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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중에 홀로 선 여인 - 아비가일

영국신사77 2006. 10. 7. 20:23

             외로움 중에 홀로 선 여인 - 아비가일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삼상 25:3).

이것은 평범한 인물 소갯말을 넘어 가장 친밀하고 영속적인 인간관계인 부부관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사랑과 연합, 희생과 협력, 용서와 화해, 동정과 연민  등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속속들이 배여  있기에 우리는 사뭇 떨리는 심정으로  이런 소갯말을 대함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종종 이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어쩌면 우리는 실망하는데 익숙해있어 이런 소갯말을 대하노라면 으레 마음에 실망할 준비를 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도 우리를 실망시키는 부부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상을 헤진 옷처럼 낡게 만드는, 우리를 아주 철저히 실망시키는 부부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키우며 생을 음울하게 보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우리 장래에  소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렘 29:11).  이 일그러진 부부상을 우리 앞에 꾸밈없이 제시하신 것도 바로 우리의 행복과 안녕을 깊이 염려하사  우리로 그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실물교훈을 통해 생생하고  호소력있게 우리의 흩트러지기 쉬운  주의를 일깨우시니 것입니다. 


자 그러면 본문인 사무엘상  25장을 중심으로, 이들 부부의 결혼관계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원인을 추적해보고, 아울러 우리의 주의를 모으는 아비가일이란 여인이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쓰임을 받았는지 살펴보고 

성령께서 우리 각인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떠난 만남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3절).  

일심동체요 평생을 동고동락할 부부에 대해 이같이 대조적인 평가가 주어진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격이나 습성, 출신가문이나 학력의 정도가  다른데서 온 갈등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즉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근본태도가 다른데서 온 뿌리깊은 문제였습니다. 


아비가일은 사랑과 은혜가 그 마음을 다스린데 반해 나발은 물질이 그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시인하고 주어진 축복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나발은 오직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만  바빴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처음 만날  때부터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간의 결혼이 초래하는 갈등과  대립의 실상을 첨예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조화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의 생활을 하기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겠으나 그 이상의 생활, 즉 마음을 나누고 미래를 설계하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정신적, 영적 생활은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비극적인 만남이 허용되었을까요?

아마 그것은 부모의 권유가 빚어낸 결과였는지 모릅니다.  나발 가문의 풍부한 소유에 마음이 끌려, 혹은 여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아비가일의 부모 편에서 신앙여부를  묻지 않고 그 딸을 모험의 현장에 내맡겼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비가일의 부모는 그 딸을 불행의 수렁으로 내몰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영적인 안목이 결여된  부모의 선택이 자녀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란 얼마나 심각한지! 아마 그것은 나발의 완력이 빚은 강압적인 결혼이었는지 모릅니다. 즉,  나발이 강제로 아비가일을 욕보인 다음 그 약점을 이용하여 아내로 취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위협 등 물리적인 수단으로 결혼을 관철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어느 한편의 강압에 의한 결혼은 결코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은 결합은 가해의식, 피해의식, 배신감, 보복심리 등 온갖 해로운 불순물들로 인해 혼연일체에 이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완력과 충동에 의해 결혼관계에 들어가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모험에 빠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절제하고 단정히 행하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아비가일 자신이 나발의 부에 현혹된데서 빚어진 결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재물에 눈이 가리워져 그 뒤에 숨은 불행의 덫을 보지  못한 처사였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 보다 그 사람의 소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도록 부추기는 불신세대를 본받은데서 초래된 비극이었는지 모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한 마디로 그들의 만남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로 그들 앞에는 불행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 대화의 단절

불행한 결혼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대화의  단절'이라 할 것입니다. 

나발의 종의 진술을 들어봅시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17절). 

또한 그 아내 아비가일의 처신을 눈여겨봅시다.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19절).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고백 내지 반응을 대하게 된다는 것은 나발의 인품이 보통 수준에도 크게 못미치는 극히 저급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만을 아는 삶, 보이는 것에만 모든 것을 거는 삶,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애써 부인하는 삶으로 점철된 인생이 도달하는 종착점은 어디일까요? 

