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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Septimius Severus]황제

영국신사77 2007. 2. 12. 01:05

   

                 세베루스 [Severus, Septimius]

 
 
정식 이름은 Lucius Septimius Severus Pertinax.

146 트리폴리타니아 렙티스마그나(지금의 리비아에 있음)~211. 2 브리튼 에보라쿰(지금의 잉글랜드 요크).

로마 황제(193~211 재위).

세베루스,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된 대리석 흉상
  자신의 왕조를 세웠으며 통치체제를 군사적 군주제로 전환시켰다. 그의 재위기간은 후기 로마 제국의 특징인 절대적 전제정치의 발전경로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로마 식민지 렙티스마그나 출신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173년경 원로원에 들어갔으며 190년에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미치광이 황제 콤모두스가 192년 12월 31일 살해당했을 때, 그는 상(上)판노니아(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있음)의 총독이자 도나우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193년 3월 로마 근위대가 콤모두스의 후계자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를 살해하고 황제 칭호를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팔아넘겼을 때도 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나 4월 13일 자기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페르티낙스의 복수를 선언하고서 로마로 진군했으며 6월 1일 율리아누스는 살해당했다.

  세베루스는 황실근위대를 자신의 도나우 군단에서 뽑은 1만 5,000명의 신예병력으로 교체했다. 그는 브리튼(브리타니아)에 있는 경쟁자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부황제(카이사르)로 지명하여 그를 일시 무마했으며, 194년에는 동방으로 진군하여 또다른 경쟁자인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이어 세베루스는 서쪽에서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한 알비누스를 공격했고, 알비누스는 197년 2월 루그두눔(지금의 프랑스 리옹) 근처에서 대패한 뒤 자살했다. 로마로 돌아온 세베루스는 원로원의 알비누스 지지자 30명가량을 처형했다.

  제위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 재위)의 양자라고 공언하는 한편, 네르바 황제(96~98 재위)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시리아 태생의 부인 율리아 돔나에게서 난 아들 카라칼라를 공동황제 겸 후계자로 지명했다. 197년말 세베루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한 파르티아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동방으로 진군했으며, 2년 후 메소포타미아는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자신의 권력이 합헌적 결정보다는 군사력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세베루스는 군대에 지배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그는 병사들의 봉급을 인상하고 결혼을 허가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을 무시해 그들의 힘을 급속히 약화시켰으며, 관리들도 원로원을 지배하는 귀족계급보다는 기사계급에서 뽑았다.

  세베루스는 사법행정에 특별히 관심을 쏟았다. 로마 외부의 이탈리아 법정은 원로원의 관할에서 제외되어 황실근위대장의 통제를 받았다. 세베루스는 유명한 법률학자 울피아누스와 파피니아누스의 조언을 받아 폭넓은 사법개혁을 실시했다.

  208년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와 둘째아들인 게타를 동반하고 브리튼으로 진군하여 로마 영토가 아닌 지역들을 정벌하고자 했으나 에보라쿰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그의 자손들은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217~218 재위) 때를 제외하고는 235년까지 계속 제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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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6년에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부근의 렙키스마그나에서 출생. 만년에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지방) 원정으로 보냈으며, 211년에 브리타니아의 에보라쿰에서 병사함.

부인: 율리아 돔나(그녀는 이교도의 딸로써 이교도를 전파시키려 함.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통치때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함.)

아들들: 첫째 카라칼라
둘째 아들: 게타



세베루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193~235)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주둔군이 193년에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197). 트리폴리 출신인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무시했다.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으며, 세습에서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 그는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211년 그가 죽자 뒤를 이은 큰아들 카라칼라(211~217 재위)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나 재정이 계속 궁핍해져 악성 인플레를 낳았다. 그는 또한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해 제국의 통합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시민권의 가치를 줄이고 군대 충원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정복을 꿈꾸고 원정을 나갔다가 부하인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올랐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곧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218년 살해당했다. 그뒤 황제가 된 세베루스 가문의 바시아누스는 그가 모시던 신(神)의 이름을 딴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4세였던 그는 로마인에게 낯선 신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지나친 낭비를 했기 때문에 결국 미움을 사 222년에 살해당했고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는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