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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①-⑪

영국신사77 2018. 8. 1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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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와 현대차를 능가하는 이순신 장군의 융복합 경영

 
입력 : 2013.11.17 21:22

 

현대 경영학의 모태는 군대경영

부유층 아들들에게 자칫 병역기피대상이 되는 군대는 국가 보위에 가장 중요하며 경영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경영전략, 인사 조직관리, 생산운영관리, 품질관리 등 현대경영학의 대부분이 미국 군대에서 유래된 만큼 전투를 수행하는 장군들의 군대경영을 기업경영의 관점에서 고찰할 가치는 너무 높다.

한국이 절대빈곤에서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대부분 한국 남성들이 군대생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조일전쟁(임진왜란:1592-1598)동안 갖은 역경 속에서 다 무너져 가는 나라를 구한 세계 최고의 명장 이순신 장군의 함대경영을 현대 기업경영의 관점에서 고찰하여 한국의 모든 조직들이 적용하게 하자. 그러면 한국 경제는 다시 한 번 더 도약하여 세계 최고의 강국이 될 것이다.
울돌목에서 열린 명량대첩 재현행사 장면./조선일보DB
울돌목에서 열린 명량대첩 재현행사 장면./조선일보DB
영국과 일본이 자랑하는 넬슨 제독과 도고 제독은 강력한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아 영웅이 되어 전투에 임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 조선의 국방력은 완전히 무너졌고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왕까지도 장군을 의심 및 음해하였다. 본인의 만성적 지병(위장병 등)이 심하여 도저히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역경 속에서 중앙정부의 보급 없는 알거지 군대를 지휘하여 수배 내지 열배 이상의 강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 해군을 대파해 23전 전승을 하였다. 이 기적적인 전과는 장군이 예측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융복합 창조의 개념은 물론, 도요타 자동차 생산시스템과 미국 항공우주산업이 개발한 Lean(조직의 불필요한 모든 자원을 없애 자원을 최소화)개념을 이미 400 여 년 전에 활용하여 함대를 지휘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장군은 군사전략에 앞서 경영의 천재였던 것이다.

경영의 천재 이순신

뛰어난 예측과 통찰력을 소유한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때(1591년 2월)는 조일전쟁 발발 14개월 전이었다. 당시 조정은 1950년 6월 한국전쟁 때와 같이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하여 당리 당론에 따라 찬반양론으로 나뉘어져 언쟁만을 하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애써 생각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전라좌수사 부임 즉시 1년 후에는 반드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해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곧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당시는 조선 개국 후 200 년이 지난 때이다. 그 동안 조선은 명나라와의 화평만 중시하고 큰 전쟁 한번 치루지 않아 전쟁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태평하여 전쟁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아 군대조직은 정말 소위 개판이고 엉망이었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 상륙 후 당일 부산성을, 이틀 후에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후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 장군 부대를 괴멸시켰다. 그런 후 승승장구 20일 만에 도성 한양을 점령하였다.

유비무환 정신으로 무장한 이순신 장군만이 전쟁이 날것을 확실히 예측하여 휘하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기와 군량을 장부의 수대로 확보하고 혹독한 전투훈련과 교육에 들어갔다. 때가 농번기임에도 주민들까지 동원하여 새 함선의 건조는 물론, 기존 함선들의 정비와 수리도 시작하였다. 태평시대에 전쟁 준비한다고 주민들의 원성도 높았다. 그러나 장군은 본인의 예측과 통찰에 대하여 굳은 확신을 갖고, 그 누가 무어라 해도 전쟁준비를 하였다. 장군은 미래에 대한 예측과 통찰력을 기초로 적군의 함선들과 장비, 위치, 기후와 날씨, 지형지물과 해류의 속도와 방향 등에 관한 데이터와 정보를 사전에 면밀히 수집하여 최대한 활용하였다.

특히 장군은 융복합의 개념으로 세계 최초 철갑선인 거북선을 창조하고 함대 선두에 앞세워 아군보다 월등하게 우세한 일본 수군을 대파하였다. 당시는 배를 건조하는 데에는 물에 뜨는 나무로만 재료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고정 관념 밖에 없었다. 장군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함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뚜껑으로 함선을 덮어 지붕을 만들고 재료는 일본 수군의 총탄이 뚫지 못하게 철판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아이디어를 창출한 것이다. 그리고 철판 지붕위에는 적군이 접근을 못하게 송곳 쇠못을 박았다. 이것은 요즘 신형 최첨단 전투기에 적 레이더 탐지 은폐보호 기능인 스텔스 기능을 장착한 것과 같은 개념이다. 장군은 나무로만 배를 건조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거북선 건조에 두 개의 주재료 즉 나무와 철을 융합하여 활용한 것이다.
도요타와 현대차를 능가하는 이순신 장군의 융복합 경영
거북선은 융복합 창조경영의 산물

