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설자 : wogns119 (개설일 : 2004.11.28)
1. 이 사람이라면 로마가 멸망하지 않았을수도..:니케르 |
|||||||||||||||||||||||||||||||||||||||||||||||||||||||||||||||||||||||||||||||||||||||||||||||||||||||||||||||||||||||||||||||||||||||||||||||||||||||||||||||||||||||||||||||||||||||||||||||||||||||
1번 주자 : wogns119 ( 2004-11-28 21:35:04 작성 ) | |
제가 예전에 로마 멸마의 이유라는 릴레이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멸망의 이유라고 했던적이 있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가 로마 멸망의 간접적 이유를 만든것은 물론이요, 그 아들은 로마 멸망에 가장 직접적인 이유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적수가 바로 페스켄니우스 니케르 입니다. 내전이 일어 났을 때 니케르는 소극적 대응으로 세베루스에게 지게 됩니다. 니케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니케르는 요즘으로 치면 이것이 인생이다 정도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는 로마의 귀족도 아닌 기사계급정도 였던 것으로 추정 됩니다. 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도 없는거지요. 그는 40세까지 백인대장과 대대장을 전전했습니다. 그는 4개의 백인대장을 모두 경험했을정도로 아주 밑바닥부터 올라왔습니다. 그렇기에 그에대해서는 40세 이전의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야겠습니다. 그가 마흔 살이 쫌 넘었을때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찼아왔습니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을 처리하러온 마르쿠스황제의 눈에 뛴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로마의 지도자 감으로 키워 지지는 않았습니다. 마르쿠스 황제때에는 단지 변방의 군단장급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마르쿠스 황제사후 품페이아누스의 추천으로 속주 총독으로 기용된그는 로마 전역을 돌아다니며 총독직을 수행했습니다. 190년 니케르는 시라아 총독이 됩니다. 로마군의 말단에서 사실상 동방의 사령관이 된것이지요. 그는 시라아 총독이 된후 적국 파르티아에 대하여 비둘기파로 일관하였습니다. 그것은 무너지는 파르티아를 로마의 힘으로써 지탱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세베루스 황제가 파르티아를 공격해 로마멸망의 한 이유를 만든것과 대조적입니다. 또한 그의 인덕과 관대한 정책은 동방의 평온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관대한 정책은 동방에서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또한 그는 청렴결백했기에 군단병들이나 동방의 로마인들에게도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적국인 파르티아에게도 해당되었습니다. 심지어 파르티아 내부에는 친니케르파가 생길 정도로요. 이러한 동방의 안정은 콤모두스 치세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부족한 것 한가지가 있었으니 욕심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제쟁탈전에스스로 끼어든것이아니라 오히려 주위사람들에게 떠밀려서 황제쟁탈전에 뛰어든 것 또한 세베루스와 대조적입니다. 그 욕심이 부족했기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세베루스에게 지고 만다. 니케르가 욕심만 있어서 세베루스대신 니케르가 황제가 되었다면..... 로마가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하게 되는 일없었을 것이다. 겉으로만 보더라도 파르티아가 멸망이 지연되어 사산조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을 동시에 상대해야되는 불행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본국 로마 출신이기에 로마의 공동화를 막는데에도 한몫했을 것이 틀림없고 무엇보다도 지극히 로마인인 그는 세베루스가 초래한 로마의 비로마화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황제가 됬을 경우의 치제는 아마도 제2의 팍스로마나가 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
'偉人*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리노 수의의 검증과 C14 탄소연대 측정법 (0) | 2007.02.12 |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Septimius Severus]황제 (0) | 2007.02.12 |
로마의 역사 연대표 (0) | 2007.02.12 |
팔레스타인 [Palestine]의 역사와 현황 (0) | 2007.02.11 |
[헤라클레이온] 현실로 나타난 전설 바다 속 고대도시 (0) | 2007.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