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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志 兵法 ⑤] 진문공(晉文公)의 국가경영학..

영국신사77 2007. 1. 7. 00:45
 

[列國志 兵法 ⑤]

 

                    진문공(晉文公)의 국가경영학

                         -정평민부(정평문부)와 개방인사에 의한 내실성장


  험하디 험한 후계자 다툼 속에 여러 인접국을 유랑하며 집권의 순간을 기다려온 진나라 문공. 굶주리고 박대받던 19년 세월이 그에겐 현군(賢君)의 자질을 쌓는 값진 자양(滋養)이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집권하자마자 다채로운 국력 배양책을 쏟아냈는데, 특히 ‘초재진용(楚材晉用)’이란 성어가 생길 만큼 개방적인 인사정책은 그의 치하를 더욱 번성케 했다.


一. 여희(麗姬)의 음모


  망명과 유랑 19년에 지칠 대로 지친 노구를 가까스로 추슬러 귀국하고는, 즉위하자마자 안정을 되찾고 신경지를 개척하며 부강조국을 이룩한 정치가가 있다.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覇者)로 등장한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이다. 그 성공의 비결엔 현대인도 배울 점이 많다.

 

  원래 진나라는 고대 한(漢)족이 주로 모여 살던 중원(中原)의 제후국치곤 퍽 강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헌공(獻公) 재위시에 후계자 선정문제를 둘러싼 자중지란이 심화되면서 국세가 급속히 추락하고 말았다.

  헌공도 중년까지는 퍽 똑똑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내를 여읜 뒤, 그 자신 전쟁을 즐기며 정복지에서 소수민족 미인들을 ‘전리품’으로 수탈해 궁중에 들여놓고 익애(溺愛)하면서부터, 탈선과 오판이 잦았다. 일찌감치 찾아든 노망끼 탓인지도 모른다.

  특히 여산에 살던 융족 일부를 정복해, 그곳의 미인 여희 자매를 얻어 몹시 사랑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여희는 아들 해제(奚齊)를 낳았고, 그 동생은 아들 탁자(卓子)를 낳았다. 이에 앞서 헌공은 이미 선처와의 사이에 태자인 신생(申生)과, 둘째 중이(重耳), 셋째 이오(夷吾)를 뒀는데, 세 아들 모두 착하거나 똑똑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편 여희는 야만족 출신으로 배운 것은 없었으나 머리가 좋았다. 그녀는 자기 소생인 해제로 하여금 태자가 되게 하여, 정복자의 나라를 거꾸로 탈취하고자 결심했다. 그 기초공사로 우선 헌공에게 최선의 봉사를 다해 사랑을 받는 동시에, 유력한 대신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노력엔 빈틈이 없었다. 그 바탕 위에 전형적인 궁중 음모 3단계 작전을 구상했다. 냉정하게 병법적 시각에서만 평가한다면, 단기적으론 성공작이었다.

  우리 조선왕조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앞으로도 유사한 시도가 있을는지 또한 알 수 없으니, 정치적 경각심을 갖도록 머리의 체조 삼아 읽어나가기 바란다.

                                  궁중 음모 3단계 전략

 [제1단계-라이벌 따돌리기] 여희는 자기가 낳은 해제를 새 태자로 결정할 생각이 헌공에게도 없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태자 후보 경선에 나설 경쟁자들이 만만찮음을 관측했다. 라이벌들을 먼 곳으로 따돌려 경쟁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통감한 것. 그래서 유력한 안보담당 대신들을 뇌물로 매수해 헌공에게 건의케 했다.

“우리 진나라의 사활적 요충지는 곡옥(曲沃), 포(蒲), 굴(屈)인데, 나라를 수호하려면 유능한 공자님을 각기 현지에 거주시켜 다스리게 하는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헌공이 그 진언에 따라 태자 신생을 곡옥, 둘째 중이를 포, 셋째 이오를 굴에 보내 거주케 하면서, 군사와 행정을 총람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한 것이다(中華書局, 春秋左傳 註, 北京, 2000, 上 239쪽).

  그런데 영국의 처칠은 “무대 가까이 있어야 등장할 기회가 많다”고 갈파한 바 있다. 음모를 방지하고 자기 세력을 심어두기 위해서도, 최고 통치자 가까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라에 정치 중심지가 둘 있다면, 먼 곳을 선택하는 것이 불리하고 위험하게 마련이다.

 [제2단계-주적(主敵)의 제거] 적은 하나여야 한다. 공격할 때는 중점을 설정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 이곳저곳으로 정신이 흩어지면 지고 만다. 양면(兩面) 작전은 패망의 선택이자 바보짓이다.

  여희는 그 점을 잘 헤아리고 있었다. 세 공자가 합세(合勢)하지 않도록 유의한 것이다. 우선 태자 신생을 부추겨 간계에 말려들게 했다. 신생이 거주하는 곡옥의 전통음식을 헌상하면 부군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진상 음식이 도착하자, 여희는 남몰래 음식에 독극물을 섞었다. 헌공이 식사하려 하자 여희가 말리면서 먼저 시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한 조각을 개에게 던졌더니 먹자마자 개가 쓰러졌다. 이어 노예에게 먹어보라 했는데, 역시 죽고 말았다. 여희는 통곡하면서 말했다.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잔인하실까요.”

  그래도 헌공은 “증거도 없는데 설마…” 하고 결론내기를 주저했다.

  태자의 측근은 여희의 작란(作亂)이니 즉각 변명하자고 했다. 혹자는 외국 망명을 건의했다. 그러나 착하디 착한 태자 신생은 고민 끝에, 고령의 아버지 헌공이 여희와 더불어 편안하게 여생을 마치시길 연원한다면서 자살하고 말았다(司馬遷, 史記, 晉世家).

  [제3단계-‘공범’조작과 잔적 소탕] 포와 굴에 각기 움츠려 살다 그러한 정보를 접한 두 공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수도의 동향을 알아보고자 탐문꾼을 파견하기도 했다.

  한편 여희 측에서는 이를 역이용하며 잔적(殘敵) 소탕전략을 세웠다. 헌공이 철저한 조사를 엄명하자, 여희는 매수한 정보원들을 시켜 “나머지 두 공자인 중이와 이오도 독살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으니 공범임에 틀림없다”고 보고하게 했다.

  이에 헌공이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포를 쳤다. 공자 중이는 가까스로 도주하여 적(翟)으로 망명했다. 망명과 유랑 19년의 어설픈 출발이었다. 헌공은 또 굴을 쳤다. 공자 이오는 양(梁)으로 망명했다.

  마침내 후계자 교체 음모로 빚어진 만성적 국정혼란의 시기가 개막됐다. 늙은 군주가 후처를 사랑하고 그 소생을 태자로 삼으려면 혼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느 왕조에나 흔히 있을 수 있는 부정적 사례다. 현대의 ‘인민공화국’이라 해도 권력세습에 집착하면 유사한 사태 발생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론형성층과 유대 못해

  여희의 음모로, 국내에서는 해제의 즉위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기적 성공에 불과했다. 외국으로 망명한 ‘대안’들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국내라고는 하지만 여희의 매수 작전은 귀족 관료사회의 일부에 그쳤던 것이다. 우선 군대를 장악하지 못했다. 또 반대세력 탄압에 활용할 정보기구도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 특히 여론형성층과 이해일치(利害一致)라는 유대를 설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었다. 그러니 유사시에 국민의 외면과 방관, 지배층 내부의 혼란이 초래될 것은 자명했다. 헌공은 그 와중에 불안과 고민을 가누지 못한 채 노환으로 병석에 드러눕게 됐다. 하루는 심복이라고 믿어온 중신 구식(苟息)을 불러 말했다.

“나는 해제를 후계자로 작정했으나 아직은 어려서 여러 대신이 심복지 않고 있다. 즉위 후 반란이 있을까 걱정된다. 경은 해제를 옹립하고 수호할 수 있겠는가?”

  구식이 대답했다.

“안심하십시오. 결심이 섰습니다.”

  그러나 구식은 결심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세 판단이나 조건 형성은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헌공은 그 말만 믿고 구식을 재상으로 임명해 해제 옹립을 부탁했다. 헌공이 사망하자 외국에 망명 중인 중이를 영입하려는 세력과, 이오를 옹립하려는 세력이 뒤질세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이 영입파인 리극(里克)이 상중(喪中)의 해제를 궁중에서 시해했다. 구식이 해제의 동생 탁자를 즉위시키고 헌공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 다음달에 리극 등은 탁자도 시해하고 말았다. 동시에 구식도 순사했다.

  승리감에 도취한 리극 등이 중이한테 특사를 파견, “영립(迎立)할 것이니 속히 귀국해 즉위하소서” 하고 권유했다. 만약 당신이 중이의 처지에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중이는 얼씨구나 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 끝에 사퇴하면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부군의 뜻을 어기며 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래서 부군이 서거하셨어도 장례에 참석지 못했습니다. 그런 내가 어찌 귀국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大夫)께서 아무쪼록 다른 공자를 옹립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숙고를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일부 대신들이 군주를 두 사람이나 죽이고 나를 새 군주로 옹립하려 한다. 이 마당에 곧바로 귀국하면 그들이 피 묻은 손을 들어 나를 환영하겠지만, 결국 나 역시 암살당하든지, 그들의 괴뢰가 되고 말 것이다. 국민이 따르지 않고, 국제적으로도 평가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귀국하면 불안만 가중될 뿐 소신을 펼 수 없겠다. 즉위하고 싶지만 현재는 그 시기가 아니다….”


                 二. 19년의 유랑생활 끝에 군주의 자리에 오르다.