거북선은 명칭과 다르게 뱃머리는 용머리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 뱃머리를 거북이 머리 형상으로 하였다면 적군들이 얕잡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지배와 권위의 상징인 용의 머리를 뱃머리로 하였다. 그리고 거북선의 지붕을 철판으로 만들어 거북이 등의 견고함을 상징한 것이다. 용의 권위와 위엄의 상징과 거북이 등의 견고함의 상징을 융합하였다. 용의 입으로부터 화염과 포탄이 나오면 적군들은 혼비백산하고 공포를 느껴 전의를 상실하여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조일전쟁 동안 전란으로 대부분의 농토가 파괴되고 생산 활동은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여 중앙정부로부터 보급이란 전혀 없었고 보급해줄 의사도 없었다. 이에 장군은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전과를 달성하기 위해 도요타 자동차 생산시스템과 미국 항공 산업이 개발한 Lean 조직 개념을 창조하여 활용한 것이다, 이는 실로 400여 년이나 앞서 현대경영의 개념을 창조하여 활용한 것이다. 장군이 창조하여 활용한 Lean 조직의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집무실도 공개한 투명경영

1) 기존 부대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전투 부대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미국 항공우주산업단이 개발한 신가치 창출흐름도 개념을 개발하였다. 일반 함선과 창, 칼로 싸우는 기존체제로는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군대의 지상최고의 가치)를 창출할 수 없음을 예견하고 승리를 위한 새로운 부대편제(보급, 훈련, 경계, 전투 등을 연결시키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열세의 전력으로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 수군을 격파하기 위하여 거북선이라는 사상 최초의 철갑선을 융합 창조하여 선단 앞에 배치하고 각 함선마다 포격전을 위한 대포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최대의 속도로 직진하던 조선 함선들이 재빠른 속도로 회전하여 일직선 대열로 추격해 오던 적 선단을 즉시 포위하여 신속하게 포격하도록 학익진 전법을 새롭게 개발하였다.

2) 사전 예방 관리를 강조하는 현대 경영 개념인 Total Preventive Maintenance(총체적 예방관리)를 적극 활용하였다. 군적에 있는 병사의 수와 실제 병사의 수를 점검하여 뇌물 또는 권력의 청탁에 의하여 군대생활을 하지 않는 자들을 다 잡아들여 군대 병력을 정상화시켰다. 함선과 병기 등 자원을 철저히 검열 조사하여 분실 및 파손된 것을 다 찾아내고 정비 및 보수하여, 모든 병기들과 함선들을 언제 전투해도 좋을 상태로 항상 유지하고 부상 입은 병사들의 진료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전투력 향상이라는 목표를 위해 원칙을 지키되, 부하를 대하는데 소통과 공감을 바탕으로 하였다.

3) 부대를 Visible Design으로 조직하였는데 본인의 집무실은 물론 훈련장, 작업장, 병기창고 등을 조직원들에게 항상 개방하여 조직 구성원들 모두가 다 볼 수 있게 하여 횡령이나 파손, 방치 등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충무공 탄생지인 서울 중구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열린충무공 다례행제 장면.
충무공 탄생지인 서울 중구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열린충무공 다례행제 장면.
민-군 협업체제 구축

4) 대민관계를 착복관계에서 협동관계로 전환하였다. 농민들과 함께 둔전을 가꾸어 농민들은 생산된 농산물들과 특산물을 군대에 공급하여 신뢰의 공급관계를 구축해 중앙 보급 없이 전투를 할 수 있었다.

5) 최소의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부대편제를 포병 중심의 편제로 새로 구축하고 모든 병사들과 장교들은 활과 칼, 창뿐만 아니라 대포도 잘 다룰 수 있도록 다기능의 교육과 훈련을 강도 높게 하였다. 현대자동차도 적용하기 어려워하는 전환배치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6)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가 경쟁력확보를 위하여 생산 활동에서 주요핵심으로 여긴 준비시간의 단축 개념을 이미 창출 활용하였다. 대포의 포격 간격시간을 줄이고 신속하게 포격하기 위하여 포탄 발사 전에 대포의 이동과 조준 그리고 화약의 투입시간(준비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훈련과 교육을 독할 정도로 강하게 시켰다. 또한 학익진 전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밑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이 직진에서 회전으로 최대한 빠르게 방향 전환하게 위하여 강도 높은 훈련과 교육을 하였다. 직진 속도를 강조하는 유선형의 일본 함대는 직진에서 회전으로의 방향전환 시간(준비시간)이 길어 회전을 잘하는 판옥선을 주력으로 하는 이순신 장군 함대의 순식간 방향 전환(준비시간 단축)에 포위되어 포격을 받아 한산대첩 등에서 대패하였다. 현대경영의 축이 양에서 질로, 질에서 유연성으로 변화하는데 유연성을 이미 함대운영에 적용하였다. 함선의 수(양)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투력과 전략(소프트웨어, 질)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 함대운영의 유연성의 중요함을 전투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융복합과 유연성을 높여 생산력 향상 시켜야

장군은 위에 언급한 현대경영의 여러 첨단개념들을 융복합적으로 창조하여 현대기업과 군대도 구축하기 어려운 Lean 함대 경영시스템(아래 그림)을 창출하였다. 이 경영시스템으로 최소자원을 사용해 세계 역사상 최강의 해군을 구축하여 장군이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 조선을 백척간두와 풍전등화의 위험에서 구하였다.

