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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만㎢ 땅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 군사 천재였지만 경영 철학 부재

영국신사77 2018. 8. 19. 10:52
515만㎢ 땅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 군사 천재였지만 경영 철학 부재

가는 곳마다 전승… 약탈과 살육 일삼아 
정복자였을 뿐 위대한 경영자 못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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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을 세계 제일의 정복 제왕으로 꼽는다. 
알렉산더와 광개토대왕 모두 타고난 군사 천재인 데다 

 

소년 시절부터 직접 전투에 참여한 지휘자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한 부대가 작전을 한 다음 
다른 부대가 이어 작전을 하는 전법을 썼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군대와 격돌한 전투를 예로 들어 보자. 
5m 정도 길이의 긴 창으로 무장한 창병(槍兵)들이 
사각형의 대오로 적 전차 부대의 중앙 공격에 맞선다. 
좌우 측면에 배치된 기병대의 공격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우측 기병들이 적의 기병들을 유인해 교전하면, 
그 교전의 중앙을 알렉산더가 지휘하는 기병들이 기습 공격해 
적 기병대를 혼란에 빠뜨려 틈을 만든다. 
후속 병력이 그 틈 사이를 뚫고 우회, 
적 후방 본진으로 파고들어가 적 본부를 괴멸시킨다. 
요약하면 창병 부대→우측 기병대→알렉산더의 지휘 기병대→후속 병력이 
순차적으로 직렬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병렬 전법과 달리, 
공격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공격 집중력이 최대화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알렉산더의 헤타이로이 기병대는 
말 위에서 한 번 창을 쓰면 창을 놓아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말에서 떨어져야만 했다. 
기마술이 서툰 알렉산더 기병대와 사각형 대오로 경직된 창병 부대의 군대는 
거의 같은 시대에 말 달리면서 
활과 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유목민인 흉노족 군대와 맞섰다면 
패배하였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알렉산더 군대가 기마에 서툰 아열대 지방의 군대와만 전투했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하나로 만든다는 만인동포관(萬人同胞觀)에 의거, 
인류 융합 정책을 구상했다. 
마케도니아 군사들을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시켰고,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의 융합을 꾀했다. 
그 결과 동서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 정책으로 마케도니아 백성들은 그를 외면했고 
장기간에 걸친 살육 정복 전쟁에 
그의 군대마저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알렉산더는 과로와 말라리아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페르시아 정복 후 300명이 넘는 여인과 황음무도함에 빠진 그는 
조직 관리를 거의 하지 못했고, 
사후 계승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정복한 대영토는 4개국으로 쪼개졌다. 
군사에 천부적 재능이 있어 12년 동안 
515만㎢(현 미국 영토의 52%)에 달하는 넓은 땅을 정복했지만, 
경영 철학과 도덕성 부재로 
장기 존속하는 강국을 만들지 못했다. 

정복자였을 뿐 위대한 경영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장대성의 제왕 경영학] <6> 태조 이성계

 

일러스트=윤혜연
기업의 가장 중요한 철학은 고객을 왕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겸손해야 한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하급자에게도 반말하지 않고 예절을 갖췄다. 그런 겸손을 무기로 신진 사대부들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건설했다.

부원(附元)에서 친고려로 전향

이성계는 1170년 고려 무신난 주역인 대장군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6대 후손이다. 1174년 이의방이 정균에 의해 살해당한 후 그의 동생 이린은 도주했다. 이린의 손자이자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목조)는 원의 벼슬을 받은 뒤 부원파(친원파)가 되어 두만강과 함경도 덕원 지방에서 행세를 했다. 이성계는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자춘은 동북면(함경도)에서 사병 2000여명을 거느린 부원파 호족이었다.

이성계가 20세 때 원제국은 쇠퇴하고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해 고려 31대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시작했다. 이성계와 부친 이자춘은 원나라 붕괴를 예측하고 친고려로 전향, 공민왕을 도와 동북면을 원의 지배로부터 고려 영토로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이자춘은 동북면 병마사가 됐고 개경으로 이주했다. 친일파가 일본 패망 직전 항일 독립군으로 변신하여 애국자로 옷을 갈아입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 대륙을 향해 품은 야망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두만강을 넘나들며 만주 대륙에서 말을 달렸다. 북방의 여진족·몽골족과도 친교를 맺었다. 이성계 평생의 동지이며 의형제인 이지란은 함경도 북청 지역 여진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촌 하나가 청 태조 누루하치의 6대조다. 이성계는 이민족 소년들과 북방에서 말을 달리며 중원 지배의 꿈을 키웠다. 이성계는 타고난 무인 기질에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보태 무술은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황소 뿔을 한 손으로 잡고 꼼짝도 못하게 할 정도의 천하장사였고, 기마술의 천재이자 270m 거리에서도 백발백중시키는 신궁이었다. 근접 백병전에서도 활로 적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총이 없던 그 시절 북방에서 최고의 무술 실력을 갖춘 이성계는 몽골족·여진족 등의 북방 기마민족들로 혼성 기마부대를 편성하고 지휘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에 고려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중원에 대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이성계는 공신으로 동북면 병마사가 된 부친과 함께 개경으로 왔다.

국보 317호 조선태조어진(태조 이성계 초상화).<
겸손한 백전 불패의 명장

개경에 온 이성계는 공신의 아들이지만 도성 귀족 청년들에게 촌사람이라고 무시당했다. 그는 굴욕을 참으면서 적보다 등 뒤에서 배반하는 아군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내부의 적을 안 만드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면서 몸을 낮추었다. 하급자들에게도 먼저 인사를 하는 예를 올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성계는 1361년 8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 만호 박의를 잡았는데 2개월 후인 1361년 10월 홍건적 20만명이 개경을 점령했다. 개경을 탈환하는 1362년 1월 군사작전에 27세 청년 이성계는 사병 2000명을 데리고 선봉에 섰다. 난공불락이던 동문을 격파하고 대승했다.

