미트리오스 2세(BC 239~229 재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리스의 아카이아 동맹 및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전쟁에 말려들었는데, 이 전쟁은 그가 죽을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마케도니아는 차츰 약해졌고, 디미트리오스 2세의 후계자인 필리포스 5세는 어렸다. 상황이 너무 불안정했기 때문에 어린 왕의 보호자인 안티고노스 도손이 왕위에 올라, 안티고노스 3세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로 진격하여 셀라시아에서 스파르타왕 클레오메네스 3세를 무찌른(BC 222) 뒤, 동맹 연합체인 헬라스 동맹을 다시 조직하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안티고노스 3세는 BC 221년에 죽었지만 ,그가 다스리는 동안 마케도니아는 국내적으로 안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 세계에서 확립한 지위 또한 안티고노스 2세 시절에 비해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필리포스 5세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처음으로 로마와 충돌했는데(BC 215: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시작, 10년후 205년에 종전,무승부), 필리포스는 로마의 힘을 너무 과소 평가한 나머지 키노스케팔라이에서 참패하고 말았다(BC 197: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중). 이 패배로 체결된 평화조약에 따라, 필리포스의 지배권은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헬라스 동맹이 무너진 뒤, 마케도니아 지역에는 여러 동맹이 잇따라 결성되었다. 무엇보다도 지난날의 세력균형이 뒤집혀, 로마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결정적인 강대국이 되었다.
필리포스 5세의 후계자인 페르세우스(BC 179~168 재위)는, 로마에 맞서 그리스의 자유를 옹호하는 투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피드나에서 패배했고(BC 168), 이 패배로 안티고노스 왕조는 멸망했다.
안티고노스 1세 [Antigonus I Monophthalmos]
(영)Antigonus Ⅰ Monophthalmus. Antigonus Ⅰ Cyclops라고도 함.
BC 382~301[81세] 소아시아 프리지아 입소스.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마케도니아 장군.
개요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BC 306~168, 138년간)를 창건해, BC 306년 왕이 된 후 5년 후인 BC 301년에, 입소스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탁월한 전략가이며 지휘관이었던 그는, 또한 명민한 통치자로서 아테네 및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이룩했다. 애꾸눈인 까닭에, 모노프탈모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군사적 활약
BC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프리지아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에는 섭정 페르디카스로부터 팜필리아와 리키아의 총독직까지 받았다.
뒤에 그는 페르디카스에 반대하여, 마케도니아 총독 안티파트로스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그리고 크라테로스 등과 동맹을 맺었다(이들은 모두 알렉산드로스 휘하 장군이었음).
페르디카스가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섭정이 된 안티파트로스는, BC 321년 안티고노스를 아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를 파견해, 카파도키아 총독이며 살해된 페르디카스의 지지자인 에우메네스를 공격하도록 했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패주시켜 산악요새 노라에서 그를 포위공격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폴리페르콘이 안티파트로스를 계승하여 섭정이 되자, 안티고노스는 BC 319년 그에게 반대해, 카산드로스(안티파트로스의 아들)·프톨레마이오스·리시마코스·에우메네스와 합세했다.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다스리던 경쟁자 에우메네스가 폴리페르콘 편으로 넘어가자,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바빌로니아 총독)와 페이톤(메디아 총독)의 지원을 받아, 가비에네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그리고 나서 안티고노스는 모든 잠재적인 경쟁세력을 제거할 생각으로, 에우메네스와 페이톤을 모두 처형해버렸으며, 셀레우코스만 간신히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리하여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를 완전히 장악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리시마코스·카산드로스·셀레우코스는 그에게 대적해 동맹을 맺고 제1차 동맹전쟁(BC 315~311)을 벌여,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제국을 재통일하려던 그의 구상을 무너뜨리려 했다.
이에 안티고노스는 시리아를 점령하고, 스스로를 섭정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헬레니즘 왕국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장애였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저항을 무마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자신의 군대에게, 그리스인은 모두 자유인이며, 그리스에 자치를 허락하고,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같은 정치적 구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즉각 되풀이한 데 이어, 196년 로마인들에 이르기까지 거듭해서 사용되었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있는 부하 장교들의 도움을 얻어, 카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점령군을 몰아내고, 에게 해의 섬지방 도시들을 '섬사람 동맹'으로 결속해 그리스 침공을 준비했으며, 동맹국인 로도스 시로부터 함대를 제공받았다. 그가 카리아 정복에 힘을 쏟고 있는 동안, 아들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는 가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했다(BC 312).