  결국 리극 집단은 이오 옹립파와 합세하여, 양에 있던 이오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이오가 귀국을 서두르자 측근들이 말렸다. 길은 멀고 국내에도 반대세력이 있으니 우선 요소요소를 회유하고 무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외교적 공약(空約)과 국내용 정치공약(公約)의 남발이었다.

  그래서 이오는 이웃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목공에게 특사를 보내면서 친서와 선물을 지니고 가게 했다. 자신의 귀국을 보호해주면 즉위 후 하서(河西) 땅을 헌상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중국어 발음으로 진(秦)은 ‘친’, 진(晉)은 ‘진’). 그리고 국내의 리극에게는 즉위하면 분양의 땅을 쪼개어 봉하겠노라고 공약했다.

  그러나 혜공(惠公)이라 칭하며 즉위한 이오는, 자기 파벌의 확장과 근위대 및 정보기구의 강화에 급급했다. 배신과 파약의 연속이었다. 리극에겐 자살을 강요했고, 그후에 잔당을 모조리 숙청했다. 그 꼴을 보고 국민이 심복하지 않았다.

  나아가 경솔한 혜공은 은인의 나라인 진(秦)을 치려고 했다. 두 나라 군사가 한원(韓原)에서 크게 싸웠는데, 진군이 대승했다. 혜공은 포로로 잡혀 압송당했다. 배신자라고 처형당할 뻔했다.

  혜공은 가까스로 풀려나 귀국했으나 대신 인질로 태자 어(퀩)를 보냈다. 그리고 자기 파벌의 중신들과 모략을 꾸몄다. 우선 ‘제후들이 외국에 망명 중인 중이를 귀국하게 한 뒤 즉위시키려 하니 불안하다’는 이유로 암살단을 파견했다. 중이는 그 소식을 듣고 거처를 동방의 대국인 제나라로 옮겨 피신했다. 인질로 갔던 태자 어는 비밀리에 도주하여 귀국했다. 그후 혜공이 죽자 태자 어가 즉위했으니 회공(懷公)이라 칭했다.

  천하가 혜공·회공 부자의 잔꾀와 배신으로 가득찬 정보 공작과 파당정치를 혐오했다. 특히 서쪽 대국인 진(秦)나라 목공은 망명 중인 중이를 찾아내어 무력으로 귀국시킨 다음,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진(晉) 내부에 잠재하는 내응세력과 합작하여 회공을 죽였다. 그후 중이는 귀국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진(晉) 문공(文公, BC 697∼628)이다.

                                       

   유랑생활 19년의 고초 끝에 62세에 즉위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초고령의 기적적인 정계 등장이었다. 문공이 즉위함으로써 진(晉)나라는 지리했던 다년간의 국정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유례없는 고령의 즉위였으나, 문공의 등장은 ‘준비된 집권’이었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마냥 적(狄), 제(齊), 위(衛), 조(曹), 송(宋), 정(鄭), 초(楚), 진(秦) 등 여러 나라로 거처를 옮기면서 때론 굶주리고 때론 모욕을 참아내면서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피해 다녔다. 도피에만 급급한 허송세월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각국의 다양한 정치현실을 심도 있게 비교 연구했다. 나아가 귀국에 대비해 미리 정책 청사진의 대강을 마련했다. 적재적소에 등용할 인재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귀국하자마자 시행착오 없이 즉각 효율적인 국정을 펴나갈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구시대 정치의 폐해가 혼란과 불신에서 비롯된다는 데 착안했다. 그러니 새 정권의 급선무로 안정과 신뢰가 부각됐다. 신경지 개척은 그 다음의 일이다.

                   ‘소외권' 포용,경력파' 무시

  국내 정치에서는 우선 안정과 화합, 신뢰와 협동을 표방했다. 한편으로 집권 초창기엔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지지세력을 급속히 요직에 등용하여 새 정권의 통치기반을 공고화할 과제도 부각됐다.

  당시의 기득권층은 궁정 안팎의 종실 귀족과 대부(大夫)들, 특히 벼슬을 이용해 토지를 불법 점유한 무리였다. 문공은 그들의 재산에 섣불리 손대지 않았으며, 과거의 죄악을 묻지도 않았다. 설령 민원대상이 있어 지지세력이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에도, 정책적으로는 ‘과거사 규명’을 하지 않았다. 만부득이한 사안이라도, 단계적인 각개격파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지지세력의 요직 등용은 신(新)정권의 화급한 자위적 요청이기도 했다. 문공은 집권 즉시, 망명 시절 줄곧 자기를 따르며 지켜준 충신들을 모두 중용했다. 도중에 멀어진 사람들이라 해도 적어도 당분간은 충성할 것으로 보고 한때의 유감을 접고 등용했다. 새 인재 등용에서는 그동안 구(舊)정권에서 푸대접받았거나 무대접으로 취급된 ‘소외권’ 인사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다. 또 군소집단(현대 용어로는 정당 결성 이전의 이익단체나 서클 등)을 포섭하고 단결시키는 데 유의했다고 한다(中國改革史, 河北敎育出版社, 石家莊, 1997, 20쪽).


                             三. 인사정책을 통한 내정개혁

  한편 자신의 무능을 탓하진 않고 ‘가문’ 타령을 하는 인물, 과거 독재자에게 아부해 얻은 벼슬을 다시 내세우는 이른바 ‘경력파’ 인물들은 무시했다. 능력제, 공적 중시의 인사정책을 편 것이다. 이와 관련, ‘숨어 사는 인재’들을 발견하는 대로 천거하라고 국가기관에 지시했다.

  군대 개혁에서도 인사정책을 중시했다. 능력과 업적, 공훈 위주의 승급을 관철했다. 군복무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군정합일(軍政合一) 정책을 썼더니, 행정효율이 크게 향상됐다는 기록이 있다. 군복무자들을 각급 공무원으로 수시 전용한 것이 사기 고무와 효율 향상에 고루 이로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과거 박정희 정권의 초기 인사정책을 연상케 한다. 나아가 수시로 군대를 시찰해 작전 연구와 군사훈련을 점검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한동안 흩어졌던 군기가 바로 서고, 전투력이 눈부시게 향상됐다.

  경제개혁에선 '공정한 정치로 민생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정평민부(政平民阜)’ 정책을 기조로 삼았다. 우선 부질없는 각종 규제를 철폐했다. 부패관료의 수뢰수단을 일소했고, 경제발전의 대로를 활짝 터놓았다. 오늘날에도 정부가 큰길을 닦고 전기·수도·가스만 끌어오면, 나머지는 민간이 알아서 잘해나가는 법이다. 졸렬한 ‘행정지도’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문공은 이어서 조세경감, 채무탕감, 빈민구제, 취업확대, 상공진흥 등에 걸쳐 ‘나라의 보살핌’을 실감케 했다. 정치안정과 경제부흥을 비롯한 내실화 작업이 일단락되자 부강한 나라, 탄탄한 국력을 여러모로 실감할 수 있게 됐다. 그러한 바탕 위에 문공은 ‘패자(覇者)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자면 신의 있는 외교,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대의명분 그리고 군사적 우세에 관한 국제적 확인이 필요했다.

                                 秦 따돌리고 楚 누르기

  당시의 열국 정세를 볼 때 여러 제후국 중에서 패권 경쟁에 나설 만한 강대세력으로는 제(齊)·진(秦)·초(楚)·진(晉)의 4개국뿐이었다.

  그중 제나라는 초대 패자였던 환공(桓公)과 명재상 관중(管仲)의 잇단 사망 이후, 지저분한 후계 싸움과 간신배의 발호로 말미암아, 급속히 약화되고 혼란에 빠져들어 경쟁권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제 문공이 패자가 되는 길은 진(秦)을 따돌리고 초(楚)를 누르는 방안으로 요약됐다.

  다행히 문공은 망명·유랑 과정에 그 나라들에서 따뜻한 대우를 받아, 군주들과 우호적인 신의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티끌만한 불신이나 적대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진(秦)나라는 문공의 귀국과 즉위에 지극히 호의적이었으며, 3000명의 병력으로 호송해주기까지 한 은의가 있었다. 다만 그 인구 구성이 한족(漢族) 일색이 아니라 서주(西周)의 잔여세력과 융이라는 이민족이 합세한 나라라는 데서 이단시되기는 했다. 중원의 패자가 되기엔 시기상조의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초나라는 중원의 한족 문명에 동화되었지만, 원래 남쪽의 야만족 출신으로 여겨지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망명 중이던 중이(문공)를 환대했고, 동등한 제후격으로 대접해준 은의가 있었다. 더욱이 초 성왕(成王)은 문공에게 “귀하가 귀국해 즉위한 후에는 무엇으로 과인의 호의에 보답해주시겠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문공은 “만약 부득이 싸움터에서 회전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때 군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저의 군대를 3사(三舍·90리)에 걸쳐 후퇴시키겠습니다” 하고 약속한 바 있다. 공인의 약속은 신의로 지켜야 한다. 초는 중원 진출에 매우 적극적이며 조급해했다.

  한편 중원의 약소 제후국인 진(陳)·채(蔡)·정(鄭)·허(許) 등은 국가안보를 강대세력인 초에 의존하고 있었다. 송(宋)나라도 초를 두려워하여 속국이 되다시피 했으나, 문공 통치하의 진(晉)의 부흥을 보자 그 밑으로 들어가 보호받고자 했다.

  초나라는 그러한 송의 표변에 분개했다. 성왕이 직접 출정하여 응징하고자 약소 동맹국들인 진·채·정·허 등의 무력을 합쳐 송나라로 진격했다. 송나라는 진(晉)에 긴급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문공은 대책회의(안보회의)를 소집했다. 장군 선진(先軫)이 출병 방침을 건의하면서, 세 가지 이득을 말했다. 첫째는 문공 망명 기간에 호의로 접대해준 송나라를 구원함으로써 은의에 보답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흥한 진(晉)나라의 위세를 제후들에게 시위하고, 셋째는 그 바탕 위에 패자로 우뚝 선다는 것이다. 그 건의는 이의 없이 채택됐다.

