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 이명박
저는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초등학생 때부터 김밥을 팔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갈 수 없는 형편이었던 저의 꿈은 고등학교 진학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은 "중졸보다는 고졸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며 고등학교 진학을 강력하게 권하셨습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등을 하면 등록금이 면제되는' 야간상업고등학교의 진학을 제안하셨고, 저는 '등록금이 면제되는 기간만' 다니는 것을 전제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낮에는 뻥튀기를 팔고 밤에는 과일 장사를 하면서 동지 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3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왔지만, 야간상고를 나온 저에게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뿐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때의 제 꿈은 '월급이 아무리 적더라도 한 달 일하고 월급 받는 일자리'를 갖는 거이었습니다. 어느 날 '대학을 다니지는 못하더라도 시험을 봐서 합격하면 중퇴가 되고, 그러면 월급 받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 다시 새로운 꿈을 꾸었습니다. '대학중퇴'가 목표가 되었습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거의 공짜로 얻은 입시 책으로 공부하여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재래시장에서 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대학을 다니니까 몸이 너무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대학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자원입대 하였습니다. 하지만 군의관으로부터 "쯧, 너 인마, 이런 몸은 군대에서도 안 받아 줘."라는 말과 함께 기관지 확장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논산 훈련소에서 쫓겨났습니다.
매일 새벽 이태원 시장을 리어카로 누비는 환경미화원으로, 때로는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일을 하며 대학을 다니던 3학년 말, 저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였습니다.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고, 기적적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고대 학생화장 시절이던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결국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6개월 후에 대법원에서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업하였으나,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모든 입사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저를 대한민국에 있는 어느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게 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월급 받는 일자리'를 갖는 제 꿈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입사원서를 넣은 종업원 98명의 중소기업 현대건설에도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청와대로 편지를 보냈고, 비서관을 만나 "한 젊은이가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한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서관이 그 말에 충격을 받아 매달 정보보고를 받는 조건으로 입사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월급 받는 일자리를 갖게 된 저는 일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 40도를 넘나드는 태국의 밀림을 헤치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중동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온 몸으로 맞섰습니다. 중공업이 생기고 자동차가 생기면서 회사가 커 나가는 한복판에서 일하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입사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에 CEO가 된 저를 보고 세상은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입사할 때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였고 8,000달러가 될 때까지 나라 경제를 키우는 현장의 한 가운데에 열정을 쏟아냈습니다. 나 하나만의 일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일자리를 만드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건국 50주년 기념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50대 인물 중 경제인 10인 중 하나로, 기업총수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기업에서 익힌 경영마인드를 정치에 도입하겠다는 새로운 꿈을 가졌습니다. 1992년 정계에 입문하여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투자 촉진법]제정 등을 주도하였고, 1995년, 청와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당정치사상 최초로 서울시장 경선 제도를 관철시켜, 민주 정치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1996년 총선 때는 '정치 1번지'종로에서 이종찬, 노무현 후보를 이기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빠른 변화의 시대, 우리가 세계에서 경쟁할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변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업이 변해야 하고, 노동자가 변해야 하고, 학교가 변해야 하고, 정치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이, 공무원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기존 관료조직에 경영마인드를 불어넣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도록 해서 우리나라 발전에 큰 보탬이 되는 것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27년간 전 세계를 다니며 익힌 경영마인드로 공조직에 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하였습니다. 2002년, 저는 민선3기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어 그 동안 걸어온 길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 열정을 쏟아 '세계 일류 도시, 서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서울시장이 되어 천만 서울시민과 함께 '편리한 서울'을 위해 친환경적인 청계천 복원, 버스중심의 대중교통체계 개편, 도심 속의 휴식처 서울광장과 서울 숲을 조성하였고, 소외되는 사람 없이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서울'을 위해 지역균형발전의 뉴타운 사업, 무주택 서민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 장애인, 노인, 사회 약자를 위한 복지에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도시로의 육성을 위한 경제 활성화로 '활기찬 서울'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제 저는 4년간의 서울시장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출발점에 섰습니다. 저는 일생을 통해 꿈을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꿈을 이루는 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만한 때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또 도전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새로운 꿈을 꿉니다. 그 길에 여러분의 꿈을 담아 함께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꿈이 무엇인지 깊게 보겠습니다. 멀리 보겠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세,
몸으로 부딪히고 싸워 이겨내는 자세,
새로운 꿈을 꾸며 노력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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