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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최명길 평전,한명기 지음 / "나를 매국노라 불러도 좋다, 나라가 살아야 복수도 할 수 있는 것"

영국신사77 2019. 12. 1. 17:40

"나를 매국노라 불러도 좋다, 나라가 살아야 복수도 할 수 있는 것"

조선일보 입력 2019.11.30 03:00

병자호란 초기 청군과 담판하며 남한산성으로 대피할 시간 벌어 
'매국노' '간신' 비난 들으면서도 조선의 영토와 국권 보전시켜 

최명길 평전

최명길 평전

한명기 지음|보리668쪽|3만3000원

383년 전 그 겨울로 돌아가본다. 1636년 12월 13일 청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튿날 오후 3시 임금(인조)과 신료들은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해 창경궁을 나섰다. 남대문쯤 갔을 때 청군 선봉이 벌써 무악재에 이르렀다는 전갈이 왔다. 강화도로 갈 길이 막혔다. 하루 전만 해도 결전을 벌이자고 기세등등하던 신하들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이 나섰다.

"신이 단기로 적장을 찾아가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묻겠습니다. 오랑캐가 신의 말을 듣지 않고 죽인다면 신은 말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요, 다행히 서로 이야기가 되면 잠시라도 칼날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서울 가까운 곳에서 방어할 만한 땅은 남한산성만 한 데가 없으니, 전하께서는 빨리 달려 산성에 들어가 일의 추이를 보소서."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벌어 그나마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게 한 이는 최명길이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담판이었다. 그는 이미 그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산성 내에서 벌어진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소설 및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헌(1570~1652)과 최명길이 벌인 논전이 핵심이다. 최명길이 청에 화친을 요청하는 국서를 쓰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국서를 찢으며 통곡했다. 최명길은 "국가가 보전된 다음에야 와신상담도 할 수 있는 법"이라고 반박하며 다시 국서를 썼다.


그 겨울 남한산성에 우리가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마초와 식량은 떨어졌다. 병사들은 굶어 죽은 말을 삶아 먹었다. 얼어 죽는 병사가 속출했다. 청군은 홍이포를 늘어놓고 대포를 쏘아댔다. 기다려도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산성 내 조선 군사들은 상황을 이렇게 만든 조정에 대한 분노로 반란이라도 일으킬 태세였다.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와서 항복을 종용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헌(김윤석·왼쪽)과 최명길(이병헌)은 척화와 화친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훗날 둘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詩)를 읊었다. 김상헌은 “어찌 바지와 저고리를 바꿔 입겠는가”라고 했고, 최명길은 “끓는 물도 얼음도 다 같은 물이다”라고 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헌(김윤석·왼쪽)과 최명길(이병헌)은 척화와 화친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훗날 둘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詩)를 읊었다. 김상헌은 “어찌 바지와 저고리를 바꿔 입겠는가”라고 했고, 최명길은 “끓는 물도 얼음도 다 같은 물이다”라고 했다. /CJ엔터테인먼트

최명길이 또 나섰다. "약한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어떤 수단이라도 쓸 수밖에 없다." 청군 진영을 몇 차례 오가며 항복 조건을 타협했다. 인조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심양(당시 청의 수도)으로 자신을 압송해가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최명길의 요청을 수락했다. "약속을 지킬 테니 조선은 안심하고 신복(臣服)하라." 인조가 삼궤구고두 의식을 치르고 국권과 영토를 보전한 것은 사실 행운이었다. "조선은 영토를 넘겨주지 않았고, 훗날 청군이 북경(명나라 수도)을 점령한 이후 자행했던 것처럼 관민들이 체발을 강요당하지도 않았다. 또 몹시 우려했던 것처럼 인조 자신이 심양으로 끌려가는 사태도 빚어지지 않았다."(363쪽)

병자호란 직후 최명길은 '매국노'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 '진회(금나라와 화친을 체결한 송나라 재상)보다 더한 간신'으로 비난받았다. 소위 '깨끗한 선비'들은 오랑캐에 짓밟힌 '더러운 조정'에 나갈 수 없다고 나랏일을 저버렸다.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바로 낙향했다. 이식(1584~1647)이 훗날 진실을 말했다. "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곧바로 귀향한 것은 지조 높은 행동이었지만, 그 또한 최명길이 열었던 문을 통해 나갔다."

김상헌도 훗날 최명길의 진심을 깨닫는다. 1640년 10월 김상헌은 '반청 혐의자'로 체포돼 심양 감옥으로 압송됐다. 최명길도 명나라에 비밀 사신을 보낸 사실이 발각돼 심양 감옥에 갇혔다. 김상헌은 "이제 같은 감옥의 죄수가 되어 백 년의 의혹을 풀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배 선비들은 최명길을 '소인'으로 낙인찍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은 "최명길은 이익만 알고 의리를 잊은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후 조선 역사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병자호란 때 나라가 망했어야 한다고 자조하는 분도 많다. 차라리 장엄한 패배를 맞았다면 치욕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영토와 국권이 청나라에 넘어갔다면, 지금 우리는 한국어를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죽창을 들자고 분노하는 일은 술 취한 필부(匹夫)라도 할 수 있다. 상대를 '매국노'라 심판하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저자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 조야를 막론하고 '비판자' '심판자'가 넘쳐나고 
 있을 때 최명길은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최명길이 보여준 책임감과 희생정신, 유연함과 포용력, 그리고 전략적 사고는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저자의 전작 '역사평설 병자호란'과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쓴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을 함께 읽으면 당대 역사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