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신년시리즈] 이명박 전 시장

영국신사77 2007. 1. 1. 19:20

 

업데이트 : 2006.12.31 18:02:20

[새로운 선택 2007 대선]

 

    (1) 이명박―걸어온길… “앞서야 산다” 타고난 승부사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삶은 친근하면서도 드라마틱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거쳐 앞만 바라보고 달렸던 그의 젊은 시절은 일반적인 50,60대 가장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은 다른 이들보다 한 발짝씩 더 내딛었고,그것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이 전 시장은 1941년 겨울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극심한 가난 탓에 초등학생 시절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도시락 대신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웠고,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사정을 몰랐던 교사들은 매일이다시피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고 술냄새를 풍기는 이 전 시장을 불량학생으로 취급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왕복 4시간을 걸어 학교에 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해 시름시름 앓다 자리에 누운 적도 있었다. 병원 치료 한 번 못 받고 집에서 넉달 동안 누워있다가 겨우 몸이 회복돼 다시 학교에 나갔다.

포항중학 시절 줄곧 전교 2등을 유지했지만 가정형편 탓에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등록금을 낼 형편이 못된다”고 했지만,담임 선생님은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면 등록금이 면제된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결국 이 전 시장은 1등을 놓쳐 등록금을 내게 되면 학교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인근 여고 앞에서 풀빵을 구워 팔았다. 사춘기 시절 또래 여학생들 앞에서 풀빵을 파는 것은 이 전 시장으로서도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남에게 구걸하는 것도 아닌데,사내 녀석이 뭐가 부끄럽다고 난리냐”는 꾸중을 들으면서도 그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 얼굴을 감추고 장사를 했다.

그는 3년간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아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엔 집안의 기둥이었던 둘째형(이상득 국회 부의장)의 뒷바라지를 위해 이사한 가족을 따아 서울로 왔다. 하지만 가족과 떨어져 혼자 나와서 살아야 했다. 판자촌 단칸방에서 모든 가족이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합숙소에서 매일 오전 5시가 되면 인력시장에 나가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다. 일자리를 못 찾으면 굶었다.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한참 동안 출근하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그때 이 전 시장이 가졌던 꿈은 매일매일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 진학의 꿈도 엉뚱한 생각에서 비롯됐다. 어느 날 문득 ‘중학교 졸업장보다는 고등학교 졸업이 낫고,고등학교 졸업장보다는 대학 중퇴가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헐값에 구입한 대입 참고서로 공부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를 병행,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등록금 문제는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입학금과 한 학기 등록금을 선불로 주는 조건으로 청소부 일자리를 제공해줘 해결됐다.

새벽 4시면 시장의 쓰레기를 치우는 이태원 시장 청소부가 됐다. 일을 마치고 학교에 가면 늘 녹초가 됐지만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에 임했다.

3학년 말에는 상과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1964년엔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맡아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6·3 학생운동)에 앞장서 대법원에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반년간 복역한 뒤 풀려났다.

대학을 졸업한 이 전 시장은 1965년 현대건설에 공채로 입사했다. 동료 직원들 앞에서는 솔선수범하는 자세로,상사 앞에서는 올곧은 모습으로 일한 그는 입사 5년 만에 이사가 됐고,12년 만에 사장을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에는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1996년 총선 때는 종로에서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대중교통체제 개편과 청계천 건설로 대표되는 시장 시절은 유력한 대선 주자가 된 지금의 그를 만든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정승훈 기자
shjung@kmib.co.kr

 

 

업데이트 : 2006.12.31 18:45:13

[신년시리즈]

 

  이명박 전 시장 동행취재 후기…테니스 경기중 참모에 애교


  [쿠키 정치] 이 전 시장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비해 예상외로 식사량이 많은 편이다. 오전 11시30분, 오후 1시 두차례 약속이 잡혀 있어도 두 자리에서 모두 그릇을 깨끗이 비운다. 당 대표 초청 만찬에서도 이 전 시장은 식사 후 “중국 요리집에서 이렇게 빨리 식사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코스요리 종류가 기대보다 적었다는 얘기다.

