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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고대사 [Egypt, history of ancient]

영국신사77 2006. 9. 11. 09:49

             이집트 고대사 [Egypt, history of ancient]

 

 

                                           고대 이집트의 역사.

 

                                                         개요

고대 이집트(왕조 이전 시대~비잔틴 시대)
(위쪽 지역)나일 강 삼각주 ...
고대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동부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에 비유될 수 있으며,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 강의 홍수에 의존해 농업이 이루어진다(→ 경제체제). 또한 주로 나일 강 유역과 나일 삼각주 지역에서 경제적 활동이 행해진다. 나일 강 유역은 띠처럼 길게 이어진 석회암 언덕 사이를 흐르는 나일 강의 비옥한 범람원이고, 나일 삼각주는 오늘날의 카이로 북쪽에 여러 개의 나일 강 지류를 중심으로 부채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땅이다. 아스완에 있는 제1폭포는 이 나라의 거주지역 안에 있는 국경으로는 유일하게 윤곽이 뚜렷한 경계선이었다. 이 폭포 남쪽에는 사람이 살기에 훨씬 부적합한 누비아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나일 강 서쪽에는 몇몇 광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자원이 부족한 메마른 사하라 사막이 있었다. 북동쪽에 있는 수에즈 지협은 시나이 반도 및 서아시아와 접촉할 수 있는 주요통로로서,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교류 지역이었다.

왕조 이전 시대와 초기 왕조시대의 이집트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땅은 고위 관리들에게 할당되어 있었고, 그 땅에 살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땅을 마음대로 떠날 자유도 없이 의무적으로 경작해야 했지만 노예는 아니었다. 노예가 되는 사람은 포로와 외국인 또는 가난이나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 고용살이를 하는 사람뿐이었다. 공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집트 사회는 신, 왕, 죽은 사람, 인간(주로 이집트인)으로 이루어진 하향식 계급 구조 사회였다. 왕도 신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지위는 주요신들보다 훨씬 열등했다. 왕은 어떤 인간보다 잠재 능력이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이었다. 이집트 왕들은 보통 파라오라고 불렸는데, 이 낱말은 '큰 땅'을 뜻하는 이집트어 '페르아'(peraa)에서 유래했다. 신왕국시대의 모든 왕은 저마다 독특한 칭호를 가진 왕비 1명과 그보다 지위가 낮은 많은 아내를 거느렸다. 왕비가 낳은 아들이 왕위 계승자로 우선권을 가졌던 것 같지만, 다른 아들들도 왕이 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후계자는 맏아들(살아남은 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이었지만, 다른 친척이나 전혀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기도 했다.

이집트 선사시대의 신석기 및 후기 단계를 보통 '왕조 이전 시대'라고 부른다. 뒤이어 이집트의 토착 통치자들이 다스린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가인 세벤니토스의 마네토가 BC 3세기초에 쓴〈이집트사 Aegyptiaca〉 에 따라 보통 30개 왕조로 나누어진다. 이 책의 내용은 오늘날 후세 작가들의 저서에 단편적으로 전한다. 마네토는 초기 왕들의 통치연도를 숫자로 표시하지 않고 통치기간에 일어난 두드러진 사건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 이름으로 목록을 만들었는데, 마네토는 이를 기본 사료로 삼았다. 오늘날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지역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현무암의 팔레르모석에는 그런 목록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이집트 역사를 알려주는 고고학 및 금석학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만 역사 해석을 시도한 것은 전혀 없으며, 자료의 분포 또한 고르지 못하다. 예컨대 자료가 전혀 없는 수십 년의 공백기도 있고, BC 2000년대에는 역사적 사건을 연속적으로 기록한 왕실 금석문 자료가 하나도 없다. 제5왕조(BC 2465~2325경)부터 로마에 정복될(BC 30) 때까지 만들어진 개인의 전기적 금석문은 개인과 사건의 관련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만, 그 사건의 전반적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제12왕조(BC 1938~1756경)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BC 305~30)까지 만들어진 왕실 금석문은 왕이 세계 질서의 재창조자이며 세계의 지속적인 안정이나 팽창을 보장하는 존재라는 포괄적인 '역사' 개념에 따라 왕의 행위를 제시하고자 했다.

고대 이집트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로마 시대에 강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되살아났다. 로마에 남아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풍부한 이집트 유물이, 이 나라를 방문한 사람들이 제공하는 약간의 정보를 보완해주었다. 당시 이집트에 대한 견해를 지배한 것은 이집트가 고대에 지혜의 땅이었다는 고전시대의 전설이었다.

1798년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했을 때 원정대에 포함되어 있던 학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것을 기록해 〈이집트 묘사 Description de l'Égypte〉(1809~28)로 출판했다. 이 저서는 상형문자를 해독하기 전에 나온 연구서 중에서는 가장 포괄적인 것이다. 나폴레옹 원정대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의 포고문을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및 그리스문자로 기록한 로제타석을 발견했고, 프랑스가 항복한 뒤 로제타석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 비문은 1822년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해독했다.