몇 달 후 요동 지역 원나라 군벌 나하추가 수만 군대로 동북면을 공격했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고 출진시켰다. 이성계 부대는 적 병력의 10분의 1 수준이었지만 사령관이 된 그는 선두에 서서 나하추의 가장 용맹한 장수가 탄 말의 목을 활로 적중시켰다. 화살 맞은 말이 비틀거리자 적장이 말의 고삐를 당기느라 "워 워 워" 하면서 입을 벌리자 그 순간 적장의 입속으로 화살을 명중시켜 사살했다. 그 이후 이성계는 약 30년간 몽골군·여진족·왜구 등과 수많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한 상승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승승장구할수록 이성계는 병사들을 더 따뜻하게 해주고 잘못을 용서해주며 안아주었다. 이성계는 최고 계급의 상장군이지만 부하 장수들에게 반말하지 않고 상관에게 대하듯 예를 다했다고 한다. 적군 포로들도 감화시켜 자기 친위 부대에 배속시켰다. 격의 없고 소탈한 그는 주위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고려 군인들 모두 그의 지휘를 받고 싶어 했다. 이성계는 '장수는 학자의 의견을 갈구해야 한다'는 고전의 가르침에 따라 신진 사대부들을 존경하고 우대했다. 이런 파격적인 그의 겸손 자체가 개혁적이어서 개혁파 사대부들인 정도전·조준·윤소종 등은 물론 온건파 정몽주도 좋아하고 따랐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끝까지 포용하려 했고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독단적으로 암살을 감행하는 바람에 이성계가 대로(大怒)했다고 전해진다.

백성 위한 혁명적 토지개혁

위화도 회군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겨냥한 다음 목표는 토지개혁이었다. 고려 말에는 권문세가 귀족들과 사찰들이 농민들 땅을 빼앗아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고 수확량의 80% 이상을 소작료로 강탈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조준과 함께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계획했다. 그런데 대지주인 원로 이색과 사대부들이 반대했고 정몽주는 애매모호한 중립을 취했다. 군사력을 가진 이성계파는 1390년 공양왕 2년에 권문세가의 토지문서들을 압수해 불태우고 국유화했다. 토지문서들이 불에 타는 3일 동안 백성은 춤을 추며 이성계를 칭송했다. 토지개혁 주목적은 국유화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해주고 세금으로 수확량의 10%를 받는 제도 수립이었다. 그러나 회의 참석자 중 3분의 2가 토지를 소유한 터라 반대가 거셌다. 대신 관청과 현직에 있는 관리에게만 토지를 사용하게 하는 과전법을 만들어 시행했다. 그나마 권문세가와 사찰 횡포는 없어진 게 소득이었다.

자기 종교 대신 신진 사대부 이념 채택

토지개혁으로 인심을 얻은 이성계는 고려 조정 백관들의 추대로 1392년 7월 왕에 올랐다. 조선이라는 새 국가를 창건하는 역성혁명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이성계는 불교 대신 신진 사대부들의 철학이었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대단한 양보였다. 군사력을 소유한 이성계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 사대부들의 조인트 벤처 국가가 조선이었다.

이후 이성계는 개국 초부터 내정 압박을 하던 명나라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군사력을 기르고 1398년 8월 요동 출병을 결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중병이 찾아와 뜻을 이루지 못했고, 권력 공백을 이용해 5남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요동 정벌을 반대하던 이방원과 그 일파는 요동 정벌을 계획한 정도전·남은 등을 모두 제거했다. 이성계는 얼마 후 이방원(3대 태종)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태상왕으로 있다가 만 73세에 운명했다.

전쟁포로로 52세에 결국


황제 즉위 나폴레옹 정복욕 불타 유럽 정벌 시작 
웰링턴에 패해 귀양살이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최고 영웅으로 추앙되긴 하나 생의 후반은 전쟁 포로로 마감했다. 그는 1769년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섬에서 출생, 친프랑스파 코르시카 귀족인 부친을 따라 파리로 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24~26세 무렵 육군 대위였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후 2번에 걸친 반란을 포격으로 진압한 공으로 27세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곧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주도 밀라노를 점령했고 그 후 2차 원정에서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정벌했다. 그는 이런 천재적인 군사 작전으로 오스트리아, 이집트 등을 정벌하여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루소 등 계몽 사상가에게 영향을 받아 민주공화제에 심취하였지만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도취해 정복 야망을 키우는 등의 이중적 성격이었다. 1804년 35세 때 국민투표로 황제로 즉위한 뒤엔 정복욕이 불타올라 유럽 정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1805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해군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 패배하면서 영국 정벌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에도 1812년 광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의 기후와 지리적 환경은 물론 군대에 관하여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원정을 감행했다. 출진 병력 60만 대군 중 겨우 5만명 정도가 프랑스로 생환하는 완패를 당했다. 오만과 독선이 결합한 결과였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에 체포되어 전쟁 포로로 엘바섬으로 귀양 갔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에서 탈출 후 재기하여 100일 천하를 누리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과 연합군에 패배하여 다시 체포됐다. 다시 전쟁 포로가 되어 영국 군함에 실려 남대서양 고도 세인트헬레나섬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 유배지에서 귀양 생활을 하다 1821년 52세에 죽었다.

이성계와 나폴레옹 모두 변방 시골 출신으로 혼란기에 반란군을 진압하고 20대에 장군이 된 군사의 천재들이며 후에 국가 통치자가 되는 등 비슷한 면이 많다. 그러나 정복욕에 빠져 포로로 생을 마감한 나폴레옹과 비교하면 이성계는 인생과 조직 경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진정한 영웅이었다.

[WEEKLY BIZ] 링컨보다 900년 앞선 노예 해방, 공무원 공채… 한반도 新패러다임 세우다

[장대성의 제왕 경영학] <5> 고려 광종
http://weekly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04/2018050401722.html


왕건의 고려는 호족들과 함께 창건한 연합 국가였다. 
호족들은 공신이 되어 지방에서는 토지를 확장하고 노비의 수를 늘리고 
중앙에 진출해서는 권력을 잡고 자식에게 벼슬을 세습시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들은 마음에 안들면 왕명을 무시할 정도였다. 
왕권은 약한데 부인이 29명이고 왕자들이 25명이나 되니 
후계자 쟁탈전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의 뒤를 이은 왕은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이며 
왕건의 장남인 혜종이었다.


