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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1장 북방왕과 남방왕

영국신사77 2006. 8. 29. 12:07
                      다니엘 11장 북방왕과 남방왕
                                         1. 11장의 배경과 개요

 

   2.1. 연대

 

  단 11:1 [내가 또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 일어나 그를 돕고 강하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


  전술한대로 11장은 10장의 연속이며 12장도 11장의 계속이기 때문에 모두를 한 단원(單元)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11장이 기록된 연대도 10장처럼 페르샤왕 고레스 3년 즉 기원전 535년쯤이 되는 것이다.

 

  11장 1절에 메대왕 다리오가 나타나는 것은 그 때의 일을 회상(回想)하는 문맥에서이다. 즉 마지막 계시가 공개될 예언의 무대를 열면서, 가브리엘은 자신이 몇년 전 메대왕 다리오의 통치에 직접 관여하여, 하나님의 뜻을 진행시켰음을 시사(示唆)했다.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이라면 바로 기원전 538년으로 다니엘이 6장의 사자굴 사건을 치루던 때였다. 다리오가 그토록 다니엘에게 깊은 호의와 후대(厚待)를 표명한 것이나, 사자굴에서도 상처 한 곳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사자의 입을 봉한 것도, 모두 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의 우군(友軍)인 하나님의 천사들의 개입이었음을 상기(想起)하게 된다.


 



   2.2. 주제와 개요

  11장의 계시의 목적은 "말일(末日)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10:14). 즉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사는 땅 팔레스틴,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집결된 예루살렘과 구속의 경륜의 현장인 예루살렘 성전이 장차 당할 일을 보이려함이었다... ...

 

  예루살렘 성전이 차려진 팔레스틴 땅은 고대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등 세 대륙이 맞부딪히는 접합점(接合点)으로,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충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후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회회교의 성지가 될만큼 종교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애굽강(나일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프라데까지"(창 15:18) 아브라함과 그 자손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셔서, 초림하실 메시야의 착륙 강림 지점으로 선정하심으로써 구속의 경륜의 진원지(震原地)가 되도록 경영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거듭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은 유지될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계획은 거듭거듭 난관(難關)에 봉착해야 했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모를 리 없는 사단도 이에 맞서 자신의 뜻을 이행할 대제국들을 이 지역으로 투입(投入)시켜 메시야의 착륙 지역을 사전에 점거(占據)하고 구속의 경륜의 마스터 플랜인 성소(예루살렘 성전)를 유린함으로써,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려 한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이집트를 비롯하여 앗시리아, 바벨론, 메대 페르샤, 그리스, 로마가 잇달아 팔레스틴 정복을 위해 진군(進軍)해 왔으며, 구속의 경륜의 전시장(展示場)이 되어야 했던 예루살렘과 성전은 열강국(列强國)들의 세력 다툼을 위한 운동장이 되어, 그들의 발길에 거듭거듭 짓밟혔다. 그리고 결국은 이 약속의 땅마저 로마제국의 철 발굽에 유린되어 감옥처럼 된 형편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혈혈단신의 고독하고 위험스러운 적지(敵地)에의 적전 착륙(敵前着陸)이었다.

 

 



  주지하는대로 역사란 두부모처럼 쉽사리 구획을 지어 자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 같고 서로 엉켜 계속 이어지는 실꾸리 같은 성질의 영역인데다가 한 가지 요소만 개재(介在)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複合的)인 요인(要因)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어 무상(無常)한 데다가, 11장의 예언의 경우 역사의 기복(起伏)과 귀추(歸趨)가 구속사의 관점(觀點)에서 서술돼 있고 종교적 배경이 정치적 국면과 포개져 있기 때문에, 이를 사람이 써 놓은 후세의 역사적 기록에 문자 그대로 적용시키는데는 얼마의 난점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사실이라도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대 구분이나 배경, 그리고 주역(主役)을 선별하는데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11장의 예언이 계시의 정도(正途)를 떠나 엉뚱한 해석으로 귀착될 수 없는 분명한 까닭은 그것이 이미 주어진 7장과 8장 및 9장의 예언을 반복하면서 구체화하고 확대하고 있다는 보장된 보응(保證)이 있기 때문이다.


   2.3. 8장과 11장의 상호관계

 

  전술했듯이 11장은 8장의 확대 해석이다. 그러므로 11장의 구체적 진술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이미 확인된 바 있는 8장의 사항들을 복습하여야 한다. 또한 8장을 확인하기 위하여는 7장과 비교함이 안전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는 권면을 좇게 되고(벧후 1:19-21), 성경을 서로 대조하여 연구하라는 권면(사 34:16)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8장과 11장의 평행해석 비교 (괄호 안의 숫자는 절수임)

 

( 8장 )

(11장과 12장 일부)

메대 페르샤

메대 페르샤

수양(3, 20)

다리오 왕들(1, 2)

그리스(헬라)

그리스(헬라)

수염소(,21)

헬라(2,3)

심히 강대함(8)

능력있는 왕(3)

강성할 때에(8)

큰 권세로 다스림(3)

큰 뿔이 꺾임(8)

나라가 갈라짐(4)

사방으로 나누임(8)

....

사방에 나누임(4)

....

 

 

 

 

 

 

 

 

 

 

 

                 2. 페르샤 시대로부터 로마제국 시대까지)


   1.1. 페르샤 통치 시대(539 - 331 BC)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네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들을 격동시켜 헬라국을 칠 것이다」(단 11:2).


  1절에서 메대를 한 마디로 언급한 뒤 가브리엘은 페르샤 역사로 들어갔다(페르샤의 자세한 역사는 8장 연구를 참조). 8장에서 수양부터 시작한 것처럼 이 때(고레스 3년) 이미 망한 바벨론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즉위 3년째인 고레스도 제외되고 "또 세 왕이 일어"나리라고 예언되었다. 고레스 다음의 세 왕은 다음과 같다.

 

○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530-522 BC) -- 아버지 고레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예루살렘 중건에 호의적이어서, 캄비세스의 통치기간 동안 성전사업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찬탈왕 바르디야(Bardiya) 혹은 거짓 스메르디스(False Smerdis, 552 BC) --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원정하고 있는 동안 본국에서 출정 전에 이미 살해당한 캄비세스의 형제인 스메르디스(Smerdis)를 사칭(詐稱)하고 왕위에 올랐다. 7개월 만에 다리우스가 주동이된 반정공신(反政攻臣)에 의해 쫓겨났다.

 

다리우스 1세(Darius I, 522-486 BC) --거짓 스메르디스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그의 재위 2년에, 제2차 성전 중건령을 내렸다(스 6:1-12). 헬라를 정복하려다가 마라돈 전쟁에서 패했다(490 BC).

 

  그 다음에 심히 부요하여 헬라 정복에 나서리라고 예언된(단 11:2) 네번째 왕은 누구인가?

  크세르크스(Xerxes, 486-465 BC, 재위 21년) --그는 다리스우 1세의 아들로 에스더의 남편인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였다(에 2:16, 17). 부왕이 실패한 헬라 정복에 나서, 40개 민족을 동원시켜 25만의 군대로 헬라를 침공했으나, 살라미스(Salamis)해전에서 패하였다(480 BC).

 

  그 후 페르샤의 국운(國運)은 쇠하기 시작하여, 몇 명의 왕이 더 계속된 후에, 마침내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에게 정복당하였다. 아하수에로의 아들인 아닥사스다왕 때에, 제 3 차 중건령이 내려(스 7:7), 페르샤를 통한 하나님의 마지막 섭리를 성취시켰다.