19세기 전반에는 수많은 고대 유물이 이집트에서 반출되어 세계 각지 주요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집트 고대 유적은 발굴 과정에서 커다란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유물들은 발굴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제거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9세기 중엽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는 이집트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인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이집트에 고대 유물 관리청과 이집트 고미술품 박물관을 세웠고,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브루크슈는 여러 시대의 문헌을 해석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으며 최초의 중요한 이집트어 사전을 출판했다. 1880년에 영국의 이집트 학자인 플린더스 피트리는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전개했다. 40년 넘게 걸린 이 발굴 작업은 오래 된 선사시대를 제외하고 이집트 문화의 모든 주요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뼈대를 만들었다.

20세기 전반에도 몇 가지 두드러진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졌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22년에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투탕카멘의 무덤이었다. 1950년대말과 1960년대에는 1970년에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되기 전에 이집트와 수단에 걸쳐 있는 누비아 지역의 유적을 발굴해 기록하자는 국제적인 운동이 벌어졌다. 그후 하(下)누비아에 있는 대부분의 신전이 좀더 높은 지역이나 여러 외국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운동 덕분에 이집트에는 광범위한 고고학 기술이 도입되어 발굴 및 기록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왕조 이전 시대와 초기 왕조시대

왕조 이전 시대

지금까지 알려진 이집트 신석기 문화 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나일 삼각주의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마림다바니살라마와 그보다 더 남서쪽에 있는 파이윰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BC 5000~4000년대에 걸쳐 있다. 주민들은 손쉽게 지은 움막에서 살았고, 죽은 사람을 집 안에 묻었을지도 모른다. 서부 사막과 하르툼 북쪽에서도 신석기 유적이 확인되었다.

상(上)이집트에 존재한 타시안 문화바다리안 문화는 BC 4000년대 말기의 것이다. 왕조 이전 시대의 가장 독특한 사치품은 화장품을 가는 데 쓴 석판인데, 이 유물은 이 시기에 처음 나타난다. 무덤은 재산과 지위의 차이를 거의 보여주지 않으며, 중앙정치 조직이 없는 농경문화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바다리안 문화를 계승한 나카다 제1기 문화는 촌락의 밀집 상태와 물질 문명에서 바다리안 문화와 달랐지만, 사회 조직은 비슷했다. 이 단계에 이어 거대한 유적이 발달하고 재산과 사회적 신분이 차츰 분화하기 시작한 나카다 제2기 문화가 나타났다. 오늘날의 카이로 부근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역에는 그당시 근동 지방과 교역했던 별개 문화의 유적이 있다. 이 시대에 이루어진 청금석 수입은 교역망이 아프가니스탄까지 뻗어 있었다는 증거를 제공해준다.

역사시대 초기를 특징짓는 것은 왕의 통치연도에 이름을 붙인 형태로 문자 기록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이 기록들은 나중에 한데 모여 팔레르모석 같은 문헌을 이루었다. 이집트 역사에서 최초의 왕인 메네스도 이런 문헌에 기록되었는데 그는 관개사업을 하고, 수도 멤피스를 건설했다고 한다.

초기 왕조시대(BC 2925경~2575경)

제1왕조(BC 2925경~2775경) 때 문자가 차츰 보급되었다. 제1왕조 중엽에는 인공적 필기 도구인 파피루스가 발명되었다. 이집트는 갑자기 번영을 누리게 되었고, 나라 전역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무덤은 당시의 다양한 빈부 차이를 보여준다. 제1왕조가 발전의 절정에 이른 것은 오랫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덴 왕(BC 2850년경에 활동) 시대였다. 제1왕조말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졌다는 증거가 있다. 왕위를 요구한 가계들 가운데 하나가 제2왕조(BC 2775경~2650경)가 되었을 것이다. 이 왕조의 초대 왕은 헤텝세켐위였는데, '두 세력에 평화로운'을 뜻하는 이 이름은 국내의 두 파벌이나 두 지역 사이의 분쟁이 끝난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제3왕조는 BC 2650~2575년경에 존속했다. 이 왕조의 2번째 왕인 조세르는 이집트 왕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사카라에 있는 그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완전히 돌로 이루어진 최초의 대규모 건축물로서, 그때까지 지어진 어떤 건축물보다 몇 배나 더 크다. 조세르의 피라미드에 수석 조각가라고 기록된 임호테프가 이 피라미드의 건축을 지휘한 것 같다. 임호테프의 명성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후기 왕조 때에는 치료의 신으로 신격화되었다.