왕건이 궁예 부하이던 나주 사령관 시절 
오씨와 동침했는데 임신을 안 시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건은 자신의 전우인 원로 장군 박술희의 도움으로 
초라한 오씨 아들에게 왕위 계승을 시켰는데 2대 왕 혜종이다. 
혜종은 2년 만에 왕권을 노리는 왕규에게 시달리다 병으로 죽었다. 
3대 왕 정종은 서경 천도 문제로 공신들과 대립하다 
왕이 된 지 4년 만인 27세의 젊은 나이에 천둥·벼락 소리에 병들어 죽었다 한다. 
정종의 뒤를 이어 
동복 동생인 25세 왕소가 4대 왕 광종으로 등극했다.

925년 태조 왕건의 3남으로 태어나

광종은 925년 태조 왕건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건의 세 번째 부인 신명순성왕후로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이다. 
부인은 이복여동생으로 대목왕후 황보씨인데, 외가는 황주의 호족이었다. 
둘째 부인 경화궁 부인 임씨는 2대 혜종의 딸이니 광종의 조카딸이다. 
광종은 이복 여동생과 조카딸을 맞이해 족내혼을 했다. 
두 부인들의 성이 왕씨가 아니고 
황보씨와 임씨인 것은 모친의 성씨를 따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성을 따르는 것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관습이었다. 
왕건의 배다른 아들과 딸들이 족내혼을 한 이유는
 왕실 재산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과 
외척의 세력화를 막고 
권력을 왕실에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광종은 담대하지만 사려 깊어 
의지를 숨기고 공신들에게 겸손했다.
 2000여 명 개국 공신들은 
강력한 권세를 갖고 조정을 장악했고 왕까지 위협했다. 
25세 청년 광종은 공신 세력의 무력화를 다짐했다. 
몰래 장기 전략 계획을 세운 그는 
7년 동안 조용히 당 태종의 '정관정요' 등을 공부하며 
공신들이 행세 못할 신패러다임의 국가 시스템을 구상했다. 
조정에서는 공신들 뜻에 잘 따르기 때문에 
공신들은 신패러다임 구축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다. 
광종은 등극 후 7년이 지난 956년 
드디어 공신들에게 신패러다임의 포를 쏘며 공격했다. 
과거 양민이었던 노비를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실시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노비는 사유재산·노동력·병력

노비는 귀족들 사유재산이며, 노동력과 동시에 병력이 되었다. 
이들이 사유화되는 바람에 국가 경제와 국방력에는 큰 걸림돌이었다. 
국가 통제력이 상실된 신라 말기와 고려 초에 
1개 연대 병력 규모인 3000여 명의 노비를 거느린 귀족도 있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 
왕권이 약한 틈을 타 
군대를 가진 호족 세력들은 
통일전쟁시 발생한 유랑민과 포로들을 노비로 만들었다. 
또 일부 양민도 붙잡아 불법으로 노비로 삼아 
경제력과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왕건도 공신들의 저항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고통 속에서 살았다. 

개인에 속한 노비는 
오직 주인만을 위해 일하고 세금도 내지 않기 때문에 
사노비가 많아지면 국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 장기 전략계획을 갖고 있는 청년 제왕 광종은 
공신들이 불법으로 노비를 계속 증가시키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956년 광종은 과거에 양민이었던 노비를 전격 해방시켰다. 
노비안검법이었다. 
군대를 보유한 공신들의 노비 해방은 
혁명 이상 가는 비상 사건이었다. 
광종은 일부이지만, 링컨보다 900년 앞서 
억울한 노예들을 해방한 신패러다임을 실현한 인물이다. 

광종의 부인이며 후원 세력이었던 대목왕후가 
친정의 몰락을 우려해 강력한 반대를 했으나 
광종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양민의 신분으로 억울하게 종살이 하던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어 
그들의 기쁨은 하늘을 찔렀다. 
반면 공신들은 노비의 수가 감소함에 따라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화되어 불만이 대단했다. 
그러나 광종은 비장한 각오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아 
노비안검법 시행은 성공했고 
더 이상 양민들을 노비로 만들 수 없는 신패러더임이 구축됐다.



일러스트=윤혜연
과거제, 1000년전엔 상상도 못할 일
광종은 이미 1000여 년 전에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한 관리 임용의 신패러다임을 구축했다. 
지금은 공무원 임용시험이 당연하지만 
1000여 년 전에는 공무원 임용시험인 과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광종의 과거 실시에는 국가의 새로운 인사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시에 
공신들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목적이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관리 임용은 조상의 후광으로 세습됐다. 
즉 혈통이 관리 임용 기준이어서 
훌륭한 인재가 발굴될 수 없었다. 
광종의 전격적인 과거 실시로 
고질적인 관리 임용의 세습 대신 
공정한 시험을 통하여 
유능한 인재가 임용되는 신패러다임 채용 시스템이 
역사상 처음으로 구축됐다,

노비안검법 시행 후 2년이 지난 958년 
광종은 중국 후주인 쌍기의 권고에 따라 
과거제도를 획기적으로 시작했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관리 인사에 관한 의견이 광종에게 수용됐다. 
과거 도입으로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양인들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공신의 아들도 과거에 합격 못하면 관리의 길이 막혔다. 
어제만 해도 부친, 조부의 권세와 명성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공부 못하면 실직자 신세가 되었다. 
그동안 무력으로 출세했던 무인들도 관로가 막혔다. 

과거 과목인 유교 학문을 공부한 양인 계급과 
지방 향리의 지식인들이 관리로 진출해 
신진 사대부 계급을 형성했다. 
자질이 부족한 공신 자제들은 관로가 막히자 
공신 세력이 약화되는 반면, 
관리임명권을 가진 왕의 인사권은 강화되었다. 
과거제도로 서희, 강감찬 등 인물이 배출되었고 
무과가 없어 
무신정변까지 문반 중심 사회가 되었다.

신패러다임 반대한 공신들 숙청

광종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란 신패러다임을 시행해 
기득권자들인 공신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화되자 
공신들은 왕에 대하여 반항하기 시작했다. 
광종은 개혁에 불만을 갖고 말썽을 부리거나 반항하면 
누구든 가차 없이 처단했다. 
왕족과 외척은 물론 
왕건의 최대 공신인 유금필의 외손자도 죽이는 등 강경했다. 
심지어 아들(5대 경종)도 의심하여 경계했다. 

관복을 제정, 관리들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중앙 집권제도를 확립했다, 
광종이 공신 숙청을 한 후 
살아남은 공신들이 2000여 명 중 40여 명이었다니 
그 숙청 규모는 역사상 최대 수준이었다. 

