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c經濟 · 미래 · 사람들/경영Ceo리더십,성공企業

스티브 잡스의 졸업식 축사.

영국신사77 2007. 1. 6. 00:05
                               스티브 잡스의 졸업식 축사.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대학중의 하나인 이곳에서 여러분에게 졸업식 축사를 드리게 되어 무척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대학 졸업을 해보질 못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학졸업식”근처에는 이번이 가장 가까이 와본 경험이 되는군요. 오늘 저는 제가 살아오면서 얻은 세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거죠, 대단한 건 아니구요. 딱 세가지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닷컴비즈니스와 관계된 이야깁니다.

저는 리드대학을 6개월간 다니다 자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자퇴하고도 18개월간은 계속 학교에 남아있었죠. 왜 제가 자퇴 했냐구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제가 태어난 시절로 거슬러 가야 겠군요. 저를 낳아주신 생모는 젊은 미혼모로 대학원생이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입양시키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런데 생모는 제가 꼭 대학교를 졸업한 양부모에게 입양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입양기관에서 그렇게 준비를 했고 저는 결국 변호사부부에게 입양되도록 정해졌습니다. 문제는 그 변호사 부부가 저의 입양결정 직전에 꼭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거죠. 마침 지금의 저의 양부모님이신 분들이 그 대기열의 다음번째 였고 그분들은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남자아이 한명에게 양부모를 찾아주어야 하는데 혹시 입양의사가 있으신지요?” 라는 전화를 받게 되었고 그분들은 “물론이죠!”라고 대답했답니다. 나중에 저의 생모가 저를 입양하게 된 양부모 중에 양어머니는 고등학교만 졸업하신 분이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입양동의서에 허락을 하지 않았답니다. 결국 몇 달 후 저의 양부모님들은 저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생모에게 약속을 했답니다.

저는 17세가 되어 대학에 정말 갔습니다. 그러나 순진한 저는 스탠포드 대학 못지않게 등록금이 비싼 대학에 입학했고 농동자 계층이셨던 저의 양부모는 저의 학비로 그간 저축해 오셨던 돈들을 써야만 했습니다. 6개월 후에 저는 이런 상황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양부모님께서 평생동안 모은 돈을 저의 학비로 쓰는 동안에도 저는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대학을 다니는 것이 얼마나 제게 도움이 될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자퇴를 결심했고 결과적으로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상당히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가 내린 결정 중에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결정을 내리자마자 흥미가 없던 학업 준비에서 벗어나서 제가 관심있는 분야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저에겐 대학생활이 그렇게 낭만적이진 않았습니다. 저는 기숙사를 쓰지 못해서 친구집의 마룻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저는 하나에 5센트 하는 빈 콜라병을 모아서 음식을 사먹고 일요일이면 공짜로 저녁을 주는 헤어크리스나 기도원에 가려고 기꺼이 7마일을 걷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저의 흥미와 직관을 따랐던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정말로 값지게 쓰였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드리죠.

그당시 리드대학에선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서법강의를 제공했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포스터나 서랍 위의 라벨에 멋지게 손으로 쓴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자퇴생이었기 때문에 전공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서법강의를 청강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그 강의를 통해 “세리프체”, “산세리프체”에 대하여 배웠고 다양한 글자체의 조합에 대하여 배웠고 어떻게 하면 뛰어난 서체를 더욱 뛰어나게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역사적이면서 과학적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예술적적인 미묘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반해버렸습니다.

이때 배운 것들이 실제적으로 저의 인생에서 쓰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우리가 첫 매킨토시를 설계할 때 갑자기 그 당시에 배웠던 것들을 적용할 기회가 왔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맥에 모두 담았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서체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최초의 컴퓨터 입니다. 제가 그 당시에 그 강의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도 매킨토시에는 다양한 서체시스템이나 비례크기의 폰트들이 설치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윈도우가 맥을 따라 했지만 어떤 개인용컴퓨터에도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자퇴를 하지 않았다면 그 서체강의를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러한 멋진 서체들은 설치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 닷컴비지니스를 예견할 수는 없었겠지만 10년이 지나서 다시 되돌아보면 정말 명료한 선택 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도 앞날을 예측만 한다고 닷컴비지니스에 종사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오직 과거를 통해서만 미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닷컴비지니스에 관계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용기든 운명이든, 카르마든 뭐라 불리던간에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서 저는 절대로 좌절하지 않았고 항상 저의 인생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저의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손실에 관해서 입니다.

