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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선택과 집중’ 노키아와 핀란드를 구했다...<7> ‘핀란드의 영웅’ 요르마 올릴라 노키아 명예회장

영국신사77 2007. 1. 17. 23:48

과감한 ‘선택과 집중’ 노키아와 핀란드를 구했다

<7> ‘핀란드의 영웅’ 요르마 올릴라 노키아 명예회장
“디지털 휴대폰시대 온다” 시대흐름 정확히 읽어내
해외유출 인력 국내로… 젊은이 위한 일자리 창출

                                                                    헬싱키=박용근기자 ykpark@chosun.com
                                                                    입력 : 2007.01.16 00:58 / 수정 : 2007.01.16 10:11

    • ▲ 요르마 올릴라 노키아 명예회장
    • “지난 21년간 저와 함께 멋진 팀워크를 이뤄준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작년 5월 31일 세계 25개국에서 일하는 6만7000여명의 노키아 그룹 임직원들은 ‘친애하는 동료들에게’로 시작하는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인은 요르마 올릴라(Jorma Ollila·56) 노키아 회장(현 명예회장)이었다.

      14년 전 적자더미에 빠져 외국에 팔려나갈 위기에 처했던 핀란드 대표기업 노키아를 불사조처럼 회생시키고, 세계 1위 무선통신 기업으로 키운 탁월한 CEO(최고경영자). 제지(製紙) 등 굴뚝산업에만 의존해 살아가던 유럽의 변방 핀란드를 정보통신 허브(거점)로 바꿔놓은 주역….

       핀란드는 2003년 이후 3년 연속 국가경쟁력 세계 1위(세계경제포럼·WEF 선정)를 차지했는데, 그 주력 엔진이 올릴라가 이끄는 노키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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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 핀란드의 국가영웅이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면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것이었다. 그의 퇴진에 대해 미국 유에스 투데이지(紙)는 “올릴라 없는 핀란드 경제가 어떻게 될까?”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그만큼 올릴라 회장과 노키아, 그리고 핀란드 국가경제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기업과 국가경제를 구하다

      1992년 1월 핀란드 수도 헬싱키의 한 은행 건물. 당시 노키아 본사가 입주했던 이 건물 3층 회의실에서 열린 노키아 그룹 이사회에서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노키아 그룹의 작은 계열사에 불과했던 ‘노키아 모바일폰’의 올릴라 당시 사장이 그룹 CEO로 전격 발탁된 것이다. 그의 나이 41세. 당시 올릴라는 검증된 것이 거의 없는 경영 초년병이었다. 노키아그룹 내 서열은 10위였고, 계열사 사장에 취임한 지도 2년이 채 안 됐다.

      경험은 없지만 패기로 가득한 그를 총수로 선택해 모험을 걸어야 할 만큼, 노키아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당시 노키아는 종이·목재에서 케이블·TV, 심지어 고무장화까지 생산할 만큼 문어발 경영을 하던 전형적인 재벌그룹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말부터 급속한 경영악화에 직면했고, 90년대 초에는 도산위기에 빠졌다. 씨티은행에서 일하던 올릴라를 스카우트해 온 노키아의 전임 CEO가, 경영악화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채권 은행단은 노키아 그룹을 분해해 스웨덴의 통신그룹 에릭슨에 매각할 계획을 추진했다.

      핀란드의 국가경제 역시 악화일로를 겪고 있었다. 구(舊) 소련과의 교역에 주로 의존하던 핀란드 경제는, 당시 소련 붕괴에다 자산거품까지 터지면서 경제 전반이 위기로 치달았다. 1990~1993년 사이 국내총생산(GDP)이 10% 줄어들고, 실업률은 18%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 CEO로 취임한 올릴라는 “노키아를 먹여 살릴 원동력은 무엇인가”를 놓고 반 년 이상 이사회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소련은 역사의 종말 처리장으로 버려졌다. 소련에 주로 수출하는 제지·고무·케이블 등 불필요한 사업은 모조리 매각한다. 둘째, 휴대전화가 소수의 사무용품에서, 다수의 생활용품으로 변하는 시대가 온다. 여기에 집중한다.”

