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춘추전국시대 개요-1

영국신사77 2007. 1. 6. 23:57
춘추전국시대 개요-1
양승국
일반
 

 

중국사의 혼란기 춘추전국시대





         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태동

춘추전국시대는 주(周)나라가 수도를 동쪽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기원전 770년에서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혼란기를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는 기원전 770년 시작하여 한(韓), 위(魏), 조(趙)가 진(晉)을 3분하여 독립한 기원전 403년으로 끝난다.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공자가 저술한 ‘춘추(春秋)’에서 유래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의 종말을 시점으로 하여 진(秦)의 중국통일을 끝으로 한다.1) 전국이라는 명칭 역시 ‘전국(戰國)’이라는 책에서 유래하였다.





                  Ⅱ.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라는 말은 춘추시대 열국(列國)의 패권을 잡은 다섯 제후를 가리킨다. 주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고 각 중원제후국이 서로 침략을 일삼고 있을 때 이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초(楚)가 남방에서 강성해지자 제후들은 제국을 다스려 봉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이러한 역할을 하던 주왕은 권위가 실추되어 존왕양이, 계절존망(尊王壤夷, 繼絶存亡)2)이라는 말 아래 주왕을 대신하여 만이(蠻夷)를 토벌하는 패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패자 진 문공(晉文公) 이후 패자의 성격은 변질하여 중원제후가 아닌 남방의 만이(蠻夷)들도 패자를 칭하게 되어 존왕양이의 성격도 희미해져가고 점점 더 주왕을 핍박하고 주 왕권을 부정해 나갔다.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3) 여기서는 조기(趙岐)의 설을 들어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 진 목공(秦穆公), 초 장왕(楚莊王), 송 양공(宋襄公)으로 한다.



                   1. 제 환공(재위 BC 685 ~ BC 643)

 환공은 최초로 패자 칭호를 얻은 제(齊)의 임금이다. 관중4)을 중용하여 재상으로 삼고 정치, 군사, 경제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존왕양이'를 주창했다. 환공은 동해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강국으로 발전시켰으며, 산융(山戎)을 정벌하여 연(燕)을 구하고 적나라를 평정하여 형(邢), 위(衛)를 지켜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656년 노(魯), 송(宋) 등 8개국 연합군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지역인 소릉에서 남방의 초(楚)를 격퇴하여 초의 북진을 저지함으로서 패자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651년, 환공은 규구에서 노(魯), 송(宋), 정(鄭), 위(衛), 허(許), 조(曹) 등의 제후들과 회맹하면서 패자의 지위를 굳건히 하였다. 제환공은 43년의 재위기간 동안 26차례의 회맹을 주재하였다. 그러나 관중사후 관중의 유언을 무시하여 자신이 등용한 간신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고 후에 내란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2. 진 문공(재위 BC 635 ~ BC 628)

 부친인 헌공 사후 치열한 내전을 겪으면서 19년간의 망명생활을 겪으면서 진 목공(秦穆公)의 도움을 받아 62세에 군위에 올랐다. 군위에 오른 후 조쇠, 호외, 선진 등의 현신을 등용하여 국력을 증가시켰다. 이후 주양왕이 왕실의 내란으로 정나라로 피신하자 주양왕을 도와 난을 평정하였다. 이어서 기원전 632년 송(宋)의 원조요청을 받아들여 북진을 노리는 초(楚)를 성복전투5)에서 크게 이겨, 전후 천토에서 주양왕을 맞아 제후들과 회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문공은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가 되었다. 문공은 비록 8년간 재위하였으나 재위기간 동안 현신을 많이 등용하여 국력을 증강시켜 사후에도 패업이 계속되었다.