지금 세계경제는 도처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극복을 위해 일본은 엔저 정책을 사용하고 미국과 유럽은 경기부양책을 활용하고 있다. 한국도 그래야 할까? 아니다. 다른 나라와 같이 금융정책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금융정책도 중요하지만 본질은 본원적 경쟁력 확보에 있다. 이순신 장군같이 끊임없는 융복합과 유연성의 창조! 한국인에게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흐른다. 모든 나라들이 금융정책으로 위기를 벗어나려하지만 한국은 장군의 창조경영철학을 배워 활용한다면 작은 나라지만 세계 최강의 경제국가로 우뚝 설 것이다. 이것이 지극히 가능한 일임을 장군은 이미 400 여 년 전에 증명했다.

도요타와 현대차를 능가하는 이순신 장군의 융복합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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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창조경영 CEO인 7가지 이유

 
입력 : 2013.11.30 05:44

 

우리 반만 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의사결정을 한 왕은 조선 3대 태종이다. 장자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3자 충녕대군(세종)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여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이 되게 한 것이다. 세종은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을 훨씬 뛰어넘는 불세출의 발명왕이며 인문학자, 언어학자, 음악가, 복지가이며 벤처창업 경영자이다. 세종의 벤처창업 정신은 논리와 합리도 중요시 하지만 백성과 고통을 공감하는 것을 우선하는 감성적 복지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감성이란 논리와 반대 개념으로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나 기쁨 등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같이 공감해 주는 것을 뜻한다. 세종은 대단한 독서광이었고 유학서적보다 역사책들을 더 좋아 했는데 이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덜어주기 위한 역사적 고찰과 고증을 위한 것이었다. 세종은 지배와 통치의 논리를 뛰어 넘어 글 모르는 백성들이 무식하여 답답한 것은 물론, 수없이 억울함을 당하는 뼈아픈 고통을 가슴 아프게 공감하였다. 이에 어머니의 감성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각종 과학기술들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감성적 벤처경영자인 7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앞을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앞을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①도전적 교육복지 창조 정신

훈민정음은 말 그대로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문에 세종은 백성을 위한다는 신념과 우리말과 일치하는 쉬운 소리글자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언문일치의 가치관을 갖고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창조한다고 하였다. 이에는 세종의 위대한 창조정신과 벤처정신 그리고 홍익인간의 정신이 담긴 감성을 기초로 한 지식경영의 의지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 목적도 백성들을 위한 복지에 있다. 당시는 한자만이 가장 위대한 문자로 인식되었던 시대이다. 이때 피지배자인 무식한 백성들의 학습과 편의를 위하여 배우기 쉬운 소리글자 한글을 창조하였다는 것은 인간존중의 위대한 창조적 교육 복지정신이고 중국 문화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②고객 지향의 User Friendly한 한글 창제

세종은 지배계급이 아닌 피지배 계급인 불쌍한 백성들을 위하여 문자를 만든 세계역사의 유일한 제왕이다. 한글 창제는 자칫하면 귀족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보복을 받아 왕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힘없는 무식한 백성들을 위해서 당뇨, 고혈압, 안질, 창병(악성종기) 등 거의 30 가지에 달하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초인적인 정신으로 한글을 창제하였다.

이렇게 세종은 자신의 목숨과 왕의 자리를 담보로 하여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이미 550 여 년 전에 현대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들이 가장 중시하는 사용자 편리(user friendly)개념으로 한글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실용적인 무형적 지식자산이다.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현대 첨단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들이 인류에게 편리성을 제공하고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 한글만큼 편리와 실용성 그리고 독창적인 지식을 산출할 수 있는 도구는 되지 못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
③백성들의 암묵적 지식을 형식 지식으로 전환

훈민정음 서문에 백성들이 제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에 대한 세종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정상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모두 내면적으로 즉 암묵적으로 갖고 있는 지식과 사상, 철학, 감정, 창조적 아이디어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문자)가 없으면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형식지식(책이나 서류 등)으로 바꾸지 못한다. 이에 세종은 조선 백성 모두 각자 내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암묵적 지식을 형식지식으로 바꿀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한글을 창제하였던 것이다. 만약 한글 창제 후 온 나라가 계속하여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면 조선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은 세계 최초의 민주국가(영국 같은 입헌군주국)가 되었음은 물론 가장 찬란한 문명 문화의 일등 선진국이 되었고 한일합병 같은 치욕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④출산 휴가와 세법에 대한 전국적 여론조사

