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고고학이란 무엇인가? | |
박 준 서 (연세대학교 교수/구약학) |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구약학자요,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ole Biblique)에서 오랫동안 소장을 역임한 R. 드보는 성서 고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 고고학이 제공하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는 성서 연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 말은 성서 고고학이 오늘날 성서 연구에 미치는 영향과 공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9세기 말 성서 고고학이 과학적 학문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 분야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결과, 성서를 새로운 빛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 성서 고고학의 정의
성서 고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현대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성서 고고학이란 고고학적 연구로 조명된 성서학이다." 이 말은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탐구하는 성서 연구의 한 분야라는 말이다. 성서 고고학의 이러한 학문적 성격은 지금까지의 성서 고고학자들이 거의가 다 성서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올브라이트의 제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성서 고고학 교수였던 라이트(G.E. Wright)도 같은 입장에서 성서 고고학을 정의하였다: "성서 고고학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고고학적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성서 고고학은 성서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일반 고고학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의 목적은 성서의 기록들을 단순히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성서의 많은 기록들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외에도 <성서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레???맥락 안에서 좀 더 정확하게 이 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2. 성서 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역사는 진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폭 넓은 고대 근동 세계의 역사,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어왔다. 따라서 고대 근동 세계 전체가 성서 고고학의 연구 대상이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 연구의 초점이 되는 지역은 성지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팔레스티나)은 성서에 기록된 역사가 전개된 무대요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고고학의 지리적 중심은 "성지 고고학"(Archaeology of the Holy Land 혹은 Palestinian Archaeology)이다.
다음으로 성서 고고학의 역사를 간략하게 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고, 성서 이해에 도움을 준 성서 고고학의 연구 결과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성서 고고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본지의 별도 기사에서 김성 교수가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참고 바란다 - 편집자 주).
3. 성서 고고학과 성서 연구
오늘날 성서 고고학의 연구 결과는 성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증" 해주는 경우도 있고, "보충" 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 중에서 구약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니 하산의 벽화
구약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모습은 어떠했 을까? 오늘날 우리들은 그들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집트 카이로의 남방 250km 지점에 있는 바니 하산에서 발견된 벽화다. 이 벽화의 연대는 B.C. 1900년경 으로, 이스라엘 조상들의 연대와 매우 비슷하다. 내용은, 37명의 가나안 사람들이 고대 애굽 여자 들에게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는 장면이다. 선두에는 검은 피부의 애굽인이 이들을 인도하고 있는데, 찬란한 채색옷을 입고 있으며(창 37:3의 요셉이 입었던 '채색옷'을 연상시킨다 ), 나귀는 물건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고학적으로 B.C. 1900년경에는 아직 말과 낙타의 사용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남자는 모두 수염을 기르고 활, 창, 도끼와 같은 무기를 들고 신발은 샌들을 신고 있다. 여자들은 모두 독특한 머리형을 하고 있으며, 남자와 다른 신발을 신고 있다. 또한 물담는 가죽 부대, 악기, 가축(염소와 산양) 등도 보인다.
(2) 마르닙타 왕의 전승기념비
1896년 애굽의 데베(Thebes)에서 마르닙타 왕(Marniptah 혹은 Merneptah, B.C. 1224-11)의 전승기념비가 발견되었다. 이 전승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스라엘은 황무하게 되었다. 그의 후손은 멸절되었다." 구약 이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이다.