강연이나 간담회 때 주최측에서 테이블에 올려놓는 다과 종류도 마찬가지다. 주최측에서 새 그릇에 다과를 다시 담아내려 할 때는 참모들이 이 전 시장의 건강을 염려해 만류할 정도다.

이 전 시장은 약속을 어기는 것은 딱 질색이다. 어디든 약속장소로 향할 때는 참모들에게 버릇처럼 “무조건 10분 전에 도착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비서와 차가 제 시간에 대기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 전 시장은 혼자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고 한다.

가끔은 어린아이같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지인들과 테니스를 칠 때면 곁에서 지켜보는 참모들에게 ‘V’자를 그려보이며 좋아한다고 한다.

곁에서 지켜본 이 전 시장은 업무에서는 엄격했지만, 일상에선 스스럼이 없었다. 사무실 직원들이 간식을 먹을라치면 집무실 밖을 나와 “맛있다”며 집어 먹었고, 전화받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잠시라도 짬을 내 직원들에게 다가가려고 하고, 통화에 집중하느라 다른 이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깐깐하기만 했던 이 전 시장의 인상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승훈 기자 shjung@kmib.co.kr

 

 

 

 

 

업데이트 : 2006.12.31 18:47:30
   [신년시리즈]이명박 전 시장의 대표공약…종부세 완화

 [쿠키 정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와 과학비즈니스 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초반 이슈를 선점, 예비대선주자들 중 정책 대결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반도대운하와 과학비즈니스 도시 건설 외에도 이 전 시장이 내놓는 정책공약은 경제 분야에 무게중심이 실려있다. 대기업 CEO 경험을 살려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정치보다는 경제를 우선시하며 정권 창출 역시 통치가 아니라 경영이라는 점을 내세워, 정치적 행위 보다는 정책 공약이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주자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뜻이다.

 특히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쏟고 있다. 침체된 경기 회복에 도움이 되고 국가 재정이나 복지 문제 등에 미치는 효과가 가장 크다는 판단에서다.

 부동산 관련 정책은 이원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주택 소유자가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겠다는 것은 시장경제 원리에 맡기되, 집 없는 사람들에게는 복지 차원의 정책을 구사해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적률을 상향조정하면 집없는 서민 1가구 당 1주택 공급이 가능하다는 게 이 전 시장 생각이다.

 종부세와 관련해서는 서울 강남에 거주하는 은퇴계층 등이 종부세 부담을 피해 외곽지역으로 손쉽게 이사갈 수 있도록 1주택 장기보유자에 대해서는 양도세를 감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북정책에선 포용정책의 수정을 촉구하고 있다. 포용정책은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은) 더 가난해졌고 북한이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강행했기 때문에 정책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인도적 지원은 해야 하지만 그 전제는 먼저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시 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등 한·미 연합 방위체제를 바꾸기 위한 논의에도 부정적이다.

  교육분야는 경쟁력 제고와 자율성 확대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자율에 맡겨야 하고 정부는 유아교육과 의무교육에 더욱 전념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는 서울 강북과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설립규제를 완화,강남과의 교육기회 형평성을 맞추는 방안도 다듬고 있다.

 따라서 현행 입시제도는 어느 정도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학생들을 입시지옥에서 탈출시키고 학부모에게 사교육비 부담을 덜어주는 게 교육개혁의 목표인 만큼 학생들이 방과 후 받는 사교육의 상당부분을 공교육으로 흡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노동 분야에선 노·사·정 협력의 지방화시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주민이 노사문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업데이트 : 2006.12.31 18:47:36

[신년시리즈]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24시…언론 인터뷰 면담 폭주


[쿠키 정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새벽 5시면 어김 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을 무렵까지는 서울 가회동 집 주변을 한바퀴 돌았지만 요즘은 날씨도 찬데다 경호문제에 신경을 써야한다는 참모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집 안에서 러닝머신으로 건강을 관리한다. 집을 나서지 전까지는 조간신문을 훑어본다.

