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장의 배경과
개요
2.1.
연대
단 11:1 [내가 또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 일어나 그를 돕고 강하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
전술한대로 11장은 10장의 연속이며 12장도 11장의 계속이기 때문에 모두를 한 단원(單元)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11장이 기록된 연대도 10장처럼 페르샤왕 고레스 3년 즉 기원전 535년쯤이 되는 것이다.
11장 1절에 메대왕 다리오가 나타나는 것은 그 때의 일을 회상(回想)하는 문맥에서이다. 즉 마지막 계시가 공개될 예언의 무대를 열면서, 가브리엘은 자신이 몇년 전 메대왕 다리오의 통치에 직접
관여하여, 하나님의 뜻을 진행시켰음을 시사(示唆)했다.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이라면 바로 기원전 538년으로 다니엘이 6장의 사자굴 사건을
치루던 때였다. 다리오가 그토록 다니엘에게 깊은 호의와 후대(厚待)를 표명한 것이나, 사자굴에서도 상처 한 곳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사자의 입을
봉한 것도, 모두 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의 우군(友軍)인 하나님의 천사들의 개입이었음을 상기(想起)하게 된다.
2.2.
주제와 개요
11장의 계시의 목적은 "말일(末日)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10:14). 즉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사는 땅 팔레스틴,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집결된 예루살렘과 구속의 경륜의 현장인 예루살렘
성전이 장차 당할 일을 보이려함이었다... ...
예루살렘 성전이 차려진 팔레스틴 땅은 고대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등 세 대륙이
맞부딪히는 접합점(接合点)으로,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충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후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회회교의
성지가 될만큼 종교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애굽강(나일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프라데까지"(창
15:18) 아브라함과 그 자손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셔서, 초림하실 메시야의 착륙 강림 지점으로 선정하심으로써 구속의 경륜의 진원지(震原地)가
되도록 경영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거듭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은 유지될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계획은 거듭거듭 난관(難關)에 봉착해야 했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모를 리 없는 사단도 이에 맞서 자신의 뜻을 이행할 대제국들을 이
지역으로 투입(投入)시켜 메시야의 착륙 지역을 사전에 점거(占據)하고 구속의 경륜의 마스터 플랜인 성소(예루살렘 성전)를 유린함으로써,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려 한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이집트를 비롯하여 앗시리아, 바벨론, 메대 페르샤, 그리스, 로마가
잇달아 팔레스틴 정복을 위해 진군(進軍)해 왔으며, 구속의 경륜의 전시장(展示場)이 되어야 했던 예루살렘과 성전은 열강국(列强國)들의 세력
다툼을 위한 운동장이 되어, 그들의 발길에 거듭거듭 짓밟혔다. 그리고 결국은 이 약속의 땅마저 로마제국의 철 발굽에 유린되어 감옥처럼 된
형편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혈혈단신의 고독하고 위험스러운 적지(敵地)에의 적전 착륙(敵前着陸)이었다.
주지하는대로 역사란 두부모처럼 쉽사리 구획을 지어 자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 같고 서로
엉켜 계속 이어지는 실꾸리 같은 성질의 영역인데다가 한 가지 요소만 개재(介在)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複合的)인 요인(要因)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 무상(無常)한 데다가, 11장의 예언의 경우 역사의 기복(起伏)과 귀추(歸趨)가 구속사의 관점(觀點)에서
서술돼 있고 종교적 배경이 정치적 국면과 포개져 있기 때문에, 이를 사람이 써 놓은 후세의 역사적 기록에 문자 그대로 적용시키는데는 얼마의
난점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사실이라도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대 구분이나 배경, 그리고 주역(主役)을
선별하는데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11장의 예언이 계시의 정도(正途)를 떠나 엉뚱한 해석으로 귀착될 수 없는 분명한 까닭은 그것이
이미 주어진 7장과 8장 및 9장의 예언을 반복하면서 구체화하고 확대하고 있다는 보장된 보응(保證)이 있기
때문이다.
2.3. 8장과 11장의
상호관계
전술했듯이 11장은 8장의 확대 해석이다. 그러므로 11장의 구체적 진술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이미 확인된 바 있는 8장의 사항들을 복습하여야 한다. 또한 8장을 확인하기 위하여는 7장과 비교함이 안전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는 권면을 좇게 되고(벧후 1:19-21), 성경을 서로 대조하여 연구하라는 권면(사 34:16)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8장과 11장의 평행해석 비교 (괄호 안의 숫자는 절수임)
(
8장 ) |
(11장과
12장 일부) |
메대
페르샤 |
메대
페르샤 |
수양(3,
20)
|
다리오
왕들(1, 2)
|
그리스(헬라) |
그리스(헬라) |
수염소(,21)
|
헬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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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히
강대함(8) |
능력있는
왕(3) |
강성할
때에(8) |
큰
권세로 다스림(3) |
큰
뿔이 꺾임(8) |
나라가
갈라짐(4) |
사방으로
나누임(8)
.... |
사방에
나누임(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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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페르샤 시대로부터 로마제국
시대까지)
1.1.
