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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개요-2

영국신사77 2007. 1. 6. 23:58
춘추전국시대 개요-2
양승국
일반
 

6. 도시의 발달과 번영 및 성격

전국책에 의하면 중원지역의 도시에 대해 “1천 장(丈)의 성, 1만 가(家)의 읍이 서로 잇대어 마주보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전국시대 중원에는 한 변이 1천 장 즉 2,250미터 정도의 성벽을 지니고, 인구가 1만호 정도의 도시가 서로 잇대어 마주보고 있을 정도의 거리에 산재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또한 역사서에 의하면 제(齊)의 도성인 임치는 7만호, 주(周)의 왕성인 낙양(洛陽)은 십수만호, 그리고 진(秦)의 함양은 수십만호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거대도시가 있었다는 사실들은 근년의 도시유적 조사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조사된 100여개의 도시 가운데 성벽의 길이가 2km를 넘는 것이 29개, 1km이상을 포함하면 반수 가까이 된다. 이러한 거대도시들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춘추 말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한대(漢代)에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전국시대의 도시는 왕궁이라든가 관서가 있는 지구와 일반주민이 거주하는 지구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지구는 나란히 병치된 경우와 전자가 후자 가운데 포섭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거대도시인 경우에는 각각의 지구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지방의 중소도시에는 관서가 있는 지구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왕궁과 관서가 있는 지구에서는 기와를 이은 광대하고 장엄한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다. 조(趙)의 한단의 왕성에는 동서 264m, 남북 296m, 높이 16.3m의 높고 큰 토대(土臺)가 남아 있으며, 지붕이 몇 개 층으로 된 고층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던 것 같다. 지방도시에서는 이러한 큰 토대가 보이지 않지만, 대형건축물이 있었음을 생각게 하는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일반 주민이 거주하는 지구에서는 수공업 제작장이나 시(市)가 있었으며, 상당히 번화하였다. 사기(史記) 소진열전에서는 소진은 임치의 번화함을 도로에서는 차가 스쳐 지나갈 때 바퀴가 부딪치고 걸어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은 어깨를 부딪치며, 입고 있는 옷이 이어져 장막과 같고, 땀을 흘리면 비가 내리는 것 같이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도시의 수공업 제작장 유적으로는 동기, 철기, 도기 등 실용품 제작장이나 골기(骨器), 옥기(玉器), 석기(石器) 등의 장식품 제작장이 발견되고 있다. 병장기 등 관이 쓰는 기물을 제작하는 관영제작장도 있지만, 물론 일용품을 제작하는 민영제작장도 많이 있어 그것으로 재산을 모은 자도 있다. 한단의 곽종 등은 제작업으로 왕에 필적하는 부를 쌓았다고 한다. 또한 이들 제작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다양하였으며, 게다가 각각의 수공업 사이에 분업이 이루어져 있었던 점도 알 수 있다.

도시에서는 거주구의 한 구석에 반드시 시가 설치되어 있다. 시는 교역의 장으로서 상설의 상점도 있어 많은 상인으로 번잡하였다. 그 가운데는 투기적인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도 있다. 도(陶)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주공이라는 인물은 농경이나 목축으로 얻은 이익을 자본으로 투기적인 상업에 종사하여 몇 번이나 거만의 부를 쌓았다고 한다. 또 진(秦)의 상국(相國)에까지 이른 여불위(呂不韋)는 양적의 대상이었는데, 도시간의 투기적인 상업에 의해 거부를 쌓았다고 한다.