 

                                        1.2. 헬라 통치시대(331-168 BC)

 

                                1.2.1. 알렉산더의 통일시대(11:3)

 

  3절부터 4절까지는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헬라반도를 통일하여,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356-323 BC) 대왕의 예언적 전기(傳記)인데, 그가 태어나기 90년 전에 예언으로 소개되어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그의 치세에 대하여는 8장 연구 참조). 과연 예언된 그대로, 그의 나라와 그 자신이 한창 "강성할 때"인 기원전 323년 33세를 일생으로 바벨론에서 요절(夭折)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끝까지 반역하다가 멸망된 바벨론을 재건하여 그가 이룩하려던 대제국의 수도로 삼으려다가 꺾이고 말았다.

 

  그가 13년 동안 이룩한 제국이 세상을 지배할듯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저지하셨다(10:20).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11:4)이라는 예언 그대로, 유복자(有腹子)였던 후사는 어린 아이 때에 살해당하였고, 그의 광대한 영토는 "이외의 사람들"인 그의 네 장수였던 캇산더, 리시마쿠스, 셀루쿠스, 프톨레미등에 의해 사방으로 나뉘었다(자세한 설명은 7장과 8장 연구 참조).

 


                                   1.2.2. 분열 왕국시대(11:4)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의 사후 20여년간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던 그의 분열된 제국의 후예들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하기까지를 헬레네스 시대(Hellenistic Age, 323-146 BC)라고 한다.

 

  기원전 301년에 입수스(Ipsus) 전쟁의 결과로 넷으로 나뉘었던 알렉산더의 제국은, 기원전 297년에 캇산더가 죽고, 281년에 리시마쿠스가 살해당함으로써, 그들의 왕국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하여 북쪽에는 시리아와 소아시아 동부를 다스리게 된 셀루쿠스 왕조가 시리아의 이름으로 들어섰고, 남쪽은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미 왕조가 들어서게 되어, 팔레스틴이 로마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예루살렘은 이들 북방 왕국 시리아와 남방 왕국 이집트의 두 세력이 마주치는 각축장(角逐場)이 되어, 거룩한 땅, 영화로운 땅은 저주받은 격전지가 되었다.



                           1.2.3. 남방왕국과 북방왕국시대(11:5~15)

 

  이렇게 북방왕 시리아와 남방왕 이집트가 팔레스틴을 가운데 두고, 파도치듯 맞부딪히는 틈 새에서, 지치고 시달린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거나 스스로 팔레스틴을 떠남으로써 이들이 그 후 역사에 알려진 "디아스포라"(Diaspora), 즉 팔레스틴의 이외의 땅에 거주하게 된 국외(國外) 거주 유대인(*중국인 화교와 같음)이 되었으며, 그들이 곧 오순절 당시 "천하 각국으로부터"모여든 유대인들인 것이다(행 2:5-11).

 

  5절의 최초의 남방 왕은 알렉산더의 장군 가운데 하나였던 프톨레미 1세(Ptolemy I, Soter. 306-283)이고, "그 군들 중에 하나"는 북방 왕조의 창시자가 된 셀루쿠스 1세(Seleucus I, Nicator 302-283)인데 이렇게 표현된 것은, 기원전 321년 이후 셀루쿠스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차지했었으나, 316년에는 중앙집권적인 통일된 군주 국가를 세우기 위해 알렉산더의 네 장수와 맞서 싸우다가 기원전 301년 입수스 전투에서 전사한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아들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패하여 거기서 쫓겨났었다.

 

  이에 셀루쿠스는 이집트왕 프톨레미 휘하에 들어가, 그를 도와 데메트리우스를 기원전 312년 가자(Gaza) 전투에서 패배시키고, 그의 이전 왕국을 되찾아 나중에는 프톨레미왕조보다 더욱 강한 왕국을 세웠음을 뜻한다.

 

  이렇게 시작된 남북 왕조를 본문(5-13절)에 맞추어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은 [다니엘서 주석] 참조).


; 북방왕국(시리아)-셀루쿠스 왕조 (연대는 기원전(BC)임)

 

셀루쿠스 1세(Nicator. 302-283)(5절)

안티오쿠스 2세(Theos. 261-246)(6절)

셀루쿠스 2세(Callinicus. 246-226)(7-9절)

셀루쿠스 3세(Ceraunos. 226-223)(10절)

안티오쿠스 3세 대왕(Magnus. 223-187)(10-13절)

안티오쿠스 4세 (Epiphanes. 176-164)(14절)


; 남방 왕국(이집트)-프톨레미 왕조 (연대는 기원전(BC)임)

 

프톨레미 1세(Soter. 306-283)(5절)

프톨레미 2세(Philadelphus. 285-246)(6절)

프톨레미 3세(Euergetes. 246-221)(7-9절)

프톨레미 4세(Philopater. 221-203)(10-13절)

프톨레미 5세(Epiphanes. 204-181)(14,15절)


  이러한 헬라의 왕조 특히 시리아와 이집트가 각축(角逐)한 150년 이상이나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성전은 최악의 수난(受難)을 겪었다. 북방 왕국인 시리아의 통치는 더욱 가혹했는데, 그 중에도 특히 기원전 176-164년까지 다스린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은 극악스러웠다.


  [유대인들에게 헬라의 관습, 헬라의 예술, 헬라의 악덕(惡德), 헬라의 우상숭배를 강요하려는 것이 그(*안티오쿠스 4세)의 고정된 목적이었다.···대제사장직은 곤궁해진 안티오쿠스 정부에 의해 돈을 제일 많이 내고 사겠다는 사람에게 매도(賣渡)되었다. ···사실 안티오쿠스는 유대 인종을 완전히 근절시키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는 모든 백성들이 종교적인 의식에 전념하게 되는 때인 안식일을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되면 그의 군사들을 저항하지도 않은 백성들에게 풀어놓아 거리가 피로 흥건해지기까지 그들을 죽였으며 느헤미야가 그토록 관심을 쏟아 건축해 놓은 성벽들을 헐어내렸고, 수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들의 모든 종교의식들은 억압받았다. 백성들은 안식일을 모독하도록 강제되었고 돼지고기와 다른 부정(不淨)한 음식들을 먹도록 강요되었으며, 할례 예식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성전은 쥬피터신에게 봉헌되었다. ···정말로 참된 종교가 뿌리가 뽑히고 그 본 고장으로부터 팽개쳐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전은 유대의 독특한 의식을 거행하기에 부적합하게 되었다. 대문들은 불타버렸다. ···기원전 168년 12월 25일에는 돼지 떼를 성전 경내(境內)로 몰고 들어와 거기서 도살했다. 한 이야기에 의하면 그 다음에는 잡은 돼지의 피로 제단이 더렵혀졌고, 심지어는 지성소까지도 모독되었으며 성경 사본들에도 돼지고깃물을 뿌렸다]


  이러한 최악의 사태가 메시야의 초림을 150년 앞두고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과 성소에 대한 사단의 숙명적인 적대감(敵對感)이 표현된 것 외에도, 성소 제도에 집약돼 있는 구속의 경륜을 말살하여 메시야의 초림을 방해하려는 초토화(焦土化)정책이기도 했다.

