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걸리버여행기] 미국서 실험실벤처 창업
2002년 스탠퍼드대 교환교수 때
실리콘밸리에 실험실벤처 세워
“SW 산업의 미래 함께 이끌자”
2005년 독일 SAP서 M&A 제안
벤처캐피털 KPCB도 손 내밀어
나는 9·11 당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획기적인 인메모리 데이터베이스 동시접근 방식 논문 발표를 위해 VLDB 국제학회에 참석 중이었다. 논문 발표 세션이 끝나자 놀라운 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테러로 화염에 싸인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장면이 반복해서 방영되고 있었다.
미국이 모든 공항을 폐쇄한다는 뉴스가 나오자 미국인 참석자가 절반이 넘는 이 학회는 대혼란에 빠졌다. 당시 스탠퍼드대 교환교수로 가족들과 함께 실리콘밸리로 옮겨온 나도 샌프란시스코행 항공편이 끊기면서 한동안 미국에 입국하지 못했다.
“훌륭한 기술, 한국서 어떻게 만들었죠”
1990년대 초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마칠 때는 ‘인공지능(AI)의 겨울’이었다. 나는 92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후 한국의 메모리 산업과 관련성이 있는 인메모리 데이터베이스 분야로 방향을 바꾸었다. 연구비는 확보했지만 연구진이 없었던 정부 출연기관 ETRI에서 2년간 1억원의 위탁과제비를 받아 1세대 기술을 개발했다. 나중에 2개의 벤처 기업이 ETRI에서 이 기술을 이전받아 창업한 것을 알게 됐다. 기술을 처음 만든 사람도 모르게 스타트업을 하는 당시의 국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실리콘밸리 진출 목표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승진 부담이 있는 신참 교수에게 연구주제를 바꾸는 것은 위험한 시도였지만 승진에 연연해 하고 싶은 연구를 못 하면 교수는 왜 하느냐는 신념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몇 년간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성능을 재는 실험을 반복했다. 드디어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답을 가져다 주었다. 200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경쟁률이 6대1인 3대 국제 데이터베이스학회에서 연속해 논문을 발표했다. 극찬의 익명 평가자로 추정되는 저명한 IBM 수석 과학자가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것을 듣고, 2세대 기술의 근간이 되는 국제특허 출원비와 연구개발비를 빨리 마련하기 위해 실험실벤처를 창업했다.
2002년 3월 1000명의 변호사가 있는 세계 제1의 벤처 로펌 WSGR의 로자티 대표 변호사 사무실. “매우 훌륭한 기술이네요.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기술을 만들었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실리콘 밸리의 전자 매장은 소니 TV가 지배할 때였다. “많은 기술 창업자들을 봐 왔습니다. 한국 법인으로는 큰 신기술 시장을 개척할 수 없어요. 새로운 미국 법인 설립을 우리가 맡고 잘 아는 벤처캐피털(VC)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변호사 비용은 투자받은 후 내면 됩니다. 대신 우리도 지분 투자를 좀 합니다.”
신기술을 가진 창업자는 실리콘밸리에서 특권을 가진다. WSGR의 로자티 변호사와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실리콘밸리의 내로라하는 벤처캐피털들을 대부분 만났다. 그러나 닷컴 붕괴와 9·11의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투자자들은 이 수축의 시기에 기존 데이터베이스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골리앗 오라클, IBM,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항하는 투자를 주저했다. “획기적 혁신기술이지만 골리앗이 쫓아오지 못할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을까요?”
펀딩이 여의치 않자 나는 실리콘밸리 대기업들로 눈을 돌렸다. 은퇴한 지오 위더홀드 지도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90년대 초 미국 DARPA 파견기간 동안 구글의 기반이 된 디지털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만든 사람이다. 위더홀드 교수는 똑똑한 인도계의 스탠퍼드 후배가 SAP 팔로 알토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만나 보라고 권했다. 이 똑똑한 후배가 이후 12년을 인메모리 데이터베이스가 시장의 주류가 될 때까지 동지로 같이 일한 비샬 시카 박사다. 비샬은 SAP의 실리콘밸리 연구소에서 새로운 기술을 찾아내 SAP 독일 본사에 접목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만나자마자 내가 개발한 기술에 흥분했다.