제가 행운아인가요? 저는 제가 정말 하고자 하는 일을 빨리 찾았습니다. 저는 20세 때 워즈와 함께 저의 부모님의 창고에서 애플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린 열심히 일했고 두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매출 2억불에 직원수 4,000명이 되는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우리의 첫번째 작품인 매킨토시를 1년 빨리 출시하였고 그때 나이가 30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고되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자기가 해고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애플이 커감에 따라 저는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고용하여 저와 함께 경영을 하도록 하였고 첫해에는 그럭저럭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전은 나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는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이사진은 그의 편이 되었고 30세의 나이에 저는 애플을 나왔습니다. 아주 공개적인 해고였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 성인이 되면서 몰입하던 오직 한가지가 사라져 버렸고 이것은 모든 것을 부셔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전 세대로부터 받아온 기업가정신을 제가 망가뜨린 듯 한, 마치 이어달리기 경주에서 제가 받은 바통을 떨어뜨려 버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났고 제가 망쳐버린 것들에 대하여 사과하려 했습니다. 저는 공개적인 실패작이었으며 심지어는 실리콘벨리를 떠나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제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했던 일들을 사랑했었습니다. 애플사에서 당했던 여러 일들이 저에게 하나의 변화조차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내몰렸지만 저는 여전히 제 일을 사랑했고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땐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되었던 경험은 저에게는 최고의 경험이라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이 다시금 새로 시작하는 자의 가벼움으로 바뀌었으며 모든 것에 함부로 단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저를 제 생애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로 진입할 수 있게끔 저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5년간 저는 넥스트 라는 이름의 회사와 픽사 라는 이름의 회사를 시작하였고 놀라운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픽사 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드는 회사가 되었으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입니다. 여러 대단한 일들이 진행되는 와중에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저는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했던 기술은 현재 중흥기를 맞고 있는 애플의 핵심 기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랜과 저는 사랑스러운 가족을 이루었구요.

저는 확신하건데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은 저에게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험은 마치 지독히도 쓴 맛의 약과 같으나 분명 환자를 낳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인생에 있어 머리를 벽돌로 얻어맞는 듯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저는 그 당시 저를 지탱하게 해 주었던 힘은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 여러분의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의 일들은 앞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이 진실로 만족하는 방법은 여러분이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보세요. 쉽게 정하진 마세요.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일들처럼 여러분이 그런 일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좋은 친구사이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아보세요. 쉽게 정하진 마시구요.


저의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17살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 “만일 네가 하루 하루를 너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너는 옳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지난 33년간 이 문구는 저의 마음속에 좌우명처럼 남았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며 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만일 오늘이 나의 인생에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일을 정말 할까?” 그러면 대부분의 날들의 대답은 “아니” 였습니다. 저는 뭔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는 일이 저에게는 큰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자극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일에서, 외부의 기대나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 – 이러한 것들은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만을 남겨놓기 때문이죠. 당신이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하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미 당신은 알몸입니다. 마음이 가고자 하는 곳을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약 일년전에 저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CT촬영을 했고 판독사진은 선명하게 저의 췌장에서 종양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었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고 하였으며 제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정도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사가 저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벌려 논 일들을 정리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의사들의 표현 이었습니다. 그것은 돌아가 아이들에게 십년 간 해줄 이야기들을 몇 달 만에 다 끝내라는 뜻이었으며 모든 것을 잘 정리해서 가족들이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끔 하라는 것이었으며 작별인사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하루종일 내가 암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 생체검사를 했는데 의사들이 가는 관을 저의 식도로 집어넣어 위를 지나 창자쪽으로 해서 저의 췌장에 바늘을 삽입하여 종양으로부터 조직을 일부 채취 하였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으나 그 당시 함께 있던 저의 처는 의사들이 현미경을 통해 그 조직을 관찰하더니 그 조직이 외과적인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임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완치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장 가까이 죽음과 직면했던 경험이며 앞으로도 몇십년간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일속에서 살아나고 나서 저는 좀더 확실하게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 조차도 죽어서 가려고는 하지 않지요. 그러나 역시 죽음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만 하는 종착지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곳이죠. 그리고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새로운 삶이 창조되기 때문에 그래야만 합니다.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대리인 입니다.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깨끗하게 바꾸어 주지요. 지금 당장 여러분들은 가장 새로운 존재 이지만 언젠가 머지않아 여러분들도 늙어갈 것이며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너무 드라마틱 한가요? 하지만 사실이죠.

