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사(Gerasa)는 성경에서 성읍으로 나오지 않고 ‘거라사인의 땅’ 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언급된다(눅8:37). 따라서 거라사는 하나의 넓은 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거라사 지역내에는 예수께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친 거라사(오늘날 쿠르시)가 골란고원 바로 밑의 갈릴리 바닷가에 있고, 또다른 거라사는 요르단의 얍복강 북부에 있는 오늘날 제라쉬다. 이 제라쉬는 아랍 시대 이후에 붙여진 명칭이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제라쉬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암만 북쪽 약 41.6㎞에 떨어진 이곳은 대규모 유적지이면서 대로변에 있기 때문에 대중 교통을 이용해도 편리하다.
해발 600m에 위치해 있는 고지대이지만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암만에서 북쪽으로 40여분을 달리자 제라쉬에 도착하게 되었다. 요르단에서 가장 큰 유적지 답게 입구에서부터 로마 황제 하드리안 개선문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성벽을 보니 제라쉬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가를 실감나게 했다.
헬라어로 거라사라 불리는 고대 제라시는 길르앗 지방 언덕의 헬라 도시였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BC332년경 세워진 이 도시는 이후 로마에 점령당하여 로마의 속주 중 데카폴리스(고대의 도시 연맹체)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0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간직한 도시인 제라쉬는 그리스 시대에 큰 도시로 성장했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사용했던 왕의 대로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하스모니안 왕가에 의해 통치(BC103∼BC76)를 받기도 했으나 고대의 거라사는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후 부유한 도시의 하나로 발전했다. 129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거라사의 번영은 4∼7세기에 걸친 비잔틴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기독교를 공인했던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고, 약 300년 동안 거라사에도 15개가 넘는 대규모의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628년 페르시아의 침공과 635년 아랍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고 말았다. 8세기 중반에 있었던 대규모의 지진으로 인하여 웅대한 석조 건물들이 대부분 무너져 거라사의 영광은 모래와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제라시에는 20만평이 넘는 넓은 언덕에 웅장한 석조건물 유적이 펼쳐져 있다. 성벽에는 모두 101개의 탑이 설치되었으며, 3m 두께의 성벽에는 모두 6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을 통해 한참을 걸어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여 들어가자 바로 앞에는 타원형 광장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직도 수많은 돌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신상을 중심으로 이 광장에서부터 도시의 중앙에 설치된 막시무스 도로가 남북으로 800m가 연결되어 있고, 동서로는 2개의 거리가 수직으로 나 있다. 광장에서 막시무스 도로에 들어서 오른쪽 경사길을 올라가면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들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눈물병도 있다.
박물관을 나와 다시 계속해서 도시의 중심도로인 막시무스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자 님파윰(Nymphaeum, 분수탑)이 거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라쉬에 남아있는 이 분수탑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보아도 3층 높이 정도의 2단으로 된 대규모의 크기였다. 과연 로마는 분수의 나라라고 할만했다. 계속해서 막시무스길을 따라 북쪽문으로 향하다보면 왼쪽 멀리 언덕 위에 제우스 신전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오른쪽 언덕 위로 거라사의 수호 여신을 위한 아데미 신전이 반파된 채 남아있다. 이 외에도 막시무스 길 언덕 위에는 술과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위한 신전을 교회로 전환시킨 비잔틴 시대의 대성당이 있고 성당 뒤에는 531년에 세워진 성 요한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와 신전들이 함께 발굴되어 있어 이곳의 3000년된 역사가 얼마나 파란만장했는가를 보게된다. 언덕을 지나 다시 원추형 포럼(광장)으로 내려오다 보면 로마의 점령지에서 빠짐없이 볼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다. 목욕탕, 포장길, 야외극장은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성경에서 가다라로 언급되는 오늘날 요르단의 제라쉬가 지닌 엄청난 규모의 유적 속에서 3천년 역사의 흐름을 보게된다. 특히 수많은 교회와 신전들의 유적 속에서 교회가 그 힘을 잃을 때 그 자리에는 이방 신전이 들어서게 됨을 보면서 교회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깨달은 뜻깊은 하루였다.(photobib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