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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랑] 남강 이승훈

영국신사77 2006. 12. 26. 14:02
  •                       [이덕일 사랑] 남강 이승훈
  •                                                                                                                 2006.12.25
    •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 1864~ 1930)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멸망한 직후인 1910년 가을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한석진(韓錫晋)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란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했다고 전해진다. 나라 빼앗긴 민족과 기독교의 ‘고난’이란 교리가 접맥한 사례이다. 자수성가한 재산가 이승훈은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에 감동해 1907년 평북 정주(定州)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는 것으로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11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오산학교 출신의 교육자 김기석(金基錫)은 ‘남강 이승훈’에서 남강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감옥에 둔 것’이라고 말했다고 썼다. 이승훈은 옥중에서 ‘구약을 열 번, 신약을 마흔 번’ 읽었다고 회고했다. 출옥 후인 1919년 2월 말 정동교회에서 있었던 3·1운동 준비 모임에서 선언서 서명 순서가 논란이 되자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고 정리했다는 것은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재판 때 그는 총독정치에 대해 “조선사람의 인격을 야만과 같이 취급하는 데 불평이 있다”라고 답한다.

      1930년 5월 9일 세상을 떠난 이승훈은 자신의 유해를 오산학교 학생들의 생리학 표본(標本)으로 기증했다. 이 유언에 따라 경성제대 병원에서 표본을 제작했으나 학생들의 독립정신 고취를 우려한 일제의 불허로 그해 11월 정주에 매장됐다. 이승훈은 한국 현대사의 걸출한 사상가 함석헌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오산학교 출신이자 교사였던 함석헌은 1930년 6월 ‘성서조선’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란 글을 실어 스승을 추도했고, 말년에는 서울 원효로 자신의 집을 남강문화재단에 기부했다.

      김기석은 이승훈이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다는 것,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승훈의 감명이 생각나는 성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