시에서의 교역에는 이미 화폐가 쓰이고 있다. 큰 거래에는 황금이 쓰이지만 일반으로는 청동화폐가 쓰이고 있다. 특히 한, 위, 조 등 중원제국에서는 도시마다 화폐를 발행하고 있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이들 나라들은 공수포, 첨족포, 방족포, 원족포, 삼공포, 교형방족포, 직도전, 원공원전 등 여러 화폐를 발행하고 있는데, 그 화폐들에는 발행된 도시 이름이 주각되어 있다. 제(齊)나 연(燕)에서도 종류는 적지만 도시에서 발행한 화폐가 존재한다.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화폐경제의 진전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는 교역의 장이었던 것만이 아니었다. 지배권력은 시의 자유스런 교역을 보증하기 위해 시의 관리를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고, 자치를 묵인하였다. 그 때문에 많은 유민이 시에 모여들게 되었는데 망명자나 살인자까지도 시에서는 안전하였다. 이러한 치외법권적인 시에서 큰 힘을 갖는 자는 인망있는 유협(遊俠)이었고, 시는 이들 유협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면이 있다. 국(國)의 지배층도 이러한 유협을 한수 위로 보고,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경우조차 있었다. 또한 국의 지배층은 시를 인재의 공급원으로도 여기고 있어, 전국시대의 시는 국에게 물적으로도 인적으로도 중요한 존재였다. 도시 가운데서도 시가 있는 도시는 ‘성시(城市)의 읍’이라든가 ‘시 있는 자’라 하여 특별히 구분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 사이에 발달한 도시의 성격에 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고대 도시는 기본적으로는 농민을 주체로 하는 소규모의 농업도시이며, 전국시대의 거대도시는 정치적, 군사적인 요청에 의해 발달된 것으로 상공업도시적인 측면은 2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에 대해 한편에서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용인에 의해 발달한 상공업도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확실히 도시에는 장대한 성벽이 있고, 왕궁이나 관서가 있어 정치적, 군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도시주민에는 상당수의 농민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도시의 성벽 밖에 접하는 농지는 ‘부곽의 전’으로서 중요시되고 있으며, 도시에 가까운 농지일수록 높은 가격이었고, 또한 성벽 안에도 농지가 있었다.

그러나 도시가 집중적으로 발달한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역은 서주시대 이래 교통로가 사방으로 뻗은 교통의 요지에 있었던 점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경향은 한대가 되어서도 변함없었으니, 사기(史記) 화식열전에는 ‘3하’ 즉 현재의 산서남부, 하남북부는 천하의 중심이며, 전국 각지의 물자가 거래되는 곳이라 하고 있다. 이 같이 중원지역의 도시발달은 그 입지로부터 보아 경제적인 요인이 극히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 중원 주변의 제, 연 그리고 초의 남부, 진(秦) 등의 지역은 유적분포로 보아 도시의 집중은 보이지 않고, 국도를 중심으로 한 몇 개의 거대도시가 발달한 것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시를 지닌 것 같은 큰 상공업적 도시는 거의 발달하지 않고 있으며 도시의 형태는 거의 소규모의 농업도시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역의 도시와 그 주변지역의 일반적인 도시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성격의 차이는 도시제도의 차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전국시대 각국에서 성벽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도시는 현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중원지역 특히 한, 위, 조의 현은 상위의 중앙정부나 군(郡)에 대해 높은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무기 제조기구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 나라 현의 무기제조 최고책임자는 현령이고, 중앙정부나 군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점은 나라 도읍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와는 따로 도읍지를 통할하는 령(令)이 국도수비병의 무기제조의 모든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무기제조의 책임자인 현령은 현의 군대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현에서는 그밖에 동용기, 도기 등의 독자의 제조기구나 화폐의 발행권도 가지고 있으며, 제도적 독립성은 각 부문에 미치고 있다.

이에 대해 진(秦)의 현은 대조적인 존재형태를 보이고 있다. 역시 무기 제조 기구를 살펴보면 확실히 현에 제조기구는 존재하지만 그 최고 통할자는 군의 태수였다. 또 진률(秦律)에도 현의 수공업자는 현의 관할 하에 두어져 있지 않다. 또한 화폐발행권도 현에서는 보이지 않고, 일찍부터 국가에 의한 통일화폐가 발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진은 제도적으로 현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중앙집권적으로 지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외의 중원 주변의 여러 국인 제, 연, 초에서도 진 정도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역시 중앙집권적인 경향이 인정된다. 특히 화폐에 그 경향이 잘 나타나있다. 제에서는 대형의 도전(刀錢)이 일찍부터 등장하고 있는데, 맨 처음에는 도읍지를 포함하는 화폐로 통일되었고, 또한 그 보조화폐도 발행하게 되었다. 연(燕)에서도 일부 도시에서 발행한 화폐가 보이는데, 일찍부터 통일화폐로서 명도전(明刀錢)을 발행하고 있다. 초에서는 저울질하여 가치를 정하는 칭량화폐(稱量貨幣)인 금판(金版)이 유통되고 있으며, 일부 도시에서도 발행되고 있는데, 거의가 도읍지 발행의 영원이고, 청동의 의비전(蟻鼻錢)도 통일화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도읍지나 군사적인 요지에 있는 도시의 발달에는 정치적, 군사적인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중원의 교통요충지에서 발달한 상공업적인 도시에서는 그러한 정치, 군사적인 요인은 2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발달의 근원적인 요인으로서 생각되는 것은 철제농구와 우경(牛耕)의 보급이다.

