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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2) / 그리스의 역사

영국신사77 2007. 5. 15. 16:35

                          그리스의 역사

 

 

 

아테네신전 /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남쪽에 있는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도시 파에스툼의 그리스유적으로 도리스양식이다.

 투르크 제국의 그리스 지배는 그리스의 민족성을 변질시킬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유능한 그리스인은 살해되든지, 망명 또는 개종하였고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며, 농민은 토지를 투르크인 영주에게 빼앗기고 그 농노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인두세가 부과되어 국고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고, 그 징세책()의 일환으로 그리스정교회의 존속이 겨우 허락되었다.

 

  다만 투르크인이 능숙하지 못했던 상업분야에서만은 그리스인이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18세기 이후 베네치아의 쇠퇴에 대신하여 그리스의 상인들은 흑해·지중해에서 활약하게 되어, 마침내 강력한 선박대()와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후의 독립전쟁에 큰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7세기 후반에 군사력이 쇠퇴한 투르크는 열강과의
외교교섭이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인을 통역관으로 등용하는데, 이를 계기로 그리스인이 점차 외교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발라키아·몰다비아 등의 통치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파나리옷(Fanariot)’이라는 그리스인의 특권계급이 형성되었다.

 

  또한 산악지대에는 결사적으로 투르크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인들이 ‘클레프트(Kleft)’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으며, 클레프트의 세력에 대비하여 ‘아르마톨(Armatol)’이라는 그리스인 경찰대가 각지에 조직되었으며, 클레프트는 후에 그리스 독립운동의 주요세력이 되었다.

  18∼19세기의
러시아-투르크전쟁, 프랑스혁명, 알리파샤 술탄의 반란 등은 그리스 독립운동을 자극하였으며, 1770년 펠로폰네소스반란의 실패 후, 1821년 남부 러시아오데사에서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이 애국 비밀결사 ‘필리키 에타레이아(Philiki Etareia)’는 그 지도자 P.A.입셀란테스의 지휘로 루마니아베사라비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에 호응하여 일어난 펠레폰네소스의 반란이 파트라스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지도로 클레프트·아르마톨이 합세하여 성공을 거두자,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832)으로 발전했다. 독립군은 D.입셀란테스의 지휘로 여러곳에서 투르크군을 공격하였으며, 그리스 선대()도 이에 참가하여 투르크 함대에 타격을 주었다.

  드디어 1822년 1월 그리스 독립이 선언되고, 파나리옷의 마브로코르다토스(1791∼1865)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클레프트파와의 내분이 일어났다. 투르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키오스섬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 그리스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리스인 학살을 계기로 유럽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그리스 편을 들게 되어, 시인 L.바이런을 비롯해서 사재()를 털어 의용군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메테르니히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을 묵살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다만 영국만이 외상 캐닝을 중심으로 그리스를 교전국()으로 인정하고, 1823년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한편 투르크는
이집트에 구원을 청하여, 1824년 정예를 자랑하는 이브라힘파샤군()이 펠로폰네소스에 상륙해서 점령을 시작한 결과, 미솔롱기는 1년간의 항전 끝에 결국 1826년 4월 함락되었고, 뒤이어 아테네도 포위되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프랑스를 동원하여 1827년 7월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조정하고, 3국의 함대를 파견하여 투르크·이집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어 1828년 4월 러시아가 투르크에 선전()하고, 프랑스도 펠로폰네소스에 파병하였다.

  그리스의 독립은 1829년
아드리아노플화약(), 1830년 런던회의에서 보장되었다. 그 동안에 그리스의 내분도 진정되고, 전() 러시아 외상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암살되었고, 바이에른 출신의 오토 1세(재위 1832∼1862)가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리스는 원래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독립전쟁에 의한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경제강화를 도모하는 것이 오토 1세의 과업이었다. 그는 수도를 아테네로 옮기고, 경제의 확립과 국토의 확장정책에 진력했다.

  국토확장의 최종목표는 1453년 이전의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대그리스주의’라고 하였다. 즉 독립 후의 그리스사()는 밖으로는 국토확장책, 안으로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분쟁, 그 2가지가 복잡하게 서로 얽혀 온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 당시의 그리스 영토는,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아르타만(볼로스만을 연결하는 선 이남에 위치하는 본토와 키클라데스제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구() 비잔틴 제국의 옛 땅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영토확장운동이 특히 활발히 진행되어, 독립 당시 4만 9000㎢였던 국토면적이 1907년에는 6만 4000㎢에 이르렀다.

  1853∼1856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였고, 1859년의 이탈리아혁명에 자극되어 1861년 그리스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오토 1세가 추방되었고, 덴마크 왕자 게오르그 1세(재위 1863∼1913)가 옹립되었다. 영국은 이때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었던 이오니아제도를 그리스에게 넘겨주었다.

 

  1877∼19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회의에서 그리스의 국경이 개정되었다.

 

  1909년 청년사관들의 ‘군인동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된 후, 베니젤로스가 총리가 되어 그리스의 근대화와 대그리스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정치를 지도하였으며, 발칸동맹을 결성했다.