이때 만든 과거제도는 
고려를 거쳐 조선, 현재까지 
국가 공무원 임용시험과 
기업 공채시험 제도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WEEKLY BIZ] 경순왕·견훤 포용한 '환대 경영' 징기즈칸보다 350년 더 지속

[장대성의 제왕경제학] (4) 왕건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王建)은 글로벌 휴머니즘 정신을 소유한 제왕이었다. 부드러운 성품이면서 인내심도 강해 목표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무에 탁월하고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지만 겸손했다. 적을 죽이는 것보다 정성을 다해 환대(歡待)하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휴머니스트 기질이 다분했던 셈이다.

반면 칭기즈칸은 군사작전에 비범한 천재로 왕건보다 300년 뒤 몽골 대제국을 건설했다. 조직의 구성·관리에 천재적인 자질이 있었지만, 성품이 무자비해 이복형을 비롯해 자기를 도운 사람을 권력을 위해서 죽였다. 권력욕에 탐닉, 여러 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사람을 살육한 잔인한 정복자였다.

평민 호족의 아들

왕건은 통일신라 말기 877년 송악(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름은 용륭(龍隆)으로 용이 일어난다는 뜻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작제건(作帝建), 제왕을 일으켜 만든다는 뜻이다. 성(姓)이 없어 귀족층은 아니고 평민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감히 왕건의 이름을 왕이 된다는 뜻으로 지은 걸 보면 세력과 재력이 대단했던 호족임을 알 수 있다. 왕건의 왕도 처음에는 성이 아니었고 '왕건'이란 이름을 뜻했다. 왕건 조부와 부친은 고구려 유민 후손으로 개성에 와서 해상 무역을 하여 큰 재산을 번 재력가였다고 한다. 왕건 부친 용륭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혼탁한 신라 말기에 감히 아들을 후삼국을 통일할 제왕이 될 것이라고 이름을 왕건(王建)으로 짓고 최고의 문무 교육을 시켰다.

일러스트=조나연
휴머니즘으로 제왕 등극

왕건은 어려서부터 제왕의 자질 교육을 받았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도량이 넓어 어려서부터 아랫사람 실수나 잘못에도 관대했으며 심지어는 포로가 된 적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20세에 집안을 살리기 위해 신라 왕족 출신으로 후고구려를 893년에 세운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서 궁예에게 충성을 다하여 2인자 위치인 시중까지 올라갔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하며 민중을 구제한다고 일어섰지만, 장인 양길을 죽이고 부인과 아들도 죽일 정도로 포악했다.

궁예는 의심이 매우 많았다. 소위 '관심법(觀心法)'으로 다른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때로는 거짓말한다고 죽였다. 왕건도 관심법에 걸려 죽을 위기를 겪었으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포악한 궁예 밑에서 왕건은 묵묵히 참고 견뎠다. 22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의심과 변덕 덩어리인 궁예 마음을 달래면서 끝까지 신뢰를 잃지 않았다. 이런 휴머니즘과 인내력을 높이 평가한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고려 4대 개국공신) 등이 궁예를 죽이고 918년 왕건을 고려 초대 왕으로 추대했다.

망한 신라 경순왕을 환대

신라는 846년 해상 세력 장보고가 죽은 이후 지속적인 부패와 지방 호족 발호로 통제력을 상실했다. 900년 후백제, 918년 고려가 건국되면서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군사력이 강했던 후백제는 927년 신라 수도 경주를 공격하고 신라 55대 경애왕을 살해했다. 견훤은 김부를 신라 왕으로 세웠다. 56대 경순왕이다. 신라는 이미 국가로서 존립 자체가 어려웠다. 왕건이 신라를 공격하면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적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망해가는 신라를 공격하지 않고 대신 후백제를 적으로 돌렸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견훤에게 살해당하자 왕건은 신라를 도우러 출전했다가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 부대에 포위되어 죽을 위기에 빠졌다. 그때 충복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가짜 왕건이 되었고 왕건은 다른 옷을 입고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살아났다. 신숭겸은 장렬히 전사했다. 왕건은 위험을 안으면서까지 신라를 포용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후백제는 군사력은 강했지만, 역사가 없는 신생 국가였다. 반면 신라는 지는 국가였지만 1000년 역사를 가진 왕국이었고 후백제가 갖지 못한 찬란한 전통문화가 있었다. 강한 호족에 인구도 많았다.

신라인들은 자기들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한 견훤은 경계했지만 왕건에게는 마음을 열어줬다. 견훤에게 압박과 협박을 당하던 경순왕은 왕건의 환대에 감동하여 신라를 맡겼다. 935년 경순왕이 문무백관을 데리고 고려 수도 송경으로 향하자 왕건은 교외로 나아가 경순왕을 정중히 맞았다. 장녀 낙랑공주를 시집보내 경순왕을 사위로 삼았다. 또 경순왕을 위국 공신 낙랑왕으로 봉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제공했다.

경애왕 죽이고 왕비 범한 견훤도 우대

개성에 있는 왕건릉


왕건은 무예에 탁월했고 학식도 상당했다. 통일을 위해 세력 있는 호족들을 포용하는 결혼 정책으로 부인 29명을 맞이했으나 부인끼리 싸움을 하거나 크게 충돌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런 성품은 최대의 적이었던 후백제 견훤 왕까지 정성과 환대로 끌어안아 자기편으로 만든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견훤은 용맹이 뛰어난 무장 출신으로 카리스마가 대단했고 군사작전에 비범했다. 그러나 교만하고 잔인한 면도 있어 신라를 침략하여 55대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범했다. 신라 백성으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견훤을 멀리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견훤은 장자 신검보다 후처에게서 얻은 금강을 더 예뻐해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쫓아냈다. 견산사(전북 김제)에 유폐당했던 견훤은 탈출해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다. 얼마 전만 해도 원수였는데 이제는 두 날개 다 떨어진 독수리. 왕건은 견훤을 친아버지처럼 극진히 환대했다. 고려 백관들보다 높은 지위에 두고 금과 비단, 노비 40명 등을 예물로 줬다. 70세 노인 견훤은 이런 환대에 감동, 눈물을 흘렸다. 936년 견훤은 왕건이 신검 군대를 공격할 때 최선을 다해 도와 아들 신검이 항복하게 한 후 곧 죽었다. 신검의 항복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신검도 포용하여 벼슬까지 주었다.