세종은 광화문 밖 광장에서 관이 끓여 주는 죽을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받아먹는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하도 슬퍼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곤궁하고 처절한 삶을 직접 체험하고 느끼기 위하여 경복궁 안에 버려진 헌 나무토막들을 주어 초가삼간을 짓게 하고 그 안에서 집무를 보았다. 세종은 관청의 여노비들의 출산 시 산후 100일의 휴가를 주었고 후에는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었다. 이는 현대판 출산 휴가의 효시이다. 세종은 농민들이 내는 세금에 관리의 농간으로 인한 농민들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세법을 바꾸는데 관리와 농민들에게 함께 설문조사하는 역사상 최초의 전국적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선은 태조 때부터 중국에서 처녀공출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받는 처녀들과 부모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외교교섭을 하여 처녀 공출을 산삼 공출로 대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세종은 어머니의 감성과 사랑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하나라도 덜어 주려고 불철주야 노력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 이렇게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베푼 제왕이 있었겠는가?

⑤노예 출신을 신과학기술 발명가로 발굴

세종이 발굴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신지식인 창조인은 동래 관아의 노예 출신 장영실이었다. 재주는 비상하지만 노예 신분인 장영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세종은 깊이 느끼고 있었다. 대신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노예 신분에서 풀어 주었고 그가 해시계, 물시계를 만든 뒤 종3품 대호군까지 신분 상승을 시켰다. 윤득홍이란 천인출신도 왜구와의 전투에서 공이 크고 능력이 있어 정2품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세종의 이렇게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인사관리 패러다임 때문에 장영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기술자가 될 수 있었고 조선의 과학혁명을 주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장영실이 창조한 해시계는 백성들을 위하여 백성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현재 조선일보사 건너편인 청계천 입구와 종로에 설치하였다.

⑥국방력의 강화로 백성 복지 기반 구축

세종은 국방력이 약하면 국가와 국민의 안녕이 보장될 수 없다는 생각에 군사력도 막강한 국가를 원했다. 세종은 태종 때부터 개발한 강력한 화약과 철제화포들을 새로 더 많이 제작하였고 1444년에는 화포주조소를 만들어 계속 화포들을 개량하였다. 특히 1443년에는 사정거리 1500 미터의 대포도 개발하였다. 그리고 당시 인구가 600 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군사의 수는 약 30 만 명의 대병력이었다. 세종 초 대마도 정벌 후에는 고려시대 윤관이 개척한 만주의 공험진(두만강변 경흥에서 북쪽 700리)까지 영토 확장을 기했다. 김종서와 최윤덕을 시켜 두만강 변 6진과 압록강 변 4군을 개척하고 야인들을 몰아내어 그 지역의 민생을 안정시켰다. 즉 강한 국방력이 없으면 국가의 존재는 물론이고 민생의 안정과 복지도 없다는 세종의 강한 의지를 지금의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⑦농업과 의학의 발달

조선은 농업이 산업의 근본인 농업국가다. 그러므로 농사가 잘 되어야 경제가 잘 돌아가고 민생의 복지도 향상된다. 세종은 우리나라 농업책인 본국경험방 등의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을 전파했다. 그리고 정초의 농사직설을 편찬·반포하여 조선시대 농업기술 발달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또한 당시는 질병이 발생하면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세종은 의약발명에도 관심을 기울려 향약채집월령,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각종 의약서적을 편찬하였다. 특히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는 15세기까지의 조선과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동양 과학사에서 빛나는 업적의 하나가 되고 백성들 의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013년 7월 31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하는‘2013 재외한글학교교사 초청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이 한글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2013년 7월 31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하는‘2013 재외한글학교교사 초청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이 한글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미국·유럽의 경영모델 보다는 세종 모델 본받아야

세종은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각종 질병의 고통 속에서 최선을 다 했다. 세종의 국가경영이 주는 시사점은 국민의 안녕과 복지는 기득권자들이 국민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공감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고 독창적 문화와 과학기술을 창조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일 민족의 한국에서 동반성장과 경제민주화가 왜 그렇게도 어려운 과제일까? 200 여년 짧은 역사의 다민족 이민 국가인 미국식의 합리적 논리적 자본주의 경영에만 의존하지 말자. 또 무턱대고 복지만 해주는 남부 유럽도 본받지 말자. 정부 측이든 민간 측이든 한국의 CEO 들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하는 세종의 감성적 창조경영을 한다면 어떠한 위기도 극복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한 복지국가가 될 것이다. 한국의 기적적 경제발전은 미국 자본주의 경영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겠지만 한국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경영이 함께 하여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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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영가 왕건이 정복자 징기스칸을 이긴다