여러분들의 인생은 짧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인생을 허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독단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그렇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결과에만 의존하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소리에 묻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못 들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여러분들이 진정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나머지는 모두 부가적인 문제들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The Whole Earth Catalog”이라는 대단한 책이 있었습니다. 저의 세대에서는 거의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었죠.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파크란 곳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 라는 작가가 쓴 책인데 자신의 시적인 영감을 담은 책이죠. 1960년대에 쓰여진 책인데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라던가 탁상출판의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은 타자기와 가위와 즉석카메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책은 마치 구글의 종이책처럼 35년전의 구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이며 깔끔한 문체와 위대한 견해들로 충만한 책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The Whole Earth Catalog” 를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발간 하였고 그런 시기를 지나 1970년대에 최종판을 발간했는데 그때가 제가 지금의 여러분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 입니다. 최종판의 뒷장에는 새벽의 시골길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요. 만일 여러분들이 충분히 모험을 즐기는 타입이라면 한번쯤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 사진 아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배고픈 채로 지내라, 바보처럼 지내라”. 이것이 최종판을 발행하던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배고픈 채로 지내라, 바보처럼 지내라. 저는 항상 제 자신이 그러기를 바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졸업을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여러분들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배고픈 채로 지내라, 바보처럼 지내라.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 글은 애플컴퓨터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대표이사인 스티브잡스가 2005년 6월 12일 졸업생축사 때 발표한 것입니다.)

 

 



 

                 <동영상>
 
정말 감명적인 축사네요~ 스티브잡스 스탠포드 졸업식 축사 [스티브잡스,스태포드졸업식축사,해외영상]
3분 34초
2006.12.05

 
 

 

 

 

                     스티브 잡스 졸업 축사

                                                                                                                     June 23, 2005 

 

Filed under: apple, folklore — ilovja @ 12:02 am

미국에는 보통 6월쯤 되면 졸업 시즌이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중퇴자에다가 스탠포드가 아니라 리드 칼리지를 다녔는데 인텔칩에 대한 충격이 아직도 선선한 지난 6월 12일 스탠포드 졸업식에서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세 가지 이야기를 비교적 진솔하게 전했다.

연설이 있기 전에 환경단체인 ‘컴퓨터 수거 캠페인 Computer TakeBack Compaign’ 이 대여한 비행기가 강연장 위를 떠 다녔는데, 비행기의 배너에는 “스티브씨, 미니 플레이어처럼 놀지 맙시다. 모든 전자제품 쓰레기를 재활용해야 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환경단체에 따르면 애플의 전자제품 쓰레기 재활용 비율은 델이나 HP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연설문 시작—-

 

  세계 명문대로 꼽히는 대학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늘 이 자리만큼 대학졸업식을 가까이서 목격한 적은 없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뿐입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딱 세가지 이야기죠.

 

  들려 드릴 첫번째 이야기는 점 잇기에 관한 것입니다.

리드 칼리지 Reed College에 입학한 지 6개월만에 자퇴를 했으나, 일년 반 정도 청강생활을 하면서 머물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이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생모는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미혼모였는데, 저를 양자로 보낼 결심을 하셨죠. 어머니는 제가 대졸학력을 가진 부부에게 입양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 마자 변호사 부부가 입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이 부부는 여자 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셨죠. “예정에 없던 사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양부모님의 대답은 “물론입니다.” 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낳아주신 어머님은 나중에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양부모님께서 저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 지 몇달이 지나서야 친어머님은 마음이 누그러지셨죠.

 

  그로부터 17년후에 대학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택했습니다. 일반 근로자였던 양부모님이 저축한 모든 돈이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 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대학 교육이 어떤 도움이 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까먹고 있었죠. 그래서 자퇴를 결심했고, 모든 일이 잘 될거라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꽤 두려웠지만, 돌아 보면, 제가 인생에서 내린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자퇴를 하고 나니, 관심없었던 필수과목 대신 듣고 싶었던 강의를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낭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기숙사에 방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 거실에서 잠을 잤고, 콜라 빈병을 모아 재활용센터에 갖다 주고 병당 5센트를 받아서 먹을 것을 샀고,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 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the Hare Krishna 사원(역주: 힌두교 계열)의 일요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식사는 정말로 좋았습니다. 제 호기심과 직감으로 얻는 대부분의 경험은, 이후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만큼 소중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예를 한가지 들어 보지요:

 

  그당시 리드 칼리지에서는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교정 곳곳의 포스터, 서랍의 레이블 마다 아름다운 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퇴를 했으니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서체 수업을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세리프와 산 세리프 서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자모의 결합에 따라서 자간을 달리 둠으로써 훌륭한 서체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역사적으로 유명했으며, 과학은 따라 갈 수 없는 섬세한 예술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매료되었죠.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인가 하는 한 가닥 희망 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 년 후,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의미가 와 닿았습니다. 매킨토시와 접목을 시켰을 때, 미려한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했으니까요.

 

  제가 만약에 그때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매킨토시는 다중 서체나 비례적으로 자간을 조정하는 글꼴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가 맥을 그대로 따라 했으니까, 매킨토시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퍼스널 컴퓨터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겠죠. 자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테니, 퍼스널 컴퓨터는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인쇄술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었을 때에는, 이런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돌아 보았을 때, 모든 게 분명히 보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점들만 이을 수 있는 거죠. 그러므로 이런 점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건 간에 믿어야 합니다. 이런 제 인생관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종국에는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스티브잡스의 3가지 스토리]
 
 스티브잡스, 현 애플 CEO인 그가 지난달 12일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장에서 축사를 했는데 이런저런 비즈니스 얘기가 아닌 일반적인 처세술 얘기도 아닌 자신의 인생과 삶의 교훈을 진솔하게 얘기한 점이 감명깊게 다가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을 졸업하면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은 내 인생의 세가지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첫째는 점(點)을 잇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에
6개월만 다닌후 그만 두었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내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고 형편상 입양을 원했는데 대졸자 부부에 입양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 변호사 부부를 골랐는데 내가 태어나자 딸을 원한다며 나를 포기했습니다. 결국 저는 다른 부부 손에 넘어갔습니다. 생모는 나중에야 그들이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생모는 몇달간 서류에 사인을 안해주다가 '대학에 꼭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사인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후 정말 나는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스탠포드와 맞먹는 수준의 학비를 대느라 막일을 하는 양부모는 평생 저축한 돈을 써야만 했습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고 대학이 그걸 어떻게 알게 해줄지, 아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른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그런 데에 양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다 쓴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 대학을 그만 두기로 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3학기를 비정규 청강생으로 캠퍼스를 전전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가다가 부딪힌 것들중 많은 것들은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들로 나타났습니다. 리드대학 당시 캠퍼스의 모든 포스터와 게시물은 손으로 직접 그린 아름다운 글씨체로 돼있었습니다.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호기심에 서체과목을 들었고 그 강의에서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체를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미적이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인 서체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그로부터 10년후 우리가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었을 때 우리의 맥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변호사 부부에 입양됐다면, 대학 정규과목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서체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지금의 맥 컴퓨터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그 무엇이든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좌절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스무살 때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10년후 애플은 20억달러에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컸고 나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나는 해고당했습니다. 이사회에서 미래 경영전략에 관한 의견차이로 나이 서른에 밀려났습니다.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나는 참혹함에 빠졌습니다. 첫 몇달동안 나는 무엇을 할지 정말 몰랐습니다. 실리콘 밸리로부터 도망쳐 떠나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거부당했지만, 여진히 내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성공에 대한 부담은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벼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NeXT와 Pixar라는 회사를 시작했고, 5년후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습니다. 나는 애플로 복귀했고, 내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내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중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운 시험약이었지만, 환자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나를 이끈 힘은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연인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약 1년 전 나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수 없다며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운좋게도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아 졌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경우였습니다.

 열일곱 살 때 이런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학창시절 '전세계 목록'(The Whole Earth Catalog)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타이프라이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든 세계 풍물 도서입니다. 말하자면 종이책 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글이 나타나기 35년전의 일입니다. 1970년대 중반, 바로 내가 여러분의 나이 때, 최종판이 나왔고 그 최종판의 뒷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탐험 여행 길에 나서 자동차를 히치 하이킹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음직한 그런 시골길을 찍은 사진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그 밑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늘 배고프고, 늘 어리석어라"(Stay Hungry. Stay Foolish)

 50평생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이러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by harris | 2005-07-22 1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