철제농구와 우경보급의 개시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춘추시대 중엽 이후 점차 보급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철제농구나 그 밖의 철제품은 전국시대가 되면 용도별로 기종이 분화하고 대량생산에 적합한 금속제의 주형(鑄型)이 사용되게 된다. 또한, 소형묘에 부장되고 있거나 묘의 흙으로부터 묘를 파는 데 쓰인 농구가 출토되고 있는 점 등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경에 대해서는 보급의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문헌자료나 청동기 등에 의거하여 보면 춘추시대 말경에는 우경이 행해지고 있었음이 확실하고, 어느 정도의 보급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춘추시대 중엽 이후, 특히 전국시대의 철제농구나 우경의 보급은 농업생산을 크게 발전시켰다. 즉 이것에 의해 심경(深耕)과 능률적인 경작이 가능하게 되어 단위면적 및 농민 1인당의 수확량이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와 같이 종족적인 집단 농경에 의하지 낳고서도 개별가족에 의한 농경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생산력의 증대에 의해 인구도 증가하고 농촌에 잉여인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량의 비농업 생산자를 부양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종래의 종족적 집단을 기초로 하는 농촌이나 농업도시는 해체되고 있다.

그리고 아울러 잉여인구는 국도나 교통의 요지 등 경제력이 있는 특정도시에 집중되고, 상공업적 도시의 폭발적 발달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발달한 도시는 이제 농업도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도시였다. 거기에는 종족적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조직원리가 발생하여 도시주민 독자의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도시의 시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협의 윤리는 이러한 새로운 사회의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체현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원리이다. 또한 이들 도시는 기본적으로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도시를 많이 지배 하에 두는 국(國)의 군현제가 도시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체제로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또한 철제농구나 우경의 보급은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개간이 불가능했던 토지를 개간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의해 새로운 경지가 확대되고, 새로운 집락이 형성되고 있다. 개간이 가능한 토지는 오래전부터 개척되어 있던 중원지역보다도 특히 그 주변의 제, 연, 초, 진 등의 지역에 많았을 것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간을 추진하여 자신들의 권력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들 국의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는 이러한 경제적 기반에 의해 아직 발달하지 못한 소규모의 농업도시나 새 집락의 터전 위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Ⅵ. 제자백가(諸子百家)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많은 학자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을 일컬어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한다. 그 이전까지는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고, 개인적인 저서 또한 별로 없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가 무너지면서 그 때까지 간부(官府)나 귀족이 독점하고 있던 학문과 지식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확대로 인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실현코자 하는 강력한 사회적 욕구가 분출될 수 있었다. 또한 학자를 우대하는 풍조를 들 수 있다. 전국시대 열국의 경쟁은 자연히 부국강병의 추진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능력있는 학자를 우대하는 풍조가 팽배하였다. 게다가 각국의 분립이 사상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국가권력이 강력하면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기 쉬워 다양한 사상의 발달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각 파의 학설이 쉽게 용인되었으며, 또 사실상 이것들을 모두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적 혼란이 도리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1. 공자(孔子)와 그 제자

