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생활 1. 애굽에 팔려간 요셉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때보다 40년 전 쯤에 기록된 애굽의 파피루스 문서가 최근에 알려졌다. 이 조각난 기록은 감옥 문서인데, 그 당시 감옥 제도가 쓰여 있고, 뒷면에는 어떤 애굽 집에 속한 75명의 종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 45명은 아시아 사람으로 애굽에 팔려 온 종들이다. 요셉도 그후에 이들처럼 팔려 온 것이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 온 요셉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국의 총리가 되었을까? 이를 뒷받침해 주는 뚜렷한 역사가 있었다.
번영하던 애굽의 중왕국(12, 13왕조)이 갑자기 세력이 약해지면서, 지방 통치자들의 분할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 힉소스(Hyksos; 목자 왕들, 이국의 통치자)라는 셈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이, 아시아 팔레스틴 쪽에서 말과 병거를 몰고 쳐들어 왔다. 그 때가 기원전 18세기 중엽으로, 그 때부터 약 150년간(약 1720~1570 BC) 애굽의 두 왕조(15, 16 왕조)는 이민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들은 수도를 동부 아바리스에 정하고, 애굽과 서부 아시아를 다스렸다. 이 때에 요셉은 애굽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창 39:4)가 되었다. 그러나 무고(誣告)를 입어 투옥되었다(창 39:20).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원전 13세기쯤의 애굽의 세티 Ⅱ세(Seti Ⅱ) 때 기록된 파피루스(d' Orbiney)에 두 형제 아누비스아와 바티스 (Anubis and Bitis)이야기에서, 다른 형태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창 40:1~23)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직분은 애굽어를 히브리어로 풀어서 쓴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궁중 관리의 직분이었음이 애굽의 고대 문서에서 확증되었다. 감옥의 총무가 된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였다. 꿈 이야기에서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위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각종 구운 식물이 있"(창 40:16, 17)다. 이 설명은 고대의 애굽 무덤의 모형 목각에 뚜렸이 나와 있어, 성경의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요셉은 2년의 옥중 생활 끝에, 총리직과 아울러 "곡식 창고장"까지 겸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창 41:40). 이러한 직책은 당시의 직분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요셉과 관련된 수레(또는 병거)와 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원전 18세기 중엽에 힉소스 족들이 애굽에 쳐들어오기 전에는, 병거나 말을 타는 습관이 소개되지 않았다. 이것은 힉소스의 시대인 것을 분명히 입증한 것이다.
요셉은 애굽인 바로가 아닌, 이스라엘과 같은 셈족인 힉소스 민족이 애굽을 통치할 때 그 밑에서 총리를 지낸 것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지어 준 애굽 이름인 "사브낫바네아"(창 41:45)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인명이었다. 근대의 애굽 발굴물 중에서 이 이름이 드러났다.
총리와 곡물 총 책임자가 된 요셉은, 7년의 풍년기 동안 전국의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창 41:46~49). 기원전 15세기에 속하는 고대 애굽의 수도인 테베의 한 무덤의 벽화에서, 추수한 곡식을 기록하는 관리들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어, 이 사실을 입증시켜주고 있다. 요셉이 섬기던 힉소스 족속의 바로는 제 16왕조에 속한 키안 또는 카안(Khian 또는 Khayan)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이름이 애굽의 상형문자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
7년 대풍년에 이어 7년 대흉년이 이집트와 팔레스틴 전역에 극심해 졌다. 이에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두 차례에 걸쳐 요셉의 형제들에게 귀한 예물을 주어 이집트 총리를 방문하여 양식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창 42, 43장). 야곱의 열 아들들은 이집트에 도착해서 총리가 된 이복 아우 요셉을 몰라 보고 그 앞에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한다(창 42:6, 43, 26).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15세기 테베에 있는 세벡-헤텝의 무덤 프레스코 벽화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그 벽화에는 팔레스틴(시리아 지방)에서 온 셈족계 아시아인들이, 그들 땅의 예물들을 손에 들고 이집트 궁전에 와서 바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요셉의 형들의 당시 사건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야곱은 애굽에 와서 17년을 살았으며, 147세에 죽어 장사되었다(창 50:1-3). 야곱의 장례법은 그 당시의 애굽의 장례법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요셉의 "수종의사"(창 50:2)가 나오는데, 당시 애굽에는 고도의 의술을 가진 의사가 있었다고 희랍의 기록에 나온다. 요셉은 야곱의 시체, 즉 "향 재료를 아비의 몸에 넣게" 했다. 그것을 넣는데 40일이 걸렸다는 것은 당시 애굽의 특수 장례법, 즉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애굽의 초기 역사에는 향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시체를 그저 말려서 처리했다. 제 11, 12 왕조와 힉소스 통치 때에는 발달해서 시체를 소금과 천연 탄산소오다로 처리했다. 죽은 사람의 내장을 제거하고 그곳에 고무진이나 방부제를 채워 넣는다(창 50:2, 3).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붕대로 감고 미이라 모양을 만들었다. 그 후에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나무 상자에 넣고 난 후에, 다시 2~3개의 직사각형 나무관 속에 넣어 바위를 깎아 만든 굴무덤에 장사했다. 무덤에 장사할 때 그가 평소에 쓰던 물건들도 함께 넣었다. 미이라를 만드는 데 40일이 걸렸다. 애굽의 습관대로 70일을 울었다. 요셉도 110세에 죽은 후에 같은 방법으로 장례를 치루었다(창 50:26). 이와 같은 기록은 당시 애굽 장례 풍습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신계훈, 조대연, 고고학과 성서배경, 59~-62 참조).