      올릴라는 5명의 핵심 임원으로, 새로운 구상을 실천할 ‘드림팀’을 구성했다. “통신분야에만 매달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내부반발도 컸지만, 그는 “목표를 정하는 데 시간을 쏟을 수 있지만, 일단 정해진 목표는 대담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통신과 함께 살거나 죽는다”(포천지 인터뷰, 1994년 3월21일자)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통신분야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종이펄프·고무장화·컴퓨터·가전부문을 다 팔아 치웠다. 그 결과 4만4000명이던 그룹 직원 수가 1994년 초에는 2만6000명으로 격감했다. 이런 그에게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운명과 맞서 싸우는 핀란드인(Finn fatale)’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                             ◆핀란드=노키아랜드

      “1990년대초 노키아와 핀란드가 올릴라를 만난 것 같은 행운이 또 있을까? 모세가 유대민족을 이끌고 홍해바다를 건넌 것과 같은 드라마였다.”(비즈니스위크)

      올릴라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결국 대성공을 이뤄냈다. 디지털 휴대폰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시대흐름을 그가 정확하게 읽어낸 것이었다. 여기에다 유럽 대륙에 불던 통신산업 규제완화, 새로운 디지털 휴대폰 규격 GSM 도입에, 선도적으로 대응한 게 맞아떨어졌다.

      노키아는 결국 1998년 미국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1위 휴대폰 제조업체로 등장했다. 화장지와 목재를 만들던 ‘굴뚝 회사’가 첨단 통신업체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올릴라가 CEO가 된 지 6년 만이었다.

      그가 살려낸 것은 노키아만이 아니었다. “산타 클로스와 호수의 나라로만 생각됐던 핀란드가, 정보통신의 신세계로 바뀐 것은 바로 노키아 때문이다. 핀란드를 ‘노키아랜드(Nokialand)’라고 부를 만하다.” 2003년 세계경제포럼(WEF)은 핀란드를 경쟁력 1위 국가에 올리면서, 노키아와 핀란드 경제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노키아랜드’란 말이 과장만은 아닌 것이, 노키아는 핀란드 국내총생산의 4%, 수출의 21%, 고용의 1%(관련산업 분야까지 합할 땐 10% 추산), 연구개발의 35%를 차지하고 있다(2004년 기준).

      특히 올릴라는 노키아 연구개발 활동의 중심을, 해외에서 핀란드로 집중시켜, 핀란드 젊은이들에게 고급(高級)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줬다. 주(駐) 핀란드 한국 대사관의 박철주 서기관은 “‘높은 세금, 높은 복지’라는 핀란드의 북유럽식 복지모델을 지탱해 주는 것이, 바로 올릴라 회장이 이끈 노키아”라며, “노키아가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과 정부에 바치는 세금이 없다면, 핀란드 국민들의 복지는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핀란드 국민 10명 중 1명이 노키아나 노키아와 관련된 분야에서 일한다. 또 은퇴 후에는 노키아의 수익력으로 유지하는 복지 시스템에 의존해 살아간다. 말 그대로 노키아 없는 핀란드란 상상하기 힘들다.

      노키아와 핀란드를 살린 ‘올릴라 신화’가 만들어지면서, 정치권의 유혹도 밀려왔다. 1999년 당시 핀란드 야당인 ‘국민연합당’은 그에게 대선(大選) 후보로 나서줄 것을 비밀리에 타진해 왔다. 올릴라의 대답은 “노(No)”였다. 그의 측근들은 “올릴라는 기업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 하는 사람이고, 그의 강한 승부근성과 추진력은 정치인 기질과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올릴라는 최근 한 사석에서 “노키아 CEO가 될 때, 길어도 12년만 하고 그 뒤에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다. 그런데 약속을 2년 넘기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인생 계획에 애초부터 정치는 들어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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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릴라 회장 약력

      1950년 8월생

      1976년 헬싱키대학 정치학 석사

      1978년 런던 정경대학 석사

      1978~1985년 씨티은행 근무

      1990년 노키아 모바일폰 사장

      1992년~2006년 6월 노키아그룹 CEO

      2006년 6월~ 노키아 명예회장(쉘 비상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