페르샤 통치 시대(539 - 331 BC)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네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들을 격동시켜 헬라국을 칠 것이다」(단 11:2).
1절에서 메대를 한 마디로 언급한 뒤 가브리엘은 페르샤 역사로 들어갔다(페르샤의 자세한 역사는 8장
연구를 참조). 8장에서 수양부터 시작한 것처럼 이 때(고레스 3년) 이미 망한 바벨론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즉위 3년째인 고레스도 제외되고 "또
세 왕이 일어"나리라고 예언되었다. 고레스 다음의 세 왕은 다음과 같다.
○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530-522 BC) -- 아버지 고레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예루살렘 중건에 호의적이어서, 캄비세스의 통치기간 동안 성전사업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 찬탈왕 바르디야(Bardiya) 혹은 거짓 스메르디스(False Smerdis, 552
BC) --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원정하고 있는 동안 본국에서
출정 전에 이미 살해당한 캄비세스의 형제인 스메르디스(Smerdis)를 사칭(詐稱)하고 왕위에 올랐다. 7개월 만에 다리우스가 주동이된
반정공신(反政攻臣)에 의해 쫓겨났다.
○ 다리우스 1세(Darius I, 522-486 BC) --거짓 스메르디스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그의 재위 2년에, 제2차 성전 중건령을 내렸다(스
6:1-12). 헬라를 정복하려다가 마라돈 전쟁에서 패했다(490 BC).
그 다음에 심히 부요하여 헬라 정복에 나서리라고 예언된(단 11:2) 네번째 왕은 누구인가?
○ 크세르크스(Xerxes, 486-465 BC, 재위 21년)
--그는
다리스우 1세의 아들로 에스더의 남편인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였다(에 2:16, 17). 부왕이 실패한 헬라
정복에 나서, 40개 민족을 동원시켜 25만의 군대로 헬라를 침공했으나, 살라미스(Salamis)해전에서 패하였다(480 BC).
그 후 페르샤의 국운(國運)은 쇠하기 시작하여, 몇 명의 왕이 더 계속된 후에, 마침내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에게 정복당하였다. 아하수에로의 아들인 아닥사스다왕 때에, 제 3 차 중건령이 내려(스 7:7), 페르샤를 통한 하나님의
마지막 섭리를 성취시켰다.
1.2. 헬라 통치시대(331-168 BC)
1.2.1. 알렉산더의
통일시대(11:3)
3절부터 4절까지는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헬라반도를 통일하여,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356-323 BC) 대왕의 예언적 전기(傳記)인데, 그가 태어나기 90년 전에 예언으로 소개되어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그의
치세에 대하여는 8장 연구 참조). 과연 예언된 그대로, 그의 나라와 그 자신이 한창 "강성할 때"인 기원전 323년 33세를 일생으로
바벨론에서 요절(夭折)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끝까지 반역하다가 멸망된 바벨론을 재건하여 그가 이룩하려던 대제국의 수도로 삼으려다가 꺾이고
말았다.
그가 13년 동안 이룩한 제국이 세상을 지배할듯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저지하셨다(10:20).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11:4)이라는 예언 그대로, 유복자(有腹子)였던 후사는
어린 아이 때에 살해당하였고, 그의 광대한 영토는 "이외의 사람들"인 그의 네 장수였던 캇산더, 리시마쿠스, 셀루쿠스, 프톨레미등에 의해
사방으로 나뉘었다(자세한 설명은 7장과 8장 연구 참조).
1.2.2. 분열 왕국시대(11:4)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의 사후 20여년간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던 그의 분열된 제국의 후예들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하기까지를 헬레네스 시대(Hellenistic Age, 323-146 BC)라고 한다.
기원전 301년에 입수스(Ipsus) 전쟁의 결과로 넷으로 나뉘었던 알렉산더의 제국은, 기원전
297년에 캇산더가 죽고, 281년에 리시마쿠스가 살해당함으로써, 그들의 왕국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하여 북쪽에는 시리아와 소아시아 동부를 다스리게 된 셀루쿠스 왕조가 시리아의
이름으로 들어섰고, 남쪽은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미 왕조가 들어서게 되어, 팔레스틴이 로마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예루살렘은 이들 북방 왕국
시리아와 남방 왕국 이집트의 두 세력이 마주치는 각축장(角逐場)이 되어, 거룩한 땅, 영화로운 땅은 저주받은 격전지가 되었다.
1.2.3. 남방왕국과 북방왕국시대(11:5~15)
이렇게 북방왕 시리아와 남방왕 이집트가 팔레스틴을 가운데 두고, 파도치듯 맞부딪히는 틈 새에서, 지치고
시달린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거나 스스로 팔레스틴을 떠남으로써 이들이 그 후 역사에 알려진 "디아스포라"(Diaspora), 즉 팔레스틴의 이외의
땅에 거주하게 된 국외(國外) 거주 유대인(*중국인 화교와 같음)이 되었으며, 그들이 곧 오순절 당시 "천하 각국으로부터"모여든 유대인들인
것이다(행 2:5-11).