이 전 시장은 지난 29일 평소보다 30분 정도 이른 오전 6시55분쯤 집을 나섰다.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진 날씨 탓인지 이 전 시장의 일성은 “야,오늘 춥다. 언제까지 춥다더냐?”는 것이었다. 이 전 시장이 차(에쿠스)에 오르자 수행비서가 검토해야 할 서류를 건네고 당일 일정을 브리핑한다.

“어,그래 가자.” 이 전 시장은 외부 인사와의 조찬 약속장소인 서울시청 인근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조찬모임 후 이 전 시장은 서울 견지동 안국포럼 사무실로 향했다. 오전 8시30분쯤 비서실장의 간략한 보고가 끝나자 마자 비서가 전날 미처 연결하지 못했던 전화를 연결한다. 오전 9시를 넘어서자 이 전 시장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줄지어 사무실을 찾아왔다. 외부 손님과 면담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 전 시장을 찾는 전화 벨이 쉴새없이 울려댔다.

언론사 인터뷰에 이어 일본 정치권 인사들이 우루루 이 전 시장을 찾았다. 손님들이 나간 후 잠깐 혼자 집무실에 있던 이 전 시장이 집무실에서 나왔다. 휴대전화를 든 상태였다. 전화를 받을 땐 의자에 앉아있지 않고 서서 사무실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다른 언론사와 인터뷰,그리고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 면담 등이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낮 12시가 됐다. 서둘러 오찬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오찬 후엔 또다른 면담이 이어졌고 오후 3시가 지나서 이 전 시장은 다시 차에 올랐다. 서울 성내동 한울컨벤션 웨딩홀에서 열리는 자전거동호인의 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연말인데다 금요일 오후여서 시내는 온통 정체였다. 시청에서 동호대교까지 가는데 무려 1시간이나 걸렸다.

이 전 시장은 “안되겠다. 차 돌려야 겠다”고 했다. 행사시간에 제대로 맞추기 힘든 것은 물론 자칫하면 오후 7시로 예정된 당 주최 만찬에 늦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 시장은 부득이 자전거동호인의 밤 행사 참석을 취소하고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사무실은 오전과 달리 참모들이 두드리는 컴퓨터 키보드 소리와 가끔씩 울리는 전화벨 소리 외에는 차분했다. 이 전 시장에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소감을 물었다.

이 전 시장은 “우리 국민은 지난 한 해를 아주 어렵게 보냈다. 새해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운을 뗀 뒤 “그렇지만 백성의 마음이 사무치면 하늘이 움직이듯이 국민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고 한마음으로 뛰면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전 시장은 “새해에는 경제 재도약과 국운 융성을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두 힘을 합치자고 국민들께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여의도로 향하는 이 전 시장의 뒤를 따랐다. 한나라당 예비 대선후보와 당 지도부가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는 간담회장으로 가는 동안 이 전 시장은 눈을 감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덕담이 오고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이 전 시장을 겨냥해 “줄세우지 말라”며 강도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1시간 40여분 간의 만찬을 끝내고 나온 이 전 시장은 손 전 지사 발언에 대해 허허 웃으며 “일반적인 얘기로 받아들인다.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받아 넘겼다.

사무실 근처 인사동 부근에서 약속이 있고,그 일정 후 귀가할 것이라며 이 전 시장은 차에 올랐다. 이 전 시장은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시는데 걱정 않으셔도 된다”며 “모두 단합해 정권교체를 이뤄낼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압도적인 차이로 지지율 1위를 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내 경쟁이 갈등과 분열로 비쳐지는 것을 가장 걱정하는 듯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승훈 기자 shjung@kmib.co.kr

 

 

                         이명박씨의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 - 이명박

 