 
입력 : 2013.12.13 13:31

 

한국 역사의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 중 중세 암흑시대에 휴매니즘의 글로벌 개방 정신을 갖고 있던 장군 출신의 창업제왕 고려 태조 왕건이 있었다. 그는 관용과 포용의 글로벌 개방정신으로 국가를 창업하고 경영하였다. 한편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정복자인 징기스 칸은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대륙정벌에만 눈이 어두워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면서 지배하였다. 왕건, 징기스 칸 중 누가 더 위대한 리더이고 우리는 누구를 배워야 할까? 왕건이야 말로 지금 우리 한국이 새로운 도약을 위해 배워야 할 위대한 리더이다.

1. 왕건은 姓이 없는 평민 출신으로 후삼국 통일

왕건(王建)은 통일 신라 말기 877년 송악(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용건(龍建)으로 용을 만든다는 뜻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작제건(作帝建)으로 제왕을 일으켜 만든다는 뜻이다. 이들의 이름은 성(姓)이 없어 귀족층이 아니고 평민층인데 규모가 큰 해상 무역상이고 재력가였다. 즉 이들 가족은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호족으로서 혼탁한 통일신라 말기에 감히 후삼국을 통일할 왕이 되는 큰 꿈을 꾸고 이름 그대로 왕건을 제왕으로 만들기 위해 최고의 문무 교육을 시켰다. 후에 왕건은 918년 왕이 되고 936년 후삼국을 완전 통일했다.
글로벌 경영가 왕건이 정복자 징기스칸을 이긴다
2. 부족장 첩의 아들인 징기스 칸 이복형과 은인도 죽여

징기스 칸의 원래 이름은 테무진으로 부족장 첩의 아들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다른 부족에게 살해를 당한 후 매우 혹독한 환경에서 상장하였다. 소년 테무진은 아버지의 부족장 계승을 위해 이복형을 죽이고 쟈무카라는 다른 부족의 소년과 의형제를 맺었다. 1204년 그는 자기를 칸으로 추대했던 옹 칸과 의형제 쟈무카까지 잔인하게 죽인 후 몽골 초원을 장악했다.
글로벌 경영가 왕건이 정복자 징기스칸을 이긴다
3. 왕건은 해전의 명수, 징기스 칸은 기습과 공급관리의 천재

해상세력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바다에 밝던 왕건은 궁예의 심복 부하가 되어 해군을 지휘하여 서해로 이동해 후백제 견훤의 주력부대가 진치고 있는 나주로 상륙하여 후백제군의 뒤를 치고 점령해 궁예왕의 신임을 완전히 얻었다. 그 후 수많은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다가 궁예왕이 죽은 다음에 918년 왕이 되었고 해상세력을 구축했다. 바다의 중요성을 강조한 왕건의 전함의 길이는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의 산타마라아호 보다 약 4 m 가 더 길어 31 m가 넘었고 아주 빼어난 조선술로 제작되었다.

징기스 칸은 말, 양, 소 등 가축이 많은 몽골 초원에서 성장한 장수였다. 기병대가 그의 주력 부대이고 육전에는 최강이나 바다에 어두워 해상 진출의 중요성을 몰랐다. 징기스 칸의 몽골군은 약 11 만 명의 기병부대로 유럽 군대를 초스피드로 공격하여 격파한 병력의 수가 약 1000만 명으로 유럽대륙을 마치 파밭을 밟아 작살내듯이 누비고 다녔다. 무기 및 휴대장비가 최소로 경량화 된 몽골 기병대는 하루 평균 진군 속도가 40 km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전차부대 진군속도와 비슷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서울서 대전 거리인 160 km를 진군하여 미처 전투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적군을 기습 공격하여 순식간에 괴멸시켰다.

몽골 기병대는 보급부대 없이 각 병사가 보급품을 직접 휴대하는 전투부대로만 편성되어 있고 모든 물자는 창고 없이 무재고로 관리되었다. 이렇게 효율적인 군대와 조직은 현재까지도 없다. 징기스 칸 부대 보급방법을 현대 경영의 공급사슬관리론으로 보면 생산자가 유통단계 없이 직접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 전달하여 유통단계서 발생하는 모든 제반비용을 대폭 절감하는 것과 똑 같아 현대기업들이 꼭 구축하고 싶은 공급방법이며 앞으로도 기업, 군대, 정부 등 조직경영의 주요 연구과제이다.
글로벌 경영가 왕건이 정복자 징기스칸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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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왕건 집안은 현대 경영기법인 SWOT 분석으로 전략 수립