환대 경영으로 평화 통일

왕건은 신라 경순왕을 겁박하는 대신 환대를 베풀어 고려에 투항하도록 했다. 장녀를 주어 사위로도 삼았다. 후백제 견훤은 장남에게 배신을 당해 분노에 차 있었는데 왕건의 환대를 받자 후백제의 모든 정보와 상황을 왕건이 최대한 활용하게 도왔다. 그 결과 왕건이 후백제 신검 군대를 쉽게 궤멸시켜 통일 사업 완수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후삼국 통일은 이런 식으로 완성됐다.

[장대성의 제왕경영학] <3> 발해 대조영

http://weekly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6/2018012601788.html


반신반의하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당·신라 군대 힘 못미치는
"동모산 가자" 자신감 불어넣어
천혜의 요새서 게릴라 작전 현대판 '블루오션 전략'
최소자원으로 최대효과 거두는 전투도 '린 경영' 닮아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최신 경영학 연구에선 '긍정심리자본(positive psychological capital)'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2000년대 초 미국 네브래스카대 경영학과 프레드 루산스(Luthans) 교수가 착안한 개념으로 

자신감(self-efficacy), 희망(hope), 낙관적 사고(optimism), 회복력(resiliency) 등 

네 가지 요인으로 이뤄진다. 

긍정심리자본으로 무장하면 

실패와 좌절, 역경을 딛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게 요지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긍정심리자본이 절정에 이르렀던 인물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 우리 역사상 가장 영토가 넓었던 발해를 창업한 대조영이다. 698년 발해를 창건한 그는 719년 사망할 때까지 발해의 기반을 구축했다. 발해는 동으로 연해주, 북은 송화강 유역과 하얼빈과 흑룡강 유역, 서는 요동반도, 남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에 이르는 영토를 소유,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①긍정심리자본

668년 나당 연합군에 고구려가 붕괴된 후 잠시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684년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투쟁을 이어갔고, 당의 식민통치기구 안동도호부를 요서로 몰아내어 당이 실제 통제할 수 있는 옛 고구려 지역은 절반도 미치지 못했다. 일부 고구려 유민은 동모산을 포함한 백두산 주변 넓은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당은 동북방 전진기지인 영주(현재 요령성 조양시)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을 강제 이주시켜 착취했다. 이들의 당에 대한 적개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영주에 끌려 와 있던 고구려 유민 장수 대조영 부자는 유민들이 지닌 당에 대한 적개심과, 당이 옛 고구려 지역을 통제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세력을 모았다.

반신반의하는 유민들에게 "당의 세력이 못 미치는 백두산 주변 동모산으로 간다면 고구려를 회복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희망과 낙관적 미래를 꿈꾸게 하는 과정이 반복되자 이들은 고구려 멸망이란 절망감을 회복하고 발해라는 새 좌표를 열 수 있었다.

②틈새 공격 경영

당의 만주 지배력은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과 670년 신라와 영토 전쟁으로 약해졌다. 이때 당의 식민통치 기구인 영주 도독 조문홰가 패악을 일삼자 거란 추장이 696년 반란을 일으켰다. 대조영 부자와 고구려 유민, 걸사비우의 말갈족도 합세했다.

당은 1년 만에 겨우 진압하긴 했으나 통제력은 약화됐다. 옛 고구려 영토였던 영주 동쪽과 남쪽에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대조영 부자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대조영 부자는 영주 동쪽 옛 고구려 영토를 빠르게 회복해 가며 군사력이 약해진 당의 안동도호부(현재 조양시 서남쪽 대릉하 하류)에 타격을 줬다. 대조영 부친 걸걸중상과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는 옛 고구려 영토 요동을 나누어 각각 국가를 세우고 왕이 됐다.

그러나 백두산 쪽에 건국했던 대조영 부친은 죽었고, 걸사비우는 당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지도자를 잃은 말갈족이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할 때 대조영이 이들을 받아줬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긍정심리자본, 틈새 경영, 블루오션 전략, 린(lean) 경영 등 경영 전략을 활용해가며 난관을 극복했다. 사진은 KBS드라마‘대조영’에 나오는 장면들. / 사진=KBS, 그래픽=김현국


③블루오션 전략

대조영은 원대한 비전을 가진 뛰어난 경영전략가였다. 패망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군사 교육과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음은 물론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 대조영은 이런 상황에서 당시 최강인 당의 군대와 결판을 내는 전쟁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당의 군대는 물론 삼국통일을 한 신라군도 오지 못할 지역으로 가야 새로운 국가를 수월하게 창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말하자면 강한 경쟁자들이 없는 블루오션 지역을 물색한 셈이다.

블루오션 전략은 2005년 김위찬·르네 모보르뉴 교수가 처음 창안했다. "경쟁자가 없는 시장을 창출하거나 찾아내 최후 승자가 되는 전략"이다.

대조영이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해 찾아낸 블루오션 지역은 고구려 유민들이 자치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백두산 북쪽 동모산이었다. 지금 중국 길림성 돈화 시에 있는 성산자산이다. 당의 지배 지역에서 멀고 서쪽은 장백산 밀림지대였다. 서북 방향은 거란과 돌궐이 장악하고 있어 성벽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긴 산맥이 있었다. 사방이 방패 지형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라 당은 물론 신라 영향력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④린(Lean) 경영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를 창건하러 동모산으로 출발하자 말갈족 지도자 걸사비우를 죽인 당 군대가 추격해왔다. 당의 군대는 10만명이 넘는 기병대와 보병부대의 대군이었다. 그러나 대조영 군대는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물론, 기병도 별로 없었고 군사훈련도 부족했다. 장비와 군량도 미흡했다. 이런 악조건에서 대조영은 게릴라식 작전을 고안했다.

