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이자성

영국신사77 2007. 1. 20. 23:13
                                         이자성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농민반란지도자. 미지(米脂;지금의 陝西省) 출신. 소지주 집안 출신으로, 명나라 왕조의 정치적 부패와 가혹한 세금으로 몰락, 파산하여, 목부(牧夫)를 하다가 역졸을 거쳐 병졸이 되었다.

 

  1628년 산시지방[陝西地方]에 대기근이 들고 굶주린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에 참가하여 고영상(高迎祥) 밑에서 대장이 되어, 츰장(闖將)이 되었다. 8년후인 1636년 고영상이 전사한 뒤에는 수령 중 한사람이 되어, 츰왕(闖王)이라고 칭했다. 다른 수령들이 투항한 뒤에도 그는 활동을 계속했고, 1640년 허난성[河南省]으로 들어간 뒤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강해졌으며, 이암(李巖)·우금성(牛金星) 등 학자를 두었다. 이자성은 그들의 건의에 따라 <귀천을 가리지 않고 농토를 균등하게 분할하며, 3년 동안 징세하지 않겠다>는 민생책을 내놓고, <살인하지 말고 재물을 탐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고 약탈하지 말라>고 명하는 한편, 군율을 엄하게 다스려 민중의 신망을 얻었다.

 

   1643년 샹양[襄陽;枷湖北省]에서 스스로 신순왕(親順王)이라 자칭하고 시안[西安]을 점령했다. 이듬해 국호를 <대순(大順)>, 연호를 <영창(永昌)>이라고 정하고, 관료제도를 설치하여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또 동정군(東征軍)을 일으켜 3월에는 산시성[山西省]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입성했으며, 명나라 숭정제(崇禎帝)를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만주군(滿洲軍)의 원조를 받은 오삼계군(吳三桂軍)의 진공으로 패퇴하여 베이징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으며, 1645년 후베이[湖北]의 산중에서 지주무장군(地主武裝軍)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