 


                                1.3. 로마 통치시대

 

   1.3.1. 로마제국의 동방개입

  이렇게 남방 왕국 이집트와 북방 왕국 시리아가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계속하는 동안 이탤리 반도에서 서서히 힘을 기른 라틴민족의 나라 로마가 점점 세력을 뻗고 있었다. 먼저 서부 지중해의 해양(海洋) 왕자였던 칼다고와 118년 간(264-146 BC)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어 서부 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그런데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218-201 BC) 때, 칼다고를 지원했음을 계기로 헬라반도의 마케도니아와도 47년 간(215-168 BC) 세 차례나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는데, 기원전 168년 피드나(Pydna)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헬라 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로마는 또 다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200-197 BC) 동안 마케도니아를 지원했던 북방 왕국 시리아의 안티오쿠스(3세) 대왕과도 맞부딪혀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시킴으로써, 소아시아를 빼앗고 팔레스틴을 정복한 시리아를 배후에서 견제했다. 로마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시리아는 팔레스틴에서 더 많은 세금을 염출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고(寶物庫)까지 손을 댔다(마카비 2서, 3:6-39).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4세는 남방 왕국인 이집트를 침공하여 거의 점령하려 했으나, 방금(168 BC)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로마는 특사를 보내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는 이집트에서 철수하라는 통첩을 보냈다. 로마의 위력을 잘 아는 안티오쿠스 4세는 할 수 없이 이집트에서 철수하면서, 분풀이로 기원전 168년 예루살렘을 짓밟아, 앞서 언급한 최악의 사태를 연출했다(마카비 1서 1장, 2장 참조).

 

  안티오쿠스 4세의 잔학한 박해와 성전 모독에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마침내 경건한 제사장 가문의 마타디아스(Mattathias)와 그의 다섯 아들이 앞장 선 독립투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기원전 165년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하고 재봉헌(再奉獻)하여, 이를 기념하는 수전절(修殿節·Hanukkah·Feast of Light)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으며(요 10:22), 기원전 161년에는 로마와 우호조약을 체결했고, 마침내 기원전 151경(151/150 BC)에는 값비싼 독립을 쟁취하여 마카비왕조(the Maccabean)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값 비싼 독립도 오래 가지 못하고, 보수적인 바리새파와 자유주의적인 사두개파의 거듭된 충돌과  마카비 왕가 내부의 왕위 다툼에 로마가 개입함으로써, 기원전 63년 고귀한 독립을 상실한 채, 기원전 40년에는 로마의 결정에 따라 에돔 사람인 헤롯대왕을 저들의 왕으로 맞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지만 참으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뭉뚱그려진 것이, 바로 11장 14절을 중심으로 한 예언인 것이다. 즉 북방 왕국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와 마케도니아왕 필립 5세의 연합 세력에 시달리고, 잇달아 안티오쿠스 4세(시리아)의 재침에 직면한 남방 왕국 이집트는 곤경에 빠져 로마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그 결과로 동방에 개입한 로마는 시리아를 비롯하여(64 BC), 팔레스틴(63 BC)과 이집트(30 BC)를 삼키게 되어, 마침내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the robbers of your people)는 히브리어 문법으로 "네 백성들의 파괴자"라는 뜻도 가능하다. "강포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vision)을 이루려" 한다는 표현에서 "이상"(vision)은 8장 10-14절에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이 박해와 파괴의 세력인 로마를 의미하게 된다. 로마는 역사에서도 "세계의 강도(强盜)"라고 자주 불리워지고 있다. 로마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왕좌와 성전과 보화와 독립과 땅을 빼앗아간 강탈자(强奪者)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남방 왕국과 북방 왕국이 맞붙어 싸우는 틈 새로 개입하게 된 로마가 14절에 소개된 뒤, 15절에는 13절의 상황을 계속 설명하면서, 북방 왕국을 더 이상 막아낼 수 없게 된 남방 왕국 이집트가 로마를 구원자로 불러들이는 내용이 16절에 소개되고 있다.



                         1.3.2. 팔레스틴을 차지하는 로마

 

  16절에는 마침내 그 로마가 "영화로운 땅", 즉 팔레스틴에 나타나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단 8:9와 비교). 여기서의 "와서 치는 자"는 제1차 삼두정치(三頭政治)의 최고 실권자였던 폼페이(Pompey)를 예언으로 돋보이고 있는데, 그는 동방 정복에 나서 기원전 64년에는 북방 왕국 시리아를 끝냄으로써, 이후부터는 로마가 북방 왕국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는 즉시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내란(內亂) 중인 마카비왕조의 왕위 다툼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3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기원전 63년 이를 함락시켜 유대의 독립을 끝냈으며, 유대인 12,000명을 살해한 뒤 그의 지휘관들과 함께 지성소까지 들어감으로써, 16절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시켰다.

 

  17-19절까지의 "그"는, 폼페이를 이어 로마의 실권을 잡은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59-44 BC)이다. 처음에는 폼페이,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했으나 폼페이의 부인인 자기의 딸 율리아(Julia)가 죽고(54 BC) 크라수스도 전사하자(53 BC), 두 사람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다가, 파르살루스(Pharsalus)에서 일대 접전을 벌여 폼페이를 패퇴시키고(48 BC), 그를 이집트까지 추격하여 거기서 죽였다.

 

  그러나 이미 50세가 넘은 그는 이집트를 정복하는 대신 프톨레미 11세의 딸로 남 동생(프톨레미 12세)과 왕권 다툼이 한창이던 당시 22세의 미인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15-30 BC)와 황홀한 사랑에 빠져, 그를 애첩(愛妾)으로 삼고 이집트의 왕위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17절의 "여자의 딸"(the daughter of women)은 "뻬어난 여자"임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바로 세계사의 절세 미인 클레오파트라를 정확히 표현했다.

 

  율리우스 케사르(씨이저)가 지나치게 오래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여러 곳에서 분규가 일어났으므로, 그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로마에 개선 입성했다(18절). 그러나 케사르가 황제가 될 것을 두려워한 공화파(共和派)의 부루투스(Brutus)일파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元老院)에서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이리하여 "그가. . .얼굴을 돌이켜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11:19)는 예언은 놀랍게 이루어졌다.

 


                1.3.3.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에 관여한 로마

 

  20절에서 "그 위를 이을 자는 토색하는 자"라고 번역된 말은, 곧 "세금을 거두는 자"(a raiser of taxes)의 뜻인데, 전체의 번역은 "왕국의 가장 영화로운 곳으로, 세금거두는 사람을 보낼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번역된다.

 

  암살당한 율리우스 케사르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것은 그의 조카딸의 아들이요, 양자였던 옥타비안(Octavian)으로 후에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Caesar)가 되는데, 그가 바로 누가복음 2장 1절에서,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영을 내린 황제인데, 이러한 호적령은 세금을 거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 호적령에 의해, 나사렛에 거하던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내려오게 됨으로써 예언된 때(단 9:25, 갈 4:4), 예언된 장소(미 5:2)에서 구주께서 태어나시게 된 것이다(눅 2:1,4, 5, 7). 얼마나 놀라운 예언의 성취인가? 그는 예언대로 평화로운 통치(Pax Romana)를 하다가, 서기 14년 8월 19일 평화롭게 여생을 마쳤다.

 

  21절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위를 이을 자는 한 비천한 사람"이라고 지적되어 있다. 다음에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Tiberius·14-37 AD)는 어머니 리비아(Livia)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의붓 아들이 되는데, 황제 자신도 그를 후계로 삼으라고 조르는 리비아에게, "로마제국의 자주옷을 입기에는 당신의 아들이 너무 비열하다(vile)"고 거절했으나, 결국은 어머니의 간지(奸智)에 의해 로마황제의 위에 오르게 되었다.