2.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생활
기원전 18세기 중엽에 셈족 계통의 아시아인들인 힉소스족들은 애굽을 침공하여 14왕조를 무너뜨렸다. 애굽은 약 150년간(1720-1570 BC) 이 민족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 기간 동안 요셉 덕분에 기근을 피해 이민 온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일강 삼각주 동쪽의 고센 땅 지금의 와디 튜미랏(Wadi Tumilat)을 차지하여 번영을 누렸다(창 47:6).
그러나 요셉이 죽고 얼마 후 애굽에서는 대정변이 일어났다. 당시의 힉소스 왕 아포피스(Apophis)가 애굽인으로서 테베의 지방 장관이였던 세켄레(Sekenre)를 죽인 사건을 계기로, 그 아들들에 의해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형 카모세(Kamose)에 이어 동생 아모세(Amose)가 힉소스 왕국의 수도 아바리스를 빼앗았다.
힉소스족은 150여년 만에 애굽에서 쫓겨나서, 남부 가나안 사루헨(수 19:6)에서 버티다가, 애굽 군대에 의해 포위 3년만에 패망하였다. 이 기록은 애굽왕 아모세의 부하 군인 중의 하나인 아모세(왕의 이름과 같음) 장교가 자기가 독립 투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운 기록을 네갑에 있는 자기 무덤에 글로 써 둔 것을, 거의 4,000년만에 발굴함으로써 밝혀졌다. 그는 독립 투쟁에서 세운 공로로, 왕에게서 받은 19명의 노예들의 이름을 무덤 비명에 써 놓았다. 그 중에는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셈족의 이름이 있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애굽의 독립 전쟁에서 성공한 제 18왕조는, 힉소스 시대에 번영을 누렸던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고 보복하기 시작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은 바로 제 18왕조를 가리키는 역사적인 표현으로, 성경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상동, 63).
3. 강제 노역과 모세의 출생 독립운동에 성공한 제 18 왕조는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을 두려워 하고 증오를 느껴,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는 강력한 정책을 폈다(출 1:9, 10). 이렇게 세워진 억압 정책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출 1:13, 14). 이런 상황에서 지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이, 1905~1906년 사이의 겨울에, 페트리(W. M. F. Petrie)에 의해 발굴되었다. 비돔은 와디 튜밀랏에서, 라암셋은 텔 엘 레타베(Tell el Ratabeh)에서 발굴되었다.
아모세가 죽자, 그의 아들 아멘호텝 Ⅰ세(1546-1525 BC)가 왕이 되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애굽의 장군이며 그의 사위인 투트모세 Ⅰ세(Thutmose Ⅰ; 1525~ 1508)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주로 외국 정복에 힘쓰는 한편, 셈족 노예들을 대대적인 토목 공사에 동원했다.
이 때 쯤 수도 테베에 끌려와서 강제 노동을 하던 레위 족속의 부부인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준수한 아기 모세가 태어났다. 이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더 이상 번창하지 못하도록 "남자가 나거든…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출 1:22)는 바로의 명령이 시행되던 때였다. 아기의 생명은 위험에 처하였다. 요게벳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 두었다가, 방수진을 칠한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 갈대 숲 사이에 띄우고, 누나 미리암이 망을 보게 하였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의 손길이 아기 모세에게 이르러 왔다. 애굽 왕 투트모세 Ⅰ세에게는 핫셉섯(Hatshepsut)이라는 무남독녀 공주가 있었다. 그가 바로 아기 모세를 건진 핫셉섯 공주였다. 모세는 바로(투트모세 Ⅰ세)의 딸 핫셉섯의 양자가 되어, 애굽 궁중에서 왕자의 대우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상동, 64).