왕건 가정의 경영이 바로 기업경영이고 국가경영이었다. 그들은 후삼국을 통일할 왕을 배출한다는 장기적인 웅대한 비젼과 계획을 갖고 있어서 많은 선원들과 사병(私兵)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벌어야 했고 가정을 조직화해야 했다. 또 목적 달성을 위한 장기 전략도 필요했다. 1100년 전 시대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내부조직과 외부의 환경을 현대 경영기법인 SWOT(Strength, Weakness, Opportunity, Threat) 개념으로 분석한 결과 WT(weakness & threat)를 선택해 살아남는 전략을 우선적으로 택하였다. 왕건 집안의 SWOT 분석 내용은 아래 그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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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왕건은 통일을 위한 군사 전략도 SWOT 분석으로 수립

왕건이 고려왕이 된 후에도 아직 반대세력이 남아 있었다. 후백제 견훤왕의 군사력은 막강하고 또한 호족들도 세력이 팽배하여 아직 그들을 무력으로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건은 SWOT 분석을 하고 SO(strength & opportunity)를 택하여 후삼국 통일을 위한 군사 전략을 다음과 같이 수립했다.

1. 신라와 우호적으로 연합해 후백제와 싸워 이긴다. 그러면 약한 신라는 저절로 굴복한다.
2. 호족들의 반발과 적대가 있으면 후백제와 전투가 어려워지므로 호족들의 딸들과 혼인 해 우호관계 맺는다. 그 결과 왕건은 29명의 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산 남자가 되었다.
3. 후백제 견훤 왕 父子간의 갈등이 있자 견훤 왕을 관대하게 포용해 형으로 우대하고 견훤 왕의 아들 신검 부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하자 신라 경순왕이 항복해 통일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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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왕건과 징기스 칸이 전쟁한다면 왕건이 단연코 승리

왕건의 국가 경영 목적은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 받고 백성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면서 포용력이 크고 온화하며 인내심이 강하여 그에게 목숨을 내놓고 충성을 하는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김락 같은 맹장들이 휘하에 매우 많았다. 적과의 전투에서는 매우 용감하고 카리스마가 뛰어 났으나 부하들에게는 부드럽고 온화한 덕장이었다. 그는 해전에도 뛰어난 명장으로 개방적이며 글로벌 지향의 국가경영을 열어 고려는 당시 아랍 상인들과도 무역을 하여 예성강 벽란도에는 외국배들로 항상 붐볐다. 한국의 영어 명칭 Korea 도 고려시대에 유럽으로 corea(고려)로 알려진 것이 그 기원이다. 왕건의 고려는 귀화 외국인에게도 높은 벼슬을 주는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했고 남녀의 재혼은 물론 연애와 이혼도 허용되고 어느 정도 남녀 평등한 선진사회였다. 왕건의 글로벌 정신이 살아 있는 한국은 글로벌 경영에 성공하여 무역 규모 1조 달러의 세계경제 10위 강국이다.

징기스 칸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맹장이며 기병대 운영의 천재로 카리스마가 매우 강하였고 부하와 백성들에게 매우 무서운 존재였다. 그는 이복형과 친구, 은인도 권력을 위해 잔인하게 죽이는 등 인간을 정복하고 세계 모든 사람들을 지배만 하려 하였다. 정복욕에만 눈이 어두운 그는 다른 나라와 민족을 말발굽으로 무자비하게 짓밟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그의 몽골 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군대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서하에서 전투 중 낙마하여 죽은 그의 시체는 아직도 못 찾고 있어 그의 무덤도 없다. 몽골의 원은 거란족의 명재사 야율초재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 살육을 줄이고 법치문화 국가로 전환하려 했으나 그가 죽자 곧 쇠퇴하기 시작해 겨우 100 년 정도 밖에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지 못했다.

아래는 왕건과 징기스 칸의 개인적인 리더십의 특성과 국가경영 리더십을 요약한 것으로 징기스 칸은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정복자이고 왕건은 21세기인 현대에도 배울 점이 많은 미래지향적인 위대한 글로벌 전략 경영가임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사람이 살아 있어 현시대에 경쟁한다면 필자는 왕건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1000 년 전에 만나 전쟁을 했어도 글로벌 전략가이며 육전과 해전 모두에 명장인 왕건이 승리하였을 것이다.
글로벌 경영가 왕건이 정복자 징기스칸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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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려 같이 과부도 왕비가 되는 개방정신으로 새로운 도약

우리 한국의 미래를 위해 왕건의 글로벌 개방정신을 아래와 같이 계승하자.

첫째, 한국의 통일과 미래를 위해 왕건과 같이 장기적인 비젼과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하면서도 주도면밀한 창의적인 통일전략을 수립해 유연하게 진행해 나아가자.

