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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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 제국의 그리스 지배는 그리스의 민족성을 변질시킬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유능한 그리스인은 살해되든지, 망명 또는 개종하였고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며, 농민은 토지를 투르크인 영주에게 빼앗기고 그 농노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인두세가 부과되어 국고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고, 그 징세책(徵稅策)의 일환으로 그리스정교회의 존속이 겨우 허락되었다.
다만 투르크인이 능숙하지 못했던 상업분야에서만은 그리스인이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18세기 이후 베네치아의 쇠퇴에 대신하여 그리스의 상인들은 흑해·지중해에서 활약하게 되어, 마침내 강력한 선박대(船舶隊)와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후의 독립전쟁에 큰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산악지대에는 결사적으로 투르크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인들이 ‘클레프트(Kleft)’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으며, 클레프트의 세력에 대비하여 ‘아르마톨(Armatol)’이라는 그리스인 경찰대가 각지에 조직되었으며, 클레프트는 후에 그리스 독립운동의 주요세력이 되었다.
그리스인 학살을 계기로 유럽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그리스 편을 들게 되어, 시인 L.바이런을 비롯해서 사재(私財)를 털어 의용군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메테르니히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을 묵살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다만 영국만이 외상 캐닝을 중심으로 그리스를 교전국(交戰國)으로 인정하고, 1823년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프랑스를 동원하여 1827년 7월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조정하고, 3국의 함대를 파견하여 투르크·이집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어 1828년 4월 러시아가 투르크에 선전(宣戰)하고, 프랑스도 펠로폰네소스에 파병하였다.
그리스는 원래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독립전쟁에 의한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경제강화를 도모하는 것이 오토 1세의 과업이었다. 그는 수도를 아테네로 옮기고, 경제의 확립과 국토의 확장정책에 진력했다.
독립 당시의 그리스 영토는,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아르타만(灣)·볼로스만을 연결하는 선 이남에 위치하는 본토와 키클라데스제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구(舊) 비잔틴 제국의 옛 땅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영토확장운동이 특히 활발히 진행되어, 독립 당시 4만 9000㎢였던 국토면적이 1907년에는 6만 4000㎢에 이르렀다.
1877∼19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회의에서 그리스의 국경이 개정되었다.
1909년 청년사관들의 ‘군인동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된 후, 베니젤로스가 총리가 되어 그리스의 근대화와 대그리스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정치를 지도하였으며, 발칸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1913년 게오르그 왕이 테살로니케에서 암살되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발칸전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품고 있었으며, 1914년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대그리스주의를 성취할 수 없게 된 그리스는, 그후 터키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즈미르와 트라케 동부 등을 포기하고, 터키와의 인구교환을 도모했다. 그 결과 120만 명 이상의 그리스인이 터키로부터 돌아오게 되었고, 반대로 45만 명의 터키인이 터키로 귀환하였다. 그밖에 10만 명 가까운 불가리아인이 그리스를 떠났다. 그 결과 그리스의 인구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아울러 경제문제도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1941년 1월 메타사스가 급서(急逝)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해지기 시작했으며, 5월에 이르러 그리스는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국왕은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카이로에는 망명 항전조직이 형성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지하운동·레지스탕스 등이 조직되어 게릴라전이 각지에서 빈발했다. 1944년 11월 그리스는 해방되었고, 한때 좌우 양파가 협조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으나 곧 붕괴되고, 1946년 9월 국민투표의 결과 게오르기오스 2세가 귀국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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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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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왕제가 부활한 이래 입헌세습 군주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967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발족하고, 콘스탄티노스 2세가 정권탈환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국외로 망명했다. 1973년 6월 군사정권은 왕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할 것을 발표하여 공화제 이행의 헌법개정안이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얻었다. 이로써 그리스는 대통령 중심 의원내각제의 공화국이 되었으며, 대통령은 의원 2/3의 신임으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다. 그러나 1981년 10월 G.파판드레우가 이끄는 PASOK(범그리스사회당)가 득표율 48%, 174의석을 획득함으로써 제1당이 되었으며 이는 그리스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다. 의회는 단원제로 정원 300명, 임기 4년이며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그러나 1989년 6월 총선에서는 PASOK가 참패하고 ND와 공산당이 새 내각을 구성했다. 같은 해 11월 크세노폰 졸로타스 내각이 출범했으나, 1990년 4월 총선에서는 ND가 제1당을 차지하고 C.미초타키스가 집권했다. 1993년 10월 총선에서 PASOK이 승리하고 G.파판드레우가 재집권했다. 1995년 3월 콘스탄티노스 스테파노푸로스(Constantinos Stephanopoulos)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00년 2월 재선되었다. 북부 농촌에는 투르크 지배시대에 기원하는 대토지 소유제가 남아 있으며, 외국자본과 결합한 산업자본가와 선주(船主) 등 소수에게 자본이 집중되어 반실업 또는 잠재실업자의 수가 많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하여 정국도 불안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6년 1월 G.파판드레우가 건강으로 인하여 총리직을 사임하고 전 공업장관 콘스탄틴 시미티스(Konstantin Simitis)가 사회당 국회의원들의 비밀투표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 콘스탄틴 시미티스는 그리스의 EU(European Union:유럽연합)와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위한 과감한 정책과 조치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 1996년 9월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여 PASOK가 41.6%의 지지율을 얻어 정치적 기반을 굳혔다. 콘스탄틴 시미티스는 1997년 9월 신내각을 구성하였다. 2000년 4월 조기총선에서 집권 PASOK가 43.8%의 지지율로 3회 연속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군사정권의 초기에는 서유럽 제국이 그리스를 비난하여 경제원조도 중지하였으나, 국내의 안정과 함께 각국의 태도는 완화되었으며, 특히 소련과의 친근관계를 고려해서 서방 각국은 적극적으로 그리스를 원조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1978년 3월 10일 그리스-터키 정상회담에서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기로 합의했으며, 1980년 10월에는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복귀했다. 또한 기지협정에 의하여 미국의 통신기지도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가입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981년 1월부터 EC 정회원국이 되었다. 2001년 1월 EMU(유럽단일통화)에 가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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