                    3. 진 목공(재위 BC 660 ~ BC 621)

   목공은 이름이 임호이며 성은 영으로 진(秦)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주가 되었다. 재위기간 중 국정을 정비하고 지금의 감숙, 영하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발전하기 시작했다. 재상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여 국정을 정비하였고 동으로는 하서지방을 차지하고 서로는 서융(西戎)을 정벌하여 패자가 되었다. 목공은 신분고하 국적에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여 백리해와 건숙을 얻을 수 있었으며 망명생활 중이던 진 문공(晉文公)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진 문공의 동생인 진 혜공에게 두 번이나 속으면서도 흉년이 든 진(晉)나라 백성을 위해 곡식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죽으면서 수백명을 같이 순장하여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4. 초 장왕(재위 BC 614 ~ BC 591)

   성은 웅이고 이름은 여이다. 재위 초 간언하는 자는 참수하겠다고 말하면서 삼년동안 국정을 제쳐두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오거와 소종을 간언을 받으면서 부패한 신하를 숙청하고 간언한 신하를 중용하면서 국력을 신장시켰다. 기원전 606년 낙양부근까지 쳐들어 온 융(戎)을 토벌하고 낙수 변에 군대를 진주시켜 주왕실을 위협하였다. 그 후 기원전 597년 정(鄭)과 송(宋)을 굴복시키고 필의 전투6)에서 진(晉)에게 대승하면서 패자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존왕양이와는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진(陳), 정(鄭) 등의 나라를 압박하면서도 멸망시키지 않아 춘추오패 중 하나로 일컫어진다.



                         5. 송 양공(재위 BC 650 ~ BC 637)

   성은 미이며 이름은 자보이다. 배다른 형 목이를 재상으로 삼고 바른 정치를 펴 나라를 안정시켰다. 기원전 642년 제 환공(齊桓公)이 죽기 전 셋째 아들인 소의 뒤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아 환공 사후 제후들의 연합군을 이끌고 두 차례나 제나라에 들어가 후계자 쟁탈전을 진압하여 소를 옹립하여 제의 군위에 올렸다. 이 일은 양공의 야심을 일으켜 목이의 간언을 무시하고 제후들과 회맹하려 하였으나 초의 방해로 실패했고 오히려 초 성왕이 그를 체포하였다가 강화조약을 맺고 풀어주었다. 돌아온 양공은 초의 속국처지였던 정(鄭)을 치고자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와 홍수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양공은 헛된 인정7)을 베풀어 싸움에서 대패하였고 그 상처로 2년 후 사망하였다. 양공은 비록 초에게 대패하였지만 나름대로 회맹을 주재하였고 주왕실에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춘추오패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Ⅲ. 전국칠웅(戰國七雄)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서주 이래의 제후국은 거의 멸망하고, 그들을 병합한 강대한 7개국이 서로 대치하게 된다. 그 7개국은 진(晉)이 셋으로 나뉜 한(韓), 위(魏), 조(趙)의 3개국과 전씨가 강씨를 몰아낸 제(齊), 연(燕), 초(楚), 진(秦)인데 이 7국을 일컫어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한다. 이들은 모두가 스스로 왕을 자칭하였고 관료기구를 정비하면서 국내체제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타국에 대항하기 위해 국적과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 중에서도 서방에 자리하고 있던 진(秦)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1. 제(齊)

   진(陳)나라에서 제나라로 망명한 대부 전씨가 기원전 5세기의 전걸(田乞), 전상(田常) 부자시대에 점차 제나라의 실권을 잡고, 기원전 391년에 전화(田和)가 주왕으로부터 정식으로 제후로서 인정을 받아 성립된 나라이다. 본래의 제(강태공이 세운 춘추시대의 제)와 구별하여 전제(田齊)라고 한다. 제의 영토는 산이나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였고 도읍지인 임치는 대상업도시로서 번창하였다. 특히 위왕(威王), 선왕(宣王) 시대가 전성기였으며, 타국으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왕의 조언자가 되었다. 이웃나라인 연(燕), 위(魏)와 대립하였다.  기원전 3세기 말에 서쪽으로부터 진(秦)의 통일의 손길이 뻗쳐서 기원전 221년 마침내 진에 항복하였다.