  저는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초등학생 때부터 김밥을 팔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갈 수 없는 형편이었던 저의 꿈은 고등학교 진학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은 "중졸보다는 고졸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며 고등학교 진학을 강력하게 권하셨습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등을 하면 등록금이 면제되는' 야간상업고등학교의 진학을 제안하셨고, 저는 '등록금이 면제되는 기간만' 다니는 것을 전제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낮에는 뻥튀기를 팔고 밤에는 과일 장사를 하면서 동지 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3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왔지만, 야간상고를 나온 저에게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뿐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때의 제 꿈은 '월급이 아무리 적더라도 한 달 일하고 월급 받는 일자리'를 갖는 거이었습니다. 어느 날 '대학을 다니지는 못하더라도 시험을 봐서 합격하면 중퇴가 되고, 그러면 월급 받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 다시 새로운 꿈을 꾸었습니다. '대학중퇴'가 목표가 되었습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거의 공짜로 얻은 입시 책으로 공부하여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재래시장에서 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대학을 다니니까 몸이 너무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대학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자원입대 하였습니다. 하지만 군의관으로부터 "쯧, 너 인마, 이런 몸은 군대에서도 안 받아 줘."라는 말과 함께 기관지 확장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논산 훈련소에서 쫓겨났습니다.


 매일 새벽 이태원 시장을 리어카로 누비는 환경미화원으로, 때로는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일을 하며 대학을 다니던 3학년 말, 저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였습니다.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고, 기적적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고대 학생화장 시절이던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결국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6개월 후에 대법원에서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업하였으나,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모든 입사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저를 대한민국에 있는 어느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게 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월급 받는 일자리'를 갖는 제 꿈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입사원서를 넣은 종업원 98명의 중소기업 현대건설에도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청와대로 편지를 보냈고, 비서관을 만나 "한 젊은이가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한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서관이 그 말에 충격을 받아 매달 정보보고를 받는 조건으로 입사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월급 받는 일자리를 갖게 된 저는 일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 40도를 넘나드는 태국의 밀림을 헤치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중동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온 몸으로 맞섰습니다. 중공업이 생기고 자동차가 생기면서 회사가 커 나가는 한복판에서 일하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입사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에 CEO가 된 저를 보고 세상은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입사할 때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였고 8,000달러가 될 때까지 나라 경제를 키우는 현장의 한 가운데에 열정을 쏟아냈습니다. 나 하나만의 일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일자리를 만드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건국 50주년 기념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50대 인물 중 경제인 10인 중 하나로, 기업총수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기업에서 익힌 경영마인드를 정치에 도입하겠다는 새로운 꿈을 가졌습니다. 1992년 정계에 입문하여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투자 촉진법]제정 등을 주도하였고, 1995년, 청와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당정치사상 최초로 서울시장 경선 제도를 관철시켜, 민주 정치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1996년 총선 때는 '정치 1번지'종로에서 이종찬, 노무현 후보를 이기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빠른 변화의 시대, 우리가 세계에서 경쟁할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변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업이 변해야 하고, 노동자가 변해야 하고, 학교가 변해야 하고, 정치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이, 공무원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기존 관료조직에 경영마인드를 불어넣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도록 해서 우리나라 발전에 큰 보탬이 되는 것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27년간 전 세계를 다니며 익힌 경영마인드로 공조직에 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하였습니다. 2002년, 저는 민선3기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어 그 동안 걸어온 길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 열정을 쏟아 '세계 일류 도시, 서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서울시장이 되어 천만 서울시민과 함께 '편리한 서울'을 위해 친환경적인 청계천 복원, 버스중심의 대중교통체계 개편, 도심 속의 휴식처 서울광장과 서울 숲을 조성하였고, 소외되는 사람 없이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서울'을 위해 지역균형발전의 뉴타운 사업, 무주택 서민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 장애인, 노인, 사회 약자를 위한 복지에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도시로의 육성을 위한 경제 활성화로 '활기찬 서울'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제 저는 4년간의 서울시장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출발점에 섰습니다. 저는 일생을 통해 꿈을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꿈을 이루는 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만한 때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또 도전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새로운 꿈을 꿉니다. 그 길에 여러분의 꿈을 담아 함께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꿈이 무엇인지 깊게 보겠습니다. 멀리 보겠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세,

                                       몸으로 부딪히고 싸워 이겨내는 자세,

                                                  새로운 꿈을 꾸며 노력하는 자세. 

 

출처 블로그 > SIMPLE LIFE
원본 http://blog.naver.com/horusjin/20031019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