 

  선왕(先王) 아우구스투스와는 달리, 평온치 못한 안팎의 사정으로 자주 군사를 일으켰던 그의 통치가 22절에 예언된 후, "동맹한 왕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이 곳의 "동맹한 왕"은 곧 "언약의 왕"(the prince of the covenant)인데, 다니엘서 9장 25-27절에 예언된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다니엘서 9장 26, 27절에 예언된 대로, 침례받으신 뒤 3년반 후인 서기 31년, 티베리우스 치하의 로마제국에 의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는 그리스도께서 무죄하심을 확인하고도, 자기 부인의 숙부로 자신에게 총독의 직분을 허락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충성하기 위하여(요 19:12),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 누구에 의하여 돌아가실 것이 이처럼 놀랍게도 565년 전(고레스3년-AD31)에 예언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성서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된다.



                          1.4. 교황권 확립까지의 로마 역사

 

  앞서 언급한대로 11, 12장의 예언은 8, 9장의 예언을 확대하고 구체화한 것이요, 8, 9장의 예언은 7장의 예언을 또 그렇게 확대한 것이며, 7장은 2장의 확대이다. 그 중에서도 네째 나라인 로마제국에 관한 예언과 로마제국을 계승한 교황로마에 해당되는 부분에, 특히 이러한 반복과 확대가 중점적으로 강조되고 있어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들이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문맥으로 재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도표를 염두에 두는 것이 바른 해석을 위해 요긴하다.

 

 

 


                  * 제국 로마와 로마교황에 대한 평행


; 제국로마  

7 장 

7:7, 19, 23  

7:7, 19  

; 교황로마 

7:8, 20, 24  

7:8, 20, 25  

7:21, 22, 25  

7:25  

7:25  

7:25  

7:9-12, 22, 26  

7:13, 14 

8 - 9 장 

8:9, 23, 24  

8:10, 25  

8:11, 25  

9:26, 27  

8:9, 12, 23, 24, 25  

8:11, 25  

8:10, 25, 9:24  

8:12  

8:11-13, 25  

9:24, 26, 27  

8:13, 14, 19, 26  

8:14, 19, 25, 9:27  

 

10 - 12 장 

11:14  

11:16  

11:22  

11:31-33  

11:36, 37  

11:33, 35  

11:30  

11:31  

11:31, 36-39  

12:6, 8, 11  

11:27, 35, 45,  

12:1, 2, 7  

12:1 


  그런데 위의 평행대조(平行對照)를 살펴 보면, 11장 23-30절까지의 기사는, 7장이나 8, 9장에서, 평행되는 점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11:23-30)에 대한 해석에는 다소의 신축성이 있게 된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앞에 기록된 로마의 역사가 이 부분에서 다시 강조되면서, 31절에서 교황권이 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앞 부분(11:14-23)에서는 남방 왕국과 북방 왕국이 각축하는 사이를 비집고, 로마가 개입하여 어떻게 승승장구하면서 동방을 정복하고, 마침내 폼페이 때에는 북방 왕국 시리아와 영화로운 땅 예루살렘을 유린하게 되고(16), 그 뒤를 따라 율리우스 케사르가 전권을 인수하여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을 통해 남방 왕국을 어울르는가가 쓰여졌다(17-19절).

 

  그러나 그가 정적(政敵)에게 졸지에 쓰러진 뒤(19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즉위하여, 메시야를 탄생시킬 호적령을 내리게 되고(20절), 그 다음의 황제인 티베리우스 때에는, 마침내 "언약의 왕"을 십자가 못박는 일을 함으로써(22절), 다니엘서 8장 10, 11절과 9장 26, 27절의 예언을 성취시킨다.

 

  이렇게 지상에 오신 메시야를 대적하여 죽이는 중대한 사건을 절정(絶頂)으로 역사를 전개한 다음, 다시 31절에서부터는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로마 교황권을 수립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소급하여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기 31년에 언약의 왕을 죽인 그 로마야말로, 그로부터 191년 전인 기원전 161년에 메시야의 나라인 유다와 열렬한 우호조약을 체결했었다. 당시 시리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던 지도자 유다 마카비(Judas Maccabaeus)는 로마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에 다른 나라들에도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에게도 "거짓을 행하여," 조약을 무시하고 "거짓을 행하여 올"라와(23절), 기원전 63년에는 유다의 독립을 빼앗고 나라를 빼앗은 뒤, 메시야까지 죽인 것이다. 실상 로마는 처음에는 작게 시작된 나라로 8장 9절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여기에서도 "적은 백성을 거느리고 강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23절).

 

  그 후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남방 왕국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한 율리우스 케사르가(11:17) 암살당하고 난 뒤, 후계 다툼을 위해 옥타비안(아우구스투스)과 안토니(Antony)가 맞서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레피두스(Lepidus)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연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적대(敵對)관계에 있었으나, 이러한 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해 안토니는 옥타비안의 누이인 옥타비안(Octavia)와 결혼하여 처남 매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 후 안토니가 이집트에 내려 갔다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매혹되어 부인인 옥타비아를 오빠인 옥타비안에게 돌려보내고 기원전 32년에는 정식으로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뒤 그에게 동방 속주(屬洲)의 태반을 넘겨 주었다.

 

  이에 분노한 옥타비안은 이집트 정복에 나서, 기원전 31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연합군을 패퇴시키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도 차례로 자살함으로써, 마침내 남방왕국의 명맥은 끝나고, 기원전 30년 이집트는 로마의 일개 도(道)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이 25-27절까지의 문맥에 적합하다.

 

  그후 로마는 메시야를 서기 31년 십자가에 못박고, 서기 70년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멸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거룩한 언약을 거스리"게 된다(28절). 그런데 이렇게 확장일로(擴張一路)를 달리던 로마도, "작정된 기간"까지만 그러한 행운이 주어질 것인데(28절),

 

  기간은 아마도 24절에 언급된, 그 "때가 이르기까지"와 연관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곳의 기간은 앞뒤 문맥에 비추어, 기원전 31년 남방 왕국 이집트가 파멸되던 악티움 전쟁 때로부터 꼭 360년 후가 되는 서기 330년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 해에,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는 "영원한 도시"(eternal city)로 알려진 로마시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계속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동쪽으로 옮겨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고, 실상 이 때부터 로마제국은 다시는 이전의 권세와 영광을 회복하지 못한 채(29절), 395년에는 동서 로마로 나뉘었고,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민족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30절에 언급된대로, "깃딤의 배들이 그를 칠 것"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깃딤(Kittim)은 본래 키프러스(Cyprus)와 그 주민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에는 일반화되어, 어디에서 왔든지 파괴를 일삼는 이국인(異國人) 압제자를 가리키는데, 이 문맥에서는 로마제국을 절단(切斷)낸 게르만민족의 침입을 적절히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제국의 수도 이전은, 이제까지 세계 교회들의 머리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오던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하여금 서로마 황제의 이미지를 대신하게 하여, 세계적인 교황이 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여건을 만들어준 계기와 발판이 되었음은 역사적으로 공인된 사실이다(7장 연구 참조).