                                     2. 조(趙)

   조씨는 춘추시대에는 진(晉)의 유력한 귀족의 하나였으나,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한(韓), 위(魏)씨와 함께 진의 영역을 3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기원전 403년에는 제후로서 공인되었다. 조의 전성기는 무령왕(武靈王)8)의 시대로서 기마전법을 채용하고 무력적 정복을 거듭하여 북변에 도읍을 설치하였다. 다른 전국 열강과 더불어 조왕(趙王)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도 이 왕의 시대이다. 그러나 아들 혜문왕(惠文王) 시대에 이르자 진(秦)의 침공이 격심하여져 도읍을 진양(晉陽)에서 한단(余鄲)으로 옮겼으나 기원전 228년 결국 진군에게 점령되고, 망명한 왕자 가(嘉)도 얼마 후에 붙잡혀서 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3. 초(楚)

   춘추시대 오나라의 침공 이후 국력이 쇠퇴하였으나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하고, 또 월나라가 쇠퇴해지자 다시 세력을 회복, 장강 중하류를 모두 차지하는 강국으로서 전국칠웅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위왕(威王)은 기원전 334년 월(越)나라를 멸하고 제(齊)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세력을 중원으로 뻗치는 동시에, 영토를 사방으로 확대하였다. 초는 7웅 가운데서 영토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가장 많았다. 그러나 점차 진(秦)의 압박을 받아 기원전 278년 수도 영이 함락되자 진(陳)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기원전 241년 수춘으로 옮겼으나 기원전 223년 결국 진에게 망하고 말았다.



                                     4. 한(韓)

 한씨(韓氏)는 진(晉)의 유력귀족이었다. 기원전 453년에 한강자(韓康子)가 조(趙), 위(魏)씨와 함께 진의 영토를 3분하여, 기원전 403년에 제후로 승인되어 독립국이 되었다. 도읍은 핑양(平陽)이었으나 뒤에 이양(宜陽)으로 옮기고, 다시 기원전 375년에 애후(哀侯)가 정(鄭)을 멸하고 신정(新鄭)으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355년 소후(昭侯)는 신불해(申不害)9)를 재상으로 삼아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책을 취하여 중원의 강국으로서 부상. 기원전 325년에는 왕호(王號)를 칭하였으나, 얼마 후 진(秦), 초(楚)의 압박을 받아 합종(合從), 연횡(連衡)을 거친 후 기원전 230년 마침내 진에게 멸망되었다.




                                    5. 연(燕)

   주 무왕(周武王)의 동생 소공 석이 세워 기원전 222년에 망하기까지 그 국세에 비해 전국시대 말기까지 장수한 나라다. 춘추시대 제 환공(齊桓公) 시절에는 제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고 전국시대에는 널리 인재를 받아들여 명장 악의가 등장하여 제를 공격하여 국세를 떨쳤고 소진이 등장하여 합종(合從)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후에 진(秦)에서 도망쳐온 번어기10)를 받아들이고 태자 단이 형가를 시켜 진왕 정(진시황)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기원전 222년 진에게 멸망하였다.



                                     6. 위(魏)

   위씨는 한, 조씨와 함께 진(晉)의 귀족이었다. 기원전 453년 위의 환자(桓子)가 한(韓), 조(趙)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진나라를 3분하고, 기원전 403년 제후로서 독립이 공인되었다. 위는 안이(安邑)에 도읍을 정하였다. 초대 위 문후(魏文侯)는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이고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 관개사업을 크게 벌였다. 또한 명장 오기(吳起)를 등용해서 진(秦)을 공격하고 중산(中山), 대량(大梁)을 공략해서 멸망시켰으며, 초(楚)를 공격하는 등 전국 초기에는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점차 진(秦)에게 눌려, 기원전 361년 대량으로 천도하고, 기원전 329년 상군(上郡) 15현(縣)을 진나라에 헌상하여 화의를 청하였다. 한때 신릉군(信陵君)11)의 활약으로 5개국 연합군으로 함곡관으로 나아가 진을 위협하였으나, 결국 기원전 225년 진왕 정에게 의해 멸망하였다.



