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회 한국CEO그랑프리, '아름다운 CEO' 수상 - 108억원 기부 난치병 연구 돕고 독거노인 돕기 활동 - 구내식당 식사 등 검소한 생활 즐겨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성공한 사람들이다. 사회적 지위와 부(富)를 갖고 있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CEO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존경까지 받는 CEO는 흔하지 않다. 뛰어난 성취와 부를 쌓은 이는 많아도, 자신이 이룬 것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이는 드물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돈을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있을 때까진 그를 칭송하지 말라." 지난달 12일 열린 제2회 '한국CEO그랑프리' 시상식에서 '아름다운 CEO'상을 받은 정석규(77) 신양문화재단 이사장.
그는 '재벌급' 거부(巨富)도 사회 저명인사도 아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평생 일군 기업을 우리 사회에 아름다운 기부문화를 싹 틔울 '씨앗'으로 뿌렸다.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인재양성과 가난한 이를 돕는 데 나누었다.
재산은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진정 즐기는 자의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정 이사장은 대한민국의 가장 큰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학창시절, 그는 돈이 없었다. 책도 선생님도 없었다. 배우기 위해 한껏 힘겨워야 했다. 그는 노력해 번 돈을 청년들에게 학비로 줬다. 책과 도서관과 선생님을 줬다.
그는 암으로 위를 잃었다. 자신의 목소리도 잃었다. 외동딸도 암으로 잃었고 장남도 난치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 난치병을 이겨내기 위한 연구비를 줬다. 그는 자식들을 사랑했다. 그가 일군 기업도 사랑했다. 그런 그의 사랑은 자식과 회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사회에다 나눠 주었다. 100억원 이상을 아낌없이 퍼주었다. # 고무 인생 한국전쟁의 폐허속이었다. 정 이사장은 임시로 부산으로 옮긴 서울대 공대를 다녔다. "아버님은 의사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제 동기들 가운데서도 교수같은 안정적인 직업으로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 편안하게 머무는 것이 싫었습니다. 독자적으로 뭔가를 개척하고 싶었습니다."
밤낮없이 학교를 다니면서 고무공장에 취직을 했다. "1951년이었습니다. 공대출신으로 고무업계에 뛰어든 건 제가 처음일 겁니다. 산업에서 고무는 매우 중요한 원료입니다. 그렇지만 당시엔 고무를 전공한 교수도, 우리말로 된 교과서도 없었습니다."
기술은 머리가 아닌 발로 배워야 했다. "한·일간 선박운송회사에 직원으로 등록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화물을 적재하는 동안 무작정 찾아가 식사를 대접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배웠습니다. 한 사람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통해 계속 소개를 받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맥을 만들어 갔습니다."
치열한 배움의 여정은 1967년 태성고무화학을 창업한 이후에도 계속 됐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사업가로서 세상에 믿을 것은 아침에 떠오르는 해 밖에 없다고 해서 아호도 스스로 '신양(信陽)'으로 지었다.
"유럽과 미국을 누볐습니다. 좋은 기술을 가진 사람이나 회사가 있다고 하면 무조건 찾아갔습니다. 다른 일로 출장을 가면서도 어떻게든 틈을 내 여러곳의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1년에 3,4번 이상을 해외로 나가 200여곳 이상을 돌아다녔습니다. 30년 동안 저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모두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주력산업이던 신발용 고무엔 별 관심이 없었다. 기업을 키우는 것보다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재생고무 생산기술과 축전지용 고무를 개발했고 전자제품용 특수고무를 국산화했다. 수많은 기술관련 상을 받았다. "요새 말로 '블루오션'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늘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1979년 고무학회를 창입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오랫동안 회장으로 활동하며 후배 양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 기부 인생 평생 쉼없이 달려오던 그에게 큰 일이 생겼다. 1998년 후두암이 발병했다. 4기 판정을 받았다. 결국엔 성대를 제거하고 인공성대를 달아야 했다. 위암 수술도 받았다. "병마를 계기로 제 지난 인생을 되돌아봤습니다. 제 나이도 제법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일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얼마를 더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제부터라도 나누며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같은 해 60억원 규모의 신양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이후 300여명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또 공학분야의 학술상을 제정,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했다. 교수들의 전문서적 출판도 도왔다. 2001년 아예 회사를 팔고, 이때부터는 재단을 통한 사회봉사활동에만 전념했다. "제 자식 가운데에서 경영을 맡을만한 적임자는 없다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능력있는 경영자에게 회사를 양도하는 것이 모두에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식들에게 무조건 거액을 재산을 나눠주는 것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좋은 일에 쓰여 진다면 모를까, 자칫하면 독립심을 없애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 일쑤입니다. 재산이 좋은 방향으로 쓰여야 하는 것인데, 잘못되면 자식들에게 오히려 독약이 됩니다." 정 이사장은 지금까지 서울대에 모두 108여억원을 기부했다. 공대와 인문대에 도서관을 2개나 지었고, 숱한 연구기금을 지원했다. "1999년 하버드 대학에 가보고 큰 것을 느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기부금은 28조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서울대는 그 100분의 1도 안 됩니다. 교육은 돈이 있어야 가능한데 말입니다."