동방에서 이같은 새로운 위협이 닥치자,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제외한 모든 적대세력과 평화조약을 맺기로 작정했다. 디아도코이(알렉산드로스의 계승자들)는, 모두 다 그리스 도시들의 기존 경계선과 자유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안티고노스는 더이상 섭정이 아니라, 단순히 아시아 전체의 스트라테고스(담당관리)로 격하되었으며,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지역과 시리아를 통치했다.
그리스에서의 활동
프톨레마이오스가 실리시아를 공격함에 따라, 안티고노스에 반대하는 제2차 동맹전쟁(BC 310~301)이 벌어졌다.
BC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디미트리오스는 카산드로스가 임명한 아테네 총독인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를 축출하고, 아테네의 옛 정치체제를 복원했다. 이에 감사한 아테네인들은,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를 '거룩한 구원자'(테오이 소테레스)로 기렸다.
이제 그리스에서 카산드로스의 영향력은 소멸되었으며, BC 306년 디미트리오스는 키프로스 섬 연안의 살라미스 부근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정복했다. 이 승리로, 안티고노스는 에게 해와 지중해 동부, 그리고 바빌로니아를 제외한 근동 전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의 군대는 그를 왕으로 선포했고, 친구들은 그에게 왕관을 증정했다. 안티고노스 자신은, 그의 아들 디미트리오스를 국왕 겸 공동섭정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왕관을 보냈다. 이러한 관행은, 이후 헬레니즘 세계 군주제의 전통의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BC 305년 안티고노스가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자, 프톨레마이오스도 왕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도 이를 따랐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정식으로 5개 국가로 분할되었다.
그해에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싸울 때 군사원조를 거부했던 로도스를 정복하기 위해, 디미트리오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1년간 성과 없는 포위공격 끝에, 로도스와 평화조약 및 동맹을 체결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쟁에서 로도스의 자율성과 중립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이같은 양보가 불가피했던 것은, 그동안에 카산드로스가 아티카 지역을 침공하여, 아테네를 포위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디미트리오스는 카산드로스를 중부 그리스에서 몰아냈으며, 아테네인들은 그 보답으로 아테네 신전의 '신나오스'('같은 신전을 소유한다'라는 뜻)라는 새로운 종교적 영예를 그에게 부여했다.
BC 303년에 그는 펠로폰네소스 지방의 코린트·시키온·아르고스를 점령했으며, 아카이아와 엘리스를 비롯해, 아르카디아의 거의 모든 도시가 그의 편을 들었다.
BC 302년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BC 337년에 창설한 범(汎)그리스 동맹을 다시 구축해 승리를 기념했다. 스파르타·메세니아·테살리아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사절을 파견해 코린트에서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를 새로운 동맹의 수호자로 선출했다. 이 동맹의 조약은 영구적인 것으로서, 당대 왕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연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각 회원국들은 동맹군에 군대를 파견했으며, 왕들이나 그 대리인이 지휘를 맡았다. 동맹은 그리스 세계 전반의 평화를 보장하는 한편, 무엇보다도 카산드로스에 대항해 안티고노스를 지원하는 것을 첫째 임무로 삼았다(→ 코린트 동맹).
마지막 전투
권력의 절정에 오른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는 자기 왕조의 본거지인 마케도니아를 차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옛 제국 전체에 지배권을 확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카산드로스를 통해 경각심을 느낀 다른 경쟁자들은, 서로 합세해 이제 욕심 많은 늙은이 안티고노스를 공격하고 나섰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부터 소아시아를,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를, 리시마코스는 소아시아 서부로 쳐들어왔다. 프리지아의 섭정인 도키모스와 리키아의 스트라테고스인 포이닉스도 안티고노스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안티고노스는 디미트리오스를 수도인 안티고네이아(BC 306년에 오론테스 강변에 세움)로 불러들이고, 자신은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갔다. 리시마코스는 셀레우코스를 기다리면서, 안티고노스와 접전을 피했다. 안티고노스는 기습부대를 바빌로니아로 보내, 적들의 세력을 분산시키려 했으나 허사였다.
BC 301년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의 연합군은, 프리지아의 입소스에서 안티고노스 및 디미트리오스의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디미트리오스는 적군의 기병대를 지나치게 멀리까지 추격하는 잘못을 범했으며, 그로 인해 80세 노령의 안티고노스는 패배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안티고노스는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한번도 전투에서 진 적이 없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는 그리스 문명을 진심으로 찬양했으며, 주로 소아시아에 여러 도시를 세우는 한편, 작은 부락 여러 개를 통합하여, 레베도스와 테오스 같은 단일한 대규모 중심도시를 만들었다. 몇몇 그리스 예술가들은 그의 궁정을 아름답게 꾸몄다. 아펠레스는 그가 애꾸눈인 점(원인은 알 수 없음)을 감안해, 그의 초상화를 옆면으로 그렸다.