 

  이러한 배경은 30절 하반의,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라는 말씀을 가장 확실히 설명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이 다니엘서 7장 25절이나 8장 11-14절에 예언된 로마교황권으로, 새 언약의 성소인 하늘의 성소 대신(히9:11-12) 미사제도를 시작하고, 화체설(化體說)과 마리아와 성자(聖者)숭배등으로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배도한 세력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로마제국의 역할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교황로마의 손으로 스스럼 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




 



                     1.2. 마지막 때의 남방 왕과 북방왕

 

  그런데 14절과 15절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이래, 잠잠하던 남방왕과 북방왕이 40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제까지 연구한 11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운데 두고, 언제나 적대(敵對)해 온 두 세력이 남방왕(king of the south)과 북방왕(king of the north)이었다. 팔레스틴을 기준으로 한 방위(方位)에서, 고대에는 바벨론과 시리아가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그들을 괴롭혔고, 이집트는 남쪽에서 괴롭혔다. 11장에서도 15절 이전의 남방왕은 이집트였고 북방왕은 시리아였지만, 시리아는 기원전 64년에, 이집트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합병됨으로서 그 의미도 끝났다. 동시에 택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도, 70주일의 끝인 서기 34년 이후 버림을 당하고, 서기 70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멸망당함으로써, 실제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에(롬 9:2 7, 6, 7, 3:28, 29), 이 곳의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싸움은,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참 교회를 대적하여 일어날 두 세력 사이의 싸움"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면 남방왕은 누가 될 것인가? 이스라엘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신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자적인 이집트도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집트의 속성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느냐?. . .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라"(출 5:2)고 부르짖은 바로의 말에서 분명해진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 때의 영적인 남방 왕이 누구인가를 성경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러한 예언 해석에 가장 안전한 방법인 것이 입증되어 온 평행적 대조법(對照法)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서 11장과 8장의 대조는 이미 끝냈으나, 사건의 연대적인 배열에서 가장 정확한 평행 대조를 이루고 있는 요한 계시록 11장을 중심으로 한 평행 대조를 시도해 보자.



                              1.2.1. 계시록 11장의 개요



; 11:3-6 -- 중세기 1260년 간 하나님의 말씀이 겪게 될 수난과 사명(538-1798년에 걸친 중세 교황권의 역사)



 



; 11:7-13 -- 증거를 마치려 할 때인 1798년 직전에 일어날 성경 말씀에 대한 전쟁(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 11:14-19 -- 일곱째 나팔이 불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계 10:7)을 간직한 지성소 봉사가 시작되고(11:17),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됨(1844년 이후 재림가지).



                           1.2.2. 계시록 11:7-13과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 신문기자 데물랭이 선동한 군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일로 시작 된 프랑스 혁명은 중세기 교권제도를 끝냈으며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방과는 달리, 공산주의를 배태한 무신론과 징집제도에 의한 국가 단위의 전쟁체제를 통한 세계 대전의 기반을 놓았다. 그것은 불길한 전조로 시작된 근세사의 시작이었다.


  ; 증오의 대상이 된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가 단두대에 처형됨과 동시에 가장 잔인하고 끔찍스러운 유혈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 교황권에 대한 혁명 세력의 증오는 1798년 2월 15일 버티어(Berthier) 장군을 로마시로 진군케 하여 재위 23년을 맞은 80세 교령의 교황 피우스(Pius) 6세를 압송하여, 1799년 8월 29일 발렌스 감옥에서 죽게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2천명 이상의 성직자들이 처형되었고 3천명 이상이 추방되거나 국외로 피신했다.


  [불행한 프랑스는 그가 심은 씨앗을 피로서 거두었다···프랑스는 자기 나라를 치료해 줄 복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무신론과 멸망을 자초하는 문을 열었다···그리하여 프랑스는 반란과 무정부 상태로 휩쓸려 들어갔다. 성경을 대적한 싸움은 세계역사에서 공포시대라는 뚜렷한 한 시대를 초래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 하, 467).

....

 


           1.2.3. 프랑스 혁명 2백 주년으로 정리된 역사적 의의


  [마르크시스트역사가들은 1789년 프랑스의 부르조아혁명이 19세기 유럽에서의 연속적인 혁명적 소요를 불러일으켰다고 정리하고 있다. 부르조아혁명은 1848년 3월 프랑스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일어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게 했다.


  1871년 파리콤뮨은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효시였으며,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1949년 중국의 공산화가 뒤를 이었고 쿠바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산혁명은 승리를 구가했다. 혁명에 대한 마르크시스트의 이러한 계보 모델은 최근까지고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

 


  콤뮨은 72일 간이나 지속되었으며, 내외의 반동세력의 공격에 영웅적으로 저항하다가 붕괴되었다. 그러나 콤뮨의 경험들과 거기서 얻은 교훈들은 세계의 혁명운동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콤뮨은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임무들을 올바로 설정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파리의 대포들이 내는 포성은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후진적인 분자들을 그들의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했으며, 또 도처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이 성장하는데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파리에서의 혁명은 전세계를 통해 강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강력한 국제적 연대운동을 촉진시켰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유산은 징병 제도, 거대한 국군들, 엄청난 숫자에 이르는 살상자들 뿐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공산주의라고 하는 또 하나의 현존하는 유산을 남겼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공산주의를 규명하기 위하여 레닌(Lenin)과 트로츠키(Trotsky)는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전 과정을 세밀히 분석했다. 그들은 그같은 과정을 통하여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인 쟝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가르침을 숙지하게 되었다. 그는 국민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도적 소수가, 다수 대중을 위해 그 방책을 대중에게 강요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오늘날 소련에는 전체 국민의 5%만이 집권당인 공산당의 당원이다. 팔버 교수는 "만약 프랑스 혁명이 앞서 발생하지 않았던들 공산주의 운동이 현재와 같은 양상을 결코 띠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1.2.4. 계시록 11(13, 17)장과 다니엘 11장의 남방왕과 북방왕


계시록 11(13, 17)장

 

다니엘 11장

11:3-6

중세기 1260년간 성경(두 증인)의 수난.

31-39

중세기 1260년간 로마 교황권이 할 일

11:7

증거를 마치려는 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1789-1799).  무신론의 상징인 영적 애굽이 된 혁명기의 프랑스.

40

마지막 때(1260년 끝인 179

8)에 남방왕(영적 애굽인 혁명기의 프랑스)이 북방왕인 교황권을 찌름(계 13:3).

13:3, 4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따름.

41

모든 방안을 총동원하여 재기한 북방왕은, 남방왕은 물론 여러 나라를 홍수처럼 정복함.

18:4

바벨론 가운데 있는 하나님 백성들이 남은 무리에 가담함.

41-43

에돔, 모압, 암몬 자손(사 11:14)의 존귀한 자는 그 세력에서 벗어나지만 영적인 애굽, 곧 무신론적 공산주의인 남방왕은 부활한 교황권인 북방왕에게 굴복당함.

11:15

(14:6-12)

일곱째 나팔인 세 천사의 기별이 늦은 비 성령의 역사(계 18:1-4)로 크게 선포됨

44

동북방에서 소문(기별)이 이르러 북방왕을 번민케 함.

11:18

이방이 분노하여 하나님 백성을 핍박함.

44

북방왕(교황권)이 분노하여 하나님 백성을 진멸하고자 함(계 13:15). 짧은 환난기가 임함.

17:15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 곧 영적인 바벨론(17:1, 5), 장막은 하나님의 성소(계 13:6), 여자(바벨론)는 땅을 다스리는 큰 성임(17:18).

45

장막 궁전을 바다와 거룩한 산 사이에 베품.

17:16

왕들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함.

45

끝이 이르리니 도와줄 사람이 없음.

11:18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인 10재앙이 임함

12:1

대군 미가엘이 일어나고 마지막 큰 환난이 시작됨.