난치병 환자의 치료방법을 연구하는 데 돈이 쓰이는 게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 서울대 병원의 난치병 연구기금도 후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난 10년간 국제로타리클럽 활동을 통해 영등포 지역의 어려운 독거노인을 돕는 등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그 누구도 모른채 혼자 죽어가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최근에도 이들에게 연탄을 지원했습니다. 일단 올 겨울은 어떻게 지낼 수 있을 텐테. 정말 걱정입니다. 따뜻한 손길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재물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사회에 돌려줘야 합니다."
그의 재물관은 이랬다. "돈이란 건 인분과 같습니다. 한 곳에다 모아두면 악취가 납니다. 하지만 밭에다 고루고루 뿌려주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은 어렵습니다. 돈을 쓰는 것은 몇 배나 더 어렵습니다."
# 베푸는 마음 세상엔 정 이사장보다 더 큰 재산을 모은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는 서울대에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동문이다. "돈이 많다고 돈을 많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 제 자손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해선 안됩니다. 다같이 평화롭게 잘 사는 나라, 진정한 선진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라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좀 더 있는 사람이 좀 더 베풀어야 합니다."
정 이사장은 자신이 우리 사회에 '기부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기부는 무익하게 소멸되는 재산의 상속보다 후세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투자이며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베푸는 마음'이 널리 퍼져 있지 않아 아쉽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초월하는 봉사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는 언론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기부문화가 좀 더 널리 전파되기 위해서는 언론이 범죄나 사고 정치분쟁 같은 뉴스로 국민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는 사회의 아름다운 면을 더 밝게 조명해 희망을 주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엄청난 재산을 기부했지만 정 이사장은 검소한 생활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그는 신양문화재단이 위치한 서울대의 교내 식당을 즐겨 찾는다. 이 2500원짜리 점심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라고 부른다. 외부 인사와 만나도 메뉴는 주로 칼국수다. 잔칫집에 갔다가 남은 음식을 싸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가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찾아 빵과 음료수를 돌리는 것이 그의 낙이다. "남들 사는 걸 갖고 뭐라고 그러긴 싫습니다만, 일단 제 스타일이 사치하는 걸 싫어합니다. 좋은 것 입고 좋은 것 먹는다고 과히 행복하진 않아요. 돈은 더 기분좋고 더 멋지게 쓰는 게 좋습니다.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도 훨씬 큽니다. 앞으로 좀 더 유익한 봉사활동을 통해 보람있는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박창욱 기자
☞정석규 이사장의 지나온 길
<경 력> 195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공과 졸업 195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화공과 수료 (공학석사) 1951년-1967년 보생산업주식회사(고무공장)에 기술사원으로입사하여 상무이사로 퇴직 1964년-1967년 한국해군재단에서 설립한 진해전지(주)(세방전지전신)를 민영화하여 대표이사 사장 역임(겸직) 1967년-2001년 태성고무화학주식회사 설립 대표이사 사장 및 회장 역임
<대외 활동> 1966년-1978년 (사)한국고무학회 부회장·회장역임, 현재 명예회장 1971-1973년 (재)대한고무제품시험검사소 이사 1984-1987년 한국고무공업협동조합 이사장 1996-1998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창회회장 1998-현재 (재)신양문화재단 설립이사장 1998-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육연구재단 이사 2000-현재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재)관악회이사
<주요 수상> 1964년 (사)대한화학회 기술진보상 수상 1981년 (사)한국고무학회 고무기술진보상 수상 199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발전공로상 수상 2000년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관악대상 수상 2005년 서울대학교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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