                                    7. 진(秦)

   진(秦)은 춘추오패 중 하나인 진 목공(秦穆公)이래로 전국시대까지 이어졌다. 기원전 362년 효공(孝公)이 왕위에 오르자 상앙(商鷗)12)을 등용해 변법을 시행하여 내정개혁으로 국력을 크게 증대시키면서 수도를 함양(咸陽)으로 옮겼다. 진의 강력함에 위기를 느낀 열국은 합종(合縱)하여 진을 막았으나 진 혜문왕(秦惠文王)은 장의(張儀)로 하여금 연횡(連衡)을 성립하게 하였다. 소양왕(昭襄王)때 이르러 성도(成都) 부근에 운하를 열고, 백기(白起)를 시켜 기원전 278년에 초를 공격하여 수도 영(落)을 함락시켰다. 후에 백기가 장평전투에서 조군 40만을 대파하고 한단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소양왕은 범수(范彧)를 등용한 뒤부터 연횡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주왕 난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은 주를 공격함으로써 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君)도 멸망하였다. 기원전 247년에 어린나이로 진왕 정이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하였으나 후에 친정하여 재상 여불위(呂不韋)13) 등을 제거하고 이사(李斯)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면서 여전히 전국의 최강국자리를 지켰다. 진군은 기원전 230년에 한(韓)을 멸망시키고, 조(趙), 연(燕), 초(楚), 위(魏), 제(齊)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면서 통일제국을 이루었다. 진왕 정은 황제가 되어 진시황이라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 사후 제국은 다시 어지러워져 통일 15년 만에 진왕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Ⅳ. 춘추전국시대의 종말

   춘추시대는 기원전 453년 삼진(三晉) 즉 한(韓), 위(魏), 조(趙)가 진을 삼분하며 독립국이 되면서 끝났다. 전국시대 역시 진(秦)이 열국을 멸망시키면서 기원전 221년 종말을 고했다. 진왕 정은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한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입을 막고 아방궁을 지었다. 그러나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고 대규모 공사를 벌이는 등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기원전 210년 지방 순시 중 죽었으며 그가 죽고 내분이 일어나 진나라는 통일된 지 16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 후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을 거쳐 통일제국 한(漢)이 성립하였다.





                  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춘추전국시대는 열국이 서로 경쟁하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시기였다. 그로 인해 관료제의 정비와 봉건제에서 군현제로의 변화를 볼 수 있고,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였으며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생산력 또한 증대하였다. 전국시대에는 거대도시가 등장하고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 국군(國君)의 암살과 추방

  주(周)대의 봉건제도는 주왕을 중심으로 하여 제후들이 주왕을 떠받들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이르러 봉건제가 동요하여 주왕과 제후의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났다. 춘추(春秋)의 경문에 의하면 신하에 의한 주군의 암살을 “그 군(君) 모(某)를 시(弑)하다”로 기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가 25번이나 보인다. 또 “시하다”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분명히 암살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예가 있어 이것을 합치면 무려 34번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한 경우는 대국과 소국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춘추시대에는 군주의 암살이나 추방이 빈번히 일어나 군주의 지위는 극히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군주권위가 저하하고 있는 다른 편에서는 신하측이 착실히 권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2. 대부(大夫)와 사(士)의 대두

  춘추시대의 제국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신하인 대부나 사의 대두가 보이며 그 가운데서도 하위인 자가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성향은 노(魯)와 제(齊), 진(晉)에서 전형적으로 보인다.

