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여름. 서울 생활도 점차 안정돼 갔다. 그러나 과로 탓도 있었겠지만 그동안 억눌러왔던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변비와 설사가 이어졌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종합검진을 받아보니 의사가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특별한 약이 없다고 했다. 기도와 금식을 해도 괴로움과 아픔만 더할 뿐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다. ‘지금까지 모든 역경을 신앙으로 이겨내며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왜 내가 이같은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거지?’ 이런 증세는 약 2년간 계속됐는데 당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재혼에 대한 권유였다.
“선생님, 이제 38선은 완전히 굳어졌습니다. 10년 정도 이렇게 사셨으면 되지 않았나요? 남의 자식들은 데려와 아무리 잘 키워줘도 때가 되면 모두 떠납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한 시절이지 늙고 병들면 그때에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재혼에 대한 권유를 적당한 이유로 거절하다가 참다 못해 사람들에게 내 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내가 재혼하지 않는 것은 내가 신앙인으로 진실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결혼할 때 평생을 그 사람과 살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더구나 나 혼자 월남했으니 어린애들과 고생이 무척 심할 텐데 내가 어떻게 재혼하겠습니까? 난 하나님과의 약속을 배신할 수 없어요.”
진실한 내 심정을 안 지인들은 더 이상 재혼을 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혼 문제와 더불어 나를 견딜 수 없도록 만든 또 하나는 나 자신의 문제였다. ‘지금 난 무엇인가?’란 질문과 회한이 자꾸만 솟구쳐올라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세웠던 30년 계획의 3분의 2가 지났는데 그동안 내가 이룬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제자들과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들이 언제까지 곁에 머물러줄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이런 고민으로 몸과 정신은 더욱 허약해져 밤마다 가족들의 병든 모습, 혹은 멀리 쫓겨가는 모습,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하는 꿈을 꾸며 고통 속에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촌로터리에서 버스를 타고 서대문사거리에서 내린 후 걸어가는데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갔다. 차 안에서 행복해보이는 가족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성경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가슴을 크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 길로 북아현동 뒷산에 올라가 몇 시간을 무릎 꿇고 기도했다.
“주님 저는 지금까지 부자의 삶을 동경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쌓고 추구해온 삶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나사로의 길을 따르며 신앙을 지키는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란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주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오로지 그림을 통해 귀한 것을 남기는 작업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 풍속화를 그리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그것을 개발하고 창작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찬송가 383장을 불렀다. 비록 기운이 없어 목소리는 우렁차지 않았지만 찬송하던 그 순간의 감격과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눈물로 감사기도를 드리고 쉬고 또 쉬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생각이 달라진 것과 같이 그날 밤부터 내 몸도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