고왕국시대와 제1중간기

고왕국시대(BC 2575경~2130경)

제4왕조(BC 2575경~2465경)는 왕의 죽음에 대비해 무덤을 만드는 데 지나치게 많은 국가 자원을 쏟아부은 시대였다. 이때문에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낮아진 것은 거의 확실하다. 무덤에 새겨진 비문을 보면, 고위 관리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진 땅을 하사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을 경작한 농민들은 수확의 대부분을 소작료와 세금으로 바쳤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스네프루였다. 그의 후계자인 쿠푸(케오프스)는 기자에 대(大)피라미드를 지었고, 쿠푸의 아들인 카프레의 2번째 피라미드와 멘카우레의 3번째 피라미드가 대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그 옆에 나란히 세워졌다(→ 기자의 피라미드). 이 건축물들은 거대한 석조물을 다루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석재들은 그 하나하나가 거대하며 서로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측량과 설계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피라미드 건축법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도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런 피라미드에 딸려 있는 부속 신전도 이집트인들이 건축 양식에 통달했음을 보여준다. 쿠푸의 신전은 인상적인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집트 조각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기자에 있는 카프레의 거대한 스핑크스와 누비아산(産) 편마암으로 만든 카프레 좌상인데, 이것은 둘 다 제4왕조 중엽에 만들어진 것이다.

태양신 숭배는 제5왕조(BC 2465경~2325경) 때 절정에 이르렀다. 왕들은 태양신을 예배하기 위한 개인 신전을 지어 태양신에 대한 헌신을 과시했다. 이 신전들은 신을 예배하는 장소 이외에 왕의 무덤으로도 쓰였을 것이다. 제5왕조에 속한 9명의 왕들 가운데 7명의 피라미드가 확인되었지만, 이 피라미드들은 제4왕조의 것보다 크기도 작고 튼튼하지도 않다. 제5왕조의 마지막 3명의 왕 때는 태양신 숭배가 다소 주춤해졌다. 이 변화는 죽음의 신 오시리스의 출현과 결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오시리스가 생겨난 것은 그보다 몇 세기 전이겠지만 그의 존재가 처음 입증된 것은 이 시대였다.

제6왕조(BC 2325경~2150경) 때는 고위 관리들의 비문이 더 길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사건과 대외 문제에 대한 정보가 훨씬 풍부하게 남아 있다. 나일 강에 있는 엘레판티네 섬에서는 관리들의 활동을 적은 전기 3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페피 1세2세 때 교역을 위해 남쪽으로 원정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집트는 더이상 하누비아를 지배하지 못했다. 이 지역은 별개의 정치 단위를 이루었으며 그 규모도 차츰 커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곳과 이집트의 관계도 점점 나빠져 페피 2세 때는 마침내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페피 2세에 뒤이어 여러 명의 통치자가 잠깐씩 이집트를 다스렸고, 마네토의 역사책에 나오는 단명한 제7왕조(이 왕조에 속한 왕의 이름은 마네토의 책에 전혀 나와 있지 않음)와 제8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제8왕조가 끝나면서 고왕국은 널리 퍼진 기근과 폭력으로 무너졌다. 이로 미루어 이 시기에 이집트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중앙권력이 약해진 것이 분명하다. 그 주요원인은 정치적 실패나 천재 지변, 또는 그 2가지가 겹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1중간기(BC 2130경~1938)

제8왕조가 끝난 뒤 왕위는 헤라클레오폴리스 출신 왕들에게 넘어갔다. 이들은 고향을 도읍으로 삼았지만 멤피스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다. 제8왕조의 왕들은 나라 전역에서 통치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남부 지방에서 발견된 관리들의 비문을 보면 왕의 지배는 명목상의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제9왕조 테베 왕조(BC 2130경~2080)와 제10왕조 헤라클레오폴리스 왕조(BC 2080경~1970경)가 양립하여 싸운 광범위한 투쟁 시대가 열렸다. 테베 왕조는 안정되어 있었지만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는 왕이 자주 바뀌었다. 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두 왕국 사이의 경계선은 아비도스 지역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바뀌었다. 제11왕조(BC 2081경~1938경)는 테베를 도읍으로 삼았다. 이 왕조의 4번째 왕인 멘투호테프 1세(BC 2008~1957)는 이집트를 차츰 재통일하고 헤라클레오폴리스인들을 추방했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쯤 되었을 때 그는 '하얀 왕관을 쓴 신'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는데, 이 이름은 상이집트 전역에 대한 권리를 넌지시 주장하고 있었다.

중왕국시대와 제2중간기

중왕국시대(BC 1938~1600경)