H. Volkmann 글
안티고노스 1세 [Antigonos I, BC 382?~BC 301] |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마케도니아 장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왕조(BC 306∼BC 168)를 창건하였다.
BC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프리지아 총독이 되고, BC 321년 아시아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후계자(디아도코이) 싸움에서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와 함께 대왕의 유지(遺志)를 이어 통일제국의 이념을 가지고, 분할지배를 꾀하는 여러 세력과 싸워 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BC 314년 '자유령(自由令)' 포고에 의하여, 그리스인(人)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폈고, BC 306년 아들과 함께 왕을 칭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이집트 정복을 꾀하였으나, 셀레우코스 등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다른 후계자들과 입소스 전투에서 패하여 죽었다. |
안티고노스(BC382~301) 1세
-마케도니아, 소아시아 및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왕-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왕조(BC306~BC168)를 열었지만,
입소수 전투에서 전사하여, 마케도니아를 카산드로스에게 빼았겼다.
안티고노스는 BC333년 프리지아 총독을 거쳐, BC321년 아시아군 총사령관에 임명됩니다. 그는 제국의 분할지배를 꾀하는 여러세력과 싸워,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일대를 지배합니다. 그는 자유령으로 그리스인의 지지까지 받아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고, 이어 프롤레마이오스의 이집트를 정복하려고했으나, 그를 반대하는 4개의 연합 세력에게, 입수스전투에서 패하여, 그의 다시 통일된 알렉산더제국의 꿈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는 알렉산더 사후 최고의 강력한 세력을 떨쳤으며, 그와
동시에 다른세력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그의 아들인 데메트리우스1세에 의해, 안티고노스왕조의 세력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옮겨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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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소아시아의 중부에서, 서부에 걸쳐 있던 고대 지역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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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북쪽은 에게해(海) ·흑해에 면하고, 동쪽은 갈라티아, 남쪽은 피시티아, 서쪽은 리디아에 접해 있었다. BC 1500년경 유럽에서 인도 유럽어족(語族)의 프리지아인이 침입하여 선주민을 정복하고 프리지아왕국을 형성하였다. 수도는 고르디온이며, 왕국의 건설자 고르디오스의 아들인 미다스왕은 ‘그의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한다’라는 전설로 유명하다.
아시리아의 기록에 의하면, 미타라고 불리고 BC 707년 사르곤 2세에게 복속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미다스왕 이후 키메리아인에게 정복당하고, 또 BC 546년에는 서쪽의 리디아왕국에게 정복되어 그 후로 독립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프리지아어(語)는 6세기경까지 사용되었는데, BC 7세기경의 고(古)프리지아어, 3세기경의 신(新)프리지아어로 된 비문(碑文)이 있으나, 문법적으로도 불명확한 점이 많아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는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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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리오스 1세 [Dimitrios I Poliorcetes] |
(영)Demetrius I Poliorcetes.
BC 336 마케도니아~283[53세] 실리시아.
마케도니아의 왕(BC 294~288 재위, 6년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인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아들로, 아버지가 원정을 다닐 때 뛰어난 지휘관으로 활약했고, 아시아에 있던 아버지의 제국을 재건하려고 애썼다.
그는 이집트 사트라프(총독)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또 아라비아의 나바타이아족과 싸워 패했으나, BC 307년에는 아테네를 마케도니아인(人) 카산드로스에게서 해방시켰으며, BC 306년에 프톨레마이오스를 살라미스(키프로스)에서 대파했다.
로도스 포위 공격(BC 305)은 실패했지만, 이 작전 때문에 그는 폴리오르케테스(포위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스에 있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입소스 전투에 참가했는데, 아버지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제국의 대부분을 잃었다(BC 301).
디미트리오스는 그리스에 거점을 두고, BC 294년에 아테네를 다시 점령해 스스로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지만, BC 288년에 경쟁자인 리시마코스와 피로스에게 쫓겨났다.
결국 킬리키아에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에게 항복하고(BC 285), 그곳에서 죽었다(BC 283). 그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나온다. |
안티고노스 2세 [Antigonos II Gonatas]
(영)Antigonus Ⅱ Gonatas.