공자는 유학의 창시자이자 춘추전국시대의 단서를 연 사상가이다. 공자의 출신신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대체로 노(魯)의 사 계층 출신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된다. 그는 젊었을 무렵 삼환의 하나인 계손씨의 가신으로 있었는데 양호가 실각한 후 대부의 신분을 얻어 경의 위인 대사구까지 이르고 있다. 이 때 삼환씨를 누르고 공실을 강고히 하려다가 실패하여 실각했다. 그리하여 제자와 함께 노국을 떠나 위(衛), 송(宋), 진(陳), 채(蔡) 등의 국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상을 이들 나라들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모두 좌절되고, 14년간의 유랑 끝에 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죽기까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며, 이상을 제자들에게 전하였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교육하면서 가장 중요시한 덕목은 ‘인(仁)’이다. 역시 공자가 중시한 ‘예(禮)’나 ‘악(樂)’도 이 ‘인’을 실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는 논어(論語) 가운데 여러 다양한 뉘앙스로 ‘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뜻을 규명해 보면 ‘인’이란 타인을 자기와 똑같이 인간으로서 대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을 자각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은 모두 ‘군자(君子)’이며, 사람의 위에 서서 정치를 행하는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공자에 있어서 ‘군자’는 후천적인 수양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인격이어서 이제 종래의 신분과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사(士)나 서인계층의 정치에의 참여를 정당화하는 것이며 후대의 관료제에 사상적 기초를 준 것이었다.

공자의 제자는 3천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학문을 성취한 자는 72명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정도로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자의 출신 신분은 일부 귀족계층 출신자를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 사 계층 출신이며 서인계층 출신자조차 들어 있다. 공자의 사상은 대두하고 있던 사 계층의 공감을 얻고 있는데, 제자의 대부분은 그 학단에서 배우면서 사관(仕官)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공자가 살아 있던 동안에도 자로나 중궁, 염구, 자고, 자하, 자유 등은 노나 다른 나라의 대부의 가신이 되어 공자의 사상을 현실정치에 실현하려고 하였다. 또한 자공 등은 노를 위해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정치적으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공자 사후 제자들은 각지에 흩어져 공자의 가르침을 폈다. 자하 등은 위 문후(魏文侯)의 초빙에 응하여 위(魏)에 가서 유능한 제자들을 키우고 있다. 문후에 임용되어 그 국정개혁의 브레인이었던 단간목이나 이회는 그의 문인이었다. 또한 역시 문후에 임용된 전자방은 자공의 문인이었고, 초에서 국정개혁을 행한 오기도 증자의 문인에게 배웠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자의 제자의 문인으로부터는 유능한 실무적 사상가가 배출되고 있지만 공자사상의 본질적인 부분을 자각적으로 이어받아 발전시키고자 한 사람은 맹자(孟子)이다. 맹자는 기원전 4세기 초 공자의 향리에서 가까운 추에서 출생하여 공자의 정통후계자로 지목되는 자사의 문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공자의 ‘인’사상을 이어받아 인간의 본성을 선(善)으로 보는 신념 위에 ‘인의(仁義)’의 도덕을 설하였다. 그러나 그 ‘인’은 만인에 대한 평등한 ‘인’이 아니고 가족도덕을 중심으로 하여 현실의 자연스런 차별을 바탕으로 한 ‘의(義)’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맹자는 이 ‘인의’에 의한 이상의 왕도정치를 현실의 국가에서 실현하고자 하여 위, 제, 송, 설(薛), 등(滕) 등의 나라를 편력하며 그 군주에게 자신의 설을 설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군주들은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현실적인 시책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상은 공자와 마찬가지로 매번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은 공자사상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후대의 유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2. 묵자(墨子)와 거자집단(巨子集團)

묵자는 송(宋) 또는 노(魯) 사람으로 전해지며 공자가 죽은 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활약한 사상가이다. 출신신분은 낮아서 수공업자였다고 하는 설도 있다. 젊었을 때 노에서 유학을 배워 공자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학의 차별주의적인 경향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하여, 공자사상을 보다 과격하고 날카롭게 하였다. 묵자는 공자의 ‘인’으로부터 출발하여 ‘겸애(兼愛)’를 설하였다. 그는 공자의 ‘인’을 확대하여 모든 인간에 대한 평등의 헌신적인 애(愛)를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겸애’는 ‘비공(非攻)’이라는 비전론(非戰論)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또한 공자와 마찬가지로 신분을 불문하고 뛰어난 인간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는 ‘상현(尙賢)’을 주창했지만, 그것은 보다 급진적이고 날카로워 반귀족적인 주장이 되고 있다. 묵자는 공자사상을 출발점으로 하면서 서민의 입장에 서서 독자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은 전국시대에 있어서는 유학사상과 합쳐서 ‘유묵(儒墨)’으로 칭해질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속하였다.