 노에서는 먼저 노 환공에게서 분가한 삼환씨14)에게 국정의 실권이 넘겨지고 나중에는 그 삼환의 가신인 사가 그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제에서는 공족에서 나뉜 국시와 고씨가 오랫동안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이 실권은 나중에 다시 최서와 경봉에게 넘어갔다. 그 최서도 경봉에게 공격당하고 경봉도 제대부에게 공격받아 타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 뒤에는 전씨가 대두하면서 점차 민심을 얻어 국군의 폐립을 마음대로 하고 대부들을 추방하면서 결국에는 제후의 열에 오르면서 제를 전씨의 것으로 만들었다. 진에서도 제와 마찬가지로 진문공 이후 대부 조순이 권력을 잡았고 후에 난씨 또 나중에는 한, 위, 조, 중행, 범, 지씨들이 국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 중에서도 중행과 범씨가 탈락하고 나중에는 한, 위, 조 3씨가 지씨를 멸망시키면서 나중에는 제후로 인정받아 진을 3분하고 만다. 춘추시대는 봉건제가 내부로부터 붕괴되고 새로운 세력이 대두되어 갔고 이 새로운 세력들이 봉건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체제를 형성해갔다. 그것이 바로 군현제이다.



                                  3. 멸국의 진행

  주대에 봉건된 국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의하면 주가 은을 멸할 때 주와 같은 성의 55국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순자(荀子)에는 주공 단이 71국을 봉건하였는데 그 중 동성이 53국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춘추대사표에는 춘추의 경과 전에 보이는 209국을 열거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하대(夏代)나 은대의 옛 국과 이민족의 국을 제외한 147국이 주가 봉건한 국을 여겨지는 까닭에 실수효는 훨씬 많았을 거라고 예상된다. 그런데 춘추대사표의 열국강역표에 의하면 춘추시대 가장 많은 나라를 멸한 나라는 초(楚)인데 그 수가 42국에 이른다. 이어 진(晉)이 18국이며 정, 위, 노 등 중원의 희(姬)성 제후국이나 제, 진(秦) 등 이성제후국의 의한 멸국도 많다. 이 멸국의 시기는 대체로 2/3이 춘추중엽에 멸국되고 있다.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주왕의 권위가 저하됨과 아울러 멸국이 증가하고 이 멸국을 기초로 실력을 축적한 국이 패자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국을 멸망하면 당연히 멸망한 나라를 지배하게 두게 된다. 춘추시대에는 이 처리방법으로 대체로 세가지방법이 있는데 첫째가 속국화로서 독립을 인정해 주고 필요에 따라 부역을 제공케 하는 지배형태이다. 두 번째로는 채읍화 인데 이는 국의 독립을 인정치 않고 멸국을 자국 대부에게 채읍으로 주어 지배케 하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은 모두 기존의 봉건틀 아래 이루어진 것이지만 세 번째 방법인 현(縣)으로서 지배하는 방법은 봉건틀을 벗어난 방법이다.



                                 4. 현(縣)의 설치

  진한시대의 현은 군주가 관료를 임명하여 통치하는 직할지인데 춘추시대의 현은 아직 그러한 형태를 지닌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춘추시대의 현은 채읍과 비슷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진(晉)의 현은 유력한 대부에게 은상으로서 주기도 하고 몇 대에 걸쳐 세습되기도 하는 경우조차 있다. 진의 원(原), 온(溫), 주(州)의 3현 중 원과 온은 한때 조씨에게 세습되고 있다. 그리고 3현 모두 조씨 이외 고, 낙, 극, 난씨 등 당시 유력한 대부에게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초의 경우도 신현(申縣)의 관리자인 신공은 투씨 등에게 세습시키고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현의 관리자는 왕족 출신이 많다.

