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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10년간 월세 동결”…김은희 작가의 응암동 풍년빌라 실험/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김은희 작가

영국신사77 2020. 2. 17. 22:41

“10년간 월세 동결”…김은희 작가의 응암동 풍년빌라 실험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자리 잡은 '풍년빌라'. 세 가족이 한 지붕 아래서 일하고 산다.[사진 김동규 작가]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자리 잡은 '풍년빌라'. 세 가족이 한 지붕 아래서 일하고 산다.[사진 김동규 작가]

10년간 임대료 인상 없이 한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쉼터도, 일터도 될 수 있게 맞춤형으로 디자인된 공간이라면. 더욱이 건물주가 “돈이 돈을 버는 구조가 싫다”며 “임차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임대 방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작정한 집이라면.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김은희 작가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지은
'풍년빌라'와 '여인숙'
질 좋고 값싼 임대 공간의 비결

  
착한 드라마 속 이야기 같지만 실제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신축한 ‘풍년 빌라’의 이야기다. 지난해 5월, 4층짜리 풍년 빌라의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입주했다. 건물주이자 임대인은 드라마 ‘시그널’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으로 유명한 김은희 작가다.   
  
세 가족은 어쩌다 좋은 건물주를 만난, 운 좋은 사람들인 걸까. 빌라의 임차인이자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임태병 건축가(문도호제 건축사무소 대표)는 “임대인과 임차인이 윈윈하는 시스템을 면밀히 기획해서 만든 결과”라고 전했다.   
  

10년간 임대료 동결, 집주인의 손해일까.  

  
풍년빌라를 만들고 사는 사람들. 뒤쪽 왼쪽부터 김대균 착착스튜디오 소장, 3~4층에 사는 오수진 작가, 김민철 서울소셜스탠다드 대표, 3~4층에 사는 김여진 작가와 반려견 푸른이, 허현경 일러스트레이터, 김하나 서울소셜스탠다드 대표, 김은희 작가, 1~2층에 사는 류은희 씨(스낵바 매점 매니저)와 딸 임서현 씨, 임태병 문도호제 소장. 오종택 기자                      

풍년빌라를 만들고 사는 사람들. 뒤쪽 왼쪽부터 김대균 착착스튜디오 소장, 3~4층에 사는 오수진 작가, 김민철 서울소셜스탠다드 대표, 3~4층에 사는 김여진 작가와 반려견 푸른이, 허현경 일러스트레이터, 김하나 서울소셜스탠다드 대표, 김은희 작가, 1~2층에 사는 류은희 씨(스낵바 매점 매니저)와 딸 임서현 씨, 임태병 문도호제 소장. 오종택 기자

풍년 빌라의 셈법은 기존 임대차 시장과 다르다.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건물주의 ‘착한‘ 투자 의지에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뭉친 결과 새로운 방정식을 만들었다. 평가 절하된 땅을 저렴하게 매입해 건물 짓기 및 임대까지 전문가들이 풀어나간 덕이다.  
  
풍년빌라에는 보증금이 없다. 임대료는 공간 크기에 따라 45만~70만원 선이다. 10년 동결이 조건이다. 뒤집어 보면 임대인에게 10년간의 공실 없는 임대 보장을 의미한다. 공유주택 전문 소셜 벤처 이자, 풍년 빌라의 관리를 맡은 김하나 서울소셜스탠다드 대표는 “임대업계에서 보면 10년 임대 기간에 2년을 공실 기간으로 보는데 집주인으로서는 공실 부담이 없는 데다, 시간이 흘러 지가 상승이라는 이득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풍년 빌라에 입주한 세 가족은 오랜 지인들이다. 이들이 함께 살기로 마음먹고 2015년께 집짓기를 위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처음에 더 많은 사람이 뜻을 함께했지만, 자금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프로젝트가 흐지부지될 뻔한 2017년께 세 가족 중 작가 부부의 지인이던 김은희 작가가 선뜻 건축주로 나서면서 급물살을 탔다.   
  
김 작가는 “그간 번 돈으로 강남 아파트를 사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인 것 같았다”며 “그러던 차에 이들의 계획을 들었고, 땅 매입부터 건물 짓기, 임대 관리까지 건물주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갖춰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1층 임태병 소장 가족의 부엌겸 거실의 모습. 너도 밤나무 합판으로 내부를 마감했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공간이다.[사진 김동규 작가]                      

1층 임태병 소장 가족의 부엌겸 거실의 모습. 너도 밤나무 합판으로 내부를 마감했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공간이다.[사진 김동규 작가]

마당에서 본 1층 임태병 소장네 부엌의 모습.[사진 김동규 작가]

허현경 일러스트레이터의 2층 작업실 모습.[사진 김동규 작가]
임태병 소장네의 2층 방의 모습.[사진 김동규 작가]
풍년빌라 4층 테라스의 모습.[사진 김동규 작가]
 임차인인 임태병 소장이 나서서 집을 지을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른 것이 북향의, 건물 6채로 둘러싸인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땅(대지 면적 134.9㎡)이다. 원래 1층 규모의 구옥이 있었다. 악조건을 두루 갖춘 듯하지만, 전문가에게는 가능성이 보였다. 임 소장은 “땅의 조건 때문에 저렴했지만, 불광천이 옆에 있어 환경이 좋았고, 기존 신축 건물 사이로 천이 보여 뷰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6채의 집으로 둘러싸인, 북향 땅의 가능성  

  
풍년빌라가 지어진 땅은 북향에 건물 6채로 둘러싸여 있다. 건축가는 북향으로 반투명 큰 창을 내 조도를 확보하고 건물 틈 사이로 작은 창들을 내 조망을 확보했다.[사진 김동규 작가]                      

풍년빌라가 지어진 땅은 북향에 건물 6채로 둘러싸여 있다. 건축가는 북향으로 반투명 큰 창을 내 조도를 확보하고 건물 틈 사이로 작은 창들을 내 조망을 확보했다.[사진 김동규 작가]

풍년 빌라의 설계는 김대균 건축가(착착 건축사사무소 대표)가 맡았다. 임 소장은 “살 집이다 보니 균형을 잡지 못할까 봐 직접 설계하지 않고 평소 집을 짓는다면 설계를 맡기고 싶다고 생각했던 김 소장에게 부탁했다”고 말했다.   
  