멘투호테프 1세의 후계자들은 테베를 거점으로 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멘투호테프 3세(BC 1945~1938) 때 왕의 대신인 아메넴헤트가 왕위를 빼앗아 제12왕조(BC 1938~1756경)를 세웠다. 아메넴헤트 1세는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멤피스로 도읍을 다시 옮겼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째 되는 해 아메넴헤트 1세는 아들 세소스트리스 1세(BC 1918~1875)를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그후 10년 동안 계속된 공동통치시대에 세소스트리스는 하누비아로 원정하여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 아메넴헤트 1세는 세소스트리스가 리비아로 원정을 떠난 사이에 살해된 것이 분명하지만 세소스트리스는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업적을 공고히 했지만 왕의 위업을 기록한 가장 오래 된 비문 가운데 하나에서 그는 국내의 소요사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제12왕조초에 중기 이집트어의 고전 형태가 문어로 정착되었다. 이것은 일상어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인위적인 언어였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중기 이집트어로 쓰였다. 이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메리카레를 위한 가르침'이다. 왕의 통치와 도덕적 책임을 설교하는 이 글은 흔히 제1중간기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 쓰인다. 제12·13왕조의 비문은 외부 형식과 수사법에서는 연속성을 보여주지만, 제12왕조에서 제13왕조로 넘어가는 사이에 왕권에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다. 약 1세기 동안 70여 명이 왕위를 차지했다. 많은 왕들은 몇 개월밖에 다스리지 못했고, 왕위를 요구하는 경쟁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제13왕조(BC 1756~1630경) 때는 아시아 이민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BC 18세기말부터 북동부 지역의 삼각주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잇따라 들어와 정착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물질문명을 유지했다. '메리카레를 위한 가르침'을 비롯한 이집트 문헌들은 이런 종류의 유입이 가진 위험을 경고하고 있으며, 이 사건은 정부의 힘이 약해진 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말에 이집트는 하누비아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다.

제2중간기(BC 1630~1540경)

이집트와 누비아의 세력 다툼은 점점 치열해졌고 이 경쟁으로 인해 새로운 두 왕조의 형성이 구체화되었다. 힉소스 왕조(BC 1630~1523경)라고도 불리는 제15왕조는 나일 삼각주에 있는 아바리스를 도읍으로 삼았고, 제17왕조(BC 1630~1540경)는 테베에 중심을 두었다. 힉소스라는 낱말의 기원은 '외국 땅의 통치자'를 뜻하는 이집트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AD 1세기)가 인용한 마네토의 서술에 나온다. 마네토는 새로운 통치자들을,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그 땅을 빼앗은 침략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아시아인의 지배는 이집트에 많은 기술 혁신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따위의 문화적 혁신도 가져다주었다. 이 변화는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나 베짜기에 이르는 다양한 기술에 영향을 주었고, 아울러 새로운 품종의 동물과 곡식이 도입되었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말과 전차가 등장해 종래의 전투 방식을 바꾸었다. 이런 변화는 기술적으로 낙후해 있던 이집트를 서아시아의 수준으로 올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제17왕조가 끝날 무렵 테베 왕들이 힉소스의 지배에 도전했다. 테베 왕 카모세는 비문에서 자기 땅을 아시아인과 나누어 갖는 것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카모세는 북부와 남부로 진격해 중왕국시대에 이집트가 다스렸던 영토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을 행동에 옮겼다. 그의 위업은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기 위한 기나긴 투쟁에서 중요한 단계를 이루었다.

신왕국시대

제18왕조(BC 1539~1292경)

이집트 전설은 아모세(BC 1539~1514 재위)를 새로운 왕조의 시조로 본다. 그는 이집트를 재통일한 토착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에 시작된 관례를 이어받아 친누이인 아모세 노프레타리와 결혼했다. 제17왕조의 왕비들과 마찬가지로 아모세 노프레타리 왕비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이는 나중에 여신으로 묘사되었다. 아모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멘호테프 1세(BC 1514~1493 재위)는 이집트 국경을 남쪽의 제3폭포까지 확대했다. 시리아 북부에서 생겨난 미탄니 왕국은 아멘호테프 때의 비문에 처음 언급되어 있는데, 이 왕국은 이집트의 북부지역 정복에 장애가 되었던 것 같다. 아멘호테프 1세에게는 살아남은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장군인 투트모세 1세(BC 1493~1482경 재위)가 왕위를 계승했다. 투트모세는 남쪽에 있던 카르마를 정복했다. 근동 지방과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이집트의 정복 활동은 투트모세 1세 때 절정에 이르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후계자 투트모세 2세(BC 1482~1479)는 선왕의 정책을 답습했다.

투트모세 3세(BC 1479~1426 재위)는 뛰어난 통치자였다. 왕위에 오른 뒤 몇 년 동안 투트모세 3세는 명목으로만 나라를 다스렸고, 실권은 섭정인 그의 어머니 하트솁수트가 쥐고 있었다. 하트솁수트가 다스리는 동안 시리아 지방에 있는 미탄니 왕국의 세력이 팽창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는 이집트의 세력이 약해졌다. 하트솁수트가 죽은 직후 시리아의 도시 카데시의 군주가 시리아-팔레스타인 동맹에 속해 있는 330명의 군주를 모아 메기도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목적은 이집트 공격인 듯하다. 투트모세 3세는 군대를 이끌고 가자 지방을 지나 예헴까지 진격하면서 반항적인 팔레스타인 도시들을 정복했다. 그의 연대기는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위험한 길을 지나가면서 적군을 무찌르고 메기도를 포위·공격한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투트모세 3세는 그후 아시아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는데, 이 원정의 궁극적 목적은 미탄니 점령이었다. 8번째 원정에서 그는 카르케미시 주변을 약탈했지만 이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고, 미탄니 왕국의 군주는 달아났다. 이 원정은 아마 군사적인 면보다 심리적인 면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이 원정 이후 바빌로니아·아시리아·히타이트가 모두 이집트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물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투트모세 3세는 죽기 2년 전에 18세 된 아들 아멘호테프 2세(BC 1426~1400 재위)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아멘호테프 2세는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카데시 부근으로 원정을 떠났다. 카데시의 도시 국가들은 이집트와 미탄니 사이에 벌어진 세력 다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아멘호테프 2세는 7명의 군주를 죽이고, 그들의 시체를 이집트로 가져와 테베와 나파타의 성벽에 매달아놓았다.