 

 

                         1.2.5. 마지막 때의 남방왕


  위에 제시되고 논증된 성경과 역사의 확인에 따라, 다니엘서 11장에 나타난 마지막 때의 남방 왕을 이렇게 정리하여 요약 한다.

 

  알렉산더의 네 장군 가운데, 남쪽의 애굽을 차지한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는 남방 애굽은(11:5-17), "와서 치는 자"인 로마의 개입으로(16절),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원전 30년 로마에 합병되었다(17절).

 

  17절 이후 언급이 없던 남방왕이 갑자기 40절에 다시 출현하는데, 그것은 "마지막 때" 곧 1260년 기간이 끝나는 프랑스 혁명과 일치된 때이다. 그것은 계시록 11장 예언의 내용으로서, "영적으로. . . 애굽"(계 11:8)이라 하였고, 그것은 프랑스 혁명으로 배태된 무신론적인 애굽의 이념과 역할을 떠맡은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시작이었음이, 그 이후의 역사와 성경에서 확인되었다. 소련이 종주국이었던 공산주의의 시작은 프랑스 혁명이었다.


 

 

                              1.2.6. 마지막 때의 북방왕


  셀루커스 왕조의 시리아는(10:5-17), "와서 치는 자"인 로마에 의하여 기원전 64년 멸망당한 후, 로마가 북방왕의 자리를 대신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 당한 후(476년), 그 자리는 중세 교황권에 의하여 계승되는데, 그것이 40절에 묘사된 영적인 북방왕이다.

 

  곧 "마지막 때"인 1260년 기간 끝에 (1798년), 북방왕인 중세 교황권이 영적인 남방왕 애굽의 정신을 드러낸(계 11:8) 프랑스 혁명에 의하여 찔림을 받는다는 극적인 예언이며(단 11:40), 그 이후 프랑스 혁명기의 무신 사상은 공산주의로 발전되어, 그동안 숙적인 로마 카톨릭과 대결해 왔으나, 마침내는 북방왕인 로마 카톨릭 세력이 최후의 남방 왕인 공산주의를 정복한다는 정확한 예언이다(11:42, 43).


  앞서 언급한 대로 다니엘서 11장의 처음 북방왕은,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가운데 하나인 셀루쿠스가 이룩한 왕조인 북방의 시리아였다. 그러나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으며, 그 후 서기 476년에 망한 서로마를 이어 로마 교황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즉 시리아 - 로마 - 교황 로마로 이어져 중세기를 장악했으나, 1260년 기간의 끝인 1798년(단 7:25), 곧 "마지막 때"(단 11:40)에 "영적인 애굽"(계 11:8)인 무신론적인 프랑스 혁명 세력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다(단 11:40, 계13:3, 6, 8).

 

  그러나 북방왕인 로마 교황권의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는 일이 있게 될 것임이 예언되었다(단 11:40 하단, 41, 계 13:4). 그리고 이렇게 극적으로 되살아난 중세교회에 의해 정복될 세력과 나라들은 어떠하며 그 영향은 무엇인가.

 

 

  1. 42, 43절에 바로 이렇게 온 세상에 확대될 현대의 북방왕인 교황권의 위세(威勢)가 미칠 영역을 고대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을 상징했던 리비아와 구스(에디오피아)를 들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고대 남방의 최강국이요, 영적인 의미로는 현대의 무신론적인 공산주의 세력을 대표한 영적인 이집트까지도, 북방왕인 교황권에 의해 정복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42절). 그것이 바로 동구의 공산권에 이어 1991년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비에트 연방이 미국과 결탁한 교황권의 신성동맹(the Holy Alliance)에 의해 붕괴된 너무나 극적인 사실에서 여실히 입증된 것이다.


  1.2.6.2.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휩쓸게 될 현대의 북방왕인 교황권의 세력에서 벗어나 살아남게 될 것으로 예언된, 41절의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은 누구인가? 이 나라들은 오래 전에 멸망한 고대의 국가들로, 이스라엘 백성과는 조상을 통하여 가까운 혈연(血緣)관계가 있으면서도, 언제나 대적하는 입장에 섰던 특별한 이방나라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새 언약시대인 신약에서 다시 거론된 이유는 무엇인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같은 구속의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어그러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다른 교리에 집착하게 되고 서로 상이한 이해 관계에 얽매어 반목하며 적대시했던 사람들이 성령의 깨우치심으로 마침내 진리를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각 교파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허다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14:8)는 하나님의 최후의 경고에 유의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가담할 많은 무리를 가리키기에 가장 적합한 대표들이다(단 11:41, 12:1을 비교하라).


  1.2.6.3. 이렇게 북방왕이 전세계의 대권(大權)을 행사하게 되었을 즈음에, 그를 번민케 하고 분노케 하여, 마침내 일어나 살륙행위를 감행하게 할 44절의 "동북에서부터 오게 될 소문"은 무엇인가. 교황권을 놀라게 할 "동북에서부터 오게 될 소식"(tidings from the east and the north shall alarm him)은 구약과 신약의 배경에서 윤곽이 드러난다. 동쪽은 해돋는 곳으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는 곳으로 쓰여지고 있으며(계 7:2, 사 41:25), 북쪽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시 48:2, 사 14:13, 사 41:25). "소문"(所聞)으로 번역된 말은 "소식", "기별"(tidings)로 번역되기도 한다.


  1.2.6.4. 겔 43:1, 2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빛나"게 되는 배경을 묘사하고 있다. 계 18:1-4에는 같은 배경에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발해지는 하늘의 기별이 적혀 있다. 계 18:1-4는 계 14:6-12의 세 천사의 기별을 확대한 것으로 세상역사의 최후에 전해질 "영원한 복음"(the everlasting gospel)이다. 이 기별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도래(到來)한 시점에서 영원한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초청(계 14:7)


  ; 각시대를 통하여 거짓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도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 바벨론에 대한 엄중한 경고(계 14:8)


; 온 세상 사람을 두 무리로 나누게 되는 심판의 척도로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을 받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초청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입게 될 짐승의 표를 받으므로 사단의 소유가 되지 말라는 경고(계 14:9-11)

.....

 



  1.2.6.6. 마지막 45절에는 북방왕인 교황권이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그의 장막 궁전을 베풀"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영화롭고 거룩한 산은 시온산에 자리잡은 예루살렘이다(슥 8:3, 사 66:20, 욜 3:17).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시 48:1-2).



  이와같이 하나님의 지상 보좌가 놓인 예루살렘을 사단은 자신의 권좌(權座)로 삼으려고 끊임없이 애써 왔다. 그것은 하늘에서 시도한 반역의 계속이었다(사 14:13). 뿐만 아니라, 구속의 경륜의 총체(總體)인 성전에 대한 사단의 증오는 숙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벨론을 보내어 이를 짓밟았고, 시리아를 뒤따라 보내어 가까스로 중건된 성전을 다시 훼파했으며, 마침내 로마제국을 통하여 그 자취를 없앴다. 새 언약의 성소가 하늘에 베풀어진 후, 사단은 교황권을 통하여 이를 짓밟고 훼방했으며(계 13:6),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에 좌정하기도 했다(살후2:4). 천 년기가 지난 뒤 사단과 부활한 악인들은 또 다시 하늘 예루살렘을 에워 싸고 도전한다(계 20:9).