 그런데 채읍과는 다른 측면도 발견된다. 먼저 세습된다고 하여도 채읍과 같이 한 대부의 가에 오래도록 보유되는 경우가 드물며 또한 채읍화는 구래의 국의 내부조직에 변화가 없이 행해지고 있지만 현화는 내부조직의 개혁이 수반되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진의 과연현이나 초의 권(權), 진(陳), 채의 현화에서 보이는 주민의 이주이다. 이 내부개혁으로 인한 현화에는 군사적 요청이 강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진(晉)에서는 기원전 6세기 후반 49개의 현에서 각각 100승의 전차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또 초에서는 신과 식의 2현에서 징발된 군대는 방위상 중요한 군대로 특별히 ‘신, 식의 사’로 칭해지고 있다.  즉 춘추시대의 진(晉)이나 초의 현은 종래의 국이나 채읍이 군사적으로 재편되어 이러한 현이 진한시대의 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晉)이나 초(楚) 이외의 춘추시대 현은 역사서에 보이는 것이 적어 명확한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춘추시대의 현이 곧바로 전국시대의 현으로 이어지는 것의 여부 또한 명확히 알 수 없다.



                                 5. 국내체제의 개혁

 전국에 이르러 멸국의 진행으로 강대한 7국이 서로 대치하게 된다. 이들이 소위 말하는 전국칠웅이다. 이들은 모두 국내체제의 개혁을 통해 타국에 대항하려 했다. 전국시대 들어 최초로 개혁을 단행한 자는 위 문후(魏文侯)이다. 문후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중앙과 지방의 장관에 임용하였다. 그 등용법은 능력을 중요시한 것으로 신분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문후에게 임용된 이회는 “지력(地力)을 다하는 가르침”을 실행하여, 토지의 생산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증가를 도모하였다. 이어 ‘평적법’에 의해 곡물의 가격을 안정시켜 도시주민과 농민의 생활을 보증하였다. 이 시책에 의해, 위의 군현체제는 경제적으로 안정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회는 또 법경을 제정하여 법률을 종래의 관습법에서 성문법으로 개정하였다. 이로써 위의 관료에 의한 지배는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위는 이러한 이회의 개혁에 의해 전국초기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초(楚)에서는 기원전 4세기 전반에 도왕이 다른 나라 사람인 오기(吳起)15)를 임용해 국정개혁을 단행했다. 오기는 귀족층을 누르고 토지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능력에 따른 관료임용를 도모하였다. 개혁은 도왕의 치세 중 성과를 거두었으나, 왕의 죽음과 함께 귀족층의 반격으로 오기는 살해되고 말아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제(齊)는 기원전 4세기 후반 위왕, 선왕 시대에 국내외로부터 학자를 초빙하여 도성인 임치의 직문 밖에 저택을 제공하여 제왕의 브레인 역할을 수행케 하였다.16) 특히 위왕은 지방관의 임용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위왕은 지방관의 정치에 생산증강과 민생의 안정을 중시하여 엄격한 치적평가를 행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이밖에 한(韓), 조, 연 등에서도 유능한 인재의 등용이 도모되고 있으며, 국정의 개혁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 구체적 시책이 불명하여 성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7웅 가운데 가장 국정개혁의 성과를 올린 자는 진 효공(秦孝公)이다. 효공은 인재 등용에 힘써 상앙(商鷗)을 임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상앙은 개혁을 통해 타국과 마찬가지고 국내체제를 공고히 하고 타국에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쌓아올리는 것이었다. 그의 개혁은 철저하고 엄격하여 법률을 정비하고, 체제강화의 시책을 하나씩 실행하기 시작했다. ‘분이(分異)의 법’에 의해 개별가족의 분석을 촉진시키고, 그 위에 시오제와 연좌제를 실시하여 서로 감시케 함으로써 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집락을 재편하여 31(또는 41)현을 두어 령(令), 승(丞), 위(尉) 등의 지방관을 두었다. 한편 토지구획을 바꾸어 천맥제를 시행하여 농업 생산 활동을 보증하였으며 도량형의 통일을 행하여 국내의 경제적 획일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앙은 군사, 행정, 생산의 각 부문에서 철저하게 민의 재편을 행함으로써 진의 군현제의 과정을 크게 진전시켰다. 상앙은 효공의 죽음과 함께 귀족층의 반격으로 처형되었지만 상앙의 변법은 계속 이어져 진(秦)의 전국통일의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