묵자는 또한 스스로 그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강고한 집단을 결성하였다. 이 집단은 하층의 각종의 기술적인 직업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묵자는 이러한 기술자집단을 이끌고 소도시를 방위하기 위하여 분주했다고 한다. 묵자가 죽은 뒤에도 그 집단은 거자(巨子)라 불리는 지도자에 인솔되어 존속해 가면서 2세기 가까이에 걸쳐 활약하였다. 초기의 거자집단은 묵자사상을 그대로 묵수(墨守)하여 역시 소국의 도시를 방위하는 데 전심하였다. 맹승이라는 거자는 초의 소귀족으로부터 그가 영유하는 도시의 방위를 부탁받았으나 방위하지 못하자 그 제자 180여명과 함께 자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 후에 거자집단의 성격은 점차 변질하여 간다. 이제 소도시나 소국의 방위에는 관여하지 않고 국력의 증강을 도모하는 대국의 요청에 응하게 된다. 진(秦)에 들어온 거자집단은 진을 위해 그 점령한 도시를 방위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그 사상도 묵자 본래의 사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현실을 추인하려는 사상으로 변화하여 간다. ‘비공’은 조건이 붙은 비전론으로 되고, 현실의 통일국가의 플랜으로서 전제지배를 추인하려는 ‘상동(尙同)’의 사상까지 제창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의 타협이 심화되면서 묵가는 점차 분열하여 진(秦)의 천하통일 전후에 역사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3. 현실주의자들

  이상에서 언급한 공자나 맹자, 그리고 묵자 등은 높은 이상을 제창하여 현실세계와 투쟁한 이상주의적인 사상가들이다. 그리고 모두 그 이상을 이루지 못한 채로 죽고 말았다. 그렇지만 전국시대의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당시 군주들의 요청인 부국강병이나 군주권력의 강화 등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과제를 위해 활동하였다.

  법가는법(法)’의 엄격한 운용에 의해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학파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회나 오기, 상앙 등 각국의 국정개혁에 종사한 사람들은 모두 법치를 중시한 법가였다. 단지 법가 가운데는 신불해와 같이 군주의 ‘술(術)’을 보다 중시하는 사상가도 있다. 그는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군주가 신하를 조종하기 위한 ‘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전국시대 말의 한비자(韓非子)는 유가인 순자(荀子)의 제자이지만 그 사상경향은 분명히 법가이다. 그는 이회나 상앙으로부터 ‘법’의 이론을. 신불해로부터 ‘술’의 이론을 이어받았으며 또 신도로부터 ‘법’을 운용하기 위한 군주의 강제력으로서의 ‘세(勢)’의 이론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들 이론을 보다 순화시키고 철저히 총합하여 군주를 위한 냉철한 지배이론을 건립하였다. 그는 이 이론을 실천하기 전에 비명의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 사상은 함께 순자에게 배운 이사에 의해 진(秦)의 통일정책 가운데 살아 있게 되었다.

  법가 이상으로 현실상황에 대응하여 당시의 군주가 당면한 문제해결에 분주하였던 자들은 종횡가(縱橫家)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웅변술을 구사하여 각국의 군주에게 외교정책을 설하고 돌아다니면서 지위나 보수를 얻으려 하였다. 기원전 4세기 후반 이후 진이 강대하게 되고, 동방 여러 국이 이에 대응하느라 쫓기게 되자 소진과 장의 등의 종횡가가 이 양세력의 사이에서 활약하였다. 소진은 동방의 제국을 서로 동맹시켜 진에 대항케하는 합종(合從)을 제창하였고, 동방6국의 재상을 겸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장의는 진의 재상이 되어 동방의 제국을 진에 종속시키는 연횡(連衡)을 제창하여 소진의 합종을 타파하였다.