둘째, 고려의 외국인 귀화 정책을 계승하자. 고려 말 설장수와 변안렬은 위구르와 원에서 온 귀화 고려인으로 각각 판서와 상장군(지금의 육군 대장)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와 같이 능력 있는 외국인을 귀화시켜 고위직으로 임명하여 한국 사회에 충성을 바쳐 이바지하게 하자.

셋째, 아들·딸 상속이 평등한 고려는 결혼 후 처가에서 일정 기간 사는 장가제도의 결혼관습 국가로 이혼 및 재혼이 자유스러웠고 과부도 왕, 권력자(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최우)의 부인이 되었다. 이제 여성들을 시집의 개념에서 완전 해방시켜 여성 인력이 모든 조직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적극적으로 일하게 하여 한국을 세계 초일류 국가로 만들자.

넷째, 왕건이 호족들을 힘으로 지배하지 않고 결혼정책으로 포용하듯이 우리의 대기업들과 기득권자들도 중소기업들과 서민들을 껴안고 공생하는 새로운 경영방법들을 창출한다면 경제민주화와 동반성장을 함께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는 고구려 계승국가로 군사력을 중요시하였다. 당시 인구 3백만-4백만 정도의 고려가 정규군인 광군사 30 만 명을 비롯하여 예비군까지 60 만 대군을 보유해 요, 금, 몽골 등 주변 강국들에 대해 당당하게 맞섰다. 한국도 적화통일을 노리며 핵무기 등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고 있는 북한은 물론 주변 강국들에 비하여 월등한 군사력을 가져야 그들과 당당히 맞서며 창조경제 국가와 복지국가로도 나갈 수 있다. 부국강병의 한국을 만들자. 국방력이 약하면 복지는 커녕 국가는 패망하고 국민은 노예로 전락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왕건 정신의 계승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글로벌 경영가 왕건이 정복자 징기스칸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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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서비스 패러다임,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에 앞서

 
입력 : 2013.12.23 14:41

 

1. 서비스의 어원은 SERVUS(종, 노예)에서 유래

서비스는 라틴어의 노예를 뜻하는 servus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즉 서비스란 노예가 수행하는 일을 뜻한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뜻에는 위의 주종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 종을 servant라 하며 종, 노예의 일이 바로 service의 본래 개념이다. 과거 대한민국 헌법에서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公僕: 공적 노예)이라 규정했고 영어로 공무원을 civil servant라 하는데 모두 다 servus 즉 노예의 개념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현대에는 주종관계가 없으므로 서비스 제공자가 근무시간 동안에는 고객을 하인이 주인 모시듯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500 년 전 조선시대 황진이는 종의 신분인 창기이면서도 지체 높은 최고위층 고객들을 친구처럼 대하면서도 고객에게 기쁨을 창조 및 제공하여 고객 재방문에 대성공했다. 황진이는 당시대의 규범을 완전 파괴하고 새로운 서비스 패러다임으로 그 시대의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을 고자세에서 뒤흔들었다.

2. 기생은 종의 신분이나 양반 사대부들과 자유연애 가능

조선시대의 기생은 노비(奴婢) 신분과 같으며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은 비(婢), 즉 여종의 신분이므로 기생이 하는 일이야 말로 서비스 바로 그것이다.
황진이의 서비스 패러다임,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에 앞서
조선시대에 원래 뜻의 서비스(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에 종사하는 노비의 인구는 전 인구의 약 1/3 정도라 하며 이들은 각종 차별대우와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 돈 벌면 사유재산은 물론 노비도 소유할 수 있었다. 특히 기생들은 종과 같은 천인 신분이지만 양반 사대부들과 자유연애도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첩으로 들어 앉아 친정을 살리기도 했다.

3. 황진이는 시각장애인의 딸로 예술과 문학의 천재

황진이는 조선 11대 중종, 명종 때 사람인데 자유를 거침없이 추구하면서 인생을 산 명기였다. 그녀는 송도(개성)의 황 진사 종인 첩의 딸(서녀: 庶女)인데 그녀 어머니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설이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것을 보아 설득력이 있다. 기생이 된 이유도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규범으로는 서녀는 양반의 첩이 되어야 하는데 첩이 되느니 자유분방한 삶을 택해 기생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양반의 첩이 되면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그녀의 자녀들도 종으로 세습 되는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생이 되었을 것이다. 외모는 여러 기록에서 뭇 남성들이 흠모하는 빼어난 미인이라 했으니 요즘 말로 얼짱이다.
황진이의 서비스 패러다임,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에 앞서
그녀는 어려서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워 춤과 노래, 악기에 능통함은 물론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사서삼경, 성리학을 공부하여 지식인 선비들과 학문적 토론과 시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겼다. 고명하다고 유명한 대성리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다 실패한 후 서경덕의 인품에 반해 제자가 되어 그에게 깊은 성리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를 스스로 송도삼절이라 칭했다. 그녀는 양반 여자들도 글을 모르는 시대(7대 세조 비 정희왕후도 글을 몰랐음)에 시(時), 서(書), 화(畵)에 뛰어난 지성미를 갖춘 전위 문학인으로서 몇 백 년의 시대를 앞서가는 신 패러다임의 여성이었다.