                        ‘간접적 접근’으로 승리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는, 호언(狐偃)이 전략상 아군은 송나라로 직행하지 말고, 먼저 초나라와 긴밀한 관계인 조(曹)와 위(衛)를 치자는 우회전략을 말했다. 그러면 초가 그들을 구원코자 자연히 송나라에 대한 포위작전을 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전략 역시 채택됐다.


              四. 9년의 집정기간으로 패권국의 지위를 공고히 하다.

  이 우회적 전략은 현대에 와서도 영국의 군사평론가 리델 하트가 극구 평가하는 ‘간접적 접근(Indirect approach)’과 발상이 동일하다. 반면에 수뇌부의 직선적 사고방식은 대체로 패전과 망국을 초래한다.

  행동 개시 직전에 문공은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에 걸쳐 소외감 없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포석을 잊지 않았다. 동주 왕조에 대해서도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문공의 명령이 하달되자, 진(晉)은 삽시간에 조나라와 위나라를 석권했다.

  급보에 접한 초나라 성왕도 송나라의 점령지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대신들 사이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자옥(子玉) 장군이 진 문공의 무례를 규탄하며 결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왕은 문공이 선정을 베풀어 국력을 배양한 데다, 그 배경에 서쪽의 진과 동쪽의 제라는 강대 세력이 있음을 감안했다. 요컨대 성급한 결전을 원치 않았다. 계속 송에 대한 포위공격 태세를 유지하면서 진과의 타협적 화해를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성왕 자신은 귀국했다. 정세가 불리하니 결전을 회피해야 한다는 판단은 옳았으나, 일부 요행심리와 체면유지 등에 이끌려 명확한 엄명을 내리지 못한 점은 그의 과오였다.

  한편 자옥은 왕명에 따라 진과 타협하여 강화를 모색해보려 특사로 원춘(펲春)을 문공한테 보냈다. 문공이 조나라와 위나라에서 철군하면 초군도 송나라에서 철군하겠다는 교환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문공의 측근인 선진 장군은, 적장 자옥을 결전으로 유인하기 위해 오만한 그를 격분시켜 판단을 그르치게 만드는 세칭 ‘격장법(激將法)’이란 계략을 쓰자고 했다. 조와 위에는 영토반환을 조건으로 초와 단교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또 자옥이 보낸 특사를 감금했다.

  격분한 자옥은 초군을 주력으로 삼아 중앙에 배치하고, 정·허·진·채 등 겁 많은 속국 병력을 우익에 배치하여 진격을 개시했다.

  한편 문공은 호언의 계략에 따라 ‘퇴피삼사(退避三舍·90리 퇴각)’를 단행했다. 표면상으로는 문공 망명시에 초 성왕이 베푼 우대에 보답하여 신의를 지킨다는 것.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문공의 진군이 미리 차지한 유리한 지형 안으로 초군을 유인한 것이다. 즉 아군의 우세한 병력을 집중 배치한 싸움터까지 피로한 적을 깊이 끌어들여 격멸한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성복(城?)싸움은 기원전 632년 초여름에 전개됐다. 쌍방 병력은 비등했는데, 합계 3만명 정도였다. 진군은 우선 초군의 약점인 우익의 잡군을 맹공하여 파급 효과를 넓혀나갔다. 그리고 적의 주력을 포위망으로 유인해 퇴로를 끊고 측면 공격으로 섬멸했다. 결과는 문공의 완승이었다. 초군의 장군 자옥은 가까스로 싸움터를 빠져나갔으나 곧 자살하고 말았다.

                                  東周 몰락의 반면교사

  그 무렵 동주(東周) 왕실은 이미 유명무실할 정도로 쇠락해 있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서주(西周) 정권의 급격한 몰락은 왕실의 동쪽을 향한 수도 이전과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이다(常金倉, 窮變通久, 瀋陽, 1998, 237쪽). 일반적으로 수도 이전은 쇠락의 길을 달리려는 꼴이라고 알려져 있다.

  필자도 동감이지만 예외적 경우도 없지 않으니 ▲점령 공고화 ▲신경지 개척에 해당되는 진취적 발상이라면 달리 평가할 수도 있겠다(예를 들면 이스탄불, 워싱턴, 브라질리아 등).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중심적 근거지 포기에 따른 경제 동요와 안보 약화 ▲기민의식(棄民意識)에 따른 많은 인구의 지지 포기 ▲국론분열의 반영구화 등을 감안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

  현대에 발생할 만한 특수한 문제로는 ▲‘두 집 살림’과 근무조건 악화 ▲노조활동의 이상 기류 ▲부동산 투기풍조의 새 양상 ▲행정효율 저하와 맞물린 노동생산성 저하 ▲권위와 권능에 걸친 불신의 심화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문제 상황은 어느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렵다. 따라서 문제는 줄여나가야 한다. 부질없이 늘릴 일이 아니다.

  하여튼 주(周) 왕실의 양왕(襄王)은 성복싸움의 결과를 보자 역학관계와 대의명분을 고루 감안해, 정식으로 진의 문공을 패자(覇者)로 임명했다. 그후 진나라의 영도적 우세는 약 100년간 지속됐다. 군사력과 경제력에 보태어 국제적 공신력이 컸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개방적이고 공정한 인재등용 덕분이다.

초재진용(楚材晉用)이라는 성어(成語)가 있다. 자국의 인재가 타국에서 쓰인다는 뜻이다. 원래의 뜻은 인재의 출생은 초국이 많으나, 그 등용은 진국이 많다는 것이다(春秋左氏傳, 襄公, 二十之年). 지역감정이나 가문 타령, 당파 성향 등에 구애하지 않는 개방적 인사정책이, 진 문공의 성공 비결이었다.   (끝)

                                                                               출처: 열국지평설 .

 

 

 

 

                 [한경에세이] 진문공(晉文公)의 신의

 
                                                      劉王敦  < 진매트릭스 대표 >

 

                                                                               출처 카페 > 분자유전학실험실 /
                                                                               원본
http://cafe.naver.com/biotech/19
 

 

   춘추시대 진문공(晉文公)은 망명 19년의 유랑 끝에 62세가 되어 군위에 올랐다. 진문공이 한때 몸을 의탁했던 초나라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신하 호언이 "주공께서 초임금에게 훗날 진과 초가 중원을 놓고 싸우는 경우가있다면 초를 위해 삼사(三舍·약 90리)를 물러서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지금 초군과 싸운다면 이는 신의를 잃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호언의 말은 진문공이 망명 시절 초성왕의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했던 약속을일깨운 진언이었다.

진문공은 주저없이 삼사를 후퇴한 뒤 비로소 진을 쳤다고 한다.

 

  사업가의 첫째 덕목은 신의가 아닌가 싶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상(巨商)이라면 신의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쯤은 따라다닌다. 신의가 없다면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고, 또한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없어 매사를 염려해야 할 것이다.

신의는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남으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 행동을 신뢰할 수 있게해 준다. 미래의 행동을 신뢰할 수 있는 자를 사업의 파트너로 삼고 거래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삼사를 물러서고도 진문공은 초나라에 결국 승리하였다.

진문공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지난날 초성왕과의 약속을 깨우쳐준 호언을일등 공로자로 정했고, 계책을 세워 초나라를 격파한 선진을 그 다음 공로자로정했다.

 

  신하들이 진문공의 처사에 의아해하자,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저 전쟁에서 싸워 이기는 것은 한때의 공로에 불과하지만, 신의를 높이는 것은 천추 만세의 교훈이라. 어찌 한때의 공로가 영원한 공로보다 낫다 할 수 있으리오."

 

  진문공의 신의는 우리 첨단기술과 산업이 세계 중심에 우뚝 서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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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모략가(01) 세월을 이겨낸 19년 망명객, 진문공

 
 
                                                                               출처 카페 > 오정윤역사교실 / aguta
                                                                               원본
http://cafe.naver.com/22779181/5
 
 

     고통과 험난의 시기에는 때를 기다려라!   

 

                                춘추 패권의 승리자,  진문공 희중이

 

                                                     오정윤(명지대 사회교육원 문화콘텐츠과 교수)

 


  세월을 기다린다는 일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나날의 연속이다. 특히 봉건왕조시대에 최고의 권력자인 군주(君主)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게임의 경우에는 수많은 정적(政敵)들의 공격과 암살단(暗殺團)의 위협이 끊이지 않으며,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게되는게 일반적인 법칙이다. 따라서 세월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하게 시간이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기는게 아니라, 그 시간의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설계하고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왕조(周王朝)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강태공 여상(呂尙)이 대표적으로 세월을 낚은 사람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그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며 위수(渭水) 강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그렇다면 강태공은 무엇 때문에 강변에서 낚시를 하였을까? 고대로 올라 갈수록 강(江)의 역할은 중요하였다. 강(江)은 그냥 흘러가는 물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었다. 강(江)은 사람이 지나가고 모든 교통과 물류가 만나는 교착점이다. 강은 길이고 정보의 통로였다. 그 당시에 강태공이 낚은 것은 세월이 아니라 사실은 정보(情報)와 민심(民心)이었고, 또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시기를 기다린 그런 낚시의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낚시를 한가한 오락이나 취미생활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목적의식을 가지고 낚시를 할 때, 그것은 자신을 성찰하고 인내를 키우며 시기를 기다리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그것을 일컬어 고요함 속에 맹렬함이 있고, 조용함속에 힘찬 기운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밤이 깊어질수록 새날이 가까워오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훗날 춘추5패 가운데 한자리를 차지하는 진문공(晉文公;서기전 636-627) 희중이(姬重耳)가 수레를 타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것은, 거지처럼 구걸하고 동냥을 하기 위함도 아니고 살길을 찾기위해 떠돌이 생활을 한것도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진문공은 왜 19년의 세월을 허비하며 천하를 주유했는가?