BC 319경~239.
마케도니아의 왕(BC 276~239 재위, 37년간).
마케도니아 왕국의 세력을 재건하고, 그리스 전역에 패권을 확립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안티고노스 1세의 손자이며, 디미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디미트리오스가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셀레우코스 1세 등을 상대로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에서 분주하게 전쟁을 벌이는 동안, 안티고노스는 섭정을 맡아, BC 287년에 확립된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권 유지에 전념했다.
BC 285년 디미트리오스 1세가 셀레우코스의 포로가 되자, 셀레우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요구했다.
2년 후 아버지가 죽자, 안티고노스가 말썽 많은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으나, BC 276년까지는 공식적인 재위 연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근거지가 몇 군데에 불과했으나, BC 281년 셀레우코스가 살해당하자, 마케도니아의 지배권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셀레우코스의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와 마찰을 일으켰다.
안티고노스는 BC 279년 켈트족의 침공에 대항하여 그리스 방위전쟁에 참가하고, 다음해에 안티오코스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그는 마케도니아의 지배권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안티고노스의 외교정책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친선관계를 기조로 삼았다.
BC 277년 그는 헬레스폰트스 해협을 건너, 리시마케이아 부근에서 켈트족을 물리쳤다. 이 승전 이후에 그는 BC 276년 마케도니아인들에 의해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BC 274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피로스는, 안티고노스를 마케도니아 북부와 테살리아에서 몰아냈다.
그후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의 몇 군데 도시밖에 차지하지 못했지만, 피로스가 펠로폰네소스 지역으로 진격하자, 그를 뒤쫓아갔다. BC 272년 아르고스에서 피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제 그는 테살리아 동맹의 영수를 겸임했으며, 이웃한 일리리아 및 트라키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코린트와 에우보이아(에보이아)의 칼키스, 테살리아의 디미트리아스 등 그리스의 '고리'를 이루는 3대 도시에, 마케도니아 점령군을 주둔시켜, 그리스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립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펠로폰네소스 여러 도시들의 마케도니아 지지세력들을 지원하고, 시키온·아르고스·엘리스·메갈로폴리스 등지에서 참주의 집권을 도왔다. 이제 마케도니아는 해협의 교통로와 러시아 남부지방에서 곡물 공급을 장악해, 그리스를 완전하게 종속시키려면 에게 해만 손에 넣으면 되었고, 그럴 만한 힘도 회복한 셈이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스파르타의 아레우스 왕과 아테네 시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사주로 그리스 해방전쟁을 선포했다(크레모니데아 전쟁, BC 267~261). 이집트 함대가 사론 만을 봉쇄했지만, 안티고노스는 BC 265년 코린트 부근에서 스파르타 왕을 패배시키고, 이어서 아테네를 포위공격했다.
아테네는 BC 263~262년 조건부로 항복했다. 아테네의 관리들은 안티고노스가 임명한 사람들로 교체되었고,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한 지방도시로 격하되었다.
크레모니데아 전쟁 직후,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와 합세하여, 공동의 적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맞섰다. 안티고노스가 코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에게 해와 '섬사람 동맹'을 확보한 것이 이때(BC 255)였는지, 아니면 크레모니데아 전쟁 때(BC 261)였는지는 불확실하다.
BC 255년 프톨레마이오스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복동생 디미트리오스를 키레네의 베레니케와 결혼시킴으로써, 이집트의 이웃나라인 키레네에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확립했다.
그러나 몇 차례의 형세가 뒤바뀌어, 그리스에서 그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BC 253년 안티고노스의 조카이며 섭정이었던 알렉산드로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아 코린트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독립 군주로 선포함으로써 안티고노스는 그리스 남부의 통치거점인 코린트와 칼키스를 잃었다. 또한 아이톨리아인들이 테르모필라이를 점령함에 따라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대한 연계가 끊어졌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미망인 니카이아를 아들 디미트리오스와 결혼시켰으며, 계략을 써서 BC 244년 코린트를 되찾았다.
이 동안에, 이번에는 아카이아 동맹이 위험한 적대세력으로 떠올랐다. BC 251년부터 아카이아 동맹은 시키온의 아라토스의 지도 아래 있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2세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아라토스를 포섭하기 위해 선물을 보냈으나, 헛일이었다.
BC 243년에 선전포고도 없이 아라토스는 코린트를 기습공격하여, 마케도니아 점령군을 퇴각시켰다. 메가라·트로이젠·에피다우로스도 안티고노스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이 영토를 되찾으려고 하는 대신,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했다. 연합세력은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BC 244년경 안드로스에서 이집트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안티고노스는 에게 해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끝없는 전투로 이어진 생애는, 80세의 나이로 끝났다.