5절의 최초의 남방 왕은 알렉산더의 장군 가운데 하나였던 프톨레미 1세(Ptolemy I, Soter.
306-283)이고, "그 군들 중에 하나"는 북방 왕조의 창시자가 된 셀루쿠스 1세(Seleucus I, Nicator 302-283)인데
이렇게 표현된 것은, 기원전 321년 이후 셀루쿠스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차지했었으나, 316년에는 중앙집권적인 통일된 군주 국가를 세우기
위해 알렉산더의 네 장수와 맞서 싸우다가 기원전 301년 입수스 전투에서 전사한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아들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패하여 거기서 쫓겨났었다.
이에 셀루쿠스는 이집트왕 프톨레미 휘하에 들어가, 그를 도와 데메트리우스를 기원전 312년 가자(Gaza)
전투에서 패배시키고, 그의 이전 왕국을 되찾아 나중에는 프톨레미왕조보다 더욱 강한 왕국을 세웠음을 뜻한다.
이렇게 시작된 남북 왕조를 본문(5-13절)에 맞추어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은 [다니엘서 주석] 참조).
;
북방왕국(시리아)-셀루쿠스 왕조 (연대는 기원전(BC)임)
셀루쿠스 1세(Nicator. 302-283)(5절)
안티오쿠스 2세(Theos. 261-246)(6절)
셀루쿠스 2세(Callinicus. 246-226)(7-9절)
셀루쿠스 3세(Ceraunos. 226-223)(10절)
안티오쿠스 3세 대왕(Magnus. 223-187)(10-13절)
안티오쿠스 4세 (Epiphanes. 176-164)(14절)
; 남방 왕국(이집트)-프톨레미 왕조 (연대는 기원전(BC)임)
프톨레미 1세(Soter. 306-283)(5절)
프톨레미 2세(Philadelphus. 285-246)(6절)
프톨레미 3세(Euergetes. 246-221)(7-9절)
프톨레미 4세(Philopater. 221-203)(10-13절)
프톨레미 5세(Epiphanes. 204-181)(14,15절)
이러한 헬라의 왕조 특히 시리아와 이집트가 각축(角逐)한 150년 이상이나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성전은 최악의 수난(受難)을 겪었다. 북방 왕국인 시리아의 통치는 더욱 가혹했는데, 그 중에도 특히 기원전
176-164년까지 다스린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은 극악스러웠다.
[유대인들에게 헬라의 관습, 헬라의 예술, 헬라의 악덕(惡德), 헬라의 우상숭배를 강요하려는 것이
그(*안티오쿠스 4세)의 고정된 목적이었다.···대제사장직은 곤궁해진 안티오쿠스 정부에 의해 돈을 제일 많이 내고 사겠다는 사람에게
매도(賣渡)되었다. ···사실 안티오쿠스는 유대 인종을 완전히 근절시키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는 모든
백성들이 종교적인 의식에 전념하게 되는 때인 안식일을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되면 그의 군사들을 저항하지도 않은 백성들에게 풀어놓아 거리가 피로
흥건해지기까지 그들을 죽였으며 느헤미야가 그토록 관심을 쏟아 건축해 놓은 성벽들을 헐어내렸고, 수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들의 모든 종교의식들은 억압받았다. 백성들은 안식일을 모독하도록 강제되었고 돼지고기와 다른 부정(不淨)한 음식들을
먹도록 강요되었으며, 할례 예식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성전은 쥬피터신에게 봉헌되었다. ···정말로 참된 종교가 뿌리가 뽑히고 그 본
고장으로부터 팽개쳐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전은 유대의 독특한 의식을 거행하기에 부적합하게 되었다. 대문들은 불타버렸다. ···기원전
168년 12월 25일에는 돼지 떼를 성전 경내(境內)로 몰고 들어와 거기서 도살했다. 한 이야기에 의하면 그 다음에는 잡은 돼지의 피로 제단이
더렵혀졌고, 심지어는 지성소까지도 모독되었으며 성경 사본들에도 돼지고깃물을 뿌렸다]
이러한 최악의 사태가 메시야의 초림을 150년 앞두고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과 성소에 대한
사단의 숙명적인 적대감(敵對感)이 표현된 것 외에도, 성소 제도에 집약돼 있는 구속의 경륜을 말살하여 메시야의 초림을 방해하려는
초토화(焦土化)정책이기도 했다.