아멘호테프 2세의 아들 투트모세 4세(BC 1400~1390 재위)는 히타이트인을 무찌른 미탄니 왕 아르타타마와 평화로운 관계를 확립하려고 애썼다. 아르타타마는 딸을 이집트로 시집보냈는데, 그 대가로 그는 시리아의 몇몇 도시를 되돌려줄 것을 이집트에 요구한 것 같다. 이것은 최초의 외교 결혼으로, 전쟁보다는 외교를 강조하고 제국의 안정을 누리는 데 중점을 둔 아멘호테프 3세(BC 1390~1353 재위) 시대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아멘호테프 4세(BC 1353~1336 재위)는 아마 이집트의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을 것이다.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에 아멘호테프 4세는 태양신 숭배를 뜻하는 아크나톤('아톤에게 쓸모 있는 존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크나톤은 얼마 전에 태양신 종교에서 일어난 급진적 경향을 더욱 발전시켰다. 태양신 종교는 태양신을 세계 전체에 유익한 하나뿐인 존재로 숭배했다. 왕의 신성도 강조되어 태양신 아톤이 왕의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아크나톤은 아톤에게 바치는 수많은 신전을 지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카르나크에 있는 아몬-레(Amon-Re) 신전 경내에 있었다. 이 신전들을 짓는 동안 아몬 신이나 그밖의 신들에 대한 경배는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 유일신론). 그리고 결국에는 더 오래된 신들에 대한 격렬한 박해가 일어났다. 나라 전역에 있는 수많은 기념비에서 아몬의 이름이 삭제되었고, 때로는 '신들'이라는 낱말도 지워졌다. 아크나톤은 또한 도읍을 중부 이집트의 아마르나에 있는 처녀지로 옮겨 그곳에 아톤 신전과 궁전, 관공서, 고위층을 위한 저택 및 넓은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진 계획도시 아케타톤('아톤의 지평선')을 세웠다(→ 아마르나 유적).

아크나톤의 맏딸 메리타톤과 아크나톤의 아들로 보이는 스멘크카레가 잠시 나라를 다스린 뒤, 9세의 소년 투탕카텐이 BC 1333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에 왕은 도읍을 멤피스로 옮기고, 아톤 숭배를 버렸으며,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종교에는 본질적으로 3신, 즉 아몬·레·프타(나중에 세트 신이 여기에 추가되었음)가 있었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모두 하나의 신이었다. 오늘날 투탕카멘이 누리고 있는 명성은 왕들의 계곡에서 그의 화려한 무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호화로운 무덤 장식과 부장품은 이집트가 전성기 때 얼마나 부국이었는가를 보여준다. 투탕카멘은 BC 1323년경에 죽고 나이 많은 아이(BC 1323~1319)가 그뒤를 이었다. 아이의 뒤를 이어 호렘헤브가 이집트 왕이 되었는데, 제19왕조에서는 그를 아마르나 시대 이후 최초의 정통적인 왕으로 생각했다. 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집트 장군이자 대신인 람세스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람세스 왕조(제19·20왕조)

람세스 1세(BC 1292~1290 재위)는 나일 삼각주 동부 출신으로, 이집트의 정치 중심지는 제19왕조가 시작되면서 나일 삼각주로 이동했다. 람세스 1세의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로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BC 1290~1279 재위)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서 근동 지방에서 세력이 약해진 이집트 제국의 권위를 다시 확립했다. 그는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했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고 애쓰는 리비아인들을 무찔러 이집트의 안전을 강화했다.

