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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206] 정조의 인사 실패와 세도정치 / 100년 국정 공백은 정실 인사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신사77 2020. 3. 31. 22:09

[박종인의 땅의 歷史] 100년 국정 공백은 정실 인사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일보

[206] 정조의 인사 실패와 세도정치

'당쟁은 전쟁보다 해악' 탕평책을 내건 정조
'친인척 멀리하고 유능한 인재 기른다'는 우현좌척 원칙 제시
뒤로는 역적 혐의로 유배 중인 고모를 몰래 석방
자기 눈에 든 관리 김조순을 끝까지 아껴 김조순 스스로 '우현좌척 원칙 깨나?' 의심
김조순 딸 세자빈 간택 후 정조 급서… 이후 원칙 깨고 중용한 김조순이 세도정치 주도
권력투쟁으로 날린 國政

박종인 선임기자

경기도 이천 백사면 내촌마을에는 고택(古宅)이 있다. 너른 마당에 잘생긴 집이 두 채 보이고 그 앞으로 건물 사라진 주춧돌들이 도열해 있다. 고택 이름은 '김좌근 고택'이다. 김좌근. 순조 때 시작해 대원군에 의해 종식된 세도정치(勢道政治) 핵심 인물이다. 주소는 내촌리 222-14번지다.

정조 사후 시작한 세도정치 시대는 조선왕조 국정의 공백기다. 바다에는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서양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하고 땅에는 민란이 폭발하던 때였다. 조선 정부는 그 국내외 위기에 둔감하고 무심했다. 외척에 의해 장악당한 조선 정부에 관심사는 모순 해결보다는 권력 유지와 확장이었다.

그 세도정치는 어떻게 시작했는가. 핵심 세도가는 김좌근이다. 김좌근은 김조순의 아들이다. 김조순은 순조 장인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다. 사돈에게 아들과 나라를 맡긴 사람은 정조다. 시작은, 탕평책을 버리고 정실 인사를 택한 정조였다.

옹고집 애연가의 죽음

정조는 군사(君師·군주요 스승)라 자칭할 정도로 뛰어난 학문과 논리로 관료들을 설득하던 군주였다.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만 갈래 강과 밝은 달의 늙은 주인)'이라 불렀다.

논리가 먹히지 않으면 고집으로 주장을 관철한 절대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 고집을 상징하는 물건은 담배였다. 정조는 애연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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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 백사면 내촌마을에는 ‘김좌근 고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택이 있다. 김좌근은 19세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 문을 연 김조순의 아들이다. 이 집은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가 선친 묘 관리용으로 지은 집이다. 원래는 99칸이었으나 일부는 매각돼 주춧돌만 남아 있다. ‘개혁군주’ 정조의 측근인 김조순은 왕의 정실인사로 순조 장인이 된 뒤 세도정치를 개시했다. 세도정치 기간 내내 국정은 공백 상태였다. /박종인 기자

1796년 규장각 학자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치렀다. 제목은 '남령초 책문'이었다. "유익한 식물로는 담배만 한 풀이 없다. 내 심신 피로는 오로지 담배로 풀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금지하자고 한다. 너희는 다방면으로 지식을 꺼내 차나 술보다 나은 이 약초의 효용을 증명하라."(정조, '홍재전서' 52, 책문) 일찌감치 "기우제를 지낼 때도 금주는 할지언정 금연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 왕이었다.(1777년 5월 5일 '정조실록') 또 규장각 학자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치르는데, '승지에게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하여 시한을 정했다. 시를 지어 올리자 "담배 한 대 피우는 사이에 써냈구나" 하고 점수를 세 곱절로 내렸다.'(정약용, '다산시문집' 1권, 시(詩)) 정약용이 써서 1등을 한 시 제목은 '태평만세 네 글자가 그 가운데 있다네(太平萬歲字當中·태평만세자당중)'였다.