  병가(兵家)의 사상도 전쟁이라는 구체적 현실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사상이다. 이 시대 병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서는 손무(孫武)와 손빈(孫臏)을 들 수 있다. 손무는 춘추시대 말 사람으로 제(齊) 출신이다. 그는 오왕 합려1)에게 군사(軍師)로서 임용되어 초의 수도 점령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병법 이론은 손자(孫子) 13편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손빈도 제 출신으로 맹자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제의 군사로서 위의 군대를 마릉에서 대패시키고 있다. 그의 병법서는 일찍이 실전되었었는데 근년 은작산 한묘에서 발견되어 손빈병법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의 병법은 손무의 병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순자(荀子)는 전국시대 말기의 유가인데 공자나 맹자와는 대립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맹자와는 달리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으로서 ‘예(禮)’를 중시하였다. 그렇지만 그 ‘예’는 국가의 여러 제도까지 포함한 것이어서, 공자의 ‘예’와는 달리, 오히려 ‘법(法)’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그는 옛날의 성왕(聖王)을 이상으로 하지 않고 근대의 왕을 규범으로 하는 후왕(後王)사상을 제창하였다. 순자가 살았던 시대는 진(秦)에 의한 천하통일이 누구의 눈에도 구체적 현실로서 분명해지고 있었다. 순자의 사상은 이러한 현실을 토대로 다가올 통일세계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점을 시야에 넣어 구상한 사상이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은 후대에 유학의 정치적인 측면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 이상(理想)에의 도피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걸친 기간은 전란이 멈춘 적이 없는 극히 혼란한 시대였다. 위에 쓴 유가나 묵가, 법가 등은 혼란에 질서를 세우는 것을 의도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현실세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전란과 혼란의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여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려고 하는 사상가들도 출현했다. 그것이 도가(道家)라 칭해지는 한 무리의 사상가들이다.

도가의 시조로 칭해지는 노자(老子)는 그가 살았던 시대도 불명하여 실재의 인물인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그가 저술했다고 하는 노자(老子)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도(道)’사상을 근본으로 한다. 그 ‘도’는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어 취할 수 없는 실재이며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의해서만 감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무위자연’은 또한, 처세술임과 동시에 정치술이기도 하여서, 민에 간섭하지 않는 정치를 최상으로 한다. 그리고 그가 이상으로 하는 국가는 당시 번영하고 있던 대국이 아니라 인구가 적은 자급자족적인 소국이었다.

  장자(莊子)는 송(宋) 출신으로 기원전 4세기 후반의 사람이다. 한때 관리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전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일생을 은둔자로 지냈다. 장자의 사상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노자와 같은 기반에 서 있으나 그 현실세계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다르다. 노자는 아직 현실정치에의 관심이 강하지만 장자는 그러한 관심이 희박하고, 정신적인 내면에의 관심이 강하다. 그는 현실세계로부터의 초극을 정신의 절대적 자유 가운데에서 추구하여 종교적인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이 되면 장자와 같이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학파와는 반대로 노자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한층 현실정치에 접근하려는 도가의 한 종파가 출현한다. 이 일파는 황제(黃帝)를 숭배하여 ‘황로(黃老)’학파라 칭해진다. 이 학파의 사상은 세세한 것에는 관여하지 않는 ‘무위청정(無爲淸靜)’의 정치를 이상으로 하고 있는데, 한 초에는 관료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Ⅶ. 춘추전국시대가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 ·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 ·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사상사에서도 가장 그 활동이 활발했던 황금시대였다.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 맹자, 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 인의(仁義), 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 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 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 ·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처럼 춘추전국시대는 당시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대변혁을 불러일으킨 시대였다. 특히 제자백가의 출현은 중국 사상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유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상들도 오늘날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참고>

두산 세계 대백과

사마천의 사기세계(http://giant.x-y.net)

아시아 歷史와 文化 1 ▸역자 : 박건주 ▸도서출판 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