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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창조 경영’의 제왕 애플컴퓨터 CEO 스티브 잡스

영국신사77 2007. 1. 5. 22:44
  • “상상을 현실로…” 변화·혁신으로 세상을 바꿔
  • <4> ‘창조 경영’의 제왕 애플컴퓨터 CEO 스티브 잡스
    미래 비전 실현해내는 ‘창조적 리더십’ 갖춰
    발상의 전환 ‘아이팟’ ‘아이튠스’ 공전의 히트
    카리스마 넘친 연설… ‘잡스敎’ 신자도 만들어
  • 김희섭 기자 fireman@chosun.com
    입력 : 2007.01.05 00:40 / 수정 : 2007.01.05 04:19
    • 새 영웅을 갈구해온 세계 경영계에 거대한 카리스마가 등장했다. ‘경제에 디자인과 창의성을 도입한 인물’(비즈니스위크),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경영자’(보스턴컨설팅그룹)…. 전 세계 언론과 경영학자들이 스티브 잡스(Steve Jobs·52)에게 헌상하는 수식어들도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다.

      애플컴퓨터의 창업자이자 CEO(최고경영자)인 그는 ‘창조경영’으로 경영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혁명가다.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 최초의 3D(3차원) 디지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MP3플레이어 ‘아이팟’과 온라인 음악 서비스 ‘아이튠스’…. 그가 창안한 제품과 서비스는 세상을 뒤흔들었고, 전 세계에 수많은 열성 ‘잡스교(敎) 신자(信者)’들을 만들어냈다. 그는 단순히 제품을 만들어 파는 사업가가 아니다. 세계인의 라이프스타일(생활양식)과 문화 자체를 바꾼 디지털 혁명가인 것이다.

      그는 또한 실리콘밸리(IT산업)와 할리우드(엔터테인먼트 산업)를 동시에 지배하는 디지털 제왕(帝王)이다. 다가올 시대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상상력, 비전을 설득하고 실현해내는 창조적 리더십이 그를 이 시대 가장 위대한 경영자로 만들었다.

      ◆시대의 ‘아이콘’을 만든다

      잡스는 ‘괴짜’다. 동양철학에 심취해 대학을 중퇴했다. 영혼의 스승을 찾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누더기 차림으로 인도를 여행했다. 맨발 차림에 과일 다이어트를 종교처럼 신봉하고, 샤워를 거부해 몸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기성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이루고자 하는 꿈에 매달리는 잡스의 집중력과 추진력은 기업 경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즐겨 입는 그는 “물건만 잘 만들면 1등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며 창의성과 상상력을 강조한다. 잡스는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주문(呪文)’을 건다. ‘다르게 생각하라’ ‘미칠 정도로 멋진 제품을 창조하라’ ‘즐기면서 일하자’가 그의 입버릇이고, ‘해적(海賊)이 되자’는 도발적 화두도 던진다. 애플의 개발팀은 1주일에 90시간을 신나게 일한다. “단순한 제품을 넘어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icon·우상)’을 만들자”는 잡스의 비전이 직원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22세(1977년) 때 그는 책상에 올려놓는 개인용 컴퓨터 ‘애플’을 출시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대형 컴퓨터 일색이던 당시, 컴퓨터가 이렇게 작아질 수 있다는 것은 혁명적인 변화였다.

      1980년대 애플의 경쟁사들은 비용절감이나 가격 대비 성능을 높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IBM을 비롯한 대부분의 컴퓨터는 시커먼 배경화면에 흰색 글자를 사용했다. 전력소모량을 아끼기 위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거꾸로 갔다. 흰색 바탕화면에 검은 글자가 뜨도록 설계했다. 마우스를 눌러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는 그래픽 형태의 혁신적인 PC 운영체제(OS)도 개발했다. 이러한 창조적 발상은 이후 개발되는 컴퓨터의 표준기술로 자리잡았다.

    • ◆발상의 전환으로 세상을 바꾸다

      잡스를 잭 웰치(전 GE회장)를 능가할 ‘경영의 제왕’으로 부상시킨 것은 MP3플레이어 ‘아이팟’과 디지털 음악 서비스 ‘아이튠스’의 대성공이다. 이것을 통해 잡스는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의 동시 지배자가 됐다. 2001년 아이팟이 처음 나올 당시 시장엔 삼성전자를 비롯한 선발업체들이 MP3플레이어를 팔고 있었다.

      하지만 판매실적은 신통치 않았고, 시장은 미성숙 단계였다. 잡스는 “제품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서비스가 없다”고 분석했다. 하드웨어(아이팟)와 소프트웨어(아이튠스)를 결합시킨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시장의 구도 자체를 바꾼 것이다.