1.3. 로마 통치시대
1.3.1. 로마제국의 동방개입
이렇게 남방 왕국 이집트와 북방 왕국 시리아가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계속하는 동안 이탤리
반도에서 서서히 힘을 기른 라틴민족의 나라 로마가 점점 세력을 뻗고 있었다. 먼저 서부 지중해의 해양(海洋) 왕자였던 칼다고와 118년
간(264-146 BC)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어 서부 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그런데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218-201 BC) 때, 칼다고를 지원했음을 계기로 헬라반도의 마케도니아와도 47년 간(215-168 BC) 세 차례나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는데, 기원전 168년 피드나(Pydna)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헬라 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로마는 또 다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200-197 BC) 동안 마케도니아를 지원했던 북방 왕국
시리아의 안티오쿠스(3세) 대왕과도 맞부딪혀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시킴으로써, 소아시아를 빼앗고 팔레스틴을 정복한 시리아를
배후에서 견제했다. 로마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시리아는 팔레스틴에서 더 많은 세금을 염출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고(寶物庫)까지 손을 댔다(마카비 2서, 3:6-39).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4세는 남방 왕국인 이집트를 침공하여 거의 점령하려 했으나, 방금(168 BC)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로마는 특사를 보내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는 이집트에서 철수하라는 통첩을 보냈다. 로마의 위력을 잘 아는 안티오쿠스 4세는 할
수 없이 이집트에서 철수하면서, 분풀이로 기원전 168년 예루살렘을 짓밟아, 앞서 언급한 최악의 사태를 연출했다(마카비 1서 1장, 2장
참조).
안티오쿠스 4세의 잔학한 박해와 성전 모독에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마침내 경건한 제사장
가문의 마타디아스(Mattathias)와 그의 다섯 아들이 앞장 선 독립투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기원전 165년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하고
재봉헌(再奉獻)하여, 이를 기념하는 수전절(修殿節·Hanukkah·Feast of Light)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으며(요 10:22), 기원전
161년에는 로마와 우호조약을 체결했고, 마침내 기원전 151경(151/150 BC)에는 값비싼 독립을 쟁취하여
마카비왕조(the Maccabean)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값 비싼 독립도 오래 가지 못하고, 보수적인 바리새파와 자유주의적인 사두개파의
거듭된 충돌과 마카비 왕가 내부의 왕위 다툼에 로마가 개입함으로써, 기원전 63년 고귀한 독립을 상실한 채, 기원전 40년에는 로마의
결정에 따라 에돔 사람인 헤롯대왕을 저들의 왕으로 맞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지만 참으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뭉뚱그려진 것이, 바로 11장 14절을 중심으로 한
예언인 것이다. 즉 북방 왕국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와 마케도니아왕 필립 5세의 연합 세력에 시달리고, 잇달아 안티오쿠스 4세(시리아)의
재침에 직면한 남방 왕국 이집트는 곤경에 빠져 로마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그 결과로 동방에 개입한 로마는 시리아를 비롯하여(64 BC),
팔레스틴(63 BC)과 이집트(30 BC)를 삼키게 되어, 마침내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the robbers of your people)는 히브리어 문법으로 "네
백성들의 파괴자"라는 뜻도 가능하다. "강포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vision)을 이루려" 한다는 표현에서 "이상"(vision)은 8장
10-14절에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이 박해와 파괴의 세력인 로마를 의미하게 된다. 로마는 역사에서도 "세계의 강도(强盜)"라고 자주
불리워지고 있다. 로마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왕좌와 성전과 보화와 독립과 땅을 빼앗아간 강탈자(强奪者)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남방 왕국과 북방 왕국이 맞붙어 싸우는 틈 새로 개입하게 된 로마가 14절에 소개된
뒤, 15절에는 13절의 상황을 계속 설명하면서, 북방 왕국을 더 이상 막아낼 수 없게 된 남방 왕국 이집트가 로마를 구원자로 불러들이는 내용이
16절에 소개되고 있다.
1.3.2. 팔레스틴을 차지하는
로마
16절에는 마침내 그 로마가 "영화로운 땅", 즉 팔레스틴에 나타나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단 8:9와
비교). 여기서의 "와서 치는 자"는 제1차 삼두정치(三頭政治)의 최고 실권자였던 폼페이(Pompey)를 예언으로 돋보이고 있는데, 그는 동방
정복에 나서 기원전 64년에는 북방 왕국 시리아를 끝냄으로써, 이후부터는 로마가 북방 왕국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는 즉시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내란(內亂) 중인 마카비왕조의 왕위 다툼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3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기원전 63년 이를 함락시켜 유대의 독립을
끝냈으며, 유대인 12,000명을 살해한 뒤 그의 지휘관들과 함께 지성소까지 들어감으로써, 16절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시켰다.
17-19절까지의 "그"는, 폼페이를 이어 로마의 실권을 잡은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59-44 BC)이다. 처음에는 폼페이,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했으나 폼페이의 부인인 자기의 딸 율리아(Julia)가
죽고(54 BC) 크라수스도 전사하자(53 BC), 두 사람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다가, 파르살루스(Pharsalus)에서 일대 접전을 벌여
폼페이를 패퇴시키고(48 BC), 그를 이집트까지 추격하여 거기서 죽였다.
그러나 이미 50세가 넘은 그는 이집트를 정복하는 대신 프톨레미 11세의 딸로 남 동생(프톨레미
12세)과 왕권 다툼이 한창이던 당시 22세의 미인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15-30 BC)와 황홀한 사랑에 빠져, 그를
애첩(愛妾)으로 삼고 이집트의 왕위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17절의 "여자의 딸"(the daughter of women)은 "뻬어난 여자"임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바로 세계사의 절세 미인 클레오파트라를 정확히 표현했다.