훗날 몸져누운 정조 침실로 신하들이 찾아갔다. 정조가 물었다. "그대들이 입실한 지 얼마나 됐는가." 의관 이시수가 답했다. "담배 한 대 피울 만큼 시간이 지났습니다."(1800년 6월 26일 '정조실록') 이틀 뒤 정조가 죽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입안하고 해결하던 권력자가 죽었다. 정국이 요동쳤다.

실천 없는 '친인척 인사 비리 척결'

김조순(1765∼1832).
김조순(1765∼1832).

재위 13년째 가을, 정조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병란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편당의 명목을 만들어 서로 주륙을 해왔다."(1789년 10월 17일 '정조실록') 당쟁을 전쟁만큼이나 해악이라고 본 왕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고 선왕 영조를 이어 탕평책으로 각 당을 두루 임용해온 왕이었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완공이 임박한 수원 화성으로 행차했다. 국가 산업인 농업은 생산성이 높아지고 학문은 나날이 수준이 높아져가던 때였다. 3월 정조는 규장각 관리들과 왕실 친족을 불러 창덕궁 후원에서 잔치를 벌였다. 왕은 신하들 앞에서 1795년을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曠千載一有之慶年·광천재일유지경년)'로 선포했다.

그리고 공무원 임용 기준을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등극 전부터 나는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친인척은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귀근(貴近·고위직에 있는 친인척)들 폐단이 극에 달하고 있다. 특별히 경들을 불러 속마음을 보여주니,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하라."(1795년 3월 10일 '정조실록')

이름하여 '우현좌척(右賢左戚)' 원칙이다. 인재를 가까이 하고(우현) 내외척을 멀리한다(좌척)는 뜻이다. 공정한 인사를 약속한 왕에게, 학연이나 혈연 없이 실력으로 무장한 규장각 관료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정조 암살 사건 연루자로 유배 중인 '정치달의 처(妻)'가 풀려났다는 뉴스가 조정에 전해졌다. '정치달의 처'는 사도세자의 동생이자 정조의 고모 화완옹주다. 화완옹주는 아들 정후겸이 정조 암살 기도 혐의로 처형된 뒤 같은 혐의로 파주에 유배 중이었다. 정조는 그런 대역죄인을 아무도 모르게 풀어주고 겉으로는 친척을 멀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를 따지며 법대로 하라는 대사헌, 대사간에게 정조가 이리 말했다. "선왕께서 사랑을 듬뿍 쏟으셨던 사람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여러 해를 넘기며 관료들이 극구 반대했으나 정조는 귀를 열지 않았다. 결국 정조는 4년 뒤 화완옹주를 사면해버렸다. 천년에 한 번 있던 경사스러운 해에 정조가 내걸었던 국정지표 우현좌척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헌신짝이 돼 버렸다.

"반성문 하나 잘 썼구나!"

1785년 김낙순이라는 안동 김씨 사내가 과거에 붙었다. 정조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 김상헌의 후손이라 칭찬하며 이름을 '조순'으로 직접 개명시켰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산56-27에 있는 김조순의 묘. 비석 앞면은 순조가 직접 쓴 친필을 새겼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산56-27에 있는 김조순의 묘. 비석 앞면은 순조가 직접 쓴 친필을 새겼다.

1792년 10월 정조의 친위 관료격인 규장각 출신 관리들이 '현대 청나라 문체'를 즐기다가 적발됐다. 외교문서 작성관 남공철이 올린 문서에 정조가 혐오하는 '저질' 단어들이 인용된 것이다. 소위 '문체반정'의 시작이었다. 남공철은 직위해제됐다. 성균관 유생이던 이옥은 저질 단어를 혼용해 쓰다가 아예 과거 급제 취소 및 응시 자격 박탈에 강제징집까지 당하는 참화를 겪어야 했다. 정조는 5년 전인 1787년 잡소설을 읽던 예문관 관원 김조순과 이상황을 떠올리며 이들에게도 반성문을 받으라고 명했다. 청나라 사신으로 막 압록강을 건너려던 서장관 김조순이 서둘러 반성문을 써서 파발로 보냈다. 정조가 말했다. "옹졸한 남공철이나 경박하게 듣기 좋게만 꾸민 이상황, 뻣뻣해 알기 어려운 심상규는 모두 억지 변명이지만 김조순은 문체가 바르고 우아해 밤 깊은 줄 모르고 읽었다. 마음 놓고 먼 길을 잘 다녀오라 이르라."(1792년 11월 8일 '정조실록')