쉽지 않은 프로젝트다. 대지 조건이 좋지 못한 데다가, 건축가를 포함해 건축주도 많다. 김 소장은 “다양한 요구를 담아내는 주거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다”며 설계를 선뜻 맡았다.   
  

3층에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집과 작가 부부의 집은 미닫이 현관문을 열면 한 공간처럼 이어져 보인다. 북향으로 난 반투명 창이 밝다.[사진 김동규 작가]

작가 부부의 3층 현관 공간에는 미팅룸을 만들었다.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다.[사진 김동규 작가]
풍년빌라 1층 현관의 모습. 북향 집이지만 더 환하게 보이도록 가평석(화강석)을 바닥재로 썼다.[사진 김동규 작가]
1층 카페 '스낵바'의 모습.[사진 김동규 작가]
4층 규모의 풍년 빌라는 층별로 세대를 나누지 않았다. 일터와 쉼터를 분리하고, 구성원끼리 오가며 더 많이 만날 수 있도록 수직ㆍ수평으로 쪼개 계획했다. 건물 1층에 카페인 스낵바를 두고, 1~2층은 임태병 소장 가족, 2~3층은 허현경 일러스트레이터, 3~4층은 김은희 작가의 지인이자 역시 작가인 오수진ㆍ김여진 부부의 집이다.  
  
집집마다 신발을 신고 드나드는 공간이 있다. 바닥재로 석재타일을 썼다. 이른바 ‘중간주거’의 영역이다. 김 소장은 “집에서도 사회적인 역할을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작가 부부의 3층 미팅룸의 경우 한옥으로 치면 사랑채 역할을 하도록 디자인했다.   
  
한계를 극복하는 세심한 설계도 돋보인다. 가구별 공간이 맞닿은 벽은 두겹으로 둬서 소음을 막았다. 북쪽으로 반투명의 큰 창을 둬서 이웃집의 시선을 차단하면서 빛을 확보했다. 김 소장은 “북향이지만 뒷집에서 빛이 반사되어 오히려 조도가 일정하고 집이 밝다”며 “다른 집으로 막히지 않은 부분에 창을 내 조망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3~4층에 거주하는 오수진 작가는 “공간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어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기도 했는데 익숙해지고 어우러지면서 내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허현경 일러스트레이터는 “혼자 산 지 오래됐는데 풍년 빌라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사니 안전하고, 집과 작업실이 분리되어 좋다”며 웃었다.  

  

풍년 빌라에 이어 여인숙, 착한 임대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착한 임대 2호점인 '여인숙'은 작가 세 명의 보금자리다. 1~2층은 근린생활시설이고, 3~5층이 주거 공간이다. [사진 김동규 작가]                      

착한 임대 2호점인 '여인숙'은 작가 세 명의 보금자리다. 1~2층은 근린생활시설이고, 3~5층이 주거 공간이다. [사진 김동규 작가]

김은희 작가는 응암동 풍년 빌라 인근에 건물 하나를 더 신축했다. ‘여인숙’이라 이름 붙인 건물의 결은 풍년 빌라와 같다.   
  
길쭉해서 잘 팔리지 않던 땅(대지면적 116.7㎡)을 사서, 작가들을 위한 5층 규모의 집을 지었다. 건물의 1층은 빵집, 2층은 사무실 및 풍년 빌라와 여인숙의 손님들이 묵어갈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3~5층에 세 명의 작가가 입주했다.   
  

여인숙의 2층 공동현관. 오른쪽의 붙박이 장이 신발장이다. 3층에 한 가구, 4~5층에 두 가구가 복층으로 들어섰다.[사진 김동규 작가]

2층 사무실의 모습.[사진 김동규 작가]
3층 작가의 집. 보증금 없이 월 임대료가 42만~60만원 선이다.[사진 김동규 작가]
4~5층 작가의 집. 보증금 없이 월 임대료가 42만~60만원 선이다.[사진 김동규 작가]
김 작가는 “프로젝트 하나를 할 비용을 쪼개 땅값이 비교적 저렴한 동네에서 풍년 빌라와 여인숙을 지은 것”이라며 “1~2층을 근생으로 둔 덕에 3~5층 주거 쪽의 월세 부담을 낮출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인숙도 보증금은 없고 임대료가 월 42만~60만원 선이다. 김 작가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힘들고 지방 출신의 후배 작가들이 많아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오랫동안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이런 남다른 방식의 임대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여인숙은 풍년 빌라의 세입자이자 기획자인 임태병 건축가가 디자인했다. 집마다 테라스가 있고, 층고가 높아 실제 면적보다 넓게 보인다. 임태병 소장은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서 좀 더 표준화한 제3, 4의 풍년 빌라와 여인숙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