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스 섬에서 기오(Chios) 섬으로 가는 배편 시간이 맞지 않아 뜻하지 않게 사모스 섬을 일주하며 많은 곳을 답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숙박할 곳을 구하지 못해 배에서 하룻밤을 새워야 하는 대가를 치렀다. 이튿날 사모스의 바티 항구에서 오전 7시에 떠난 배는 5시간의 오랜 항해 끝에 12시가 넘어서야 기오 섬에 도착했다.
기오 섬은 에게해의 동부 중앙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터키 본토에서 직선거리로 8㎞밖에 안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기오 섬은 남북이 51.2㎞,동서가 12.8∼28.8㎞에 이른다. 이 섬의 가장 큰 항구는 섬 이름과 같은 기오 항으로 오늘날의 명칭은 시오(Chio) 또는 히오스(Hios)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고스 섬에서 레스보스(성경의 미둘레네)로 가려던 헤롯왕이 북풍에 의해 기오 섬에 밀려와 그 도시의 기둥들을 재건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바울 시대에 기오 섬은 아시아의 로마 영토에 있는 자유도시 중의 하나였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노정에서 미둘레네로부터 남으로 항해하여 밤새도록 기오 맞은편 본토에 정박하였다가 다음날 보다 더 넓은 바다를 건너 사모에 도착하였다(행 20:14∼15). 그러나 나는 바울과는 반대 방향인 남쪽의 사모스 섬에서 이곳 기오 섬으로 들어왔다.
이 섬의 최초의 주민은 크레타인과 가리아인들이었으나 이오니아인에게 정복되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이곳을 번창시켰다. 현재 이 섬의 가장 큰 기오 항은 비잔틴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답게 아직까지도 당시의 모습들이 남아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1210년 터키 시대에 세워진 성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조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청색의 대리석이 유명한데 지금도 많은 양의 대리석이 채굴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비단은 프랑스 리옹으로 수출될 만큼 질이 좋으며 그 외에 오렌지 아먼드 유향수지 피혁 등도 수출 품목들이다.
나는 기오 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네아모니 수도원으로 향했다. 항구에서 서쪽의 산중턱을 따라 S자로 된 포장길을 따라가자 에게해를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인 이 수도원은 1045년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건물 중심부는 기둥이 없는 15.5m 높이의 둥근 지붕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는 당시의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이콘이 있다. 그러나 1822년 터키인들에 파괴돼 지금은 모자이크 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그리고 기오 섬에는 호메로스를 비롯하여 유명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나는 호메로스가 앉아서 시상을 떠올렸다는 돌의자를 찾았다. 그야말로 시상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에게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게는 유명한 시인의 시상보다는 복음 전도를 위해 바다에서 수없이 고난을 겪었다는 바울 사도의 자서전적 고백이 가슴이 와닿았다.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 11:25∼26)
12시에 기오에 도착하여 바쁘게 5시간을 보낸 후 오후 5시에 미둘레네로 가는 배에 올랐다. 미둘레네는 아테네의 피레우스항에서 뿐만 아니라 북쪽의 데살로니키(성경의 데살로니가) 카발라(성경의 네압볼리) 기오 사모스 등에서도 이곳으로 오는 배들이 있다. 오늘날 레스보스 섬으로 불리는 미둘레네는 터키 소아시아 동남 연안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다른 섬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에 속해 있다. 면적은 1630㎢,인구는 9만여명이며 그리스에서 세번째로 큰 섬이다.
미둘레네는 주전 479년 헬라인에 의해 페르시아(바사)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그후 한때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다가 주전 4세기께 다시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된 미둘레네는 차례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바울은 세번째 전도여행의 귀로 중 아가야에서 수리아로 돌아올 때(행 20:2) 소바더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등 일행과 함께 앗소의 서해안 항구에서부터 이곳으로 배를 타고 갔으며 그 이튿날에는 이곳을 떠나 기오와 사모 섬으로 향했는데 밀레도에 도착하기 전에 기오와 사모에서 각각 하룻밤을 지냈다(행 20:13∼15). 그러다가 주후 151∼152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미둘레네라는 성읍 이름이 섬 전체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중세 때이다.
오늘날 이곳은 잘 닦여진 도로와 좋은 관광구조를 갖고 있어 해마다 여름철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양질의 올리브유와 치즈가 생산되고 있으며 도자기와 나무로 만든 조각품,직물과 같은 민속예술품로 유명한데 여러 표정을 한 얼굴로 나타낸 나무 조각품이 매우 인상 깊었다(photobib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