김조순은 정조의 문체반정을 적극 지지하는 관료로 변신했다. 이후 정조 입맛에 쏙 든 김조순은 승승장구했다. 어디까지 승승장구했는가. 정조의 사돈이자 후임 왕 순조의 장인이 된 것이다.

국왕의 장인이 된 안동 김씨

재위 24년째인 1800년 2월 26일 창경궁 행각인 집복헌에서 정조 세자빈을 고르는 첫 번째 간택이 거행됐다. 행호군 김조순, 진사 서기수, 유학 박종만과 신집, 통덕랑 윤수만의 딸이 간택에 들었다.

그날 처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정조는 김조순에게 따로 편지를 보냈다. "상하 모두 (그대 딸을 가리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 하늘이 명하신 일이고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장인)로서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1800년 2월 26일 '정조실록')

김조순 묘에 있는 비각. 신도비 글은 순조가 지었다.
김조순 묘에 있는 비각. 신도비 글은 순조가 지었다.

그런데 김조순이 정조와의 만남을 기록한 '영춘옥음기'에는 한 해 전 김조순이 정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친인척도 사대부처럼 쓰면 어진 사대부가 될 수 있지만 사대부를 친인척처럼 쓰면 어진 사대부가 될 수 없다."(김태희,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대동한문학 43집, 2015, 재인용) 1800년 6월 정조는 다시 만난 김조순에게 세자를 위해 세도(世道)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김조순은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께서 표방했던 우현좌척을 바꾸신다는 뜻인가.'

세도정치와 정조와 안동 김씨

김조순을 만난 직후 정조는 급서했다. 두 달 전 이뤄진 재간택에서 정조는 김조순에게 "아비라도 함부로 딸 방에 들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최종 간택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지막 간택은 2년 뒤 이뤄졌고, 그 딸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됐다. 1803년 어린 순조 뒤에서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가 섭정을 거뒀다. 국구(國舅) 김조순은 정조 사후 권력을 장악했던 경주 김씨 세력을 숙청하고 안동 김씨를 대거 등용했다.

절대왕권을 휘둘렀던 정조와 달리 순조는 장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장인 김조순은 '사람이 조심스럽고 넉넉하고 후덕했으나, 외람스럽게도 권세를 거머쥔 간신 흔적이 있었고'(황현, '오하기문') 아들 김좌근은 소실인 나합과 권력과 금력을 휘두르며 왕실과 나라를 뒤흔들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풍양 조씨로 이어져 이후 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계속됐다. 대원군 실각 후에는 여흥 민씨가 망국 때까지 권력을 휘둘렀다.

그 세상은 볼만했다. "전하께서 침묵이 너무 지나쳐 사무 일체를 신하에게 일임하니 공사 구별이 저절로 권병(權柄·권력자)에게 돌아간다. 온 세상이 이익에만 치닫고 있으니 오로지 뇌물에서 말미암는다." 사간의 상소에 순조는 "구체적으로 누군지 밝히라"며 답을 내리지 않았다.(1819년 4월 8일 '순조실록') 온 세상이 급변하던 19세기였다. 조선은 텅 빈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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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에는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가 아비 묘막으로 지은 고택이 남아 있다. 원래 99칸이었으나 큰 건물 일부는 연전에 후손들이 매각해 주춧돌만 남아 있다. 집과 농지는 서울대에 기증했으나 지금 텅 비어 있다. 그 집 도로명 주소는 '청백리로 393번길 100-131'이다. 입으로 능력 인사를 외치고 손으로는 정실 인사를 펼쳤던 한 왕이 남긴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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