  1912년과 1913년 2회에 걸친
발칸전쟁 때에는, 세르비아·불가리아 등과 함께 투르크와 싸워 더욱 영토를 확대하여, 마케도니아 남반(), 테살로니케 등을 획득하였고, 에피로스 지방의 남쪽, 크레타섬, 트라케 서부 등지를 영토로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게오르그 왕이 테살로니케에서 암살되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발칸전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품고 있었으며, 1914년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때 독일의
빌헬름 2세의 사촌인 콘스탄티노스 왕은 중립을 희망했으나, 베니젤로스는 삼국협상 편에 서야 된다고 주장하여, 서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압력을 가하여 왕을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왕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리스는 독일에 선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승국이 된 그리스는 영국의 지지를 얻어, 1919년 5월 소아시아이즈미르(스미르나)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투르크는,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그리스주의는 실현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케말 아타튀르크(케말파샤)가 출현하여 ‘터키’를 재건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고, 1922년 그리스군은 소아시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보다 앞서 1920년 11월의 선거 결과 베니젤로스는 실각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스 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대그리스주의를 성취할 수 없게 된 그리스는, 그후 터키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즈미르와 트라케 동부 등을 포기하고, 터키와의 인구교환을 도모했다. 그 결과 120만 명 이상의 그리스인이 터키로부터 돌아오게 되었고, 반대로 45만 명의 터키인이 터키로 귀환하였다. 그밖에 10만 명 가까운 불가리아인이 그리스를 떠났다. 그 결과 그리스의 인구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아울러 경제문제도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화폐가치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1924년 3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여전히 왕당파와 공화파의 싸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928년 베니젤로스가 다시 총리가 되었고, 1935년 혁명이 일어났으나 곧 진정되었다. 왕정이 부활되고 콘스탄티노스의 장남 게오르기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후 좌익 공화파가 우세하게 되었으나, 1938년 총리가 된 메타사스는 국회를 정지하고 계엄령을 공포했다.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40년 10월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알바니아 전선에서 그리스군에게 패전했다.

 

 그러나 1941년 1월 메타사스가 급서()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해지기 시작했으며, 5월에 이르러 그리스는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국왕은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카이로에는 망명 항전조직이 형성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지하운동·레지스탕스 등이 조직되어 게릴라전이 각지에서 빈발했다. 1944년 11월 그리스는 해방되었고, 한때 좌우 양파가 협조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으나 곧 붕괴되고, 1946년 9월 국민투표의 결과 게오르기오스 2세가 귀국하게 되었다.

 그후 그리스는 격심한 인플레와 좌우 양 파의 내란을 겪게 되었으나,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은 그리스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십수억 달러의 원조로 정부측을 지원했다. 그 결과 좌파는 세력을 잃고 1949년 10월 내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형편을 배경으로 왕당파·공화파 사이에 정쟁()이 계속되었고, 군부 쿠데타 등으로 강압적인 군사정권이 성립되는 등 정국불안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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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정치

 

아테네 국회의사당 /

제2차 세계대전 후, 왕제가 부활한 이래 입헌세습 군주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967년 쿠데타군사정권이 발족하고, 콘스탄티노스 2세가 정권탈환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국외로 망명했다. 1973년 6월 군사정권은 왕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할 것을 발표하여 공화제 이행의 헌법개정안이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얻었다. 이로써 그리스는 대통령 중심 의원내각제공화국이 되었으며, 대통령은 의원 2/3의 신임으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다.

1974년 7월 전 총리 K.
카라만리스가 귀국해 총리에 취임하여 민정으로 되돌아갔다. K.카라만리스는 ND(신민주당)를 결성하여 11월의 총선거에서 300의석 중 220의석을 획득했다. 또한 12월의 국민투표 결과, 공화제를 채택할 것이 확인되었다. 그후 K.카라만리스는 민주화 작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1977년 11월 20일 조기총선을 실시하고 승리를 거두어 재집권했다. K.카라만리스는 1980년 5월 15일 대통령으로 승격, 라리스를 총리로 하는 신내각을 조직하여 출범시켰다.

그러나 1981년 10월 G.파판드레우가 이끄는 PASOK(범그리스사회당)가 득표율 48%, 174의석을 획득함으로써 제1당이 되었으며 이는 그리스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다. 의회는 단원제로 정원 300명, 임기 4년이며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그러나 1989년 6월 총선에서는 PASOK가 참패하고 ND와 공산당이 새 내각을 구성했다. 같은 해 11월 크세노폰 졸로타스 내각이 출범했으나, 1990년 4월 총선에서는 ND가 제1당을 차지하고 C.미초타키스가 집권했다. 1993년 10월 총선에서 PASOK이 승리하고 G.파판드레우가 재집권했다. 1995년 3월 콘스탄티노스 스테파노푸로스(Constantinos Stephanopoulos)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00년 2월 재선되었다.

북부 농촌에는 투르크 지배시대에 기원하는 대토지 소유제가 남아 있으며, 외국자본과 결합한 산업자본가와 선주() 등 소수에게 자본이 집중되어 반실업 또는 잠재실업자의 수가 많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하여 정국도 불안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6년 1월 G.파판드레우가 건강으로 인하여 총리직을 사임하고 전 공업장관 콘스탄틴 시미티스(Konstantin Simitis)가 사회당 국회의원들의 비밀투표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

콘스탄틴 시미티스는 그리스의 EU(European Union:유럽연합)와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위한 과감한 정책과 조치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 1996년 9월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여 PASOK가 41.6%의 지지율을 얻어 정치적 기반을 굳혔다. 콘스탄틴 시미티스는 1997년 9월 신내각을 구성하였다. 2000년 4월 조기총선에서 집권 PASOK가 43.8%의 지지율로 3회 연속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군사정권의 초기에는 서유럽 제국이 그리스를 비난하여 경제원조도 중지하였으나, 국내의 안정과 함께 각국의 태도는 완화되었으며, 특히 소련과의 친근관계를 고려해서 서방 각국은 적극적으로 그리스를 원조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1978년 3월 10일 그리스-터키 정상회담에서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기로 합의했으며, 1980년 10월에는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복귀했다. 또한 기지협정에 의하여 미국의 통신기지도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가입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981년 1월부터 EC 정회원국이 되었다. 2001년 1월 EMU(유럽단일통화)에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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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국회의사당 앞의 무명용사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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