(3) 이스라엘의 수구(水口)
예루살렘은 천연의 요새로 난공불락의 도성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서 정착생 활을 한 이후에도 200년 이상 예루살렘만은 정복하지 못한 채, 가나안 원주민 여부스족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자 곧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 구약 의 기록을 보면 다윗왕은 부하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수구"를 타고 올라가서 그 성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였다 (삼하 5:8). 예루살렘의 수구 발견은 지금부터 약 100년전에 영국인 C. 워런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국의 <팔레스티나 발굴 기금>은 1867년 영국군 장교 워런을 성지에 파견하였다. 워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탐색작업을 하던 중 놀랄만한 발견을 하였다. 히스기야 터널을 탐사하던 중에 암벽을 뚫어서 만든 지름 2m 정도의 원통형으로 된 수직 터널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하로 뚫은 이 수직 터널을 통해서 기혼샘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린 장치였다. 기혼샘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水源)이었다. 그러나 기혼샘이 성밖에 있었기 때문에 적에게 성이 포위당했을 경우에는 물을 길으러 밖으로 나올 수 없었으므로 주민들은 성안에서 지하 터널을 파서 성밖으로 나오지 않고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수구인데, 다윗왕의 부하들은 이 수구를 타고 올라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이다. 이 수구를 발견한 사람을 기념해서 "워런 수구" (Warren Shaft)라고 부른다. 이런 방법은 하솔, 게젤, 므깃도, 기브온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4) 히스기야 터널
B.C. 701년경 유다왕 히스기야는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려고 할 때, 급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기혼샘으로부터 지하 터널을 파서 기혼샘의 물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끌어들였다(왕하 20:20). 이것을 "히스기야 터널" 혹은 "실로암 터널"이라고 부른다. 이 터널은 총 길이 535m로서 완전한 암석지대를 파서 만든 터널이다. 기혼샘의 위치는 해발 636m이며, 이 물이 예루살렘성 안으로 흘러들어 생겨난 실로암못의 높이는 해발 634m이다. 즉 2m의 고저차로 535m의 지하 터널을 통해서 기혼샘에서 발원한 물이 완만하게 흐르도록 만든 것이다. 이 터널을 만든 과정은 1880년 실로암못 근처의 돌벽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서 밝혀졌는데, <실로암 기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굴이 뚫린 과정은 아래와 같다. 양편에서 중심부로 향해 파 나가다가 중간지점에 거의 도달해서 3규빗쯤 남았을 때, 우리들은 반대쪽에서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굴이 마주 만났을 때, 사람들은 돌을 깎아나갔고, 돌 깎는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혔다. 그리고 샘(기혼샘)으로부터 물은 저수지(실로암)를 향해서 1200 규빗 거리를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히스기야 터널에 관해서는 아직도 남아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이 터널이 직선이 아 니고, 대략 S자형의 곡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간 지점에서 만났을 때, 양편의 고저차는 불과 30cm 미만의 오차가 있었을 뿐이었다. 왜 직선으로 파지 않고 복잡하게 곡선으로 만들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일설에 의하면 근처에 있던 유대왕들의 무덤을 피하여 파기 위해서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5) 히스기야 성벽
히스기야왕은 터널을 파서 예루살렘의 급수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성벽을 새로 쌓아 방위를 견고히 하기도 하였다. 히스기야왕이 쌓은 이 성벽은 1970년대 이스라엘 고고학자 N.아바가드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목이 7m나 되는 철통 같은 성벽이었는데, 흥미있는 사실은 기존의 가옥을 허물고, 민가 지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굴로 히스기야왕이 '가옥을 헐어 성벽을 세웠다'고 기록한 이사야 22장의 말씀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6) 기브온의 못
예루살렘에서 약 3km 북서쪽에 있는 기브온에 큰 못이 있었다. 이 못가에서 다윗의 장군 요압과 이스보셋(사울왕의 아들)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접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 못은 1956-57년 J.프리처드를 단장으로 한 미국팀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지름 11m 깊이 25m의 원형으로 파졌다. 그런데 발굴 결과,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지하 부분에 있는 샘물 부분에 도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통로임이 판명되었다. 층계를 내려가서 밑바닥 부분에 이르면, 더 밑으로 내려가는 작은 입구가 있고, 입구를 통과하여 내려가면 암반을 파서 만든 경사진 터널을 만난다. 79개의 계단을 밟고 이 지하터널을 내려가면, 지하 25m 위치에 맑은 샘물이 괸 지점에 도달한다. 이 못도 "예루살렘의 수구"와 마찬가지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기브온 성 안에서 지하통로를 통해서 물을 긷기 위해 만든 것이다.