4. 모세의 양모 핫셉섯 공주 애굽왕 투트모세 Ⅰ세에게는 무남독녀 핫셉섯이라는 공주가 있었다. 그가 바로 모세의 양모이다. 투트모세 Ⅰ세가 친자식으로는 핫셉섯 밖에 낳지 못하자, 세습 제도에 의해 왕위를 잇고자, 소첩에게서 낳은 나이 어린 아들을 연상의 딸과 결혼시켜 다음 왕인 투트모세 Ⅱ세가 된다.
그러나 투트모세 Ⅱ세가 4년 만에 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요절하자, 과부가 된 핫셉섯은 자신이 남자의 모습을 하고, 이중관을 쓰고서 왕으로 군림했다. 그는 왕으로서 20년간(1504-1482 BC) "세계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상하 애굽을 다스리며 번영과 평화의 시대를 이룩했다. 그의 유명한 건축물은 테베 가까이 데일 엘 바리(Deir el Bahri) 절벽에 맞대서 지은 흰 대리석의 시체 안치관인데, 신전 형식으로 웅장하게 세워졌다. 또한 그를 위해 카르낙에 세워진 두 개의 오베리스크(방첨비) 가운데 한 개는, 그 높이가 97.5 피트에 무게가 70만 파운드나 된다. 이 여왕을 양모로 한 모세는, 당대의 최고 교육을 받으며 왕위를 계승할 강력한 후계자로 등장했다.
핫셉섯 여왕은 후계 문제로 애굽의 지배 계급인 아몬신의 제사장들과 반목이 심했다. 왕이 될 사람은, 동시에 아몬신의 제사장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선조의 신앙을 고수하고자 이를 거절했다(히 11:24, 25). 궁지에 몰린 핫셉섯은 제사장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죽은 남편의 소첩에서 낳은 아들을 자기의 딸과 결혼시켜 후계자인 투트모세 Ⅲ세(1482-1450 BC)로 삼았다. 뜻 밖에 왕의 후계자가 된 투트모세 Ⅲ세는, 카르낙에 있는 신전 비명에 "아몬신의 개인적인 개입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적어 놓았다. 그는 모세와 왕위 다툼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위치가 달라지고, 그의 유일한 보호자인 핫셉섯도 기원전 1486년 경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던 어느 날, 민족적 자각과 사명감에 충동을 받아,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감독관을 쳐 죽인다. 그러다 진상이 탄로나자,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쳐 40년간을 그곳에서 살았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친 뒤, 얼마 후 핫셉섯의 근신(近臣)들이 제거되는데, 아마 투트모세 Ⅲ세의 추종자들에게 살해된 것 같다(상동, 65, 66).
5. 가중된 이스라엘 백성의 노역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신한 후 사태가 악화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 생활은 극도로 가혹해졌다. 오랫동안 계모인 핫셉섯에게 억눌렸던 투트모세 Ⅲ세는 우선 계모가 세운 기념물들을 없애고 기록들을 지워 버린 후, 대신 아버지(투트모세 Ⅱ세)와 할아버지(투트모세 Ⅰ세)의 이름을 써 넣기도 했다. 그는 20여년간 팔레스틴과 아시아를 원정하여 국위를 떨쳤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오면, 가을에 걸쳐 카르락에 있는 아몬 신전 증축을 비롯한 대 토목 공사를 일으켜, '역사상 최초의 대 제국 건설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토목 공사를 관할하는 수상급의 관리를 두었는데, 바로 그 레크미레(Rekmire)의 무덤이 테베의 근교에서 발굴되었다. 그의 무덤 벽에는 자신의 경력을 말해 주는 그림과 글이 소상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노역했는가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글로 써 있다. 벽돌 찍는 광경, 벽돌 쌓는 그림, 돌 뜨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벽돌을 만들고 쌓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보이는 아시아인인 것이 차림과 색깔에서 명백하다. 그 옆에 레크미레 노역 감독장이 작대기를 받치고 앉아 있는데, 거기에 쓰여진 글에는 "포로들은 아몬 신전을 건축하기 위해 데려왔다." 또한 포로들의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우리에게 빵과 맥주와 모든 좋은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감독이 말하기를 "채찍이 내 손에 있으니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는 경고도 적혀 있다. 애굽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 밖에 먹을 것이 없을 때, 먹는 것으로 불평하던 것이 노예 생활을 그리워한 것이다(민 11:4~6, 21:5, 6).