  민심을 알려면 저자거리로 나가라고 하였다. 한나라의 군주가 진정으로 백성의 삶을 살피고자 한다면, 신하들의 입에 발린 보고에 의지해서는 눈이 멀고 귀가 닫히는 법이다. 진실로 훌륭한 군주는 권력의 힘이 백성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저자거리에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물며 어려운 시절에 저자거리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군주가 된 사람의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백성의 실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흘륭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된 예가 많이 있다.

 

  그 옛날 고구려의 15대 임금이었던 미천왕(美川王;300-331)은 고조선 이래 중국에게 빼앗긴 낙랑과 대방의 땅을 다시 찾은 영걸한 군주였다. 그가 그토록 빼어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밑거름은, 왕자 시절에 박해를 피해 천하를 둘아다니며 생활한 경험이었다. 그는 소금장사를 하면서 고구려 밑바닥의 인심을 파악하였고, 산천지리의 정보를 폭넓게 구하였으며, 격동의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기술에 눈을 떴다.

 

  아마 훗날 춘추5패(春秋五覇)의 하나이며 진문공(晉文公)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희중이(姬重耳)의 삶도, 별반 미천왕과 다를 바 없이 유랑의 세월에서 자신이 가야할 목표를 선택할 수 있었다.


  희중이가 태어난 진(晉)은 중원의 핵심부에 자리잡은 주(周)나라의 오래된 분봉왕조(分封王朝)이다. 진(晉)나라는 서주(西周) 무왕(武王;서기전 1076-1064)의 아들인 성왕(成王;서기전 1063-1027)이 처음으로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할 때, 성왕의 동생인 당숙(唐叔) 우(虞)가 세운 나라이다.

 

  그후 서기전 858년에 희의구(姬宜臼)가 진정후(晉靖侯)에 봉해져 독립된 진(晉)나라를 열었으며, 동주(東周) 희왕(僖王;서기전 681-677) 시기인 서기전 678년에 무공(武公) 칭(稱)이 진후(晉侯)에 봉해지면서 주왕실로부터 무장력을 갖출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다.

  훗날 진문공이 되는 희중이의 아버지인 진헌공은, 바로 무공 칭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무공 칭은 희중이의 할아버지이다.  


   희중이는 할아버지 무공 칭(稱)이 장군으로 이름을 드날리던 때인 서기전 697년에 태어났다. 이때 진(晉)나라의 북쪽에는 유목기마종족인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자리잡고, 동북쪽에 연(燕)나라가 있었다. 서남쪽에는 진(秦)나라가, 남쪽에는 천자의 나라인 주(周)가 위치하며, 동쪽으로 위(衛)나라, 동남쪽으로 초(楚), 정(鄭), 송(宋) 3국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펼쳐져 있다. 오늘날 중국의 섬서(陝西), 산서(山西) 지역이 대체적으로 진(晉)의 땅이다.

 

  서기전 685년은 춘추5패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제환공(齊桓公;서기전 685-643)이 제나라의 군주에 즉위한 해이다. 이때부터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의 권위는 서서히 무너지고, 힘이 센 제후의 군주(君主)가 회맹(會盟)이라는 형식으로 약소한 제후국을 제압하고 패자(覇者)가 되어 실질적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시대에 돌입하였다. 제환공은 관중의 도움을 받아 서기전 679년에 노(魯), 송(宋), 위(衛), 조(曹), 주(邾), 진(陳), 채(蔡) 7국과 회맹(會盟)하고 제후의 패자인 후백(侯伯)이 되었다. 이 해에 무공 칭은 진(晉)의 권력을 차지하고 이듬해는 진후(晉侯)가 되었으며, 2년후에는 그의 아들인 진헌공이 뒤를 이었다.


  희중이의 부친은 진헌공(晉獻公;서기전 677-651)으로, 첫 번째 부인인 제강(齊姜)에게서 아들 신생(申生)과 진목공에게 시집간 목희(穆姬)라는 딸을 얻었다. 그후 적(狄)나라에서 호씨(狐氏) 집안의 자매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언니에게서 중이(重耳)를 얻고, 동생에게서 이오(夷吾)를 얻었다. 그뒤에 여(驪)나라를 공격하여 그곳의 왕녀인 여희(驪姬)를 가로채 후비로 맞이하여 해제(奚齊)를 낳았고, 그녀의 여동생도 부인으로 맞이하여 탁자(卓子)를 얻었다.

 

  그런데 진헌공은 서기전 656년에 미모가 출중한 여희의 감언이설에 속아 아버지의 근엄함과 책임감을 잃어버리고 태자인 신생(申生)을 핍박하여 목을 매달아 죽게 하였다. 나아가 여희를 황후로 삼고 그녀의 소생인 해제를 태자로 삼았으며, 대공자인 희중이(姬重耳)와 2공자인 희이오(姬夷吾)마저 죽이려고 하였다.

 

  진헌공은 두 아들이 태자인 신생과 공모하여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내려 했다는 죄명을 씌워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 하였다. 포성(蒲城)을 지키던 희중이는 아버지의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오자 대항하지 않고 적(翟)나라로 도망갔으며, 굴성(屈城)을 지키던 이오(夷吾)는 아버지가 보낸 토벌군과 1년여를 싸우다가 패하여 양(梁)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이오도 중이가 달아난 적(翟)으로 가려했는데, 그의 참모인 기예(冀芮)가 말려서 양나라로 떠난 것이다.

 

  “공자께서 적으로 달아나면 진헌공은 반드시 두 공자를 잡으려고 군대를 파병할 것입니다. 그리고 적은 약한 나라이고 진(晋)을 무서워 하므로 조금도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양(梁)으로 가십시오. 양나라는 진(秦)과 가까이 있고, 진(秦)은 강국이므로 언제든지 병력을 빌려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때 적으로 피신한 중이의 나이는 43살이었으며, 중이를 따르는 사람은 외숙부인 호언(狐偃)과 가신인 조쇠(趙衰), 선진(先軫), 가타(賈佗), 위추(위무자), 개자추(介子推), 호숙(壺叔), 전힐(顚詰), 사공계자(司公季子), 호모(狐毛), 가륜(賈倫) 등이었다. 일찍이 중이는 17살때부터 호언을 부친처럼, 조쇠는 스승처럼, 가타는 형님처럼 모시면서 이들 참모들의 건의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중이가 망명을 떠나자 모두 따라나선 것이다.

 

  중이가 적나라의 국경에 이르렀을 때 함께 떠난 위추가 말했다.

  “지난날 공자께서 포성을 지키고 있을 때, 만일 함께 대업을 도모하자고 하였다면 모든 백성이 따랐을 것이고, 이웃인 적국(翟國)에서 군대를 빌려 단숨에 강도(絳都)로 내달려 간신들을 베어 버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수 있었는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고 오늘의 망명길을 택하셨습까?”

  중이는 참모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그대의 말은 호탕하고 시원해서 좋소이다. 하지만 부왕(父王)을 상대로 감히 칼을 겨눌 수는 없었소.”

 

  위추는 다시 한번 두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인의(仁義)를 말씀하시는데 어찌 여우같은 여희(驪姬)에게 통하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언제 큰 일을 이루실 수 있겠습니가?”

  호언이 곁에서 있다가 위추의 말을 끊었다.

  “공자께서 어디 여(驪)씨가 무서워 피하셨겠는가?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라는 명분(名分)을 두려워 하시는 것일세.”

 

  중이의 심정을 헤아리고 있는 사람은 호언이었다. 그래서 훗날 [묵자(墨子)]는 ‘제나라 환공은 포숙과 관중에게 물들었고, 진나라 문공은 호언에게 물들었고, 초나라 장왕은 손숙과 심윤에게 물들었고, 오나라 합려는 오원과 문의에게 물들었으며, 월나라 구천은 범려와 문종에게 물들었다. 이들 다섯 군주는 모두 물이 제대로 들어서 천하의 패자가 되었으며, 그 공덕과 명예가 후세에 전해졌다’고 평가하였다.

 

  희중이는 적나라에서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 적공(翟公)은 전쟁에서 얻은 숙외(叔隈)와 계외(季隗)라고 부르는 두명의 미녀를 각각 조쇠와 중이에게 시집보냈다. 

 

  중이 일행이 적(翟)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 양나라로 달아난 이오는 그곳의 주인인 양백(梁伯)의 환대를 받고 그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어(圉)를 낳았다. 희어(姬圉)는 훗날 진회공(晉懷公;서기전 637-636)이 된다.

 

  중이와 이오가 각각 적나라와 양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한지 5년이 되었을 때, 진헌공이 세상을 떠났다. 진(晉)나라의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지내고 있던 순식(荀息)이 태자 해제를 밀어 왕위에 올렸는데, 태자 신생의 측근이었던 이극(理克)이 순식을 설득하고 대부 비정(邳鄭)과 연합하여 해제와 여희를 살해하고 적국에 있는 중이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순식은 권력에서 밀려날까 염려하여 오히려 탁자를 다시 왕으로 삼았고, 이에 분노한 이극은 아예 탁자와 순식을 모두 죽이고 이번에는 양나라로 달아나 있던 이오를 불러들여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가 곧 진혜공(晉惠公;서기전 651-637)이다.


  이오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이극과 진목공(秦穆公;서기전 660-621)의 지지였다. 이오는 자신이 진(晉)의 왕이 된다면 이극에게는 분양(汾陽)의 땅 100만 무(畝)를 하사하고, 진목공에게는 황하 서쪽의 5개 성(城)을 내주겠다고 밀서를 보내 약속했다.