(7) 모압 기념비
1868년 모압 지방(현재의 요르단)의 디본에서 검은돌 위에 34줄로 기록된 기념비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기념비는 모압 왕 메사(B.C. 830년경)가 자기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내용 중에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이 모압 지방을 정복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구약에 기록된 오므리 왕의 업적에는 그러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왕상16:23-27) 모압기념비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은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정치적 업적을 많이 남긴 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8) 앗수르 왕 살만에셀 업적비
1846년 영국인 H. 레이야드가 앗수르 제국의 중심지의 하나였던 갈라(Calah)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념비를 발굴하였다. 그 내용은 살만에셀 3세(B.C. 859-825)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독특한 형태로 된 검은 돌에 기록되어 있다. 이 업적비의 특이한 형태 때문에 (살만에셀의 오벨리스크)라고 부 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예후 왕(B.C. 842-815)이 앗수르 제국을 방문하여, 살만에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조공을 바치는 장면이 새겨져있는 것이다. 이 예후 왕의 모습은 이스라엘 왕 중에 그 모습이 남아 있는 유 일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 2계명 말씀을 근거해서 왕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음). 그런데 이 살만에셀 왕의 업적비에는 예후 왕이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쓰여있다. 오므리 왕조를 혁명으로 거꾸러뜨리고 왕이 된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해서 오므리 왕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 산헤립 왕 업적비
B.C. 701년 유다의 히스기야왕 때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왕은 유다왕국을 참략하여 유다의 모든 성 읍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앗수르 군대에게 공격을 당한 예루살렘의 운명은 백척간두의 상황이었다(왕하 18-19장). 이 때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였다(사 36-37장). 그러나 히스기야왕은 금 30 달란트(1달란트는 약 34kg), 은 300달란트를 앗수르 왕에게 조공으로 바치고 굴복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1850년대 초 H.레이야드가 니느웨성의 산헤립왕 궁전에서 발굴한 기념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히스기야에 대해서 말하면, 그 유다인은 내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산헤립 왕)는 유다의 46개의 견고한 성읍들과 작은 마을들을 함락시켰다. 나는 20만 150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고, 말 나귀 낙타 소 양을 빼앗았다. 그는(히스기야) 그의 왕궁이 있는 성, 예루살렘에 새장의 새처럼 갇혀 있었다. 나는 포위하여 아무도 그 성을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히스기야는 나의 위엄에 기가 질 렸다. 그가 예루살렘을 수비하려고 모은 장병들은 우리와 감히 싸우지도 못하였다. 그는 내게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붉은 빛이 나는 석재, 상아로 장식한 침상과 의자, 또 그의 딸들과 궁전의 여자들 및 노래하는 남녀를 대신을 시켜 조공품으로 니느웨로 보내고 내게 굴복하였다."
(10) 라기스의 오스크라카
오스트라카 (단수는 오스트라콘)란 깨진 토기 조각에 글씨를 써 기록한 것을 말한다. 라기스는 유다 왕국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그런데, 1935년 라기스의 발굴에서 불탄 성문 옆 잿더미 부분에서 21개의 오스트라카를 발굴하였다. 그 연대는 588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라기스를 불질러 파괴하기 직전이었다. 그 내용은 라기스 근처의 경비초소의 책임을 맡은 호사야가 라기스의 주둔군 사령관 야오스에게 보낸 편지들로 거기에 보면, 당시 유다 왕국의 군사령관 고니야가 애굽에 내려갔다는 구절이 있다. 바벨론 군대가 침공한 위급한 상황에서 유다의 군사령관이 애굽을 방문했다는 것은 애굽에 군사원조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겔 17:15비교). 또 다른 오스트라콘에는 "우리들은 라기스의 신호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세가의 신호는 이제 끊어졌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은 진군하는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 아래 유다의 도시들이 하나씩 하나씩 함락당하는 모양을 잘 나타내고 있다.
(11) 바벨론 제국 역대기
열왕기하 24장의 기록을 보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B.C. 597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여호야긴왕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가고, 그 대신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발굴된 <바벨론제국 역대기>에 보면 <열왕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B.C. 605년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왕으로 등극하고, B.C. 597년 유다 왕국을 정복하여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역사적 기록의 정확성이 고대 근동의 다른 기 록을 통하여 확인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2) 여호야긴 왕의 포로생활
열왕기의 기록은 B.C. 597년 바벨론에 잡혀간 여호야긴 왕의 포로생활의 기록으로 끝을 맺고 있다. "저의(여호야긴 왕) 쓸 것은 날마다 왕(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定數)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5:30). 이 내용은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 왕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고학자 R. 콜데위는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바벨론을 발굴하였고, 그는 이 발굴작업에서 바벨론 제국 왕실문서 보관소를 찾아냈다. 거기에서 많은 토판문서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포로로 잡아온 왕족과 귀족들에게 기름과 보리를 나누어 준 기록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식량 배급 명단에는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에게 물자를 배급해 준 기록도 들어 있다. 이러한 바벨론의 기록은 포로생활을 한 여호야긴왕의 상황을 실감나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4. 성서 고고학의 현황과 전망
성서 고고학은 약 100년 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동안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성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에는 20군데 이상의 장 소에서 발굴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 발굴작업에는 전 세계로부터 모여든 "자원 발굴 자"들이 참여하여 고고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땅에는 적어도 6000개 이상의 장소에서 고고학적 예비조사가 이루어져서 발굴 가치가 있음이 밝혀졌는데, 그 중에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곳은 약 200개소(약3%)정도이다. 200개소의 발굴지 중에서도 대규모의 발굴작업이 진행된 곳은 불과 30군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0.5%). 이러한 상황에 대해 P. 랩은 "성지고고학은 이제 유아기 단계는 넘어섰으나 아직 유년기는 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고고학 연구가 이루어진 성지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에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 대단히 많이 남아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성서 고고학이 연구해야 할 분야가 무궁무진하게 남아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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