첫째,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전투하기 위해 움직이기 어려운 천문령(현재 길림성 합달령) 깊은 산속 협곡으로 적 병력을 유인한다. 둘째, 적의 기병대와 보병부대를 분리해 전투력을 분산한다. 셋째, 분리된 적의 보병부대를 격멸한다. 넷째, 소수 날랜 전투병들을 곳곳에서 기습적으로 나타나게 해 수천명 군사처럼 보이게 하여 시선을 분산하는 위장술을 사용한다. 다섯째, 주력 부대는 미리 천문령 위에 가서 매복·대기하고 유인 부대가 적군을 천문령 깊은 협곡까지 쫓기면서 유인한 다음, 적군이 협곡을 빠져나올 때 매복 부대는 산 위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대조영은 이런 전술로 당의 보병부대를 궤멸했다. 그리고 게릴라 부대와 합세, 당의 기병대도 전멸시켰다. 당군 사령관 이해고는 극소수 생존 병사들과 함께 간신히 도주했다.

대조영이 쓴 전술은 린(Lean) 경영 개념에 가깝다. 린 경영은 1990년대 미 MIT대 경영대학원과 항공우주산업에서 도요타의 JIT(Just In Time·적시생산) 전략을 발전시킨 것으로 최소 자원으로 최대 가치를 산출하는 전사적 통합 개념이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는 궤적을 추적해 보면 이런 린 경영 전략이 곳곳에서 발현된다.

[장대성의 제왕 경영학](2) 김춘추의 '아부 경영' 唐 태종에 태평송 바친 신라… 굴욕 아닌 전략적 승부수


http://weekly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03/2017110301829.html


가야 왕족 출신 김유신과 전략적 제휴… 김춘추, 왕위계승 기반
유연한 아부 외교는 모든 환경에서 불리한 한국 정부·기업 경영에 반드시 필요한 능력

<figure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장대성 경영학 박사<figcaption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2px 0px 0px; font-size: 14px; font-family: 돋움, Dotum, Arial, Helvetica, sans-serif; line-height: 16px; color: rgb(136, 136, 136);">장대성 경영학 박사·전 강릉영동대 총장</figcaption></figure>
기업 경영에서는 고객을 왕으로 대접해야 한다고 한다. 그 뜻은 최고의 '아부'를 말한다. 국어사전은 아부를 '남의 비위(脾胃)를 맞추어 알랑거림'으로 정의한다. 아부로 비장과 위 운동이 잘 조화되면 소화가 잘되어 기분 좋아진다. 기분 좋아지면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과 쾌락 호르몬 도파민이 뇌에서 분비되어 행복과 기쁨을 느낀다. 고객은 이런 행복과 기쁨을 주는 아부를 좋아하고 새로운 아부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기업은 계속 승리한다.

무한 경쟁이 심화되는 21세기에는 강한 기업도 홀로 계속 승리할 수 없어 다른 기업들과 전략적으로 제휴한다. 약한 기업은 강한 기업과 더욱 더 전략적으로 제휴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강자를 기쁘게 해 주어 내 편으로 합류시킬 수 있는 아부가 필요하며, 이러한 아부는 굴욕이 아니고 승리를 위한 중요한 전략적 수단의 하나다.

김춘추, 김유신의 혼인 아부 받아들여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조부인 25대 진지왕이 황음무도해 왕위를 박탈당하고 집안이 성골에서 진골로 격하된 왕족이었다.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어도 김춘추는 원래 성골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성골 제28대 진덕여왕이 사망하면 왕위 계승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왕위 계승을 위해 취해야 할 전략을 현대 경영 전략 기법인 SWOT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27·28대 선덕·진덕여왕의 신뢰를 받고 있었으나(강점·Strength), 조정에 자기 세력이 드물었다(약점·Weakness). 26대 진평왕 후손 중 아들이 없었으며, 이어진 두 왕이 여자여서 그에게 유리했으나(기회·Opportunity), 백제·고구려가 김춘추에게 공격적이었다(위협·Threat).

분석 결과 가야 왕족 출신 무장 김유신과 전략적으로 제휴하는 길이 왕권을 계승할 수 있는 답이었다. 김유신은 무예가 출중한 맹장이나, 가야 왕족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신라에서 출세에 지장이 많았다. 진골로 격하된 김춘추와 김유신의 신분상 불리함이 두 사람을 친밀하게 했다. 김유신이 둘째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에게 주려는 아부를 하자 군사력이 필요했던 김춘추는 김유신의 아부를 받아들였다. 정치·외교 달인 김춘추에게 김유신의 군사력이 더해졌다. 선덕여왕을 여자라고 무시하면서 647년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춘추와 김유신이 함께 진압했다. 반란 진압의 공으로 진덕여왕 사후 김춘추는 신라의 왕이 되었다.

<figure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이미지 크게보기<figcaption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8px 0px 0px; font-size: 14px; font-family: 돋움, Dotum, Arial, Helvetica, sans-serif; line-height: 16px; color: rgb(136, 136, 136);">일러스트= 정다운</figcaption></figure>
당나라에 전략적 아부

642년(선덕여왕 11년) 신라의 대야성(경남 합천)이 백제군에게 함락당하고, 김춘추 사위인 성주(城主) 김품석 부부가 백제군에게 살해당했다. 원한을 품은 김춘추는 백제 공격을 위해 고구려와 군사 연합을 추진하러 사신으로 갔다. 그런데 고구려 영류왕이 김춘추를 가두고 살해하려 해 겨우 탈출해 돌아왔다. 김춘추는 당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작은 나라 신라와 세계 제일 강대국 당의 대등한 전략적 제휴는 사실 불가능했다. 김춘추는 작은 국가가 강대국의 힘을 이용하려면 아부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라 조정은 당의 제후국을 자처하며 자세를 최대한 낮췄다. 당의 연호를 사용하고 조공을 바침은 물론, 진덕여왕이 친히 당을 찬양하는 태평송을 비단에 수를 놓아 당 태종에게 바쳤다.