  그러므로 45절의 예언은, 이처럼 하나님의 거처인 성소를 짓밟고 훼방하며 그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하고자 노력해 온 사단의 궁극적인 시도가 교황권을 통해 지상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절정에 달할 것을 보여 준 것이며, 이런 경우 거룩한 산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가리키는 영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


  1.2.6.7. 45절 하단에서,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은 , 이미 평행절로 비교한 바 있는 여러 성경절에서 분명해졌다. 이제까지의 다니엘서의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듯이, 배도의 세력의 최후에 관한 예언도 분명히 이루어 질 것이다.

...


 


                          3. 성소 중심의 구속의 역사 개관


  우리는 본서의 서두에서 다니엘서의 주제(主題)가 지상의 성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구속의 역사와 성소를 중심으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임을 밝혔었다. 이제 7, 8, 9장과 10, 11장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분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범주를 넘어 다니엘서의 계시가 지상성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늘성소에까지 연결되어 마침내는 세계 역사의 종말까지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집약(集約)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8장과 9장은 다니엘서의 주제요, 인간 역사의 의미요, 목적이며, 핵심일뿐더러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선악의 대쟁투의 현장(現場)이며, 구속의 역사의 전개도(展開圖)가 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중요성을 감안하여, 7장부터 11장까지를 한 데 요약함으로써 영혼의 닻같이 튼튼한(히6:19),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구속사관(救贖史觀)을 정립(定立)하고자 한다.

 

 


                              3.1. 타락에서 아브라함까지


  3.1.1.1. 일찍 하늘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반역을 시작한 사단은(사14:12-17, 겔 28:12-19), 비록 하늘에서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추방되었으나(계 12:7-9), 인류의 시조요 하나님을 대신하여 지구를 다스린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자기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타락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동조자(同調者)를 얻게 되고 지구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하는데 성공하였다.


  3.1.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이러한 지구 불법점유(不法占有)와 하나님의 주권(主權) 침해를 방치(放置)하지 아니하시고, 범죄한 인류와 상실된 지구를 회복하시기 위해(사 49:24, 25), 구속의 경륜(the Plan of Redemption)을 발표하심으로써(창 3:15) 마침내 지구와 인류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선악의 대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3.1.1.3. 타락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속의 경륜을 인간이 이해하고 믿으며 행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이 바로 희생제물을 제사드리는 성소제도(聖所制度)의 시작이었다.

...


 



  3.1.1.4. 이처럼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사단은 자신은 자신이 강탈(强奪)한 지구 통치권을 빼앗길 것임은 물론, 자신의 "머리가 상"하는 치명상(致命傷)을 입을 것을 깨닫고, 이 제도에 필사적인 도전을 시작했다. 그 처음 표현이, 거짓 제사를 드림으로써 가짜 성소를 시작한 가인의 제사였으며, 성소제도를 바르게 이해하여 어린양으로 표상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으려는 하나님의 참 백성에 대한 사단의 분노는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극으로 연출되었다(창 4:3-8).


  3.1.1.5. 그 후 구속의 경륜과 성소제도에 대한 참다운 신앙과 지식은, 홍수전의 넘치는 죄악과 우상숭배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하여 아담-셋-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라멕-노아등 경건한 노독들에 의해 간단 없이 이어졌다(창 5장). 홍수가 지난 뒤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제단을 쌓고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제사제도를 수호(守護)하고 존속시키는 일이었다(창 8:20, 21).


  3.1.1.6. 홍수 후에도 구속의 경륜에 관한 지식과 믿음은 면면(綿綿)이 전승되어,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렀다(창11장).




  3.1.1.7. 아브라함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을 실현시킬 메사야의 강림을 준비하시기 위해, 메시야를 탄생시킬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셨고(창12:1-3), 이를 뒤받침할 아브라함 자손들의 나라를 세우실 장소로 가나안으로 정하셨으며, 메시야의 탄생 지점을 베들레헴으로 선정하시고(미 5:2), 아브라함을 미리 가나안에 이주시키셨다(창 12:5, 6, 13:14-17).


  3.1.1.8. 한편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이러한 구속의 경륜의 진전에, 필사적으로 맞서 싸워야 할 입장에 놓인 사단은, 가인으로 하여금 거짓 제물로 위조(僞造)된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거짓 종교인 이교(異敎)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줄로 믿게 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우상종교를 시작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여 노아의 한 가족 만을 제외하고는 홍수 전 세상을 완전히 타락시켜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데 성공했다.


  3.1.1.9. 노아의 한 가족을 타락시키는데 실패함으로써 홍수 후 하나님의 남은 자손을 남기게 한 사단은, 온 세상 거민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노아의 증손인 니므롯을 택하여 바벨탑을 쌓고 전제군주(專制君主) 체제의 세계적 국가를 조직함으로써(창 10:8).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이루시려는(창 18:18) 하나님에 계획에 맞섰다.

 



                           3.2. 아브라함에서 초림까지


  3.2.1.1.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은 번성하여 이스라엘 국가로 자라났고(창 18:18), 구속의 경륜은 더욱 구체화되어 원시적인 제사제도는 성소제도로 확대되었으며(출 25:8), 솔로몬 때에 이르러서는 성전까지 세워짐으로써(왕상 6장) 예루살렘은 명실공히 구속의 경륜의 총본산(總本山)이 되었다. 이렇듯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세 대륙의 교차점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은 온 세상에 구원의 기별을 선포하고 오실 메시야를 전파해야 하는 구원의 센터(center)가 된 것이다.


3.2.1.2. 이런 배경에 비추어 볼 때,


; 지구의 역사적, 지리적, 종교적 중심은 팔레스틴에,


; 팔레스틴의 중심은 예루살렘에,


; 예루살렘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에,


; 예루살렘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에,


; 지성소의 중심은 언약(법)궤에,

....



 


  3.2.1.5. 이러한 상황에서, 다니엘 7장에 나타난 첫 제국이, 니므롯의 정신과 우상숭배를 이어 받아 세계 우상종교의 총본부가 된 느브갓네살의 신바빌로니아였다. 이미 우상숭배에 깊이 빠짐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의해 포로돼 가서 우상숭배를 강요받았으며(단 3장), 성전은 페허의 무더기가 됨으로써 사단의 승리는 결정적인 듯이 보였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우상숭배로 세뇌(洗腦)하여 영원히 포로로 잡아 두려고 시도했으나, 하나님은 극소수의 신실한 남은 무리들, 특히 다니엘과 세 친구등을 통하여 바벨론에서 계속 이기셨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페르샤왕 고레스의 힘을 빌어 당신의 백성을 돌려보내려 하지 않는 바벨론을 하룻 밤 사이에 멸망시키시고 고레스의 석방령에 따라(스 1:1-4), 예언된대로 70년 만에 저들을 귀환시켜 오래 황폐된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제도를 회복하게 하여 메시야의 초림 준비를 서둘렀다.


  3.2.1.6. 다음 번에 등장한 메대 페르샤는 하나님과 사단의 감화에 번갈아 이끌리며, 선악의 대쟁투에 등장했다. 이 때쯤 다수는 아니지만, 이미 귀국한 상당수의 성실한 남은 무리에 의해 성전이 재건되고 제사제도가 회복되자 메시야 초림의 임박으로 다급해진 사단은 메대와 페르샤법의 불변성을 이용하여 전 세계의 우유대인을 전멸시킴으로써 메시야의 족보 자체를 단절시켜 아예 그 그루터기를 없애고자 하만과 모르드개 사건을 일으켰다(에 3:8-13). 그러나 바벨론에 다니엘을 준비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 때를 위하여 왕후 에스더를 준비시기심으로써(에 4:16) 사태는 역전(逆轉)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극적으로 파멸에서 벗어났다. 메대 페르샤를 통한 핍박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분쇄하려 했던 사단은 다시 한번 패배한 것이다.


