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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목사 성서도시](22) 하맛과 두라 유로포스

영국신사77 2007. 2. 24. 22:44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22) 하맛과 두라 유로포스
[국민일보 2005-07-25 16:14]

하맛(Hamath·삿 3:3)은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다메섹)에서 북쪽으로 214㎞ 지점에 있는 오론테스 강변의 나흐르 엘 아시(Nahr el Asi)이다. 에블라 문헌에서는 에마투(Ematu)로,시리아-히타이트 설형문자 비문에서는 아마투(Amtu)로 표기되고 셀루시드 왕조 때(BC175∼164년)에는 에피파네이아로 개칭되었는데 현재 지명은 하마(Hama)이다.

시리아의 북부 알렙포에서 출발하여 하맛까지는 146㎞지만 시리아에서 가장 잘 닦여진 4번과 5번 고속도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에블라 유적지에 들르고도 점심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서시대에 하맛은 오랫동안 독립 왕국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지경을 정탐할 때 최북단의 정탐도시였다(민 13:21). 다윗 때에는 하맛 왕국의 수도였으며 다윗은 이 왕국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소바 왕 하닷에셀을 물리칠 때 하맛 왕 도이(Toi)의 도움을 받았으며 다윗은 소바와 동맹을 맺었다(삼하 8:3∼12 참조). 이후 솔로몬은 이곳까지 진출하여 요새를 세웠는데 성전 낙성식 때는 이곳 사람들까지 참여했다(왕상 8:65). 오늘날의 풍요로운 모습을 보면서 솔로몬이 국고성을 세울 만한 입지적 조건을 일찍부터 갖추고 있었음을 짐직할 수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맛에 남아 있는 백성들까지 돌아올 것이라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다(사 11:11).

하맛에 대한 발굴은 1931∼38년에 인골트(H Ingholt)가 이끈 덴마크 발굴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12개의 주거층이 드러났는데 최초의 거주시기는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올라 간다. 가장 오래된 지역은 왼쪽 강둑이며 그 규모는 높이 45m,넓이 12㎢의 성채 마운드이다. 그리고 3세기쯤 골짜기에 세워진 신전터에서 출토된 유물은 현재 대사원에 보존돼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곳에서는 여호와 신앙과 관련된 특별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날 직물산업의 주요 도시인 하맛은 오론테스 강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시내 중심가에 고대 수차가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은 생존에 관계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대에는 물을 도시로 끌어오기 위해 지하터널을 만들기도 하고 로마의 수도교처럼 공중에 수로를 건설하기도 했으며 하맛에서 처럼 수차를 이용하기도 했다.

두라(Dura·단 3:1)의 위치에 대해 제기되는 장소들 가운데는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와 하볼,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바벨론 남쪽 툴룰두라(Tulul Dura)가 있는데 아마 텔 데르(Tell Der)를 말하는 것 같다. 텔 데르는 바벨론 남쪽 9.6㎞,바그다드 남서쪽으로 27㎞ 떨어진 곳이다. 두루라고 불리는 바벨론식 이름의 지역들이 있는데 두라라는 말은 바벨론어로는 벽(wall),아카드어로는 ‘경계선으로 둘러싸인 부분’ ‘벽으로 둘러싸인 곳’을 의미한다.

두라 유로포스는 오늘날 시리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곳을 찾으려면 다메섹에서 북부 시리아 사막을 동서로 횡단한 후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다드몰에서 1박한 나는 사막을 지나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내려갔다. 강가를 끼고 평야가 있었지만 농촌은 무질서해보였다. 두라 유로포스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세웠던 곳으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두라(단 3:1)로 언급된다. 이곳은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막료 셀레오쿠스 1세에 의해 전형적인 그리스 도시로 건설됐다. 그러나 기원전 256년 야밤에 지하터널을 뚫고 급습한 페르시아(성경의 바사)군의 공격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그후 이 도시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두라에 도착하자 평지로 이루어진 메소포타미아의 전형적인 지형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육중한 철문 하나와 동쪽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 있었다. 찾는 이가 없어서 그런지 성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나는 일행과 함께 낮은 곳의 성벽을 넘어들어 갔다. 특별한 유적은 없고 초기 교회와 회당터만이 있었고 나머지는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옛날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이 세워졌던 곳. 그러나 지금은 죽음의 도시로 버려진 채 인적이 끊긴 두라의 유적을 바라보며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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