648년(진덕여왕 2년)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과 당에 가서 당 태종에게 극진히 아부했다. 당 태종이 기분이 좋아져,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다면 백제 전 국토와 고구려 평양 이남 땅을 신라에 주겠다고 약속하자 김춘추는 아들 문왕을 당에 남겨 두고 왔다. 이렇게 신라는 저자세 아부 외교로 당과 전략적으로 제휴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러던 중 654년 진덕여왕이 사망하여 김춘추는 51세에 왕이 됐다. 그는 660년 당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일을 아들 김법민(30대 문무왕)과 김유신에게 맡기고 661년 사망했다. 평생 한 번도 허리를 굽힌 적 없는 고고한 역사가 단재 신채호는 김춘추를 비굴한 사대주의자로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단결도 못 하면서 굽히지 않는 약소국에는 강대국의 무자비한 공격과 잔인한 지배만 있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왕이 된 뒤에는 부하 김유신에게 아부

신라가 당과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해도 기백이 빼어난 명장 김유신이 없었다면, 신라는 당의 군사 작전에 종속적 역할만 하는 부속 국가가 되어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춘추는 왕이 되자 자기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61세 노인 군벌 김유신에게 셋째 공주(지소 부인)를 주는 아부를 해 김유신의 매부 겸 장인이 되어 전략적 제휴를 더 공고히 했다. 노장 김유신은 충성심이 극에 달해 신라를 무시하는 당 최고 사령관 소정방과 정면으로 맞서 기를 꺾었다. 사기충천해진 신라군은 676년 세계 최강대국 당의 세력을 대동강 이북으로 밀어냈다.

김춘추의 유연한 아부 외교와 전략적 제휴 능력은 국토가 나뉘어 있고 자원이 빈약해 거의 모든 환경에서 불리한 한국의 외교와 기업 경영에도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기업 경영에서도 경쟁에 불리한 기업들이 서로 연합하여 자원과 역량을 장기적으로 공유하면서 괄목할 만한 경영 성과를 달성한 예가 적지 않다. 유럽에서만 주로 영업해 세계시장 진출을 못 하던 프랑스 자동차 회사 르노와 만성 적자였던 일본의 닛산 자동차가 1993년 3월 전략적 제휴를 맺었고, 2010년에는 주식 교환으로 제휴를 더 강화했다.

두 회사는 각 회사의 고유한 정체성과 독립성을 인정하면서 개발 모형, 생산 시설은 물론, 부품 개발과 선적 일정 등을 공유해 생산성을 올리고, 유통 비용도 최소화해 두 기업 모두 경쟁력을 높였다. 특히 닛산은 1999년 60억달러 적자, 2000년 56억달러 적자가 났는데, 2001년에는 영업이익률 11.3%에 30억달러 이상 흑자를 냈다. 르노 닛산 얼라이언스는 전략적 제휴를 통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해 왔다. 2015년 매출 대수 850만대였으나, 2017년 매출 대수는 1000만대를 넘게 예상되어 세계 제1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엔 미쓰비시 자동차를 합류시켜 2022년 1400만대 판매 목표를 세웠다.

<figure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이미지 크게보기</figure>

포항제철 만들어낸 박태준의 아부

약자가 강자에게 아부로 도움을 받아 성공한 사례는 포스코 설립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은 196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 70달러 정도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종합 제철 회사 건립은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종합 제철 회사 없이 경제 개발은 있을 수 없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 종합 제철 설립을 구상하고 군 시절 충성스러웠던 부하 박태준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건립 자금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 등 5국으로 구성된 KISA(대한국제철차관단)가 발족했지만, 결국 한국에서 종합 제철 회사 건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차관 지원을 거절당했다. 한국 정부 내부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박태준은 농수산업 발전에 사용할 수 있는 대일 청구권 자금 일부를 전환하여 종합 제철 회사 건립 자금으로 확보하기 위해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 등을 만났다.

박태준은 이나야마 회장이 좋아하는 일본 노래들을 미리 파악한 후 공부와 연습을 하고 일본에 가서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등 온갖 정성과 아부를 다하여 이나야마 회장의 전폭적 지지를 확보하고 기술 지원 각서를 받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 지원 각서로 청구권 자금 전환에 성공해 자금과 기술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1970년 한국에서 불가능하다는 연 103만t 생산 능력의 종합 제철 회사가 포항에서 어렵게 출발했다. 현대 경영학의 원천은 미국 군대인데, 박태준은 장교 시절 미국 보병학교와 행정학교에 두 번 유학해 경영학을 배워 당시 한국 대학의 엘리트 경영학 교수와 거의 다름없었다. 전투 등 군대 생활 경험과 경영학 실력 그리고 진실한 아부 능력까지 갖춘 그는 불굴의 투지와 도전으로 포항제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세계 최고 종합 제철 회사로 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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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글을 이렇게 쓰시나? 이게 사대주의 정신에 충실한 글이다. 우리 지식인의 사고가 이 정도다.

제왕 경영학<1> 기획·생산·마케팅 한꺼번에…'CEO 광개토대왕'에게 배워라

http://weekly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8/2017081801632.html

현대 기업들이 1980년대에야 도입한 동시 병렬 업무 1600년前 전투에서 써
여러 기능의 부대가 동시에 공격하고 방어 거대 적군 다 무찔러

<figure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figcaption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2px 0px 0px; font-size: 11px; font-family: 돋움, Dotum, Arial, Helvetica, sans-serif; line-height: 16px; color: rgb(136, 136, 136);">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경영학 박사</figcaption></figure>
경영학자로서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은 인간의 창의적 행동 능력은 수없이 다양한 경험이 누적되어야 형성될 수 있다고 했다. 광개토대왕에게 들어맞는 표현이다. 광개토대왕은 태자가 된 12세 때부터 백제 및 중국 후연과 벌인 전투에 몸소 여러 번 참가해 뛰어난 용병술과 전투 지휘 능력을 보이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소년 시절부터 영웅적 전쟁 수행 능력으로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실전 경험과 위기 대처 능력이 전혀 없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도망만 다니던 초라한 선조, 인조와는 완전히 달랐다. 왕이 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번영을 위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나라들을 평정하여 영토를 넓히고 정복지 백성을 포용하면서 불모지를 개간하여 농토로 바꾸고 경제를 진흥해 백성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게 했다. CEO 광개토대왕의 성공 전략은 무엇일까.

1.핵심 무기: 철갑 기병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 승리는 핵심 전략 무기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현대전에서 대표적 핵심 전략 무기는 핵무기이다. 광개토대왕의 핵심 전략 무기는 말과 철갑 무장이었다. 광개토대왕의 모든 장병은 철을 물고기 비늘같이 얇고 작게 만들어 단 철갑옷으로 무장했다. 현대의 방탄복이다. 비늘 철갑옷은 강도가 높고 유연성이 있어 화살이 뚫기 어렵고 가볍기 때문에 행동하기 자유로워 방어는 물론 공격에 탁월했다. 당시 세계 어디에도 그런 철갑 무장은 없었다. 약 500년 후 중세 유럽 기사들은 무거운 철갑을 통째로 착용하여 매우 둔해 광개토대왕의 철갑 기병보다 전투력이 약했다. 광개토대왕의 기병들은 말 위에서 고삐를 잡지 않고 두 손으로 활과 창을 잡고 앞뒤로 공격해 적병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말도 같은 철갑옷으로 무장시켜 철갑 기병이라 했다.