아!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하는 버림받음의 땅입니다. 그가 자랑하는 재물이 그 공허감을  채워주었을까요? 수많은 종들을 수족 놀리듯이  임의로 부리는 그 권세의 위풍당당함과 쩌렁쩌렁한 호령이 그 내면의 상실감을 상쇄시켜주었을까요?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나쳤습니다. 그러하나 옷깃의 스치는 소리뿐, 사람의 소리, 마음의 소리, 진실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이서, 늘  대하는 아리따운 여인에게서조차 종종 차가운 시선과 꾹다문 입술을 대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의식 내지 자존심을 품고 있는 한,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나발은 그러한 외면당함으로부터 하나님의 그를 향한 사랑의 호소를 들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사랑에 주린 자임을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으로써만  채워질 수 있는 신비한 공간이 있음을 직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생각이  높아진 까닭에 그같은 황량함과 버림받음의 땅에 홀로 내버려진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기를 싫어한 까닭에 하나님도 그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죄악된 삶의 어떠함을 절실히 맛봄으로써 스스로 두손 들고 복의 근원이신 그분께로 나오도록 하신  것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그 이름의 뜻대로 미련한 길을 고집했고 그 예정된 운명을 맞고 말았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 5).


이러한 대화단절의 비극을 맞은 것은 아비가일에게 있어서나 나발에게 있어서나 

두번 다시 범해서는 안될 일생일대의 과오요, 철저한 실패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편에서의 그 어떤 실패에 대해서도 대책을 갖고 계십니다. 

실패를 기회로 활용하시는 하나님,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분은 이 불행한 결혼을 통해서도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는 선한 역사를 기대하셨을 것입니다(고전 7:14). 

비록 인간 편에서의 고집과 불복종이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갔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은  이 나발과 아비가일 부부처럼 

대화단절의 불행 중에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부부들에게 

자비의 메시지, 소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가지 환란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란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 5:18, 19).


   3. 빛을 발한 홀로 서기

이제 주위를 둘러보는데서 한 걸음 나아가 아비가일 자신에게로  다가가 봅시다.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3절). 

이것은 단순히 그녀의 지식과 외모를 가리킨 표현이 아니라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라고  한 

바로 뒤에 나오는 설명과 대조되는 뜻을 내포한 표현입니다. 

즉, 아비가일은 그 인격과 도덕성에  있어서 

나발과 현저한 대조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총명하다'는 것은 그녀가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유지함으로써 

범사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신중하고 사려 깊게 행할 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러한 잘 단장된 속사람으로 인해 

그녀의 겉모습 또한 평화로움과 안정됨과 온화함과 정숙함의 향기를 

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녀의 그러한 높은 수준의 간증이 

'대화단절'이란 최악의 환경에서 보존, 유지되었다는 점입니다. 

남편과 대화가 단절되는 상황에 처할 때  

대개 아내는 포기와 체념의 늪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깊은 절망과 무기력 속에 남편을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하고, 

그렇게 된 상황을 원망하고, 그리고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냉랭하고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그러한 한계를 능히 극복하고 

믿음의 승리자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녀의 영혼의 빛은 모진 세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의든 타의든,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그래서 내면적인 의사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불행한 결혼관계에 들어가긴 했지만

거기서도 하나님 앞에 홀로 서기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남편의 거칠고 무례한 언사로 마음이 상할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 마음을 토했습니다. 

남편의 권위주의적인 거드름과 허세로 마음이 눌릴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 마음을 토했습니다. 

남편의 탐욕적이고  불신앙적인 처세로 마음이 민망스러울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  마음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피난처되신 하나님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안식과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한편, 그녀의 하나님 앞에 홀로 서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남편이 다윗 일행을 문전박대한 일로 

이제 온 집안이 멸절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4-17절) 

그녀가 보인 민첩성(18-23절)과 영적 통찰력(24-31절)을 보면 

그녀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상당한 수준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행한 일이 그녀의 집안의 운명을 뛰어 넘어 

그녀가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장래에 미칠 파급력을 내다보았습니다. 

만일 그 일로 인해 다윗이 그녀의 온 집안을 멸하는 불행이 일어난다면 

장차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에 그 일이 마음에 자책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국정을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 

적지않은 위축과 의기소침을 가져 올 것이며 

왕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에도 흠집을 남길 것입니다(30-31절). 

따라서 이제 아비가일이  일의 정황을 듣고 

다윗 일행의  노도와 같은 진격을 중도에 막은 것은 

다윗의 이후 생애에 있어 크나큰 의미를 가진 일이었습니다. 