율리우스 케사르(씨이저)가 지나치게 오래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여러 곳에서 분규가 일어났으므로, 그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로마에 개선 입성했다(18절). 그러나 케사르가 황제가 될 것을 두려워한 공화파(共和派)의 부루투스(Brutus)일파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元老院)에서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이리하여 "그가. . .얼굴을 돌이켜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11:19)는 예언은 놀랍게 이루어졌다.
1.3.3.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에 관여한 로마
20절에서 "그 위를 이을 자는 토색하는 자"라고 번역된 말은, 곧 "세금을 거두는 자"(a raiser
of taxes)의 뜻인데, 전체의 번역은 "왕국의 가장 영화로운 곳으로, 세금거두는 사람을 보낼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번역된다.
암살당한 율리우스 케사르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것은 그의 조카딸의 아들이요, 양자였던
옥타비안(Octavian)으로 후에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Caesar)가 되는데, 그가 바로 누가복음 2장 1절에서,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영을 내린 황제인데, 이러한 호적령은 세금을 거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 호적령에 의해, 나사렛에 거하던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내려오게 됨으로써 예언된 때(단 9:25, 갈 4:4), 예언된 장소(미 5:2)에서 구주께서 태어나시게 된 것이다(눅
2:1,4, 5, 7). 얼마나 놀라운 예언의 성취인가? 그는 예언대로 평화로운 통치(Pax Romana)를 하다가, 서기 14년 8월 19일
평화롭게 여생을 마쳤다.
21절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위를 이을 자는 한 비천한 사람"이라고 지적되어 있다. 다음에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Tiberius·14-37 AD)는 어머니 리비아(Livia)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의붓 아들이 되는데, 황제 자신도 그를 후계로
삼으라고 조르는 리비아에게, "로마제국의 자주옷을 입기에는 당신의 아들이 너무 비열하다(vile)"고 거절했으나, 결국은 어머니의 간지(奸智)에
의해 로마황제의 위에 오르게 되었다.
선왕(先王) 아우구스투스와는 달리, 평온치 못한 안팎의 사정으로 자주 군사를 일으켰던 그의 통치가 22절에
예언된 후, "동맹한 왕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이 곳의 "동맹한 왕"은 곧 "언약의 왕"(the prince of the
covenant)인데, 다니엘서 9장 25-27절에 예언된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다니엘서 9장 26, 27절에 예언된 대로, 침례받으신 뒤 3년반 후인 서기 31년, 티베리우스 치하의 로마제국에 의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는 그리스도께서 무죄하심을 확인하고도, 자기 부인의 숙부로 자신에게 총독의 직분을
허락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충성하기 위하여(요 19:12),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 누구에 의하여 돌아가실 것이 이처럼
놀랍게도 565년 전(고레스3년-AD31)에 예언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성서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된다.
1.4. 교황권 확립까지의 로마
역사
앞서 언급한대로 11, 12장의 예언은 8, 9장의 예언을 확대하고 구체화한 것이요, 8, 9장의 예언은 7장의
예언을 또 그렇게 확대한 것이며, 7장은 2장의 확대이다. 그 중에서도 네째 나라인 로마제국에 관한 예언과 로마제국을 계승한 교황로마에 해당되는
부분에, 특히 이러한 반복과 확대가 중점적으로 강조되고 있어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들이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문맥으로 재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도표를 염두에 두는 것이 바른 해석을 위해
요긴하다.
* 제국 로마와 로마교황에 대한 평행
;
제국로마
7
장
7:7,
19, 23
7:7,
19
;
교황로마
7:8,
20, 24
7:8,
20, 25
7:21,
22, 25
7:25
7:25
7:25
7:9-12,
22, 26
7:13,
14 |
8
- 9 장
8:9,
23, 24
8:10,
25
8:11,
25
9:26,
27
8:9,
12, 23, 24, 25
8:11,
25
8:10,
25, 9:24
8:12
8:11-13,
25
9:24,
26, 27
8:13,
14, 19, 26
8:14,
19, 25, 9:27
|
10
- 12 장
11:14
11:16
11:22
11:31-33
11:36,
37
11:33,
35
11:30
11:31
11:31,
36-39
12:6,
8, 11
11:27,
35, 45,
12:1,
2, 7
12:1 |
그런데 위의 평행대조(平行對照)를 살펴 보면, 11장 23-30절까지의 기사는, 7장이나 8, 9장에서, 평행되는
점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11:23-30)에 대한 해석에는 다소의 신축성이 있게 된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앞에 기록된
로마의 역사가 이 부분에서 다시 강조되면서, 31절에서 교황권이 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앞
부분(11:14-23)에서는 남방 왕국과 북방 왕국이 각축하는 사이를 비집고, 로마가 개입하여 어떻게 승승장구하면서 동방을 정복하고, 마침내
폼페이 때에는 북방 왕국 시리아와 영화로운 땅 예루살렘을 유린하게 되고(16), 그 뒤를 따라 율리우스 케사르가 전권을 인수하여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을 통해 남방 왕국을 어울르는가가 쓰여졌다(17-19절).