 

  진(晉)의 내부에서는 대신(大臣) 이극이 2공자인 이오를 추대하고서 영입대표단을 양(梁)으로 보냈고, 외부에서는 진목공(秦穆公)이 이오를 밀었다. 진목공은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5개의 성(城)이 마음에 들었고, 또한 자신의 부인인 목희(穆姬)의 혈육이란 점에서 이오에 대한 지지를 결정하였다.

 

  진목공은 명목상의 천자인 주양왕(周襄王;서기전 652-619)과 제후의 패자(覇者)인 제환공(齊桓公;서기전 685-643)의 양해를 얻어, 양나라에 군대를 파견해 이오를 진(晉)으로 호송시켜 왕으로 추대하였다. 


  진혜공은 왕위에 오른뒤에 하서(河西) 5성을 할양하겠다고 약속한 진목공(秦穆公)에게 대부 비정(邳鄭)을 보내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목공 어른의 도움으로 군주가 되고, 5개 성을 주겠다는 약속을 실천하려고 하였지만, 토지는 선왕(先王)이 이룩한 나라의 근본이라 결코 주어서는 안된다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러하오니 저의 간절한 뜻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진목공은 국서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배은망덕한 놈! 결코 한 나라의 군주가 될 재목이 아니었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보았어.”

  진혜공은 이어서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이극을 감옥에 가두었다.

  “너는 신하된 자로 두 왕을 죽였으니, 어느 누가 너의 군주가 되려고 하겠느냐?”

  이극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내가 만일 두 왕을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너의 오늘이 있었겠느냐? 그런데도 죄를 묻는다니 할 말이 없구나.”

 

  이극은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진혜공은 이어 대신 각예(卻芮)가 내놓은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대부 비정(邳鄭), 가화(賈華), 공화(共華) 등 9명을 희중이와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진혜공은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자, 곧바로 친형인 중이(重耳)를 떠올렸다. 자신이 진목공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듯이, 만일 중이도 제후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진혜공의 참모인 각예가 계책을 다시 올렸다.

  “옛날에 진헌공의 명령을 받아 포성을 공격할 때 사인피(寺人披)란 사람이 중이의 옷소매를 자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이가 돌아올까봐 걱정이 대단합니다. 그를 자객으로 보내는게 어떻습니까?”

 

  진혜공이 중이를 죽이고자 자객을 보냈다는 정보를 탐지한 대신 호돌(狐突)은, 밀서를 중이에게 보냈다. 호돌은 중이의 참모인 호언의 부친이었다.

 

  호언과 조쇠 등 여러 참모들은 중이와 의논하여 제나라로 가기로 결정했다. 마침 이때 제환공의 참모로 서기전 679년부터 제(齊)나라가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는데 1등공신이었던 관중이 서기전 645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 제나라는 지금 천하의 패자이고, 그 나라의 군주인 제환공은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의지하였던 관중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반드시 우리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중이 일행은 제나라로 망명지를 선택했다. 중이는 떠나기에 앞서 부인인 계외(季隗)에게 말했다.

 

  “뜻밖의 사건을 만나 제나라로 가야겠소.”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신가요?”

  중이는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두 아들을 낳아 잘 키워 주었으니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부인이오. 앞으로 25년을 더 기다리다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도록하오.”

  계외가 웃으며 말했다.

  “사나이가 뜻을 세웠으니 가는 길을 막지 않겠습니다. 제 나이 이제 25살이니, 다시 25년이 지나면 늙은이가 되어 있을텐데 어디로 재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제 염려는 마시고 큰 뜻을 이루소서. 저는 여기서 평생을 기다리겠습니다.”

  진혜공이 보낸 자객이 적국에 왔을 때, 중이 일행은 이미 제나라로 떠난 뒤였다. 희중이의 암살에 실패한 진혜공은 중이가 제나라로 도망갔다는 말에 추격을 멈추게 하였다.


   중이 일행이 제(齊)나라로 가기 위해서 위(衛)나라의 오록(五鹿;하남성 복양 동쪽)을 지날 때에, 너무나 허기가 져서 마침 밭에서 김매기를 하는 농부에게 밥을 동냥하였다. 농부는 그들을 놀리느나 일부러 바가지에 흙을 퍼담아 갖다 주었다. 공자 중이가 화를 내면서 농부를 채찍으로 패려고 하자, 조쇠(趙衰)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공자! 분노를 삭이시지요. 밥이 흙으로 바뀐것은 하늘이 농부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토지를 내리려는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중이는 기분이 들떠서 흙을 조용히 밭에다 뿌리고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제(齊)나라에 도착하니 제환공은 중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제환공은 중이에게 80필의 말을 선물로 주고, 아울러 종실녀인 제강(齊姜)을 중이에게 시집보냈다.

  중이는 이곳에서 편안하게 지내면서, 도무지 진(晉)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기전 645년에 희중이가 제나라로 떠날 때, 드디어 진목공과 진혜공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의 원인은 진혜공 희이오의 약속위반 때문이었다.

  본래 2년전인 서기전 647년에 진(晉)나라에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진혜공은 다급한 나머지 진목공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진목공은 대부 공손상(公孫桑)에게 물었다.

  “진혜공은 우리에게 은혜를 저버리고 약속을 어겼는데 도와 주어야 옳소이까?”

  “우리가 진(晋)에 많은 도움을 주면 그곳의 백성들도 감동을 할 것입니다. 만일 진혜공이 약속을 어기면 진(晋)의 백성들은 무도(無道)한 자신의 군주를 버릴 것이고, 우리 진(秦)의 백성은 배신감에 분노를 일으켜 더욱 단결할 것이니, 쌀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진목공은 대부인 백리해(百里奚)에게도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도 식량을 주어야 하겠소?”

  “하늘의 재앙은 어느 나라에도 닥치는 법입니다. 인의를 실천하면 다음에 반드시 복이 될 것입니다. 진(晋)의 군주가 옳지 못하지, 진의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대부들이 찬성을 하자 진목공은 지난날 진혜공이 자신에게 지키지 않은 약속을 묻어두고, 선박에 곡식을 가득싣고 위수(渭水)를 거쳐 분수(汾水)를 따라 도읍인 강도(絳都)까지 직접 호송하는 성의를 보였다. 이듬해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진(秦)에서 흉작이 들어 진목공은 진혜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혜공은 또다시 은혜를 저버리고 곡식을 반환하지 않았다. 진(秦)나라의 백성들은 배은망덕한 진혜공을 징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진목공은 이듬해인 서기전 645년에 한원(韓原)에서 진혜공을 대파하고 그를 포로로 잡아 개선하였다.

 

  이때 진목공(秦穆公)의 부인이고, 진혜공(晉惠公)의 누나인 목희(穆姬)는 성문에 장작을 쌓아두고, 자신이 낳은 태자와 딸을 끌어안은채 진목공에게 호소했다.

 

  “내 동생을 풀어 주고 두 나라는 화해를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몸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혀 자식들과 함께 죽겠습니다.”

  진목공은 하는 수 없이 진혜공을 석방하여 진(晉)으로 돌려보내는 대신에, 태자인 희어(姬圉)를 인질로 삼았다.

  진(晉)으로 돌아온 진혜공 이오는 실패를 교훈삼아 농지법을 바꾸고, 군사를 키우며 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점차로 국력을 키워나갔다.


         진진(秦晉) 전쟁이 있은지 2년뒤인 서기전 643년에 제환공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니 비빌 언덕을 상실한 희중이가 진(晉)으로 돌아가 왕이 될 가능성은 점점 멀어졌다. 게다가 제환공의 신하인 수습(竪習), 역아(易牙) 등이 정변을 일으켜, 태자 소(昭)를 제치고 무궤(無詭)를 옹립하였다. 그러자 제환공의 나머지 다섯 아들이 이에 불복하고, 제나라는 내전상태에 돌입하였다. 이듬해인 서기전 642년에 태자 소(昭)가 내란을 끝내고, 제효공(齊孝公;서기전 642-633)에 등극하였다.

 

 

  중이의 참모인 조쇠, 호언, 선진 등은 이제 제(齊)나라가 패업(霸業)을 상실하고 더 이상 자신들을 돌볼 수 없는 국가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나라에 온지 7년째인 중이는, 망명생활의 긴박감을 상실하고 남이 주는 환락에 빠져 무기력해졌다.

 

  하루는 참모들이 뽕나무 밭에서 긴급 회의를 열었다. 호언이 먼저 말했다.

  “공자와 함께 제나라의 국경 근처에서 사냥을 가자고 꼬인 다음에, 억지라도 빠져 나가도록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나라로 가는게 좋겠습니까?”

 

  조쇠가 말했다.

  “제환공이 죽고나서 천하가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마침 송양공(宋襄公)이 패업의 뜻을 지니고 있다하니, 송나라로 가는게 어떻습니까?”

 

  호언이 그말에 대답했다.

  “이 사람이 송나라의 사마(司馬) 공손고(公孫固)와 교분이 있으니 먼저 그곳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고,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초(楚)나 진(秦)으로 가도록 합시다.”

 

  모두들 호언의 의견에 동의를 하였다. 그러나 옛말에 벽에도 귀가 달려 있다고, 중이의 부인인 제강의 시녀(侍女)가 우연히 엿듣고 이를 부인에게 고하였다. 제강은 비밀이 탄로날까 오히려 시녀를 꾸짖고는, 그날 밤에 시녀를 죽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끼던 시녀를 죽이고 착잡한 심정으로 잠에 취해있는 중이를 깨웠다.

 

  “공자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참모들을 두셨는데, 오히려 공자는 큰 뜻을 접고 매일 안일한 삶만 추구하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중이는 부시시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인생이란 물처럼 화살처럼 지나가는 법이오. 한세상 마음이 편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소?”

