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스트끼리의 외교전쟁, 뻔뻔하거나 교활하게
![1940년 10월 프랑스 앙다예(2차대전 중 독일 점령)역 플랫폼 열병식. 나치 독일의 히틀러(왼쪽)와 스페인의 프랑코가 독일 의장대에 파시스트식 답례를 하고 있다. 작은 역의 좁은 플랫폼 탓에 붉은 카펫은 프랑코의 발걸음이 차지했다. 왼편은 프랑코가 타고 온 열차. 앙다예 국경 너머는 스페인 이룬.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2/09/c47e00e3-4aa1-4910-9c14-0dd8e7a12936.jpg)
1940년 10월 프랑스 앙다예(2차대전 중 독일 점령)역 플랫폼 열병식. 나치 독일의 히틀러(왼쪽)와 스페인의 프랑코가 독일 의장대에 파시스트식 답례를 하고 있다. 작은 역의 좁은 플랫폼 탓에 붉은 카펫은 프랑코의 발걸음이 차지했다. 왼편은 프랑코가 타고 온 열차. 앙다예 국경 너머는 스페인 이룬. [중앙포토]
히틀러의 회유와 분통
“차라리 내 이빨 뽑는 게 낫다”
약자의 교묘한 술책에 허 찔려
프랑코의 지피지기
‘악마는 디테일 속’ 협상술
참전 압박에 턱없는 조건제시
체임벌린의 겁먹은 유화책
비굴한 ‘우리 시대의 평화’
용기 없으면 속임수에 당해
![프란시스코 프랑코](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2/09/fbc02799-ee28-43cb-aee5-0876a5790942.jpg)
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에서 스페인 친구 디에고 바스케스를 만났다. 그는 마드리드 역사박물관의 학예관 출신.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두 독재자는 비슷했다. 무자비한 파시스트다. 하지만 국익을 다투는 외교에선 갈라섰다. 둘의 만남은 처음이고 국력차이는 컸다. 히틀러는 교활한 카리스마다. 프랑코의 기회주의적 영악함이 한 수 위였다.” 앙다예는 20세기 외교사의 절묘한 현장이다.
나치의 파죽지세 시절이다.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6주 만에 항복했다. 그 무렵 파시스트 원조인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독재자)가 히틀러에 합세했다.
그해 10월 21일 히틀러의 특별열차가 독일 수도 베를린을 떠났다. 프랑스 서쪽 끝으로 달렸다. 그의 전략 의지는 선명했다. 베를린-로마 추축(樞軸·Axis)에 마드리드를 넣는 것이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2/09/9f5496c2-a6f9-4b31-8823-77f8df60bc32.jpg)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프랑코는 미소로 분위기를 바꿨다. 둘은 퓌러(Führer, 히틀러), 카우디요 (Caudillo)로 서로를 불렀다. 뜻은 최고 지도자(총통으로 번역). 히틀러는 51세, 프랑코는 48세다. 플랫폼에 독일 의장병 100여 명이 도열했다. 간략한 열병 후 둘은 히틀러 열차 안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프랑코의 감미로운 외교 수사(修辭)가 작렬했다. “정신적으로 양 국민은 어떤 주저함도 없이 결속했다.” 그 바탕에는 스페인 내전이 있었다. 내전은 장군들의 반란이었다. 프랑코 군부(우파 국민전선)와 좌파 인민전선의 공화정부는 격돌했다. 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군사 원조를 받았다. 그것은 내전 승리의 주요 요소다.
프랑코는 추축국 편으로의 참전 의사를 확인했다. 그는 어려움을 호소했다. “스페인 내전(1936.7~1939.4)이 끝난 지 얼마 안 된다. 나라가 피폐해 있다. 전쟁준비에 시간이 필요하다. 경제·식량 원조를 부탁한다.” 그것은 약소국의 징징거리는 말투였다. 히틀러는 지원을 약속했다. 처음엔 설득조다. 거기에 위압과 회유를 섞었다. 그는 지중해 서쪽에서 영국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지브롤터(영국령, 스페인 남단)의 공격이다(펠릭스 작전).
프랑코의 열망도 지브롤터 점령이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아프리카 북서부) 방어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걸었다. 대규모 군수물자와 장비를 요청했다. 히틀러는 어처구니없어 했다. 프랑코는 대담해졌다. 참전의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교묘한 물타기 역습이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프랑스령 모로코와 알제리 오랑)를 넘겨달라고 했다. 그곳은 영화 ‘카사블랑카’(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 배경이다.
히틀러는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그곳은 프랑스 비시(Vichy) 정부 관할. 비시의 수장 필리프 페탱의 식민지 집착은 뚜렷했다. 히틀러의 다음(10월 24일) 비밀 일정은 페탱과의 만남과 협력이다. 프랑코는 수위를 조절했다. 히틀러의 인내심이 마를까 조심했다. 프랑코의 외동딸(마리아 델 카르멘)은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납치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졌다.” (『프랑코 나의 아버지』)
![1938년 뮌헨협정의 4개국 정상, (왼쪽부터) 영국 체임벌린, 프랑스 달라디에,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2/09/32153d46-c68a-4432-a614-270abc300916.jpg)
1938년 뮌헨협정의 4개국 정상, (왼쪽부터) 영국 체임벌린, 프랑스 달라디에,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 [중앙포토]
프랑코는 작지만 단단하다. “별명은 꼬마지휘관(comandantín). 냉정하고 집요하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introvertido).” (앤서니 비버 지음 『스페인 내전』) 프랑코는 내심 히틀러를 경멸했다. 그는 정통파(33세 최연소 장군) 군인이다. 히틀러는 사병 출신이다.
![프랑코가 세운 ‘전몰자 계곡’의 십자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02/09/3027a367-eb09-4e30-91ad-29a7fea38471.jpg)
프랑코가 세운 ‘전몰자 계곡’의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