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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칼럼] 관객에 대한 예의: 철저한 프로정신

영국신사77 2006. 12. 29. 14:01
             [노재현칼럼] 관객에 대한 예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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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조용필(56)씨와 서울대 송호근 교수의 송년 대담(본지 12월 26일자 1, 5면)을 보면 가수 경력 38년인 조씨의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역시 국민가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프로로서, 정상의 리더로서 자기 위상에 걸맞은 직업관과 진퇴(進退)의 철학이 몸에 배어 있었다. 조씨는 "정상에 있는 사람은 너무 오래 잡고 늘어지면 추해진다. 처신이 깔끔해야 한다. 그게 프로가 발휘할 수 있는 관객에 대한 예의다"고 했다.

조용필씨는 관객 앞에서 자기 능력을 100% 완벽하게 드러내지는 못해도 90%까지만 발휘하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관객들도 즐거워하고, 다음 공연 때 또 찾아준다는 것이다. "그게 공연의 핵심"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더 의미심장한 얘기도 했다. "사람들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만드는 사람이 편해선 안 된다"고.

어느 분야든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는 예외 없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남몰래 흘린 눈물'이다. 물론 남몰래 수많은 눈물을 흘리고도 정상에 오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정상에 오른 사람 중에서는 남모르는 눈물을 흘려 보지 않은 이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용필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춥고 배고픈 아마추어 시절을 거쳤고, 인생에 곡절도 있었다. 남몰래 눈물을 흘려 본 이는 남의 슬픔과 한(恨)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남이 겉으로 흘리는 눈물뿐 아니라 속으로 흘리는 피눈물까지 느낄 줄 안다. 예술가에게는 필수적인 능력이다. 가수라면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 무엇을 원하고 느끼고 싶어하는지 파악하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열창한다. 조용필씨는 공연 때 신변잡기식 재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법이 없다. 전국투어 서울 공연(12월 10일)에서도 인사말과 밴드 멤버 소개 시간을 빼고는 두 시간 내내 노래에 집중했다.

조씨보다 나이는 몇 살 적지만 데뷔 연도로 치면 현역 중 최고참 가수가 바로 하춘화(51)씨다. 연세 지긋한 노인들도 "도대체 언제 적 하춘화냐"고 할 정도다. 1961년 6세 때 최연소로 레코드를 내며 가요계에 나왔으니 올해로 데뷔 45년이다. 긴 세월 동안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었다.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이다.

하춘화씨는 공연 도중 관객 앞에서는 절대로 물을 마시지 않는 가수로 유명하다. 땀이 흘러내려도 닦지 않는다. "관객에게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연습공연 때도 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고 한다. 그래야 스스로 긴장이 되고, 조명.음향 등 스태프들도 함께 긴장해 실전 같은 연습이 이뤄진다고 한다. 그는 공연 때마다 "하춘화라는 이름 석 자 보고 찾아온 관객인데,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된다"고 수백 번 다짐한다. 공연 한 달 전부터는 사적인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다. 목에 좋지 않은 것을 일절 삼가고, 조금씩 즐기던 와인도 이때만은 싹 끊는다. "진정한 프로는 자기절제를 해야 한다. 관객은 하늘이다. 나는 관객이 한 명이든 만 명이든 아무런 차이 없이 열창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춘화씨는 올해 8월 '사회변동기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성균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을 준비할 때는 집 근처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반드시 정장에 공들여 화장하고 독서실로 향했다. "공인(公人)으로서 예의를 갖추려고"였다.

하춘화.조용필씨는 매일 발성연습을 한다. 목소리 컨디션을 유지해 공연 때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하씨가 들려준 가요계의 경구(警句) 하나. "한 번 실수하면 내가 알고, 두 번 실수하면 주변이 알고, 세 번 실수하면 일반 관객이 안다."

어찌 조용필.하춘화씨뿐이랴. 패티김.이미자.최희준씨처럼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즐비하다. 하나같이 '관객에 대한 예의'를 아는 프로들이다. 관객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지킬 줄 모르면서 '관객의 예의'만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우리 사회 다른 분야에 비하면 대중가요계는 정말 아름답고 어른스럽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

2006.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