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처음으로 순례한 곳은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라오디게아는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2세에 의해서 건설된 상업 도시로, 그의 부인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이 붙여졌다. 이 지역은 9km가 떨어진 히에라폴리스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토관을 통해 흘러와서 라오디게아에 이르면 미지근한 물이 되고, 골로새에 가면 차가운 물이 된다. 골로새에는 차가운 물이, 히에라폴리스에는 뜨거운 온천수가 있는데, 라오디게아에는 아주 미지근한 물이 흐르는 것이다. 이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교회’라는 요한계시록의 말씀(계 3:15-16)을 떠올리게 하였다.
라오디게아는 한 때에 ‘아시아의 대도시’라고 불려 졌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한쪽에는 부러진 십자가만이 교회의 위치를 쓸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성지 순례단은 이곳에서 우리의 신앙을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의 모습이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모습이 아니기를 기대하며...
두 번째로 순례하게 된 빌라델비아 교회는 라오디게아로부터 1시간 30분을 달려서 도착하였다. 빌라델비아는 페르가뭄 왕국의 아타로스 2세 필라델포스에 의해서 주전 159년에서 138년에 세워졌고, 그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비아가 되었다. 현재의 지명은 알라쉐히르(Alasehir)이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마을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는 비잔틴 시대에 사도 요한의 이름을 따라서 지어진 직사각형 모양의 교회 건물이 있는데, 여섯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 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고, 한 개의 기둥은 반쯤 땅 속에 묻혀 있다. 그리고 가장 서쪽에 있는 기둥들은 오늘날의 건물들의 기초로 사용되어 원형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그 기둥의 크기는 실로 거대하였다. 기둥의 한 면 길이가 약 5m는 되어 보였다. 교회의 다른 모습은 사라지고 기둥만이 남아 있는 교회,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와 더불어서 일곱 교회 중에 칭찬 받은 교회였다.
버스를 타고 사데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산 위에 있는 터키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가이드는 깃발이 세워진 그곳이 사데가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알려주는 표시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 순례단은 거대한 돌기둥들이 줄 지어 세워져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보았다. 폐허가 되어 기둥만 남아 있었지만, 그 기둥만 보아도 신전의 크기가 거대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쪽 끝에 붙어 있는 교회, 둥근 담과 아치형 창문이 있는 아담한 교회라고 위안을 삼으려 했지만, 신전의 거대함에 주눅이 드는 것만 같았다. 한때는 신전 옆이라는 악조건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 순례단은 교회의 터 위에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데의 북서쪽으로 약 65Km 정도 떨어져 있고, 버가모와 사데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악크히사르(Akhisar)라는 조그만 도시 안에 있었다. 역시 폐허로 변해 있는 교회였지만, 가이드는 자주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가 두아디라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또한 주후 150년경 이곳에서는 몬타니즘이라는 기독교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3세기 중반에는 몇몇의 두아디라 교회 신자들이 버가모에 끌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버가모의 유적지는 언덕 위에 있었다. 아니 언덕이라기보다는 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에 내려서도 버가모의 유적지는 20m정도의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언덕 위에는 견고하게 보이는 성벽이 보였다. 그리고 트라얀 황제의 신전은 그야말로 거대한 규모였다. 지금은 파괴되어 형태만을 알 수 있는 정도였지만, 곳곳에 세워져 있는 기둥과 장식들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6,000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버가모의 극장은 산의 비탈을 이용하여 만들어져 있었고, 역시 그 크기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래서인지 순례팀은 아무도 밑에 내려가지 않으려 했다. 이 극장의 구조가 우수하여 마이크 시설이 없어도 소리가 위에까지 잘 들린다고 하는데, 실험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모아진 의견이 누군가 대표도 다녀오는 것이었고, 대표는 성지연구소의 전임연구원인 본인을 지목하였다. 할 수 없이 무대에까지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극장의 위에서 기다리는 순례팀들을 올려다보니, 엄지손가락 크기로 줄어 있었다. 본인과 순례팀들간에 의사소통은 역시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물론 날씨가 건조하기 때문에 소리 전달이 덜 방해된다고는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치밀함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몇 몇의 사람들이 밑으로 더 내려왔는데, 난데없이 순례팀들이 장소를 이동하였다. 급하게 뛰어올라가야 하는데, 극장 밑에는 디오니시우스의 신전이 있어 사진도 찍어야 했다. 사진을 찍고 나니 순례팀이 보이지 않았다. 남겨진 사람들은 국제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어올라가야만 했다.
버가모의 유적지를 돌아본 후에는 차를 타고 언덕을 내려와, 버가모 교회로 이동하였다. 역시 버가모의 규모만큼이나, 버가모 교회의 크기도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말 그대로 유적지라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버가모에서 또 하나 유명한 곳은 아스클레피온이라는 병원이지만, 이곳을 돌아보는 것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가이드의 설명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느 듯 해는 4일째의 일정을 끝내라는 듯이 지고 있었다. 다섯 개의 교회를 돌아보며, 모든 교회가 폐허로만 남아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저녁이었다.
다섯째 날의 일정은 서머나를 순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서머나는 현재의 이즈밀로, 인구가 300만이나 되는 터키 제 3의 도시이다. 이곳에서 순례단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순교한 교회를 돌아보았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고, 20대의 청년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으며, 86세에 순교했다.
서머나 교회(폴리갑 순교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교회였다. 지금은 가톨릭에서 관할하고 있으며, 순례단의 방문은 예약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 교회의 내부는 동방정교의 건축양식에 따라 매우 정교하고 화려했다. 그리고 교회의 천정에는 폴리갑 감독의 순교 과정을 표현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폴리갑은 예수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는 박해자들의 회유에도, “예수님을 믿은 86년 동안 주님은 한번도 나에게 잘못하신 일이 없는데, 어찌 주님을 모른다고 하리오”라고 대답하고는 화형에 처해져 순교하였다. 성지 순례단은 순교자의 정신을 생각하며 교회의 의자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였고, 적은 금액의 헌금도 하였다. 교회를 다 돌아보고 문을 나서는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폴리갑의 말이 귓전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에베소 지역은 밀레도 방문 이후에 이어졌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가 되어 있었고, 에베소는 약 2시간을 그늘이 없는 햇볕 속에서 순례해야 하므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안내 되었다. 순례단은 에베소가 가까워질수록 모자와 양산, 그리고 물 등을 분주히 준비하였다. 에베소 유적지는 입구를 지나자마자 그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3미터나 되어 보이는 상가의 돌기둥들이 도로 옆으로 줄지어 세워져 있고, 바닥에도 평평한 돌들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모자이크 무늬가 새겨진 귀족만이 다니던 도로도 있었다. 도로 곳곳에는 신전과 시청, 종교청 건물, 고대의 화장실, 목욕탕 등이 있었고, 사진으로만 보던 셀수스 도서관과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원형 극장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어서 순례단은 성모마리아교회에 도착하였다. 이 교회는 원래 에베소교회였으나, 주후 431년 에베소 회의 때에 성모 마리아의 신성이 재확인 되면서 성모 마리아 교회로 다시 세워졌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에베소 근처에 있는 요한기념교회였다. 모든 기둥이 4개나 3개로 되어 있는데, 가이드는 이를 4복음서와 3위1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순례단은 사도 요한의 무덤 앞에 섰다. 아직도 요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이곳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결단하는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