  3.2.1.7. 다음에 들어선 제국이 철학의 나라 헬라였다. 페르샤를 통한 육신적인 핍박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단은, 전혀 새로운 시도로 헬라의 철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정신을 정복하여 구속의 경륜을 와해(瓦解)시키려고 시도했다. 그 때쯤, 성전재건을 끝내고 제사제도도 회복한 유대인들은 헬라문명의 사자(使者)로 태풍처럼 세상을 휩쓴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히브리 신앙의 밑 뿌리까지 뒤흔들리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3.2.1.8. 특히 메시야의 초림을 200년도 채 남기지 않은 기원전 2, 3세기 동안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헬라 왕국들인 시리아와 이집트의 싸움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페허로 만들었으며, 특히 헬라문명의 광신자(狂信者)인 북방의 시리아(셀루쿠스 왕조)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에 의해 헬라화를 강요당했다. 매력적인 헬라문명에 압도되어 그토록 보수적이었던 유대인들은 앞을 다투어 헬라의 언어, 관습, 의복, 제도를 채택했으며 히브리 신앙은 진부(陳腐)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올림픽의 본산인 헬라의 체육관이 세워졌고, 나체로 경주하는등 스포츠의 공세는 대단하여, 심지어는 성전의 제사장들도 성소봉사보다는 운동 경기에 더욱 매력을 느낄 정도였다.


  3.2.1.9. 이제 히브리인의 정통적인 신앙과 전통은 헬라의 관습과 철학에 뒤섞여졌으며, 그 결과로 사두개파가 생겨났고, 이에 반대하는 바리새파도 일어나, 수천년 동안 보전돼 온 히브리 신앙은 사분오열(四分五裂)이 되었으며, 성전예배의 의미는 망각되고 형식만이 남게 되어 구속의 경륜은 사람들의 눈에서 가리워졌다. 심지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전에서 조석으로 드리던 상번제마저 중지되었으며, 성전 앞에는 우상의 제단이 세워지고, 돼지가 제물이 된 제사가 드려졌다. 여호와 하나님 대신 그리스의 신인 제우스와 디오니수스(Dionysus)를 예배하도록 강요되었고, 할례와 안식일 준수의 금지령이 내렸고, 돼지고기는 식용(食用)으로 권장됐다.

 

   이렇게 메시야의 강림 150여년을 앞 두고 사단은 발악적으로 구속의 경륜의 진행을 방해했으며, 그것이 곧 성소제도의 파괴와 안식일등 율법의 유린으로 나타났다.


  3.2.1.10. 메시야의 강림이 눈 앞에 다가오자, 사단은 그가 선정할 수 있은 최강의 챔피온인, 다니엘서에 예언된, "무섭고 놀라운" 네번째 짐승인 철나라 제국로마를 등장시켜, 신속히 "영화로운 땅" 팔레스틴으로 이동시킴으로써(AD 31), 초림하시는 메시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였다(계 12:1-4). 이렇게 이미 한 차례 헬라문명의 태풍으로 히브리 신앙의 핵심인 성소제도는 뒤죽박죽이 되고 또다시 철통같은 로마제국의 위협으로 살벌해진 때, 마침내 다니엘서에 예언된 초림의 시간표에 따라(9:25-2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하신 것이다(갈 4:4).


  3.2.1.11. 메시야의 강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가계(家系)까지 선정하여 다윗의 집안을 택하셨으며(사 11:1), 출생지는 물론(미 5:2), 어머니까지 택정하여 예고하셨고(사 7:14), 강림의 시기와(단 9:25-27), 이 땅에서의 일생까지 예고한 바 있으셨다(사 53: , 시22: 등). 그러나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사단의 예비 방해공작은 완벽하리만치 성공적이어서, 메시야 탄생 조차도 알아차릴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위해, 방 한칸이 마련되지 않은 것만큼 사단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눅 2:6, 7).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한 최대의 비극이었다(요 1:11).


  3.2.1.12. 사단은 지구의 주권 회복과 인류의 구속을 위해 혈혈단신 적지(敵地)에 착륙하신 그리스도를 탄생(誕生)과 동시에 제거하기 위해, 헤롯 대왕의 힘을 빌어 죽이려까지 했으나(마 2:1-18, 계 12:2-5), 하나님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3.2.1.13. 4천년 이상 사단이 다져놓은 홈 그라운드인 이 지상에서 예수께서는 이 때를 위해 준비시킨 아브라함의 자손에 의해서까지 오해와 핍박과 증오의 대상이 되신 채, 구원의 "포도즙틀을 홀로 밟으셨는데,""만민 중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사 63:3). 광야에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 협상(協商)으로 그리스도를 패배시키기에 실패한 사단은(마 4:1-11), 번지는 복음과 함께 하늘 임시정부인 은혜의 왕국이 사람들의 마음에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지자 그것이 최선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빼앗기로 결정하고 이미 준비해 놓은 세계사의 최강(最强)의 지상 대리자인 로마제국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고 무덤을 봉인(封印)함으로써, 메시야의 역할을 영원히 끝내려 했다(단8:9-11). 이제까지의 설명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3.3. 부활에서 중세기 끝까지

 

  3.3.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의 총력을 기울인 역사적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용기백배한 제자들은 오순절의 늦은 비 성령으로 능력을 받아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여(행 1:8),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당한 67년 경에는 당시 알려진 모든 세계가 복음을 듣게 되었다.


  3.3.1.2. 다급해진 사단은 세계를 철통 같이 장악한 로마제국의 물샐 틈 없는 조직을 총동원하여, 200년 이상 계속된 가혹한 핍박으로 제자들을 비롯한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였으나, 부활의 소망으로 확신된 그들의 신앙을 이길 수가 없었다(계 2:10).


  3.3.1.3. 이처럼 이교 로마를 통한 그의 계획이 벽에 부딪히고, 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안절부절해진 사단은 그의 최고의 지혜를 짜내어 구상한 것이 로마교황권의 출현이다. 콘스탄틴황제를 위장(僞裝) 회심시켜, 교황권의 산파역을 맡게 했으며, 그 결과로 제국로마를 대신하여 6세기 초에는 교황로마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3.3.1.4. 사단의 이러한 지상 대리자의 교체(交替)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을 70주일이 끝나는 서기 34년 이후 포기하시고, 교회를 그 분의 영적 이스라엘로 삼으신데 대한 대응(對應)조치이기도 했다. 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선 그리스도인들을 압도(壓倒)하는데는, 역시 이에 맞설 수 있는 유사(類似) 종교세력이 적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단은 이교로마를 통해서는 지상에 임하신 구주를 대적하고(AD 31), 지상성전을 훼파했으나 (AD 70),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늘 성소를 훼파하는데는, 교황권의 손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교황권이야말로 사단이 창안(創案)해 낼 수 있었던 최후의 최대 완성품(Crowning Achievement)이었다.


  3.3.1.5.

이리하여 538년부터 정식으로 그 기능을 수행한 교황로마는, 이전의 제국보다 더 오랜 1260년 이상 가장 효과적으로 일하여 중세기를 진리의 암흑시대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미사제도와 교권주의를 통해 하늘 성소를 훼파하고,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을 유린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성도를 이기게 되었다(단 7:24, 25, 8:11-13, 계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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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 새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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