 

  “당신은 진(晉)나라의 공자입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이곳에 머물고 있을 뿐이지, 당신을 믿고 따라온 참모들은 보이지 않나요? 당신은 저들의 희망이고 생명이고 밑천입니다.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저들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지, 한낱 나같은 아녀자의 치마폭에 파묻혀 있어서야 어디 대장부라 할 수 있나요?”

  “부인이 뭐라해도 나는 죽을때까지 이런 안락을 누리며 살고 싶소.”

  제강은 더 이상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이며 방을 나갔다.

 

  이튿날 호언과 조쇠가 일찍 중이를 찾아왔다. 중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채 모기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몸이 불편하니 그대들 먼저 사냥을 가면 내가 곧 따르겠소.”

  제강이 그 소리를 듣고 몰래 밖으로 나와 호언을 밀실로 불렀다.

  “공자께서는 적국(翟國)에 있을 때 하루라도 사냥을 멈춘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나라에 와서는 오랫동안 사냥을 하지않아 군살이 찌고 근육이 굳어 있습니다. 이래서야 어디 큰 뜻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제강이 그 말에 웃으며 답했다.

  “이번 사냥은 송나라가 아니면, 초나라나 진(秦)나라 이겠군요?”

  호언은 제강의 말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디 그리 멀리 갈 수 있겠습니까?”

  제강은 호언에게 시녀에게 들은 말을 모두 토로하고, 굳은 결심을 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이 몸이 공자를 취하게 할터이니, 수레를 가지고 와서 멀리 떠나도록 하세요.”

  호언은 그제서야 제강에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이날 저녁에 호언과 조쇠 등은 제강의 조치에 따라 수레를 가지고 와서 술에 취한 중이를 싣고 조(曹)나라로 갔다. 아침이 되어 술이 깬 중이는 화가 치밀어 호언에게 칼을 빼들었다.

 

  “저를 죽이고 큰 뜻을 이룬다면 기어코 그 칼을 받지요.”

  중이는 호언의 굳은 결심에 다짐을 받는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알았소.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살코기를 베어 먹으리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제 살은 너무 굳어서 먹기가 불편할 것입니다.”

  중이는 호언의 말에 그만 화가 풀어졌다.

 

  중이 일행은 조(曹)나라에도착했으나, 조공(曹公)에게 푸대접을 맏고 이번에는 송(宋)나라로 발길을 돌렸다. 송양공은 중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제후의 예로 대접하였다. 호언과 교분이 있는 사마 공손고가 말했다.

 

  “우리 송(宋)은 작은 나라이고 초(楚)와 전쟁에서 패하여 공자의 귀국(歸國)을 도울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공자께서는 훗날에 반드시 대국의 도움을 받아 뜻을 이룰 것으로 믿습니다.”

  중이가 송나라를 떠나자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누워있던 송양공은 20대의 수레를 선물로 내어 중이 일행을 전송하였다.

 

  중이 일행은 다시 정(鄭)나라로 수레를 돌렸는데, 정나라의 정문공(鄭文公)은 중이를 홀대하였다. 대부 숙첨(叔詹)이 간언하였다.

 

  “중이는 현덕하고 인의가 있어 진(晋)의 백성은 물론이고 이웃 여러 제후국의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습니다. 게다가 진(晋)과 정(鄭)은 모두 주(周)왕실과 한 집안으로 동성(同姓)의 국가입니다. 이번에 도움을 주시면 훗날 틀림없이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문공은 대국을 보는 안목이 낮아서인지, 정처없이 떠도는 중이 일행을 차갑게 대하고 나라밖으로 내쫒았다.

 

  마침 이때에 초성왕(楚成王;서기전 672-626)은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야심 때문에 중이를 불러들였다. 초성왕은 중이를 제후의 예로 대접하고 어느날 잔치에 불러 직접적으로 물었다.

  “내가 공자를 도우면 공자는 나중에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화살깃털에 쓰는 새깃이나 짐승가죽은 물론이고 상아, 코뿔소뼈와 같은 진귀한 물품도 마땅히 초나라에 있으니 대왕께서는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하십시오?”

 

  사실 초성왕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교두보가 될만한 토지를 원하였다. 그러나 초성왕은 노골적으로 요구하거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야 무엇으로 받아도 좋겠지만, 역시 공자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겠소?”

  중이는 한참 머리를 굴리는듯한 표정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몸이 귀국하여 군주가 되었는데, 부득이 우리 진(晉)과 초(楚)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저는 우리 군대를 3사(舍)나 뒤로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사(舍)란 30리를 말한다. 춘추시대에는 군대가 행군할 때 하루에 1사(舍)를 움직였다. 따라서 3사는 90리로 3일의 행군거리에 해당하였다. 이때에는 상대에 대한 예의로 군대를 뒤로 퇴각하는 일이 빈번하였고, 이를 인의(仁義)라고 여겼다.

 

  중이의 이야기를 들은 초나라의 장군 자옥(子玉)은 초성왕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토록 중이 공자를 후하게 대하는데, 그는 뒷날 우리와 전쟁을 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초나라의 잠재적인 적이오니 이참에 죽여 버려 후환을 없애지요.”

  초성왕도 심정으로는 동의를 하지만, 부덕(不德)하고 옳지 않았다는 주변국가의 비난이 두려워 중이를 죽이지는 못하였다.


  중이가 초나라에 온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진(秦)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진혜공의 아들 어(圉)가 부왕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탈출하여 진(晋)으로 달아났다. 진혜공은 아들 희어를 본 얼마후 세상을 떠나고, 태자 희어(姬圉)가 진(晉)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 이가 진회공(晉懷公;서기전 637-636)이다.

 

  진목공(秦穆公)은 진(晉)을 제어할 수 있는 인질이 달아나자 이제까지의 생각을 바꾸고, 19년동안 망명지를 떠돌아 다니는 희중이(姬重耳)를 지원하여 왕위에 올려놓아 우호적인 이웃 국가를 만들기로 하였다.

 

  서기전 637년에 중이 일행은 진목공의 초청을 받아 진(秦)나라에 도착하였다. 진목공은 이때 과부아닌 과부가 된 딸 회영(懷嬴)을 공자 희중이에게 시집보냈다. 원래 회영은 진회공 희어의 부인이었다. 진혜공을 석방하고 태자 희어를 인질로 삼은 진목공은, 희어를 회유하고자 자신의 딸인 회영(懷嬴)을 시집보냈다. 그런데 희어가 진(晉)으로 달아날 때 회영은 부친을 배신할 수 없다며 동행을 거부하고 진(秦)나라에 남았다.

 

  그동안 진목공은 진헌공과 사돈지간, 진혜공과는 처남매부, 진회공과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였다. 이제 그런 와중에 희중이는 자신의 외종질녀이며, 조카며느리인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진목공은 처남매부 사이에서 장인이 되었다.

 

  진회공은 친백부(親伯父)가 자신의 아내였던 회영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화가나서 온 나라에 공고했다.

 

  “중이를 따르는 진(晉)의 신하들을 3개월 이내에 투항시키면 옛날의 관직을 다시 회복시키고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 만일 이를 어길시에는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화를 당할 것이다.”

 

  3개월이 지나도 소득이 없자, 진회공은 희중이의 참모인 호언의 부친 호돌(弧突)을 처형하였다. 이때부터 진(晉)의 대신들과 백성들은 진회공을 원망하며, 공자 희중이가 귀국하여 새로운 군주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희중이는 더 이상 시기를 늦출수 없다고 여기고 진목공을 찾았다.

  “사위는 걱정하지 말게나. 성급하게 처리하면 실수가 있는 법이니 조금만 참으시게. 내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진(晋)으로 가주겠네.”

 

  며칠후 진목공은 수레 4백승(乘)과 3천명의 정예병을 딸려보내 희중이를 진(晉)으로 호송시켰다. 공자 중이가 진(秦)의 대군을 이끌고 진(晋)의 국경에 이르자 대다수 군인들이 희중이를 환영하였으며, 길가의 백성들도 두손을 치켜들고 반겼다. 진회공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고량성(高梁城)으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19년의 유랑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희중이는 그때 나이가 63세였고, 역사에서는 진문공(晉文公;서기전 636-627)이라고 한다.


  적국(翟國)의 계외(季隗)와 두 아들은 희중이가 진문공에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단걸음에 달려왔다. 진문공은 계외의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부인의 나이는 어떻게 되오?”

  계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25년을 기다렸으면 50이 되었을 터인데 7년밖에 지나지 않아 겨우 32살이 되었어요.”

  “참으로 25년이 되지않아 다행이오.”

 

  진문공이 감회에 젖어있을 때, 이번에는 제나라에서 두 번째로 아내삼은 제강(齊姜)이 찾아왔다. 진목공의 딸인 회영은 자신이 가장 지위가 높은 처지라고 생각하다가, 두 여인의 포부와 아량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고 첫째, 둘째 부인의 자리를 양보하고 셋째 부인에 만족하였다.

 

  이런 점에서 진문공은 3명의 훌륭한 부인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부친인 진헌공이 여희(驪姬)라는 여인을 얻고나서, 진(晉)나라가 무려 20여년의 내란에 휩싸인 사실을 본다면 말이다.

 

  진문공은 옛날 포성을 다스릴때 두 부인이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고, 다만 아들 환(驩)과 백희(伯姬)라는 어린 딸이 생존했다. 그런데 환란중에 데리고 떠나지 못해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이때 두수(斗須)라는 포성의 창고지기가 거두어 성인으로 키웠다. 진문공은 종법(宗法)의 예에 따라 큰 아들인 환(驩)을 태자로 세우고, 백희는 자신의 참모인 조쇠(趙衰)의 아내로 삼았다. 이때 백희도 어머니가 되는 계외, 제강, 회영이 서로 다투지 않고 차례대로 서열을 정하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조쇠가 적(翟)에서 얻은 숙외(叔隗)에게 첫 자리를 양보했다.