그러나 그가 정적(政敵)에게 졸지에 쓰러진 뒤(19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즉위하여, 메시야를 탄생시킬 호적령을
내리게 되고(20절), 그 다음의 황제인 티베리우스 때에는, 마침내 "언약의 왕"을 십자가 못박는 일을 함으로써(22절), 다니엘서 8장 10,
11절과 9장 26, 27절의 예언을 성취시킨다.
이렇게 지상에 오신 메시야를 대적하여 죽이는 중대한 사건을 절정(絶頂)으로 역사를 전개한 다음, 다시
31절에서부터는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로마 교황권을 수립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소급하여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기 31년에 언약의 왕을 죽인 그 로마야말로, 그로부터 191년 전인 기원전 161년에 메시야의 나라인 유다와
열렬한 우호조약을 체결했었다. 당시 시리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던 지도자 유다 마카비(Judas Maccabaeus)는 로마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에 다른 나라들에도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에게도 "거짓을 행하여," 조약을 무시하고 "거짓을 행하여
올"라와(23절), 기원전 63년에는 유다의 독립을 빼앗고 나라를 빼앗은 뒤, 메시야까지 죽인 것이다. 실상 로마는 처음에는 작게 시작된 나라로
8장 9절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여기에서도 "적은 백성을 거느리고 강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23절).
그 후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남방 왕국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한 율리우스
케사르가(11:17) 암살당하고 난 뒤, 후계 다툼을 위해 옥타비안(아우구스투스)과 안토니(Antony)가 맞서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레피두스(Lepidus)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연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적대(敵對)관계에 있었으나, 이러한 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해
안토니는 옥타비안의 누이인 옥타비안(Octavia)와 결혼하여 처남 매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 후 안토니가 이집트에 내려 갔다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매혹되어 부인인 옥타비아를 오빠인 옥타비안에게 돌려보내고 기원전 32년에는 정식으로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뒤
그에게 동방 속주(屬洲)의 태반을 넘겨 주었다.
이에 분노한 옥타비안은 이집트 정복에 나서, 기원전 31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연합군을 패퇴시키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도 차례로 자살함으로써, 마침내 남방왕국의 명맥은 끝나고, 기원전 30년 이집트는 로마의 일개
도(道)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이 25-27절까지의 문맥에 적합하다.
그후 로마는 메시야를 서기 31년 십자가에 못박고, 서기 70년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멸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거룩한 언약을 거스리"게 된다(28절). 그런데 이렇게 확장일로(擴張一路)를 달리던 로마도, "작정된 기간"까지만 그러한 행운이 주어질
것인데(28절),
이 기간은 아마도 24절에 언급된, 그 "때가 이르기까지"와 연관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곳의 기간은
앞뒤 문맥에 비추어, 기원전 31년 남방 왕국 이집트가 파멸되던 악티움 전쟁 때로부터 꼭 360년 후가 되는 서기 330년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 해에,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는 "영원한 도시"(eternal city)로 알려진 로마시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계속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동쪽으로 옮겨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고, 실상 이 때부터 로마제국은 다시는 이전의 권세와 영광을 회복하지
못한 채(29절), 395년에는 동서 로마로 나뉘었고,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민족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30절에 언급된대로, "깃딤의 배들이 그를 칠 것"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깃딤(Kittim)은 본래 키프러스(Cyprus)와 그 주민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에는 일반화되어, 어디에서 왔든지 파괴를 일삼는
이국인(異國人) 압제자를 가리키는데, 이 문맥에서는 로마제국을 절단(切斷)낸 게르만민족의 침입을 적절히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제국의 수도 이전은, 이제까지 세계 교회들의 머리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오던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하여금 서로마 황제의 이미지를 대신하게 하여, 세계적인 교황이 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여건을 만들어준 계기와 발판이 되었음은
역사적으로 공인된 사실이다(7장 연구 참조).