<figure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광개토대왕</figure>
핵심 전략 무기가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는 능력은 국가 통치자나 기업 경영자에게 사활이 달린 핵심 능력이다. 1769년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영국 면직물 산업의 새로운 핵심 전략 무기가 되어 세계 최대인 인도 면직물 산업을 붕괴시키고 1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1995년 아마존을 창업한 제프 베조스는 종류는 많지만 배달이 쉬운 책을 핵심 전략 무기인 인터넷을 이용해 팔기 시작했다. 아마존은 이제 거의 모든 상품과 콘텐츠를 유통하며, 막대한 인터넷 경제 영토를 확보했다. 1974년 반도체 제조 기술이 모든 산업의 미래 핵심 전략 무기라는 것을 통찰하고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은 반도체 제조에 무모하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도전 14년 후 삼성 반도체는 흑자 경영에 성공했고,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1위를 점하고 있다.

2. 핵심 전법: 동시 병렬 전법

광개토대왕은 기병을 철갑 기병과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으로 나누고 보병은 환도수(칼 쓰는 부대), 창수(창 부대), 부월수(도끼 부대)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활 쏘는 궁수를 따로 편성하였다. 즉 현대 군대 편제와 같이 여러 전문 기능의 병과(兵科) 부대로 나누어 운용했다. 적의 공격 형태에 따라 여러 기능의 부대가 각각 다르게 작전하면서도 모든 부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동시에 전투에 참여하는 동시 병렬 작전을 구사했다. 광개토대왕은 환도수, 창수들이 방패를 들고 선두에 서게 하고 창수들 사이사이에 부월수를 배치했다. 같은 선상에 궁수를, 뒤에는 경기병과 철갑 기병을 배치했다.

<figure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광개토대왕</figure>
전투가 시작되면 뒤에 있던 기동력이 빠른 경기병들이 앞으로 나아가 선제공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면 곧 보병인 창수와 환도수도 동시에 나아가 적을 집중 공격했다. 이때 부월수도 함께 보병을 지원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궁수는 적 후방에 활을 쏘아 무력화하는데 적들도 화살로 맞서면 철갑 기병이 나아가 적의 화살 공격을 막아내어 궁수와 보병이 계속 전투를 하도록 엄호해 주었다. 광개토대왕 군대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백제의 관미성을 육군과 해군의 동시 병렬로 20일간 공격해 함락했다.

현대 기업들은 1980년대에야 제품 구상 단계부터 설계, 생산, 마케팅을 동시에 진행하는 동시 병렬(concurrent engineering) 개념을 개발했다. 애덤 스미스의 분업 이론에 따라 발달된 직렬 업무 처리의 문제점을 인식한 것이다. 크라이슬러 자동차는 부품 공급업자도 참여시킨 동시 병렬 방법으로 신차를 개발해 31개월 만에 1만달러 이하의 자동차 네온(Neon)을 개발, 1993년에 출시했다. 당시 자동차 업계의 신기록이었다. 1990년에 와서야 인터넷 기술 등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해 직렬 업무 처리를 동시 병렬 업무 처리로 전환하면서 조직의 모든 불필요한 낭비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혁신적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 개념이 개발됐고, 지금도 많은 기업이 활용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1600년 전에 동시 병렬 개념으로 전투 시스템을 갖춰 소수 정예 병력으로 세계 최고 전투력의 중국과 북아시아 유목민 기마 부대들을 격파했다.

3. 핵심 가치: 정복이 아닌 동반 성장

조직 경영의 궁극적 목적은 조직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것이다. 경영자 사망 후에도 조직이 오래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 사망하는 경영자가 가장 위대한 경영자다. 412년 39세에 사망한 광개토대왕은 백성이 부유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강력하고 안정된 대제국을 건설해 아들 장수왕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고구려는 256년 동안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편안하게 살게 되었고,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하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고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의 정벌 사업은 백성들의 평안과 부유한 생업을 위해 백성을 괴롭히는 인접 국가들을 제압하기 위함이었지, 정복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광개토대왕은 적군 포로도 포용했다. 정복지 백성도 자유롭게 개간하도록 해 농업을 왕성하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경제 부흥이 일어나 정복지 백성들의 삶의 질도 향상되는 동반 성장의 영토 M&A(인수 합병)를 성공시켰다. 이러한 M&A는 현대 기업 경영에도 매우 중요하다.

<figure style="box-sizing: inherit; 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광개토대왕 군대 시스템과 현대 기업 운영 시스템</figure>

180곳이 넘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구글은 2005년 5000만달러로 안드로이드라는 작은 소프트웨어 기업을 M&A했다. 그 뒤 휴대전화용 개방형 운영 시스템 안드로이드 플랫폼을 개발, 2007년 11월 공개했다. 그 후 구글은 안드로이드로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운영 시스템을 장악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PC 운영 시스템 윈도를 누르고 있다. 현재 운영 시스템 시장점유율 약 40%로 1위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식의 동반 성장 M&A의 대표적 사례이다.

기업들이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성공하려면 신속한 신기술 개발이 필수이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원하는 모든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요한 신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제값을 주고 M&A하여 빨리 기술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동반 성장 M&A가 아니면 핵심 인력은 떠난다.

독자 브랜드로 독립 경영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황제 이외에는 독자 연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연호는 황제의 통치 시기를 나타내 황제의 통치 철학을 의미한다. 광개토대왕은 우리 조상의 국가에서 처음으로 독자 연호 영락(永樂)을 사용하였다. 영락은 백성들과 영원한 영화를 누리는 고구려라는 광개토대왕의 통치 철학을 반영한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18년에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은 지 4년 후 사망했다. 왕위를 계승한 장수왕은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사후 256년간 세계 최강 대국 중국의 30만 대군을 여러 번 격파하며 자웅을 겨루었던 초강국이었다. 정복 제왕으로 알려졌던 광개토대왕은 21세기 기업 경영 관점에서도 위대한 경영자였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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