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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목사] (48) 무라·바다라·니도… 바울의 로마행

영국신사77 2007. 2. 25. 19:12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48) 무라·바다라·니도… 바울의 로마행
[국민일보 2006-01-30 16:28]

전날 버가를 답사한 후 앗달리아에서 하루를 묵은 후 해안가에 있는 바울의 전도 여행지인 무라(Myra)와 바다라(Patara)를 향해 차를 몰았다.

무라는 앗달리아에서 120㎞ 정도 떨어져 있지만 해안가를 따라 뻗어있는 길은 굴곡이 심한데다 초행길이라 빨리 달릴 수 없었다. 더구나 북쪽으로 펼쳐진 고산지대와 어우러진 바닷가의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결국 3시간이 걸려서 무라에 도착했다.

무라는 소아시아 남루기아도에 있는 지중해의 항구도시이다. 루기아 도시연맹의 6대 도시 중 하나로 본성은 바다로부터 4㎞ 가량 떨어진 안드라쿠스 강변에 위치했었다. 지명의 뜻은 몰약,불사르다이다.

무라에 들어서자마자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들이 이곳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고대 중동지역에서는 바위로 무덤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건조한 지역이므로 매장을 하지 않아도 악취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라에는 마치 조각품처럼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무덤 옆에는 고대 로마 때의 야외극장이 바다를 향해 건설되어 있었다. 대부분 로마의 야외극장이 그랬듯 무덤 옆에 세워진 이곳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거나 문화시민의 긍지를 높였을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산타클로스로 알려진 니콜라우스가 바다라에서 출생하고 이곳 무라에서 감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곳에서 뱃사람들이 참배를 드리던 한 이교의 신을 대신하여 뱃사람들의 수호 성자가 되었다. 그래서 무라에는 성 니콜라우스 교회와 니콜라우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루기아주(州)의 수도였던 무라가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바울이 루기아도에 속한 무라성을 거쳐 로마로 갔다는 사실이다(행 27:5).

무라를 떠나 다시 해안가를 따라 계속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무라에서 바다라까지는 앗달리아에서 무라로 오는 길보다 더욱 험하여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바다에 빠져버릴 위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경치가 매우 빼어나 곳곳에 가족단위로 즐길 수 있는 아담한 해수욕장이 많았다. 60㎞ 정도를 달리자 바다라라는 안내 표지판이 나오고 바닷가 쪽으로 8㎞를 들어가자 예상밖에 큰 유적이 있었다.

로도 섬 맞은편에 있는 바다라는 로도에서 85㎞ 떨어진 곳에 있다. 바울 당시에는 꽤 번창한 항구로 해상무역이 활발했으며 비옥한 크산투스 강 유역에 농업도 잘되어 루기아 지방에서 가장 번성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심이 얕아서 선박 출입이 매우 힘들다. 지금은 컬레미슈라고 부른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배를 타고 베니게로 건너갔다(행 21:1∼2). 당시 바다라 항구는 오늘날 유적지 입구 직전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상당 부분이 늪지대로 변했다. 이곳에는 아폴로의 유명한 신탁소가 있었으며 당시의 극장 목욕탕 성벽 등의 유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옛날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니도(Cnidus)는 지중해의 서쪽 끝에 있는 니도의 곶 내지는 항구도시이다. 길이는 동서로 약 64㎞이고 동쪽의 기복이 심한 산들과 서쪽 연안 평원의 비옥한 지역은 지협에 의해 구분됐다. 이곳 역시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지나간 곳이다(행 27:7). 바다라에서 이곳까지는 165㎞를 달린 후 다시 좁은 도로로 112㎞나 더 가야 하는 오지중의 오지이다. 나는 섬을 답사할 때 이곳을 지나갔는데 이곳은 19세기말 발굴된 신전 연회장 황금주택 등의 유적이 있다. 항구 옆에 있는 야외극장을 비롯하여 신전터와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유적이 즐비해 언젠가는 꼭 육지를 통해 답사해보고 싶은 곳이다.

오늘은 무라와 바다라,니도를 살펴보았다. 찾아가기 힘든 곳이지만 바울의 고난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뜻깊은 장소이기 때문에 앞으로 많은 독자들이 찾아가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