안티고노스는 겸손하고, 키가 작았으며, 들창코였다. 마케도니아에서는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과 달리, 통치자 숭배가 행해지지 않았다. 친구를 선택할 때, 귀족혈통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고려했다. 그는 자신의 군주통치를, 통치자로서 자기 의무를 엄격히 이행한다는 철학적 의미로 이해했다. 한번은 아들이 몇몇 신하들을 마구 대하는 것을 보고 그는
"우리의 왕좌가, 고귀한 머슴의 신분(endoxos douleia)인 것을 너는 모르느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얼핏 모순되는 것 같은 이러한 군주정 개념에 따르면, 통치자는 자기 직분을 책임지고 백성과 법률에 봉사하는 존재였다.
젊은 시절에, 안티고노스는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의 제자였다. 그는 아테네에서 제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BC 276년에는 제논을 마케도니아의 펠라에 있는 자신의 궁정에 초대했다. 그러나 제논은 초대에 응하지 않고 대신, 제자들인 페르사이오스와 테베인(人) 필로니데스를 보냈다. 페르사이오스는 왕권에 관한 논문을 썼고, 안티고노스의 아들 할키오네오스를 가르쳤으며, BC 244년 코린트의 사령관이 되었다.
BC 263년에 제논이 죽자 ,왕은 탄식을 하면서 자신의 공적 활동에 대해 가치 있는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을 잃었다고 애석해 했으며, 아테네인들을 설득하여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도록 했다. 그의 궁정에 머문 문인들은, 전쟁을 기록한 역사가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 널리 읽힌 천문학에 관한 교훈시 〈파이노메나 Phaenomena〉를 쓴 실리시아 태생의 시인 아라토스, 피로스 등이었다.
디미트리오스 2세 [Dimitrios ll]
(영)Demetrius Ⅱ.
BC 276경~229.
마케도니아의 왕(BC 239~229 재위, 10년간).
소년시절 에페이로스 왕 알렉산드로스를 패배시키고 폐위시킴으로써, 마케도니아를 구해(BC 263경) 명성을 얻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이톨리아와 아카이아가 동맹을 맺어 대항했고, 나중에는 에피로테 동맹도 이에 가담했다. 그 연합 세력에 위협받던 그는, 트로이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싸우다가, 패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이 패배로 그의 왕국과 군주제는 크게 약화되었다.
안티고노스 3세 [Antigonos III Doson]
(영)Antigonus Ⅲ Doson.
BC 263경~221경.
마케도니아의 왕(BC 227~221경 재위).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를 패배시켜, 스파르타의 오랜 독립을 종식시켰다. 도손이란 그의 성(姓)은 '주려고는 하지만 ,절대로 주지는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다.
안티고노스 1세의 후손으로 디미트리오스 2세(안티고노스 2세의 이복형제)와 라리사의 올림피아스 사이의 아들이다.
BC 229년 디미트리오스 2세가 죽자 디미트리오스의 아들 필리포스의 경호원에 임명되었으며, 2년 뒤 디미트리오스의 미망인인 프티아와 결혼해 왕위를 차지했다.
안티고노스 3세의 첫번째 군사임무는, 국경지방의 야만족들로부터 마케도니아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뒤 그리스에 개입해 뛰어난 정치 수완을 발휘했다. 아이톨리아 동맹 및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에 대항하고 있던 아라토스와 아카이아 동맹을 지원했다.
수년 간의 전쟁 뒤, 클레오메네스는 BC 222년에 패배했고 안티고노스는 스파르타를 점령했다. 그뒤 곧 그는 일리리아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야만 했으나, 결국 적을 물리쳤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안티고노스를 현명하고 온건한 통치자였다고 묘사했다.
마케도니아의 왕위는, 의붓아들인 필리포스 5세가 이어받았다.
필리포스 5세 [Philippos V]
(영)Philip Ⅴ.
BC 238~BC 179, 59세 마케도니아 암피폴리스.
마케도니아의 왕(BC 221~179 재위, 42년간).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하려 했으나, 오히려 로마에 패했다. 그의 생애는 주로 로마의 팽창 정책 와중에 펼쳐진 하나의 일화와도 같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디미트리오스 2세와 프티아(크리세이스)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어린 필리포스는, BC 229년 아버지가 죽은 뒤, 왕위를 차지한 안티고노스 3세 도손의 양자가 되었다.