   진문공은 자신의 등극을 도운 공신들에 대해 논공행상을 하였다. 자신을 따라 망명생활을 한 신하는 1등급, 자신과 연락을 취하며 도움을 준 신하는 2등급, 자신이 진(晋)에 왔을 때 진회공을 버리고 자신을 환영한 신하는 3등급으로 삼았다. 그런데 1등공신이어야 할 개자추(介子推)가 공신명단에서 빠졌다.

 

  개자추의 어머니는 이제껏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는데, 아무런 논공행상도 받지 못하자 아들에게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너의 공이 크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상 하나 받지 못했단 말이냐?”  개자추는 그런 어머니의 손을 쓰다듬으며 그냥 웃었다.

  “내가 들으니 지난날 공자께서 적국을 떠나 제나라로 갈 때 며칠을 굶어 쓰러졌는데, 네가 허벅지의 살을 몰래 구워 공자를 살렸다고 들었다. 그런 너를 못본척 외면해서야 쓰겠느냐?”

  “어머니! 선왕 진헌공에게는 9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주군이 가장 현명하고 인덕이 넘치시는 분이라, 진나라의 종묘사직은 이제 걱정이 없습니다. 저는 공명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니, 어머니를 모시고 짚신을 기우며 살아도 충분합니다.”

  개자추는 어머니를 모시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웃에 사는 선비가 개자추를 홀대한 진문공을 원망해서 시 한수를 성벽에 붙혔다.


  “용이 하늘로 오르고자 하니 다섯 뱀이 도왔다네.

  용이 하늘에 올라보니 네 마리의 뱀만 곁에 있어라.

  마리 홀로 원망하여 끝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라.”


  진문공은 이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개자추를 찾았지만, 깊은 산속에 숨어버린 그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게 산불을 놓으면 산밑으로 내려올 것이라 여겼다. 사흘 후 산불이 꺼지고 개자추는 여전히 내려오지 않았다. 진문공은 온 산을 되져 개자추를 찾았는데, 그는 나무 밑에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불에 타서 죽은 뒤였다.

 

  진문공은 개자추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진문공은 개자추가 숨어 산 면산(綿山)에 개자추 모자(母子)의 무덤을 만들고 이 산을 개산(介山)이라 고치고, 마침 산불을 놓은 날이 청명절(淸明節)이라 그날부터 1달동안 뜨거운 밥을 먹지 않았다. 뒤에 이 풍습은 3일동안 찬 밥만 먹는 금화(禁火), 금연(禁煙)으로 불렸고, 청명절 전날에 찬밥을 먹고 묘지를 청소하는 풍습을 한식(寒食)이라 하였다.

 

 

  진문공은 19년의 유랑생활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아직 진(晉)은 천하의 패권을 논할 수 있는 국력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인재를 알아보고 쓰는 안목이 있었다. 진문공은 지난날 자신을 헤치려던 사인피(寺人披)의 능력을 사서 그를 중용하였다. 많은 이들이 지난날의 과거를 들먹이며 반대를 하자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지난날 제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룬 관중은 원래 제환공에게 화살을 겨눈 사람이었소.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를 쓴다면 반드시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할 것이오.”

 

  진문공의 예상대로 사인피는 얼마후 제몫을 다하였다. 진문공이 등극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서기전 636년 겨울의 어느날, 주(周)왕실에서 변란이 발생했다. 이때 주나라는 주양왕(周襄王;서기전 652-619)이 천자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서기전 652년에 제환공의 도움으로 태숙(太叔) 대(帶)를 물리치고 천자가 된 사람이었다. 태숙 대는 국외로 도망다니다가 12년후인 서기전 640년에 동주(東周)로 돌아와 북방의 적인(狄人)과 연합하여 주양왕을 내쫒고 자신이 천자가 되었고, 주양왕은 이웃인 정(鄭)나라로 달아나 진목공과 진문공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진문공은 이때 출병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조쇠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중원의 패자가 되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선 천하에 천자를 보호하고 오랑캐를 내쫒는다는 근왕양이(勤王攘夷)를 명분으로 내걸고, 가장 빠른 시간에 군사들 동원하여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진(秦)은 우리보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당도하여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 어느 누가 존왕(尊王)의 깃발을 들지않고 천하제후의 패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진문공은 군대를 이끌고 태숙 대(帶)와 적인을 기습하여, 적인을 국경 밖으로 내쫒고 태숙 대를 사로잡아 주양왕에게 인계했다. 주양왕은 감격하여 진문공에게 도읍지인 낙읍(洛邑;낙양)의 주위에 있는 양번(陽樊;하남 제원)과 원성(原城)의 땅을 하사했다. 이때 두 성의 주민이 진문공에게 강력하게 저항을 하자, 지난날 자객이었던 사인피가 용감하게 앞장서서 두 성의 반항을 잠재웠다.

 

  진문공은 주양왕을 보호한 조치로 천하 제후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마치 지난날 제환공이 주양왕을 도와 패자(覇者)가 된 일과 같은 반열에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진문공이 등극한지 2년이 되는 서기전 635년에 백성을 동원하려 하는데, 좀처럼 영(令)이 서지 않았다. 호언이 계책을 내놓았다.

  “신의를 내세우면 백성들은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문공은 병사들에게 열흘분의 식량을 주고 원(原)이란 성을 공격하였다.

  “열흘안에 저 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철수할 것이다.”

  그러나 원(原)은 너무 견고하여 열흘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았다. 진문공은 약속대로 철수를 준비하였다. 이때 성안에서 병사 한 명이 빠져나와 진문공에게 아뢰었다.

  “3일만 더 공격하면 원(原)은 무너집니다.”

  주위의 장수들도 철수를 말렸으나 진문공은 병사들에게 약속한 신의(信義)가 중요하다며 철수했다.

 

  성안에 있던 원(原)의 백성은 신의를 지키는 진문공에게 감탄하여 곧바로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진문공은 이곳 원(原)을 조쇠(趙衰)의 봉읍으로 삼았다.

  초성왕은 이때 송나라와 패권을 다투고자 서기전 633년에 정(鄭), 진(陳), 채(蔡), 허(許)나라와 연합군을 조직하여 송(宋)나라의 도읍인 상구(商丘)를 포위공격 하였다. 송나라는 진문공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선진이 진문공에게 말했다.

  “송나라를 도와 지난날의 은혜에 보답하고, 주군의 패업을 이룩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송나라를 대신하여 제(齊)와 진(秦)에 후한 예물을 보내 초나라가 송나라에서 철수하도록 설득을 요청하시고, 우리는 조(曹)와 위(衛)를 협박하여 일부를 송(宋)에 나누어 주라고 하면, 초나라는 제(齊)와 진(秦)의 설득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와 진은 오만한 초(楚)나라에 화가 나서 우리의 연합에 응할 것입니다.”

 

  호언이 이어서 계책을 내놓았다.

  “상황이 그렇게 전개가 되면, 이제 우리 진(晉)은 먼저 초나라에 붙어있는 위(衛)와 조(曹)나라를 치면 됩니다. 그러면 초나라는 두 나라를 구하고자 송나라의 포위를 풀것입니다.”

 

  진문공이 이때 호언에게 되물었다.

  “나는 이제껏 맛난 음식과 고기를 궁전에 가져다 놓고, 술은 진하게 익었을 때, 고기는 딱딱하게 굳기전에 모두에게 싫증이 나지 않도록 배불리 먹였소. 소를 잡아도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세금으로 들어온 많은 재물도 병사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였소. 이러한데 백성들로 하여금 싸움터에 나가게 할 수 있겠소?”

  “그건 안되는 일입니다.”

  호언의 대답에 진문공이 계속 말을 이었다.

  “백성의 세금을 낮추고 형벌을 가볍게 하면 백성들을 싸움터로 내몰 수 있겠소? 장례비용이 모자라면 비용을 대주고 사람을 보내 뒷일을 처리해주고,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풀어주고, 가난한 백성에게 돈을 주었다면 백성들이 싸움터에 나가겠소?”

  “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과 발전을 돕는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전쟁은 사람을 죽이게 하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복종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이익때문인데, 복종을 한다고 무작정 전쟁터로 보내면 그들은 복종하는 이유가 없어지고 결국은 나가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호언의 말에 진문공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해야 전쟁에 나가게 할 수 있겠소?”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를 앞세우고 신상필벌의 원칙을 세우면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앞에서는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평등해야 하며, 법을 어기는 사람은 사사롭게 용서해서는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진문공은 이튿날 사냥을 가기로 정한 다음에, 늦게오는 자는 군법에 따라 처벌한다고 하였다. 마침 진문공이 평소에 아끼는 장수 한 명이 늦게 도착하자, 진문공은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도록 지시하였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법의 공정함과 무서움을 느꼈다.

 

  “우리 주군께서는 가까운 사람도 눈물을 머금고 처형하셨다. 우리라고 예외가 될 수 있겠느냐?”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처벌하여 군기를 잡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는 뒷날의 이야기이지만, 진문공은 이때 철저하게 이를 실행하였다.

 

  진문공은 송양공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박대한 조(曹)나라를 먼저 공격하였다. 위(衛)나라는 진문공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문공은 황하를 건너 우회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고, 이어서 위(衛)나라의 오원을 빼앗았다. 위나라는 급히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위(衛)나라의 백성들은 오히여 진문공의 신의를 믿고 진(晉)에 투항하였다.