      잡스는 음악CD를 간단히 컴퓨터로 복사하고 재생할 수 있는 ‘아이튠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했다. 음반회사와 제휴해 아이튠스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도 내놓았다. 잡스는 아이팟에도 최대한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을 도입했다.

      경쟁사들이 복잡한 기능추가에 매달릴 때 그는 반대의 길을 갔다. 아이팟은 크기와 무게를 줄이기 위해 녹음이나 라디오 기능을 모두 제거했다. 복잡한 버튼을 대폭 줄이고, 간편한 ‘스크롤 휠’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용자들은 사용이 편리하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갖춘 아이팟에 열광했다. 아이팟은 작년 한 해 동안 약 4000만대가 팔렸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50%에 육박한다.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은 임직원에게 “우리가 MP3플레이어를 먼저 개발하고도 시장을 놓친 것은 뼈아픈 실수”라며 “애플의 창조적 발상을 배워야 한다”고 주문한다.

      ◆대중을 열광시키는 카리스마

      2005년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다. 이제 세상 속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에게 그는 췌장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으나 극적으로 회생한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한다.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미련할 정도로 자기 길을 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충고했다.

      잡스의 감동적인 연설장면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의 대중연설은 사람을 휘어잡는 마력을 갖고 있다. 잡스가 탤런트적 기질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데다 철저한 사전준비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잡스는 연설에 앞서 연설문 문구와 무대장치까지 꼼꼼히 검토한다.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사전연습을 수없이 반복한다.

      잡스는 원래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이기주의자였다. 회의 때면 화이트보드를 독점하며, 제품 이름에서 포장박스 크기까지 모든 일을 자신이 결정했다. 과도한 기술우월주의에 빠져 개발한 신형 컴퓨터가 줄줄이 실패하면서 1985년엔 자신이 만든 회사(애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대 억만장자에서 끝 모를 바닥까지 추락한 경험은 그를 새로 태어나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0년 애플의 CEO로 정식 복귀한 그는 앞머리가 벗어지고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됐다. 당시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장에서 그가 한 연설은 지금도 ‘잡스교도(敎徒)’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저는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인재들과 일하고 있습니다. 애플은 ‘팀 스포츠’로 움직입니다.”

      수천여 청중들은 일제히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잡스가 가장 좋아하는 존 레넌의 노래 ‘이매진(Imagine)’이 흘러나왔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나를 보고 몽상가라 비웃을지 모르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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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잡스] 새시장 만드는 ‘창조적 비전 제시형’

     

     

     
    잡스의 리더십 유형은
     

    많은 경영 전문가는 스티브 잡스가 잭 웰치(GE의 전 회장)를 뛰어넘어 21세기 최고의 기업가·경영인으로 칭송받을 것이라 예측한다. 그는 미래상을 정의하고 제시하는, 전형적인 ‘창조적 비전 제시형’ 리더다. 즉, 시장의 대세를 따르기보다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낸다.

     

    그는 전향적인 사고를 하는 경영자이면서도 직원들과 보조를 맞춰 함께 전진한다는 점에서 현대 경영사상 전무후무한 리더라 여겨진다. 잡스는 혁신적인 비전 제시로 유명하지만, 그의 진짜 강점은 효과적인 프로젝트 관리와 직원들의 창조성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애플이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지금도 이런 기업가 정신이 유지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고, 그의 창조적 비전 제시형 리더십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잡스는 아이팟을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 그리고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혁신을 가져왔다. 아이팟은 21세기 사회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다시 말해, 잡스는 자신의 활동영역을 IT 산업에 국한시키지 않고, 젊은 층의 문화 혁신을 선도했다.

     

    애플이 음악 산업의 수많은 전문 기업을 제치고 이러한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잡스가 기존 분야를 뛰어넘어 광역적(廣域的) 시각으로 기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았기 때문이다. 비전 제시형 리더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슈를 동시에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산업 간 컨버전스(convergence·융합) 역량을 키워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최대 장점은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 추구이다. 오늘날 애플은 단순한 컴퓨터 회사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영역으로 제품 포트폴리오(자산구성)를 확대했다. 혁신적 기술에 대한 비전을 가졌어도 공상(空想) 단계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다. 반면 잡스는 혁신적인 기술에 대한 상상력을 실제로 현실화시키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리더 중 한 사람이다.

                                            

     

     

                         

     애플사 CEO 스티브 잡스 인생 스토리

    '내 인생의 세가지' 스티브 잡스 연설 동영상 화제
    돈·명예·열정 모두 거머쥔 이 시대의 아이콘


    ▲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뛰어난 사업가이자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중 연설가로도 유명하다. 조선일보 DB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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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CEO(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가 2005년 6월 스탠포드 대학에서 했던 연설 동영상이 뒤늦게 화제다. 당시 동영상이 8일 각 포털과 동영상 사이트 인기 순위 윗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세계 최고 대학 가운데 한 곳의 졸업식에 참석해 영광이다”며 “내 인생의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입양에서 대학 중퇴, 사랑 마지막으로 죽음까지 3가지 주제로 그의 인생 경험을 솔직하게 뱉어냈다.