이러한 배경은 30절 하반의,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라는 말씀을 가장 확실히 설명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이
다니엘서 7장 25절이나 8장 11-14절에 예언된 로마교황권으로, 새 언약의 성소인 하늘의 성소 대신(히9:11-12) 미사제도를 시작하고,
화체설(化體說)과 마리아와 성자(聖者)숭배등으로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배도한 세력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로마제국의 역할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교황로마의 손으로 스스럼 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
1.2. 마지막 때의 남방 왕과
북방왕
그런데 14절과 15절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이래, 잠잠하던 남방왕과 북방왕이 40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제까지
연구한 11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운데 두고, 언제나 적대(敵對)해 온 두 세력이 남방왕(king of the south)과
북방왕(king of the north)이었다. 팔레스틴을 기준으로 한 방위(方位)에서, 고대에는 바벨론과 시리아가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그들을
괴롭혔고, 이집트는 남쪽에서 괴롭혔다. 11장에서도 15절 이전의 남방왕은 이집트였고 북방왕은 시리아였지만, 시리아는 기원전 64년에, 이집트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합병됨으로서 그 의미도 끝났다. 동시에 택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도, 70주일의 끝인 서기 34년 이후 버림을 당하고,
서기 70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멸망당함으로써, 실제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에(롬 9:2 7, 6, 7,
3:28, 29), 이 곳의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싸움은,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참 교회를 대적하여 일어날 두 세력 사이의 싸움"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면 남방왕은 누가 될 것인가? 이스라엘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신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자적인 이집트도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집트의 속성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느냐?. . .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라"(출
5:2)고 부르짖은 바로의 말에서 분명해진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 때의 영적인 남방 왕이 누구인가를 성경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러한 예언 해석에 가장
안전한 방법인 것이 입증되어 온 평행적 대조법(對照法)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서 11장과 8장의 대조는 이미 끝냈으나, 사건의 연대적인 배열에서 가장 정확한 평행
대조를 이루고 있는 요한 계시록 11장을 중심으로 한 평행 대조를 시도해 보자.
1.2.1. 계시록 11장의
개요
; 11:3-6 -- 중세기 1260년 간 하나님의 말씀이 겪게 될 수난과 사명(538-1798년에 걸친 중세 교황권의
역사)
; 11:7-13 -- 증거를 마치려 할 때인 1798년 직전에 일어날 성경 말씀에 대한 전쟁(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 11:14-19 -- 일곱째 나팔이 불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계 10:7)을 간직한 지성소 봉사가
시작되고(11:17),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됨(1844년 이후 재림가지).
1.2.2. 계시록 11:7-13과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 신문기자 데물랭이 선동한 군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일로
시작 된 프랑스 혁명은 중세기 교권제도를 끝냈으며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방과는 달리, 공산주의를 배태한 무신론과
징집제도에 의한 국가 단위의 전쟁체제를 통한 세계 대전의 기반을 놓았다. 그것은 불길한 전조로 시작된 근세사의
시작이었다.
; 증오의 대상이 된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가 단두대에 처형됨과 동시에 가장 잔인하고 끔찍스러운 유혈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 교황권에 대한 혁명 세력의 증오는 1798년 2월 15일 버티어(Berthier) 장군을 로마시로 진군케 하여 재위
23년을 맞은 80세 교령의 교황 피우스(Pius) 6세를 압송하여, 1799년 8월 29일 발렌스 감옥에서 죽게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2천명 이상의 성직자들이 처형되었고 3천명 이상이 추방되거나 국외로 피신했다.
[불행한 프랑스는 그가 심은 씨앗을 피로서 거두었다···프랑스는 자기 나라를 치료해 줄 복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무신론과 멸망을 자초하는 문을 열었다···그리하여 프랑스는 반란과 무정부 상태로 휩쓸려 들어갔다. 성경을 대적한 싸움은 세계역사에서 공포시대라는
뚜렷한 한 시대를 초래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 하, 467).
....
1.2.3. 프랑스 혁명 2백 주년으로 정리된 역사적
의의
[마르크시스트역사가들은 1789년 프랑스의 부르조아혁명이 19세기 유럽에서의 연속적인 혁명적 소요를 불러일으켰다고
정리하고 있다. 부르조아혁명은 1848년 3월 프랑스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일어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게 했다.
1871년 파리콤뮨은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효시였으며,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1949년 중국의 공산화가 뒤를
이었고 쿠바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산혁명은 승리를 구가했다. 혁명에 대한 마르크시스트의 이러한 계보 모델은 최근까지고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
콤뮨은 72일 간이나 지속되었으며, 내외의 반동세력의 공격에 영웅적으로 저항하다가 붕괴되었다. 그러나 콤뮨의
경험들과 거기서 얻은 교훈들은 세계의 혁명운동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콤뮨은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임무들을 올바로 설정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파리의 대포들이 내는 포성은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후진적인 분자들을 그들의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했으며, 또
도처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이 성장하는데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파리에서의 혁명은 전세계를 통해 강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강력한 국제적 연대운동을
촉진시켰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유산은 징병 제도, 거대한 국군들, 엄청난 숫자에 이르는 살상자들 뿐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공산주의라고 하는 또 하나의 현존하는 유산을 남겼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공산주의를 규명하기 위하여 레닌(Lenin)과
트로츠키(Trotsky)는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전 과정을 세밀히 분석했다. 그들은 그같은 과정을 통하여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인 쟝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가르침을 숙지하게 되었다. 그는 국민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도적 소수가, 다수 대중을 위해 그 방책을 대중에게 강요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오늘날 소련에는 전체 국민의 5%만이 집권당인 공산당의 당원이다. 팔버 교수는 "만약 프랑스
혁명이 앞서 발생하지 않았던들 공산주의 운동이 현재와 같은 양상을 결코 띠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1.2.4. 계시록 11(13, 17)장과 다니엘 11장의 남방왕과 북방왕
계시록
11(13, 17)장 |
|
다니엘
11장 |
11:3-6 |
중세기
1260년간 성경(두 증인)의 수난. |
31-39 |
중세기
1260년간 로마 교황권이 할 일 |
11:7
|
증거를
마치려는 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1789-1799). 무신론의 상징인 영적 애굽이 된 혁명기의 프랑스. |
40
|
마지막
때(1260년 끝인 179
8)에
남방왕(영적 애굽인 혁명기의 프랑스)이 북방왕인 교황권을 찌름(계 13:3).