오랫동안 이집트를 다스린 람세스 2세(BC 1279~1213 재위) 때는 나일 삼각주 동부에 새로운 국제 도시인 수도 피라메세가 건설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건축물이 세워졌다. 그는 비교적 원정을 하지 않았고, 처음 10년이 지난 뒤부터 그의 치세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중요한 예외는 그가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에 카데시 전투에서 히타이트인과 싸운 것이었다. 그후 몇 년 동안 람세스 2세는 시리아로 원정했다. 대치 상태가 10년 동안 계속된 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 람세스 2세의 후계자는 아들 메르넵타(BC 1213~1204 재위)였다. 메르넵타의 치세를 기록한 비문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왕국은 황폐하여 뿌릴 씨앗이 전혀 없다"는 유명한 구절이 들어 있는 승리의 시로 끝난다. 유대인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건은 람세스 2세 때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비문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메르넵타가 죽자 왕족 안팎의 파벌들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투었다. 결국 질서를 회복한 사람은 혈통이 분명지 않은 세트나크트(BC 1190~1187 재위)였다. 그는 왕위에 올라 제20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세트나크트의 비문은 나라를 평정하기 위해 기울인 그의 노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3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그는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는 해에 이 평정 작업을 끝냈다. 세트나크트의 아들 람세스 3세(BC 1187~1156 재위)는 신왕국 최후의 위대한 군주였다.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에 그는 삼각주를 대규모로 침략한 리비아인을 무찌르고 수천 명의 적을 죽였다. 그보다 더 큰 위협은 북쪽에 있었다. 북쪽의 해양 민족들은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는 해, 람세스 3세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지상전과 나일 삼각주의 어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그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집트 국경 밖으로 쫓겨난 해양 민족들은 더 서쪽으로 항해했는데, 그중 일부는 시칠리아인과 사르데냐인 및 에트루리아인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람세스 3세의 통치 말년에는 행정의 비효율성과 경제적 쇠퇴 때문에 정부가 왕의 무덤을 짓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제때에 식량을 배급하지 못했다. 이들은 시위로 불만을 표시했는데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파업으로 기록된다. 이런 시위는 제20왕조가 끝날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또다른 종류의 내부 문제는 왕의 하렘(후궁들의 처소)에서 비롯했다. 후궁 1명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람세스 3세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이 음모에는 궁정과 하렘에서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부 관리와 군대 장교도 관련되었으며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람세스 왕조 후기에는 고위 성직자 가문이 형성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가문들 가운데 하나는 제19왕조 후반에 테베에서 생겨났다. 람세스 9세(BC 1126~1108 재위) 때 테베의 고위 성직자는 왕보다는 지위가 낮았지만 이미 지방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람세스 11세(BC 1104~1075경 재위) 때 아몬 신을 섬기는 고위 성직자 헤리호르가 테베에서 권력을 잡았다. 결국 그는 람세스 11세를 배제하고 왕을 자칭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했다. 헤리호르는 람세스 11세가 아직 왕위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고, 피앙키라는 고위 성직자가 그 뒤를 이었다. 이집트가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잃을 무렵 피앙키는 쿠시 총독을 지냈던 사람과 누비아에서 싸웠는데, 테베에서 발견된 일련의 편지에는 피앙키의 이 군사적 모험에 대해 적혀 있다. 람세스 11세가 죽자 타니스 총독인 스멘데스가 왕이 되어 제21왕조(타니스 왕조라고 부름)를 세웠다.

제3중간기와 후기 왕조시대

제3중간기(BC 1075~656)

신왕국 말기에 이집트는 분열되었다. 북부는 타니스 왕조인 제21왕조(BC 1075~950경)가 물려받았고 나일 강 유역은 대부분 테베 성직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지에서 왕의 칭호를 채택했다. 새로운 왕조의 도래와 함께(어쩌면 그보다 약간 일렀는지도 모르지만) 람세스 3세가 주로 북부에 정착시킨 메시웨시 리비아인 정예부대가 지배 계급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제21왕조의 제5대 왕 오소르콘 1세(BC 979~973경 재위)는 리비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그의 시대부터 제26왕조까지는 리비아인의 혈통을 가진 통치자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사람은 제22왕조(BC 950~730경)를 세운 셰숑크 1세(BC 950~929 재위)였다.

제22왕조는 초기에는 성공적이어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을 되살렸다. 솔로몬이 죽은 뒤(BC 936경) 셰숑크 1세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가 예루살렘을 유린했다. 오소르콘 3세(BC 888~860경 재위) 때 페이웨드 리비아인이 삼각주 서부지역을 위협하는 바람에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22왕조의 후반기를 특징짓는 것은 나라의 분열이었다. 한꺼번에 최고 6명이나 되는 왕이 나라를 쪼개어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리비아인 족장들도 저마다 지역을 다스렸다. 이같은 지역 분할과 동시에 도시화 경향이 일어났고 분열이 가장 심한 곳은 나일 삼각주 지역이었다. 그러는 동안 테베에서는 제23왕조가 일어났다. 제24·25왕조 때 이집트 국내 정치는 아시리아 제국의 성장에 영향을 받았다. BC 671년에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이 이집트에 들어와 타하르카 왕(BC 690~664 재위)을 상이집트로 쫓아냈다. 2년 뒤 타하르카는 멤피스로 돌아왔지만 BC 667년에 에사르하돈의 후계자인 아슈르바니팔은 타하르카를 쿠시인이 확고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테베로 쫓아냈다. 타하르카의 후계자인 타누타몬은 아시리아를 지지하는 삼각주 군주들의 동맹군을 멤피스에서 무찔렀지만, 이에 대해 아슈르바니팔은 테베를 약탈하는 것으로 보복을 했다.