이스라엘 백성이 벽돌을 만들던 과정이 한 무덤의 목각에서 나타났다. 곡괭이로 나일강변의 흙을 파서 물을 퍼다 모래와 잘게 썬 짚을 섞어 이긴 후, 나무를 파서 만든 틀에 찍어서 햇볕에 말려 흙벽돌을 만든다.
나바이유(Naville)는 1883년, 키일(Kyle)은 1908년에 비돔성(출 1:11)을 발굴하면서, 아래 층에서는 약간의 뿌리와 거루터기를 섞어서 만든 벽돌을 발견했다. 그리고 윗층에서는 아예 짚이 들어 있지도 않은 벽돌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출애굽기의 진실성을 입증한 것이다(출 5:6-18). 모세가 죽기를 기다리던 바로는(출 2:23; 4:19), 투트모세 Ⅲ세(1482-1450 BC)이다. 그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있는 동안 죽었다(상동, 66~68).
6. 출애굽과 모세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피신해 있는 동안 투트모세 Ⅲ세가 죽었다. 출애굽이 있기 5년 전 쯤인 1450년 경에 죽었다(출 2:23). 그의 아들 아멘호텝 Ⅱ세(AmenhotepⅡ; 1450~1425 BC)가 바로의 자리에 오르는데, 그가 출애굽 당시의 바로이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용맹하였다. 그의 입상도 발견되었고, 또 그가 암소 신으로 제 18 왕조가 섬기던 애굽 신인 하돌(Hathor)신의 머리 아래서 보호받고 있는 입상도 발굴되었다.
최근 기자 지방의 스핑크스 가까이에서 석비 하나를 발굴했는데, 거기에는 그가 젊은 왕자 시절에 그의 북쪽 정원에서 3인치 두께의 아시아제 구리로 된 활 과녁 네 개가 35피트 간격으로 세워진 것을 보고, 전통에서 화살 4개를 꺼내 말을 달리면서 연거퍼 쏴서 맞춘 무용담이 적혀있었다. 그의 미이라는 1893년 테베의 왕곡에서 발굴되었다. 그의 유명한 활이 아직 그의 곁에 놓여 있으나, 아무도 그것을 당길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젊고 용맹한 바로 앞에, 나이가 80세가 넘은 모세와 83세의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요구하였다. 그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하였다. 모세와 아론이 그 앞에 섰던 바로는 아멘호텝 Ⅱ세였다(상동, 68).
7. 열 재앙(출 7:20~12:30) 1) 첫째 재앙 - 나일강이 피로 변함 애굽인들에게 있어서 나일강은 예배의 대상이었다. 나일강을 위한 기도, 찬미, 예배가 드려졌다. 고대 나일강의 찬가가 발견되었다. "당신은 가난하고 어려운 자의 주가 되십니다. 만약 당신이 하늘에서 뒤집혀지면 신들은 망할 것입니다." 나일강은 애굽 신들의 총 본산이다. 부활과 영생의 신 오시리스(Osiris), 나일강의 신 하피(Hapi), 홍수의 여신 사테드(Satet), 그의 언니신 안퀘드(Anqut) 등이 첫째 재앙에서 망해버린 것이다.
2) 둘째 재앙 - 개구리 이 재앙은 개구리로 나타나는 크눔(Khnum)신의 부인 헤큐트(Heqt)를 친 것이다. 헤큐트(Heqt)는 개구리 여신으로 부활의 상징이요 비옥의 표상으로 개구리가 거처에 나타나면 그 해의 길조라고 했다.
3) 셋째 재앙 - 이 지신(地紳) 셉(Seb)에게 내린 것이다. 그들은 지신 셉 덕분에 온갖 혜택을 입고 산다고 믿었다.
4) 넷째 재앙 - 파리 파리 중에서 맵시파리(Ichneumon Fly)는 거룩해서 신으로 섬겼다. 너무 극성스럽고 폐해가 심해 신으로 섬긴듯이 보인다.
5) 다섯째 재앙 - 가축 애굽에는 수많은 가축 신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암소의 여신 하돌(Hathor)이 으뜸이었다. 하돌은 출애굽 당시인 18왕의 주신이었다. 또한 황소신 아피스(Apis)를 잘 섬기면 내세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6) 여섯째 재앙 - 독종 이 재앙은 풀무의 재를 바람에 날려 독종을 일으켰다. 이것은 태풍과 전쟁의 신인 레슈퍼(Reshpu)와 퀘테슈(Qutesh) 슈렉(Sulech)에 내린 것이다. 이 재앙으로 사람과 가축이 고통을 당해도 고칠 힘이 없는 의약의 신 임호텝(Imhotep)을 친 것이다.