|
13:3,
4 |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따름. |
41 |
모든
방안을 총동원하여 재기한 북방왕은, 남방왕은 물론 여러 나라를 홍수처럼 정복함. |
18:4 |
바벨론
가운데 있는 하나님 백성들이 남은 무리에 가담함.
|
41-43 |
에돔,
모압, 암몬 자손(사 11:14)의 존귀한 자는 그 세력에서 벗어나지만 영적인 애굽, 곧 무신론적 공산주의인 남방왕은 부활한 교황권인 북방왕에게
굴복당함. |
11:15
(14:6-12) |
일곱째
나팔인 세 천사의 기별이 늦은 비 성령의 역사(계 18:1-4)로 크게 선포됨 |
44 |
동북방에서
소문(기별)이 이르러 북방왕을 번민케 함.
|
11:18 |
이방이
분노하여 하나님 백성을 핍박함. |
44 |
북방왕(교황권)이
분노하여 하나님 백성을 진멸하고자 함(계 13:15). 짧은 환난기가 임함. |
17:15 |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 곧 영적인 바벨론(17:1, 5), 장막은 하나님의 성소(계 13:6), 여자(바벨론)는 땅을 다스리는 큰
성임(17:18). |
45 |
장막
궁전을 바다와 거룩한 산 사이에 베품.
|
17:16 |
왕들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함. |
45 |
끝이
이르리니 도와줄 사람이 없음. |
11:18 |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인 10재앙이 임함 |
12:1 |
대군
미가엘이 일어나고 마지막 큰 환난이 시작됨.
|
1.2.5. 마지막 때의 남방왕
위에 제시되고 논증된 성경과 역사의 확인에 따라, 다니엘서 11장에 나타난 마지막 때의 남방 왕을
이렇게 정리하여 요약 한다.
알렉산더의 네 장군 가운데, 남쪽의 애굽을 차지한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는 남방 애굽은(11:5-17), "와서 치는
자"인 로마의 개입으로(16절),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원전 30년 로마에 합병되었다(17절).
17절 이후 언급이 없던 남방왕이 갑자기 40절에 다시 출현하는데, 그것은 "마지막 때" 곧
1260년 기간이 끝나는 프랑스 혁명과 일치된 때이다. 그것은 계시록 11장 예언의 내용으로서, "영적으로. . . 애굽"(계 11:8)이라
하였고, 그것은 프랑스 혁명으로 배태된 무신론적인 애굽의 이념과 역할을 떠맡은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시작이었음이, 그 이후의 역사와 성경에서
확인되었다. 소련이 종주국이었던 공산주의의 시작은 프랑스 혁명이었다.
1.2.6. 마지막 때의 북방왕
셀루커스 왕조의 시리아는(10:5-17), "와서 치는 자"인 로마에 의하여 기원전 64년 멸망당한 후, 로마가
북방왕의 자리를 대신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 당한 후(476년), 그 자리는 중세 교황권에 의하여 계승되는데, 그것이 40절에 묘사된 영적인
북방왕이다.
곧 "마지막 때"인 1260년 기간 끝에 (1798년), 북방왕인 중세 교황권이 영적인 남방왕
애굽의 정신을 드러낸(계 11:8) 프랑스 혁명에 의하여 찔림을 받는다는 극적인 예언이며(단 11:40), 그 이후 프랑스 혁명기의 무신 사상은
공산주의로 발전되어, 그동안 숙적인 로마 카톨릭과 대결해 왔으나, 마침내는 북방왕인 로마 카톨릭 세력이 최후의 남방 왕인 공산주의를 정복한다는
정확한 예언이다(11:42, 43).
앞서 언급한 대로 다니엘서 11장의 처음 북방왕은,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가운데 하나인 셀루쿠스가 이룩한 왕조인
북방의 시리아였다. 그러나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으며, 그 후 서기 476년에 망한 서로마를 이어 로마 교황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즉 시리아 - 로마 - 교황 로마로 이어져 중세기를 장악했으나, 1260년 기간의 끝인
1798년(단 7:25), 곧 "마지막 때"(단 11:40)에 "영적인 애굽"(계 11:8)인 무신론적인 프랑스 혁명 세력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다(단 11:40, 계13:3, 6, 8).
그러나 북방왕인 로마 교황권의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는 일이 있게 될 것임이 예언되었다(단 11:40 하단, 41, 계 13:4). 그리고 이렇게 극적으로 되살아난 중세교회에 의해 정복될
세력과 나라들은 어떠하며 그 영향은 무엇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