    그는 나쁜 남자다.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머니에게 ‘3학기 만의 중퇴’라는 상처를 안겼다. 첫 딸을 낳아 준 여자는, 임신시킨 채 무참히 버렸다. 친자확인 소송에도 불구, “내 딸이 아니다”라며 버티던 그가 딸을 자식으로 인정한 것은 1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 대부분은 그를 “폭군”이라 부르며 떠났다. 남들이 공들여 만든 알짜배기 작품들 빼앗기를 밥먹듯 했다.

    하지만 그만큼 세상을 열광시킨 남자는 없었다. 그가 인생의 한 막을 시작할 때마다, 그가 나락에서 ‘희망’을 발견할 때마다 세상의 역사는 새로 씌어졌다. 애플의 CEO(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50)’. 돈과 명예, 열정을 모두 한 손에 쥔 이 시대의 아이콘(Icon)이다.

    ▲유튜브(youtube.com)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폴과 클래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호기심이 많아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 약을 삼키던 말썽꾸러기 스티브는 17살 때 오리건주 리드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학비가 없어 3학기 만에 중퇴를 결정했다. 친구 방 마루에서 자고, 빈 코카콜라 병을 팔며 생계를 이었다. 학교는 그만뒀지만 “완벽하고 예술적인 서체를 배운 것과 동양철학에 심취한” 것은 대학생활에서 얻은 소득이다.

    먹고살기 위해 20세 되던 해 그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부모님의 창고에서 ‘애플’을 시작했다.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불과 10년 후 4000여명의 종업원과 함께 20억달러 가치의 기업이 되었다. 그는 미국 대중의 우상이 됐다.

    하지만 그의 인생 1막은 여기까지였다. 30살 때 모든 경영진이 그를 회사에서 내쫓았다. 함께 일했던 제프 래스킨은 “스티브 잡스가 있는 곳에선 항상 배신과 다툼, 편가르기가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이후 시작한 인생 2막은 모든 것과의 싸움이었다. 돈은 떨어져가고 언론은 냉혹했으며 동업자들은 등을 돌렸다. 5년 동안 ‘넥스트’와 ‘픽사’를 설립했지만,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몰렸다. 집과 자동차까지 빚으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마지막 순간, 신(神)은 그의 편에 섰다. 픽사가 만든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잇달아 만든 ‘벅스 라이프’ ‘토이스토리 2’ ‘인크레더블’ 등은 그에게 엄청난 수익과 함께 ‘성공한 영화 제작자’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붙였다.

    1996년. 추락하고 있던 애플은 쫓아냈던 스티브 잡스를 ‘임시(interim)’라는 딱지를 붙여 ‘구원 투수’로 불렀다. 애플의 히피 같은 독특한 기업 문화는 잡스의 작품이었고, 어떤 CEO도 이러한 애플 직원들을 휘어잡지 못했다. 2년 후 스티브 잡스는 전문가들의 만류에도 모니터와 본체를 하나로 만든 혁신적인 디자인의 아이맥(iMac)을 내놓는다. “최종 사용자가 편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맞아떨어졌다.

    2000년 1월 샌프란시스코 모스코 컨벤션센터 맥월드 엑스포. 검정 터틀넥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스티브 잡스가 등장했다. 그가 “이제 임시(interim) 직함을 떼겠다”고 말하자 청중은 벌떡 일어나 “스티브! 스티브! 스티브!”를 외치기 시작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2004년 8월. 그는 췌장암에 걸려 3~6개월밖에 살지 못하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죽음을 준비하며 신변 정리를 하라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인생 3막이 열린 셈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제 컴퓨터·영화 업계에 이어 음반업계 평정에도 나섰다. 음악파일을 들을 수 있는 MP3플레이어 ‘아이포드’와 음악 파일을 돈 주고 사는 ‘아이튠 뮤직스토어’를 통해서다. 음반사들과의 협상을 통해 ‘합법적인’ 유통 경로를 마련했다. 이제 애플은 ‘물건’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서비스를 파는 곳이다.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을 극복한 모습으로 스탠퍼드 졸업식장에 나타나 축사를 했다. 지금 화제인 동영상이 바로 그 때 모습니다.

    이제 세상 속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에게 “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한다.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미련할 정도로 자기 길을 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화두를 던졌다. 2000년 그가 애플의 ‘임시 CEO’ 직함을 떼고 창업주이자 정식 CEO로 돌아와 무대에 섰을 때는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Imagine)’이 흘러나왔었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나를 보고 몽상가라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만 그런 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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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05.10.30 21:07 46' / 수정 : 2006.09.08 13:2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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