2002년 9월 중순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인 독일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가로지르는 네카르강 건너편 호텔에서 본 하이델베르크성은 아름다웠다. 택시로 15분 거리에 있는 SAP 독일 본사에서 나는 12명의 핵심기술자들과 하루종일 워크숍을 했다. 한 사람만이 열렬히 환호하고 나머지는 조용히 기술적 질문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비샬은 SAP 내부에서 나의 스타트업 인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회사 내부에서 우리보다 뒤떨어진 기술을 만든 기술진에 의해 거부됐다.
“차 교수의 인메모리 데이터베이스 기술과 개발팀 모두를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세계 소프트웨어 산업은 향후 놀랍게 변합니다. SAP는 차 교수가 이 변화를 함께 끌어 나가기를 원합니다.”
2005년 7월 7일 일본 도쿄에서 필자보다 열 살이 젊은 30대 후반의 SAP 기술총괄사장 샤이 아가시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이스라엘 ‘스타트업 네이션’의 아이콘이다. 정중하고도 진지한 그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려 전략적 비밀 인수에 동의했다.
SAP “전략적 M&A를” 매일 전화 세례
닷컴 붕괴와 9·11 이후 3년째가 되면서 실리콘밸리는 성장을 위한 기지개를 다시 켜고 있었다. SAP와는 별도로 실리콘밸리 제1의 벤처캐피털인 클라이너 퍼킨스(KPCB)의 레이 레인과 빌 조이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빌은 내가 설명하는 기술에 흥분해 질문을 계속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레이가 끝날 무렵 말했다.
“당신 기술은 참 훌륭한데 비즈니스 모델은 고쳐야겠어요.” 순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떠올랐다. “칭찬 고맙습니다. 만약 내가 비즈니스모델까지 잘 만들면 왜 당신에게 오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나서 레이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당신은 수석 과학자가 되고 우리가 CEO를 영입하겠습니다.”
세계적인 고객 기반과 지원체계, 자금력을 가진 SAP와 파트너십을 맺고 KPCB의 레이와 빌이 펀딩을 하면 새로운 시장을 만들 최고의 조합이 되겠다는 나이브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샤이가 말했다. “오라클이 우리와 동반자였지만 지금은 적이 되었습니다. 차 교수가 제안한 대로 하면 우리는 오라클보다 더 무서운 적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SAP의 일원이 되어 주세요.”
이렇게 해서 KPCB와 SAP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해 전략적 M&A를 독촉하는 SAP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의 미래를 위해 글로벌 3대 소프트웨어 기업 속으로 들어가 이 기업의 경쟁력과 비즈니스를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5년 뒤 SAP HANA를 세상에 내놓은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다.
인메모리 데이터베이스
전통적 데이터베이스는 데이터를 외장 디스크나 SSD(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에 저장하고 필요한 때 DRAM에 올려 처리한다. 반도체 기술 발전으로 컴퓨터 DRAM 용량과 CPU(중앙연산장치) 처리 능력이 데이터베이스 기술이 처음 나올 때 비해 천만 배 이상 커지게 되었다. 인메모리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는 대용량 데이터베이스를 다수의 컴퓨터의 메모리에 분산 압축 저장하고 고성능 실시간 분석과 머신 러닝을 지원하는 기술이다. SAP가 HANA를 개발해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의 ERP(전사적사원관리) 데이터베이스를 지원하면서 오라클·IBM·마이크로소프트도 추종하는 메인 스트림 기술이 됐다.
서울대 전기공학사, 계측제어공학석사, 스탠퍼드대 박사. 2014~19년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초대 원장. 2002년 실리콘밸리에 실험실벤처를 창업했다. 이 회사를 인수한 독일 기업 SAP의 한국연구소를 설립해 SAP HANA가 나오기까지의 연구를 이끌고 전사적 개발을 공동 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