여기 다윗의 경탄에 찬 고백을 직접 들어봅시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32-34절)


이처럼 아비가일이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안목이 남달랐던 것은 

그녀의  영혼이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민감히 느끼고 분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무정하고 불신앙적인 남편으로 인해 고독감과 상실감이 몰려올 때면 

으레  그녀는 '영혼의 홀로서기'를 시도했습니다. 

삶의 압박이 심할수록 그녀의 영혼은 그만큼  빈번하게 하나님과 대면하였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깊이 아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신령한 지혜와 안목이  키워졌던 것입니다. 

그녀는 다름아닌 환란을 통해 인내를 인내를 통해 연단을, 

그리고 연단을 통해 소망을 이루는 비결을 체득하고 있었습니다(롬 5:3, 4).


우리의 신앙에 있어 '홀로서기'는 어떤지요. 

우리도 이 아비가일처럼 삶의 시련을 '홀로서기'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는지요. 

하나님과만 함께 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지요. 

우리의 골방은 기도의 향기로  가득한지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우리  영혼을 감싸는 축복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지요.


요컨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 어떤 시련도 

결국은 그분과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 그분을 깊이 알고 

그분의 일에 쓸만한 도구로 사용되는 축복을 베푸시기 위한 것임을  

아비가일은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4. 우월의식

아비가일은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한 발전과 폐단, 두가지 모두를 경험했는데, 앞서 말한 '홀로서기'는 그 발전적인 측면을 언급한 예라 하겠습니다. 이제 그 이면을 살펴보면, 그러한 남편과의 대화단절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가벼이 여기고, 나아가서 무시하는 습성에 젖게 했습니다. 다윗 앞에서 그녀가 취한 남편에  대한 태도는 아무리 앞뒤 상황을 참작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려한 자니이다...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25, 26절).

물론 여기서 아비가일은 한 남편의  아내로서보다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 앞에  선 사자의 위치에서 그를 공적으로 격려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처럼 외인 앞에서 자기 남편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은 왠지 정도를 지나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건전한 상상에 의하면, 아비가일은 은연 중에  영적인 우월의식을 키웠으며, 그로 인해 인격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남편을 관심 밖으로 제쳐두게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한 우월의식이 그녀로 하여금 다윗의 면전에서  남편에 대한 그러한 불손한 언사를 발하게끔 한 것입니다.

비록 강압에 의해 원치않는 결혼관계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결혼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유효하며, 또한 신성한 계약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비가일은  남편의 가치관, 인격 및 태도 여하에 관계없이 아내의 도리를 다하며 남편에게 순복하고 그 뜻을 존중히 여기며 언행심사를 삼가야 했습니다. 오늘날 한 남편을 섬기는 아내들이 신앙, 경제력 등을 이유로 남편의 권위와 지도력 아래 있기를 거부하며 자녀들과 이웃이 보는데서 공공연히 남편에 대한 평소의 불만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을 쉬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손으로 자기 집을 허물고 있습니다(잠 14:1). 아비가일은 그런 면에서, 특히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고전 7:14).

"아내 된 자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 3:1, 2).

나발은 혹 정도가 지나쳤을지는 모르나 

여전히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도를 순종치 않는  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멸망을 당하고 말았으니(36-38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중에  

조심스럽게, 그 아내된 아비가일이 남편을 얻기 위해 

과연 최선을 다했는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비가일의 삶은 우리 중 대부분이 그렇듯이 

긍정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삶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성경이 극히 단편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는 까닭에 

많은 부분 우리의 건전한 상상에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성경의 기록상에 나타난 성령님의 뜻에 비추어 볼 때, 

아비가일은 아내로서의 부적절한 면모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은 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했음이 분명하며,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지혜로운 여인을 

그 기뻐하시는 종 다윗 왕의 아내가  되게 하사 

전날의 괴로움과 아픔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씻어주실뿐 아니라 

그녀의 생각지도 바라지도 못한 존귀와 영예를 얻게 하셨습니다(39-42절).


하나님께서 혹 우리를 사용하기를 기뻐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온전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연약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중심에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의 불씨가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많은 외적인 활동에 우리  자신을 몰입시키기보다 

우리의 내면에 고요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의 심지를 키워가는 중에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적은 일에 한가지 한가지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의 심지를 때묻지 않게 보존하고 조금씩 깊게 할 수 있도록 

아비가일처럼 하나님 앞에 

'홀로  서기'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3, 4) <끝>.

 

 

                                                                                글쓴이 : 정병은

 

                                                                          출처 블로그 > 쉴만한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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