후기 왕조시대(BC 664~332)

아시리아인들이 본국 근처에서 일어난 문제에 부딪쳤을 때 프삼티크(BC 664~610 재위)는 그 틈을 이용해 무력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도 독립을 이루고, 테베를 포함한 이집트 전체의 왕으로서 권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이스 왕조, 즉 제26왕조(BC 664~525)의 시작이었다. 사이스 왕조의 우수한 군대에는 리비아 병사만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카리아인 용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일 삼각주 해안을 습격하던 그리스 해적들은 군대에 용병으로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삼각주 북서쪽 경계에 세워진 식민지에 정착했다. 이집트와 그리스 사이에는 교역이 발달했고 보다 많은 그리스인이 이집트에 정착했다.

네코 2세(BC 610~595 재위) 때 이집트는 메디아인과 바빌로니아인의 위협으로부터 방패가 되고 있는 아시리아를 지원했다. 네코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BC 605년에 이집트군은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참패를 당했다. 네코는 아시아에서 군대를 철수한 뒤 이집트 상업을 발달시키고, 해군을 증강했으며, 나일 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에스(BC 589~570 재위)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대한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끝내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집트군이 아시아에서 철수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BC 586년에 예루살렘 신전을 파괴했다. 그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뒤, 많은 유대인이 이집트로 탈출하여 그 일부가 이집트를 점령한 페르시아군에 입대했다. 그후 아프리에스 군대는 나일 삼각주에서 서쪽으로 약 990㎞쯤 떨어진 리비아의 키레네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를 공격했으나 참패를 당했고, 이 후유증으로 군대 반란과 나일 삼각주의 내전이 일어났다. 아마시스(BC 570~526 재위)는 아프리에스를 추방하고 왕위를 빼앗았다.

BC 526년 아마시스가 죽은 지 6개월 뒤 페르시아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로 쳐들어와, BC 525년에는 누비아에 이르렀다. 그는 BC 525~522년 파라오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BC 522년에 캄비세스를 계승해 BC 486년까지 다스린 다리우스 1세는 신전을 고치고 신전 수입의 일부를 신전에 돌려주었으며 법률을 편찬했다. 이런 행동은 이집트를 오랫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BC 490년 페르시아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군에 패배한 사건은 이집트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마라톤 전투). BC 486년에 다리우스 1세가 죽자, 나일 삼각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를 페르시아 속주의 지위로 떨어뜨렸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5~424년 파라오로 재위)와 다리우스 2세(BC 424~404년 파라오로 재위) 때 이집트의 국내 상황은 불안정했다. BC 404년 다리우스 2세가 죽자 나일 삼각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성공을 거두었다. 사이스 출신의 이집트인인 아미르타이우스(BC 404~399 재위)가 제28왕조를 세웠지만 그가 이 왕조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BC 4세기 이집트는 비록 독립을 유지했지만 국내에서 왕위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나일 삼각주에서 오랜 기간의 전투가 끝난 뒤 제29왕조(BC 399~380)가 나타났다. 이 왕조시대에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적들과 동맹을 맺고 육군과 해군을 증강했다. BC 373년 페르시아군이 이집트를 공격했다. 이집트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페르시아 지휘관과 그의 휘하에 있는 그리스 사령관이 전략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를 보인 데다 나일 삼각주가 때마침 범람한 덕분에 이집트는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치하에서 페르시아 제국이 잠재적으로 해체되었기 때문에 이집트는 더이상 침략당할 걱정 없이 비교적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집트는 제30왕조(BC 380~343) 때 줄곧 번영을 누렸다. 페르시아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때 되살아났지만 BC 350년에 이집트를 공격한 페르시아군은 격퇴당했다. BC 343년에 페르시아군은 또다시 이집트로 진격했다. 펠루시움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는 페르시아의 전략이 우세함을 보여주었다. 결국 나일 삼각주가 모조리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어서 이집트의 나머지 지역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게 점령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도시의 성벽을 파괴하고, 신전의 보물을 약탈하고, 경전을 말살하는 등 이집트를 가혹하게 다루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BC 338년에 암살된 뒤 잠시 혼란기가 계속되었다. 이 동안에는 누비아의 한 군주가 이집트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던 것 같다.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3세 코돔마누스 때인 BC 335년에 이집트에 대한 지배를 다시 확립했다. 그러나 이 지배는 3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마케도니아의 정복

BC 332년 가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이때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의 억압 통치를 기꺼이 벗어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해방자로 환영을 받았고 결국 한번도 싸우지 않고 이 나라를 차지했다. 그는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까지 가서 그리스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아몬 신탁소를 방문했다. 이 신탁소는 알렉산드로스가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그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가졌더라면 파라오의 전통 속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30)

