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보통 6월쯤 되면 졸업 시즌이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중퇴자에다가 스탠포드가 아니라 리드 칼리지를 다녔는데 인텔칩에 대한 충격이 아직도 선선한 지난 6월 12일 스탠포드 졸업식에서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세 가지 이야기를 비교적 진솔하게 전했다.
연설이 있기 전에 환경단체인 ‘컴퓨터 수거 캠페인 Computer TakeBack Compaign’ 이 대여한 비행기가 강연장 위를 떠 다녔는데, 비행기의 배너에는 “스티브씨, 미니 플레이어처럼 놀지 맙시다. 모든 전자제품 쓰레기를 재활용해야 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환경단체에 따르면 애플의 전자제품 쓰레기 재활용 비율은 델이나 HP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연설문 시작—-
세계 명문대로 꼽히는 대학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늘 이 자리만큼 대학졸업식을 가까이서 목격한 적은 없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뿐입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딱 세가지 이야기죠.
들려 드릴 첫번째 이야기는 점 잇기에 관한 것입니다.
리드 칼리지 Reed College에 입학한 지 6개월만에 자퇴를 했으나, 일년 반 정도 청강생활을 하면서 머물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이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생모는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미혼모였는데, 저를 양자로 보낼 결심을 하셨죠. 어머니는 제가 대졸학력을 가진 부부에게 입양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 마자 변호사 부부가 입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이 부부는 여자 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셨죠. “예정에 없던 사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양부모님의 대답은 “물론입니다.” 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낳아주신 어머님은 나중에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양부모님께서 저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 지 몇달이 지나서야 친어머님은 마음이 누그러지셨죠.
그로부터 17년후에 대학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택했습니다. 일반 근로자였던 양부모님이 저축한 모든 돈이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 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대학 교육이 어떤 도움이 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까먹고 있었죠. 그래서 자퇴를 결심했고, 모든 일이 잘 될거라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꽤 두려웠지만, 돌아 보면, 제가 인생에서 내린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자퇴를 하고 나니, 관심없었던 필수과목 대신 듣고 싶었던 강의를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낭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기숙사에 방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 거실에서 잠을 잤고, 콜라 빈병을 모아 재활용센터에 갖다 주고 병당 5센트를 받아서 먹을 것을 샀고,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 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the Hare Krishna 사원(역주: 힌두교 계열)의 일요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식사는 정말로 좋았습니다. 제 호기심과 직감으로 얻는 대부분의 경험은, 이후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만큼 소중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예를 한가지 들어 보지요:
그당시 리드 칼리지에서는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교정 곳곳의 포스터, 서랍의 레이블 마다 아름다운 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퇴를 했으니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서체 수업을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세리프와 산 세리프 서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자모의 결합에 따라서 자간을 달리 둠으로써 훌륭한 서체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역사적으로 유명했으며, 과학은 따라 갈 수 없는 섬세한 예술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매료되었죠.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인가 하는 한 가닥 희망 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 년 후,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의미가 와 닿았습니다. 매킨토시와 접목을 시켰을 때, 미려한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했으니까요.
제가 만약에 그때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매킨토시는 다중 서체나 비례적으로 자간을 조정하는 글꼴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가 맥을 그대로 따라 했으니까, 매킨토시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퍼스널 컴퓨터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겠죠. 자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테니, 퍼스널 컴퓨터는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인쇄술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었을 때에는, 이런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돌아 보았을 때, 모든 게 분명히 보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점들만 이을 수 있는 거죠. 그러므로 이런 점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건 간에 믿어야 합니다. 이런 제 인생관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종국에는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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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을 졸업하면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은 내 인생의 세가지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첫째는 점(點)을 잇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에
6개월만 다닌후 그만 두었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내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고 형편상 입양을 원했는데 대졸자 부부에 입양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 변호사 부부를 골랐는데 내가 태어나자 딸을 원한다며 나를 포기했습니다. 결국 저는 다른 부부 손에 넘어갔습니다. 생모는 나중에야 그들이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생모는 몇달간 서류에 사인을 안해주다가 '대학에 꼭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사인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후 정말 나는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스탠포드와 맞먹는 수준의 학비를 대느라 막일을 하는 양부모는 평생 저축한 돈을 써야만 했습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고 대학이 그걸 어떻게 알게 해줄지, 아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른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그런 데에 양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다 쓴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 대학을 그만 두기로 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3학기를 비정규 청강생으로 캠퍼스를 전전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가다가 부딪힌 것들중 많은 것들은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들로 나타났습니다. 리드대학 당시 캠퍼스의 모든 포스터와 게시물은 손으로 직접 그린 아름다운 글씨체로 돼있었습니다.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호기심에 서체과목을 들었고 그 강의에서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체를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미적이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인 서체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그로부터 10년후 우리가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었을 때 우리의 맥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변호사 부부에 입양됐다면, 대학 정규과목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서체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지금의 맥 컴퓨터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그 무엇이든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좌절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스무살 때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10년후 애플은 20억달러에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컸고 나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나는 해고당했습니다. 이사회에서 미래 경영전략에 관한 의견차이로 나이 서른에 밀려났습니다.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나는 참혹함에 빠졌습니다. 첫 몇달동안 나는 무엇을 할지 정말 몰랐습니다. 실리콘 밸리로부터 도망쳐 떠나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약 1년 전 나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수 없다며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운좋게도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아 졌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경우였습니다.
열일곱 살 때 이런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학창시절 '전세계 목록'(The Whole Earth Catalog)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타이프라이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든 세계 풍물 도서입니다. 말하자면 종이책 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글이 나타나기 35년전의 일입니다. 1970년대 중반, 바로 내가 여러분의 나이 때, 최종판이 나왔고 그 최종판의 뒷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탐험 여행 길에 나서 자동차를 히치 하이킹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음직한 그런 시골길을 찍은 사진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그 밑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늘 배고프고, 늘 어리석어라"(Stay Hungry. Stay Foolish)
50평생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이러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그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