 

  진문공은 여세를 몰아 조공(曹公)을 포로로 잡고 정(鄭)나라를 공격하였다. 초성왕은 하는 수 없이 장군 자옥을 남겨두고 자신은 정(鄭)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이때 제(齊)와 진(秦)이 진(晋)과 연합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다. 초성왕은 하는 수없이 철군을 단행하여 자신의 영지인 신지(申地;하남성 남양)로 돌아왔다. 그런데 장군 자옥(子玉)이 호승심과 자만심을 이기지 못하고, 초성왕의 철군명령을 듣지 않은채 진문공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로잡은 위군(衛君)과 조공(曹公)을 풀어주고 두 나라의 복국을 약속한다면 송나라의 포위를 풀고 돌아가겠다.”

  진문공은 오히려 위군과 조공에게 초(楚)나라와 단교한다면 복국을 시켜주겠노라 약속했다. 두 사람은 일찍이 진문공이 신의가 있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楚)나라와 단교를 선언했다.

 

  자옥(子玉)은 자신이 농락당하였다고 여기고 진문공을 향해 군사를 돌렸다. 진문공은 이전에 자신이 초성왕에게 약속한대로 3사(舍)를 후퇴하는 예의를 지켰다. 자옥은 진문공이 겁을 먹고 후퇴를 한다고 여기고 무작정 공격했다. 진문공은 위국(衛國)의 성복(城濮)으로 물러나 진(秦)과 제(齊)의 연합군과 합세한 뒤에 초(楚)의 대군을 전멸시켰다. 진문공은 이때의 성복전쟁으로 모든 제후국을 아우르는 패자가 될 수 있었고, 초성왕은 패자의 꿈을 접어야했다.

 

  진문공은 초나라를 물리쳐 지난날 자신에게 후하게 대접한 송양공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었고, 천하의 백성들과 군주들에게는 신의가 두터운 사람이라는 명성을 천하에 얻었으며, 위(衛)와 조(曹)를 지원세력으로 확보했고, 진(秦)과 제(齊)를 동맹국으로 삼을 수 있었다.

 

  성복대전이 끝나고 얼마뒤인 서기전 632년 6월에 진문공은 천토(踐土)에서 제(齊), 송(宋), 노(魯), 채(蔡), 정(鄭), 위(衛), 거(莒)나라의 군주를 초빙하여 회맹을 갖고 제후들의 패자인 후백(侯伯)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6년을 진(晉)의 군주로 지내며 패자(覇者)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진문공은 19년 유랑생활의 대미(大尾)를 이렇게 후백(侯伯)으로 끝을 맺었지만, 63세에 군주가 되어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숱한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끝내 대업을 이루었다.

 

 

  진문공의 성공은 먼저 기다림에 있었다. 그의 19년은 기다림으로 점철된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만일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주변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나가 결국은 외톨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선택은 희망을 바탕으로 하는 기다림이었다.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 군주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이 성공을 보장하는 열매요 샘물이었다. 그래서 진문공 희중이 본인도 기다렸고, 호언, 조쇠, 선진 등 참모들도 기다렸고, 부인들도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품었다 할지라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믿음을 주느냐 하는 문제는 또다른 과제이다. 과연 이 사람은 훗날 성공하여 군주(君主)가  될 수 있겠는가? 기다림속에서 진문공은 자신을 따르는 가신(家臣)들에게 지속적으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몇차례 도중하차 할 수 있는 위기가 있었다. 그럴때마다 망명지에서 얻은 부인들이 그를 재찍질 하였다. 어느 누구는 훌륭한 부인을 만난게 그의 복이라 하겠지만, 그에게 부인을 감복시키는 능력이 없었다면 희망없는 그에게 어느 부인이 자신을 희생하며 기다려 주었겠는가?

 

  세 번째는 진문공에게 어떤 인간적인 매력과 능력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진헌공이 아들인 진문공 희중이를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적(翟)의 군대와 포성의 군대를 이끌고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는데, 그는 아들의 신분에서 아버지인 진헌공을 공격하는게 인의(仁義)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망명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 많은 참모들이 주저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난세의 시기에 우리는 자칫 무력기반이 승리의 전제조건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훗날의 대학자인 공자(孔子)는 제환공이 관중을 기용한 일이나 진문공이 사인피를 용서한 일은 인의(仁義)의 표상이라 자주 언급하였고, 나아가 군사와 식량과 민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이라고 설파하였다. 식량과 군사는 바로 모을 수 있지만, 한번 흩어진 민심은 좀처럼 얻기가 어려운 법이다.

 

  희중이는 이런 면에서 인의(仁義)를 실천하여 백성의 믿음을 가장 큰 자산으로 가졌다. 따라서 19년의 세월이란 시간이 흘러갔는데도 민심이란 기반은 여전히 진(晉)에서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후들이 패권을 추구하던 시대에, 19년의 망명생활을 하다가 끝내 제후의 패자가 된 진문공의 삶의 궤적은,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힘을 얻고 방향을 잡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였다.

 

  공자(孔子)는 이를 두고 진문공은 만고의 치적을 쌓았다고 말했다. 만고의 치적이란, 인덕(仁德)과 신의(信義)를 가지고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다는 뜻이다.(완)

 


 

 

 

                      서신 진문공 []

 

 

  인재를 천거한 춘추 시대 진()나라 대부()인 서신()과 그 말을 듣고 등용한 진문공()을 가리킴. 서신의 자()는 계자()이며, 구()를 채지()로 받았기 때문에 구계() 또는 사공계자()라고도 하는데 문공을 따라 망명길에서 기결()의 사람을 높이 평가하여 추천하게 되었고 문공도 기꺼이 등용한 데서 나온 고사.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서신은 오히려 한 번 기결을 보고 천거하였으며, 진나라 문공도 한 번 그 말을 듣고서 능히 등용했으니, 재주만 있으면 등용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비록 초야의 선비라도 얻어 쓰려고 하면, 등용하는 방법에 구애된다느니 너무 빠르다느니 하고 말을 하니, 인재를 얻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다.
(원문)
[영조실록 권제56, 20장 뒤쪽, 영조 18년 10월 2일(정해)]

 

 

 

 

      

               제36계. 주위상(走爲上) 

 

                                                                - 도망치는 것도 뛰어난 전략이다.-

원본: 곡천의 블로그  

 

  (36계 줄행랑이란 말은 병법에는 없는 말이랍니다. 바로 여기 주위상이 한문을 잘 몰라서 그렇게 줄행랑으로 발음 했던지 또는 중국식 발음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언어가 아닌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답니다.)


 

   강한 적과 싸울 때는 퇴각하여 다시 공격할 기회를 기다리는 것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도주는 자주 사용되는 군사전략의 하나이다.


   이 말의 출전은 <남제서(南齊書)·왕경즉전(王敬則傳)>에 "단공삼십육책(檀公三十六策), 주위상책(走爲上策)" 이라고 나와 있다. 전군(全軍)이 퇴각한 후 시기를 기다려 적을 쳐부순다. 적 군사력이 절대우세를 점해 아군이 그를 이길 수 없으면 투항하거나, 강화 또는 퇴각하는 3가지 길밖에 없다. 투항은 곧 실패이며, 강화는 절반의 실패이지만 퇴각은 실패가 아니다. 적절히 대비하면 승리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계획적이고 주동적으로 후퇴해 기회를 기다려 공격한다.


  춘추시대 초기, 초나라가 날로 강성해져 초나라 장수 자옥(子玉)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晉)를 공격하였다. 초나라는 진(陳),채(蔡),정(鄭),허(許) 등의 작은 네 나라에게 출병하여 초나라의 작전에 응하도록 위협하였다.

 

  이때 진문공(晉文公)은 초나라에 종속된 조국(曹國)을 공격하였는데, 진나라와 초나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옥은 부대를 이끌고 호탕하게 조국을 향해 출전하였는데 진문공이 형세를 분석하였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초는 강하고 진은 약하니 그는 잠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외부에는 "내가 할 수 없이 도망을 가지만 초나라 선왕은 나에 대해 예의로 대하였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그와 약속했다. 장래 만약 내가 진나라로 되돌아온다면 두 나라가 수교하기를 희망한다. 만약 부득이 두 나라가 전쟁을 한다면 나는 먼저 삼사(三舍:90里)를 물러날 것이라고 약속했다. 현재 자옥이 나를 치려 하니 나는 약속을 이행해 삼사를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90 리를 물러나니 이미 진나라 변경인 성복(城僕)에 다달았다. 자옥이 부대를 이끌고 성복으로 추격하여 가자, 진문공은 진지를 확고히 정비하였다. 진문공은 이미 초나라 좌-중-우군 중에서 우군이 가장 약하고, 우군의 앞에는 진, 채나라 사병으로 그들은 싸울 의지가 전혀 없이 강제로 참전한 것을 알고 있었다.

 

  자옥은 좌우 군이 먼저 나아가도록 하고, 중군이 그 뒤를 따르도록 명령하였다. 초나라 우군이 진군을 공격했으나, 진군이 계속 도망을 가자 급히 쫓아갔다. 갑자기 진군이 말머리를 돌렸는데, 진군의 말에는 호랑이 가죽이 씌여져 있었다. 진, 채군의 말들은 그것이 호랑이인줄 알고 놀라, 말 위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떨어졌다. 초나라 우군은 대패하였다.

 

  진문공은 병사를 보내어 진, 채나라 병사로 분장하여 자옥에게 첩보를 하였다. "우군은 이미 승리를 거두었으니 빨리 공격을 하십시오."하자, 자옥은 멀리 진군의 후방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흐뭇해했다. 그 말만 믿고 자옥은 총 공세를 펼쳤지만, 초나라 군은 진군의 매복공격에 빠져 모두 섬멸되고 말았다. 자옥은 그때서야 함정에 빠진 줄 알고 도망을 쳐,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하였다.


  * 이상의 36계 인생전략 내용은 박재희 교수의 홈 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며,  여기에서 부족한 부분은  네오스톤 바둑 사이트 중에서 따온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