BC 323년에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제국은 여러 장군들의 분할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이집트 행정수반인 사트라프의 지위를 주장하고 나선 이가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인 프톨레마이오스였다. 그는 BC 305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로 즉위했다. 그의 치세에 대한 비문은 페르시아인들한테서 땅을 빼앗은 그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BC 30년에 클레오파트라 7세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집트 왕국은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그의 후계자들이 세력 다툼을 벌인 뒤에 나타난 여러 개의 왕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집트는 가장 부유했고, 그후 300년 동안 거의 내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꾸준히 그리스화하고 있는 지중해 세계와 관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알렉산드리아 시의 성장과 그 중요성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왕조가 가진 마케도니아-그리스적 성격은 적극적으로 보존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BC 331년에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나일 삼각주 북서쪽에 있는 라코티스라는 작은 이집트 마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도시였다. 이 도시는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될 때까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집트 왕국의 수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지 몇 년 뒤에 멤피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영했던 시대는 초기의 160년 동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 재위) 때의 문헌적·금석학적·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이 왕국의 행정과 경제가 철저한 개편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또한 농업에서 중요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농작물이 도입되었고 광범위한 관개 사업으로 새로운 경작지가 많이 생겨났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BC 24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BC 246~222 재위)에게 번영하는 왕국을 남겨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페르시아인들이 가져간 이집트 신들의 신상을 도로 빼앗아와 인기를 얻었다. 에우에르게테스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BC 222~205)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그리스 역사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를 나약하고 타락한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필로파토르의 죽음과 젊은 프톨레마이우스 5세 에피파네스(BC 205~180 재위)의 즉위를 둘러싼 사건은 궁정의 음모 때문에 진상을 알기 어렵다. 에피파네스가 왕위에 오른 뒤 10년 동안 남부에서 이집트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왕국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왕의 지배력은 약해졌고, 왕을 자칭하는 사람이 잇따라 나타났다. 그후에도 수십 년 동안 분쟁은 계속 일어났다. BC 196년경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해외에 있는 영토의 대부분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로제타석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BC 196년에 소집된 종교회의는 이집트 신전에 대해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BC 180~45 재위)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를 침략해 보호령을 설치했다. BC 168년에 그는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물을 이집트 총독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로마가 이집트에 대해 보다 강력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BC 168년 여름 로마의 특사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나일 삼각주의 펠루시움 근처에 있는 안티오코스의 사령부에 도착해 이집트에서 철수하라고 안티오코스에게 명령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라이나스는 지팡이로 왕의 주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원 밖으로 나오기 전에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안티오코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고, 7월말에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떠났다. 필로메토르와 그의 동생(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피스콘)의 경쟁은 로마의 중재에 따라 피스콘이 키레네로 감으로써 해결되었다. 피스콘은 BC 145년 필로메토르가 죽을 때까지 키레네에 남아 있었다. 피스콘은 BC 116년까지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2세(클레오파트라 2세가 반란을 일으킨 BC 131~130년은 제외) 및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폭군이라 하여 싫어했고, 그의 치세에 대한 역사 기술은 그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험악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1세기 동안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독립을 유지했다. 이집트의 독립은 순전히 로마의 뜻에 달려 있었다. 이 시기에 로마는 해외 영토가 거의 없고 로마의 이익이나 안전을 위협하겠다는 야망도 전혀 없는 왕조를 지원하는 데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왕이 잇달아 바뀌는 불안정한 시대가 계속된 뒤, BC 80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 지배했다. 죽기 전 해인 BC 52년에 아울레테스는 딸 클레오파트라 7세 및 맏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BC 47 죽음)와 왕위를 공유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적극적이고 보기 드물게 유능한 여왕으로, 로마와 손을 잡고 영향력을 키움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명성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48년에 이집트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했을 때 로마와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왔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한 것을 알고 이집트에 머물면서 BC 47년에 여왕과 함께 나일 강을 유람하며 관광을 즐겼다. 그가 로마로 떠날 때 클레오파트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카이사리온('작은 카이사르')이라고 이름지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후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카이사르를 뒤따라 로마로 갔지만 BC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아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클레오파트라는 얼마 동안 로마 장군들의 파벌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애썼다. 클레오파트라는 BC 41년 타르수스에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그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BC 36~30년에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장군과 동양 여왕의 유명한 연애사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큰 효과를 거두었다. BC 34년 카이사리온은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를 공동 통치자로 삼은 것은 죽은 카이사르의 인기를 이용하려는 책략임이 분명했다. 가을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과시용으로 자녀들에게 동쪽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로마 대중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밤마다 소란스럽고 퇴폐적인 연회를 베풀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선전은 무력 충돌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BC 31년 9월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결과는 판가름났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함대가 퇴각했고, 안토니우스도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달아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고 그로부터 10개월 뒤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가 도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 30년 8월에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칼 위에 쓰러져 죽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그 도시에 보존되어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를 참배했는데, 그때 유해를 만지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의 코가 일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의 유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는 시체가 아니라 왕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으로 간주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이런 상태는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속주를 다스린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수도를 그리스 도시인 비잔티움으로 옮겼을 때, 로마 제국은 완전히 쇠퇴하고 비잔틴 제국이 긴 역사의 막을 올렸다.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새 도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알렉산드리아가 오랫동안 누려온 전통적 지위를 무너뜨렸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집트인들은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7세기 중엽에 이슬람 군대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이집트를 정복했고 이로써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막을 내렸다.

 

 

 

R.W. Baker/D.H.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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