안티고노스 3세가 죽은(BC 221 여름) 뒤, 17세로 왕위에 오른 필리포스는, 곧바로 스파르타·아이톨리아·엘리스에 맞서 전쟁을 벌이던(220~217) 동맹을 지원해 명성을 떨쳤다.
BC 215년[23세] 그는 이탈리아에 침입한(제2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일리리아에 있는 로마의 속국들을 공격해, 10여 년 동안 로마와 지루한 전쟁(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다. 로마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그리스 도시들과 제휴하여 필리포스의 공격에 대항했으나, 필리포스는 효과적으로 자신의 동맹국들을 원조했다.
BC 207년 로마가 물러나자, 이듬해인 BC 206년 아이톨리아에 단독 협정체결을 강요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로마와의 전쟁을 끝냈다(BC 205, 포이니케 조약).
필리포스는 뒤이어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로도스에 대해 책략을 꾸몄으며, BC 203~202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2세와 공모하여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영토를 약탈했다. 그러나 로도스와 페르가몬인들이 키오스 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그의 군대를 격파했으며(BC 201), 이들로부터 그의 공격에 대한 과장된 보고를 받은 로마는 전쟁을 선포했다(BC 200~196,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마케도니아(BC 199)와 테살리아(BC 198)에 대한 로마의 군사 작전으로, 그리스에서의 필리포스의 입지는 큰 타격을 입었다.
BC 197년 로마는 테살리아의 키노스케팔라이에서, 필리포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강화 조건에 따라 필리포스의 세력은 마케도니아로 국한되었으며, 전쟁 배상금으로 1,000탈렌트를 지불하는 한편, 자신의 막내 아들인 디미트리오스를 비롯해 여러 명의 볼모와 함대 대부분을 로마에 넘겨주었다.
BC 189년까지 8년동안,그는 그리스 반도의 적대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로마를 원조했다. 그 대가로 조공의 의무를 면제받고, 아들도 되찾았다(BC 190
필리포스는 말년의 대부분을 마케도니아 왕국의 내실을 다지는 데 보냈다. 재정을 정비하고 인구를 이주시켰으며, 광산을 다시 열고, 중앙과 지방에서 쓸 화폐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웃나라들은, 이같은 그의 행동을 끊임없이 로마에 알려 그를 주시하도록 했다.
로마가 자신을 파멸시키려 한다는 것을 확신한 그는, 3차례에 걸친 군사작전을 통해(BC 184, 183, 181), 마케도니아의 세력을 발칸 지역으로까지 넓혔다.
그러나 BC 179년, 바스타르나이인을 이용해 트로이인에 대항할 계획을 세우던 중에 죽었다.
필리포스는 뛰어난 군인이자 인기 있는 왕이었으나, 그의 팽창 정책은 일관된 목표가 없었고, 일시적인 승리만을 거두었을 뿐이다. F.W. 월뱅크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 Philip Ⅴ of Macedonia〉(1940)가 가장 정평 있는 전기이다.
페르세우스 [Perseus]
BC 212경~BC 165경, 47세 로마 근처 알바푸켄스.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재위 179~165경, 14년간).
그리스를 지배하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마케도니아가 로마에 패하고 로마에 합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의 아들로, 아버지가 로마(199)와 아이톨리아(189)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부대를 지휘했다. 동생인 디미트리오스를 상대로 3년 동안 음모를 꾸민 끝에, 그가 왕위계승을 탐낸다고 비난하면서, 181년[31살] 아버지를 설득해 동생을 처형하게 만들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트라키아와 일리리아에서 세력을 넓히는 한편, 그리스 세계의 환심을 얻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목적을 위해 델포이 인보동맹에서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고, 로데스와 남다른 관계를 맺었으며, 아이톨리아와 테살리아의 혁명을 부추겼다. 돌로피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군대를 이끌고 델포이를 방문해, 그리스 전역에 광범위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페르가뭄의 에우메네스 2세가, 페르세우스에게 침략의도가 있다고 로마를 부추겨,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171~168)이 벌어졌다.
페르세우스는 3년 동안 로마인들의 진격을 막아냈으나, 168년 일리리아 왕 겐티오스의 지원을 잃어, 서부전선에 빈틈이 생겼다. 로마군이 그를 몰아붙여, 마케도니아 남부지방에 있는 피드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그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패한 뒤, 남은 생애를 포로로 지냈다.
H. Volkmann 글[엠파스]
| <마케도니아와 로마의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