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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Augustus, Caesar Domitianus]

영국신사77 2007. 1. 22. 23:13

     도미티아누스

     [Domitianus, Titus Flavius,51.10.24~96.9.18]

 

    요약

로마 황제(재위 81~96)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이다. 전제적 경향이 짙어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고 원로원을 제압하였으나 속주통치와 변경방위에서는 치적을 올렸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형 티투스 황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처음부터 전제적 경향이 짙어 86년부터 ‘주님이자 하느님’이라고 부르게 하고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였다. 또한 원로원을 제압하여 비판자를 탄압하였으나, 속주통치() ·변경방위()에서는 치적을 올렸다. 특히 브리튼섬에서는 장군 아그리콜라가 로마화()에 힘썼고, 군대를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까지 진군시키는 한편, 라인 ·도나우강() 지방에서는 국경방위를 위한 방벽을 쌓았다. 다키아인()의 침입 때에는 화평을 맺어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근위장관과 결탁한 황비에게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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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Augustus, Caesar Domitianus]
 
(영)Domitian. 본명은 Titus Flavius Domitianus(~AD 81).

51. 10. 24~96. 9. 18 로마.

로마의 황제(81~96 재위, 15년간).

도미티아누스, 대리석 흉상(부분), 로마에 있는 Palazzo dei Conservatori ...

 

 치세 말년에는 여러 유명한 원로원 의원들이 그의 공포정치로 고통을 받았다.

 

 훗날 로마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소[小]제1시민)라는 지위를 갖고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콘술(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79년 6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이때문에 훗날 형의 죽음(81. 9. 13)에도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소(小) 플리니우스에게서 받은 혹평(수에토니우스는 아주 비판적은 아니었음)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행정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 로마와 속주(屬州)의 행정관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

 

  그의 군사·외교 정책도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집권초 브리튼 섬과 게르만 지방으로의 진격을 시행했고, 국경인 라인-도나우 강변에 리메스(요새 방벽)를 건설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미처 합병시키기도 전에, 도나우 강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2개의 레기온(군단)과 많은 군사를 잃었다. 이것은 타키투스도 지적했듯이, 당시 군지휘관들이 태만하고 성급했기 때문이었지만, 로마에서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84년에 군인 봉급을 1/3 정도 올려주는 등 현명하게 처신해 군대 내에서 인기를 그대로 유지했다.

 

  진짜 문제는 그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의전행사에서의 위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자주 콘술직을 맡았으며(82~88년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콘술이 되었음), 85년에는 종신 켄소르(감찰관)가 되어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원로원에서는 개선식 의상을 입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해서 심한 공격을 받았다.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킨(84) 것은 다른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87년에 일어난 일반적인 소요의 전초였다. 89년 1월 1일에는 상(上)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하(下)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딸)의 음모로 결국 살해당했다(96. 9. 18). 그뒤 곧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했으나,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G.E. Falguhar 글 | 李順珠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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