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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가 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영국의 노예제 폐지 과정 중 노예 소유주들의 보상을 영국납세자들이 지불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운동을 하고 있던 이 시기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들이 한쪽에서 동시에 성령 대부흥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역사가 플럼은 휫필드와 웨슬리의 부흥이 일반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이 없었다면, 영국이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을 피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는 대부흥을 경험한 국민들이 노예 소유주들의 보상을 대신 해준 반면에, 미국에서는 그 대가로 남북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 뚜렷한 대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만일 성토모[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가 주장하는 지대 조세제(Land Value Taxation)의 실현이 가시화 된다고 할 때, 보상에 대한 문제가 반드시 제기될 텐데, 이때 과거 영국과 같은 대부흥이 없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그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전쟁이나 반동적인 혁명과 같은 비극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6.25 전쟁 때 이북의 그리스도인 지주들이 끝까지 그 많은 땅을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살육과 내어쫓김을 당한 것처럼.. 그 평화의 역할을 할수 있는 것은 교회 밖에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
존 웨슬리(1703-1791)의 친구인 존 하워드(1726-1790)는 교도소 개혁을 위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퀘이커 교도인 엘리자베스 프라이(1780-1845)는 뉴게이트에 있는 죄수들을 위하여 깊고 실제적인 동정심을 베풀었다. 잘 알려진 샤프츠베리 경(1801-1885)은 광산과 공장에서 일어나는 여성과 아동에 대한 착취를 방지하려고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존 웨슬리는 노예제도를 아주 강력하게 비판했고, 자신이 미국에서 발견했던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아주 솔직한 말로서 자신의 심경을 담담히 말했다. 존 뉴턴(1725-1807)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더 이상 노예 무역상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역에 반대하게 되었다. 노예 무역에 반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외쳤던 토마스 클락슨(1760-1846)은 영국 국교회 목사의 아들이었고, 퀘이커교의 찬미자였고 역사가였다.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클락슨의 선구적 사업을 활용할 수 있었다. 윌버포스는 오랫동안 노예 무역에 반대하여 하나님 아래에서 흑인의 인간성이 기본적으로 인정되도록 의회에서 투쟁했다. 그리스도인인 윌버포스는-자신이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영국에서 노예 무역을 반대한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결국 노예 무역은 1807년 영국에서 금지되었고, 윌버포스가 죽어가고 있었을 때, 노예 제도 자체가 그곳에서 소멸되었다. 1833년에 통과되고 1834년에 효력을 발생했던 법안으로 노예제도는 영국 식민지 전역에서 금지되었다. 영국 납세자들은 노예 소유자들의 보상을 위해 2천만 파운드를 지불했다.
미국에서도 윌버포스처럼 일관성 있는 특출한 그리스도인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도 같은 결과를 아니 더 훌륭한 결과를 훨씬 이전에 낳을 수 있는 인물이 있었으면 하고 바랄 수도 있다. 혹은 미국에 노예 제도가 전혀 생기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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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한 조지 휫필드(1714-1770)와 존 웨슬리의 부흥과 그 부흥으로 생겨나서 정치적, 교육적, 경제적 개혁을 많이 강조했던 초기 감리교파 등의 영향을 언급해야 하겠다. 사실상 케임브리지의 역사가 플럼(1911-)은 휫필드와 웨슬리 부흥이 일반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이 없었다면 영국이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을 피했을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 출처: 프란시스 쉐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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