7) 일곱째, 여덟째 재앙 - 우박과 메뚜기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은 애굽인에게 풍요한 수확을 약속하고 경배를 받는 그들의 신들의 무능과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알게 하는 하나님의 실력 행사이다.
8) 아홉째 재앙 - 흑암 아홉째 재앙으로 빛은 사라졌다. 몸을 굽혀 궁창을 만들고 있다던 하늘 여신 누드(Nut), 하늘을 거처로 삼고 해로 얼굴을 나타낸다던 호러스(Horus)신, 일월성신을 주장한다는 도드(Thoth)신, 불의 여신 세크멧(Sekmet), 일출신 프타(Ptah), 일몰신 테무(Temu), 주신인 태양신 라(Ra)가 흑암 재앙 때 완전히 패배당했다.
9) 열째 재앙 - 장자 애굽의 주신인 라(Ra)는 태양신이다. 그는 때때로 암소의 첫 새끼 황소로 땅 위를 걷기도 한다. 또한 출생의 신 메스케밋(Meschemit)은 바로의 장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이리하여 애굽의 모든 신들은 아무것도 아님이 밝혀지고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이 폭로되었다.
열째 재앙에서 맏 아들을 잃은 바로는 아멘호텝 Ⅱ세이다. 그를 뒤이어 바로가 된 투트모세 Ⅳ세는,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였다. 애굽의 기자 지방에 있는 스핑크스 가까이에 세워진 커다란 붉은 색 화강암 비명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스핑크스 모양으로 나타난 신에게서 꿈으로 통고 받았다. 참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신의 꿈 이야기이다. 열째 재앙에서 황태자인 형이 죽자, 뜻밖에 왕이 되었음을 무심결에 시인한 것이다(상동, 69, 70).
8. 출애굽 연대 성경(왕상 6:1)에는 솔로몬 왕의 재위 4년 2월, 즉 출애굽한 지 480년이 되는 해에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솔로몬의 재위 4년은 기원전 966년경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출애굽 연대는 1445년경이 된다(본교회 성경주석 8권, 210, 349).
사사기(삿 11:26)에는 기원전 1,100년 경의 사사인 입다 당시로부터 약 3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청착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광야 생활 40년을 가산하면 1440년 경인 15세기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연대에 의하면, 모세는 투트모세 Ⅰ세(Thutmose Ⅰ; c. 1542-c.1524 BC)의 통치 기간인 기원전 1525년 경에 태어났다. 그는 합법적인 후사가 없자, 정비(正妃)의 딸 핫셉섯(Hatshepsut)을 이복 형제에게 출가시켜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투트모세 Ⅱ세(Thutmose Ⅱ; c.1524-c.1504 BC)이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없이 죽자, 핫셉섯이 왕위에 올라 20여년을 다스렸다. 이 핫셉섯이 모세를 양자로 삼아 후계를 삼으려 했던 바로 왕의 공주였다(출 2:1-10; 행 7:19-21; 히 11:24). 그러나 기원전 1486년 경 핫셉섯은 제거되고, 계모이며 장모인 핫셉섯의 섭정을 받던 투트모세 Ⅱ세의 서자인 투트모세 Ⅲ세(Thutmose Ⅲ; c.1486-c.1450 BC)가 왕위에 올라, 36년간 강력한 왕으로 군림한다.
모세가 두려워하여 미디안으로 피신했던 바로가 투트모세 Ⅲ세였을 것이다. 모세의 보호자였던 핫셉섯이 제거되자, 모세도 불안을 느껴 기원전 1485년 경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것이다.
투트모세 Ⅲ세는 출애굽이 있기 5년 전쯤인 기원전 1450년에 죽었다. 그를 이어 젊고 용맹한 아들 아멘호텝 Ⅱ세(Amenhotep Ⅱ세; c.1450-c.1427 BC)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모세와 출애굽 당시에 대결한 바로로 추정된다. 그리고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있을 때 죽은 바로(출 2:23)는 그의 아버지 투트모세 Ⅲ세가 된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의하면, 출애굽 당시에 바로가 그의 군대와 함께 홍해에서 죽은 것처럼(단정적인 것은 아님) 지적하고 있다(본교회 성경주석 8권, 350). 그런대 그의 미이라가 여러 애굽의 왕들처럼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그의 재위 기간이 기원전 1427년까지 연장되고 있어, 연대의 문제를 안고 있다. 참으로 그가 홍해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그의 말들과 군사들만 죽고 그는 뒤에서 독전했는지 모를 일이다(상동, 72-74). |
출처:건강복음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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