애인인 선전관(정3품-종4품, 국장-과장급)이며 명창인 이사종을 그리워하는 시조 “동지”와 왕족 귀공자 벽계수를 유혹하는 시조 “벽계수야”는 그녀의 의식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녀의 시조는 상당히 많다고 전해지는데 주로 연회장에서 즉흥적으로 지었다고 하고 때로는 양반 사대부들을 조롱하는 시도 읊었다고 한다. 그녀의 문학적 자질은 대단했다.

4. 당시 패러다임 파괴, 최고위층 고객들도 동네 친구 삼아

조선 시대에 종의 신분인 기생의 서비스 수행이 교만하다거나 고객인 양반에게 거슬리기라도 하면 목숨부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러한 시대에 천한 종의 출신 기생 황진이는 지체 높은 고관대작의 고객을 동네 친구처럼 대하였다. 까딱하면 죽음을 초래할 일이다. 그런데 500년 전 밑바닥 신분의 황진이는 무슨 신출귀몰할 재주가 있어 그 지체 높은 양반 사대부들이 황진이의 서비스를 받지 못해 안달을 했을까? 외모가 아름다워서 그랬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외모보다 더 뛰어난 중요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기생으로서 해야 할 서비스 패러다임을 완전 파괴하였다. 고객 신분이 아무리 높아도 굴종하는 서비스를 하지 않았고 당당했고 때로는 고관대작의 고객도 조소하면서 응대를 했다. 그래도 지체 높은 고객들은 그녀를 찾았다. 시, 서, 화에 뛰어난 그녀는 고객을 친구삼아 시와 문장으로 대화를 나누는 서비스를 하면서 마음이 내키면 거침없이 고객과 같이 가야금을 타면서 창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낮은 자세로 머리 숙여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올리는 그런 일상적인 서비스보다 자연을 함께 노래하며 세상사와 인생철학을 논하는 풍류가 지식인 고객들에게 더 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을 주었다. 사대부들에게는 황진이의 서비스를 받아 본 경험 있다는 그 자체가 자랑이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그런 자유를 누린 여인은 그녀 혼자일 것이다.

황진이가 시각장애인의 딸이어서 심청의 경우처럼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효성을 다해 효녀문을 남기기 위해 심청처럼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졌을까? 황진이는 목숨을 던지는 서비스보다 돈 많은 고관 친구로부터 삼백 석 아니라 삼천 석이상의 돈을 기증 받아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였을 것이다.

5. 황진이의 서비스에는 시 창작과 문사철(文史哲) 지식도 융합되어

조선 13대 왕 명종 때 사대부 백호 임제는 개성 유수(종2품, 차관급) 송순의 잔치에서 딱 한 번 만나본 황진이를 못 잊어 평안도 도사(종5품 이하 직)로 부임도중 양반의 신분을 잊고 죽은 황진이 묘에 가서 시를 읊었다. 선조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 이덕형은 황진이의 예술적, 문학적 자질이 천재였다고 칭찬을 “송도기이”에 기록했다. 그녀는 뛰어난 예술적 자질과 문사철 지식을 가진 지성 미인으로 500년 후의 현대 서구 지식인 여인들도 감히 엄두를 못내는 당시대의 규범과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자유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좌찬성(종1품, 부총리급) 소세양과 30일의 동거약속을 하고 동거 30일 지난 후 이별의 한시(漢詩) 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을 작성해 줄 정도로 몇 세기를 뛰어넘는 자유인이었다. 소세양은 황진이의 이별시를 받아 읽고서 완전히 넋을 잃어 황진이에게 동거를 더하자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500 년 전 고정된 사회규범과 관습에 눌려 있는 답답한 여인들만 보았던 지식인 사대부들에게는 춤과 노래, 악기에 달인인 황진이와 함께 시를 나누고 고정관념을 파괴하면서 자유롭게 文史哲의 얘기를 나눌 때의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황진이의 실력과 재능이라면 할리우드의 초일류 영화배우가 되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거나 뛰어난 여류 문인이 되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 대한민국의 국위를 세계만방에 선양할 터인데 조선시대의 규범이 그녀를 기생으로 만든 것이다. 현대 황진이라면 바이올린의 명연주자요 노래는 명가수요, 춤은 무용의 대가이며 문단의 시인이며 화가요, 시대를 앞서가는 자유인의 철학을 모든 재능에 융합한 지성미를 갖춘 여인이다. 이러한 여인의 공연을 이 세상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유튜브 접속 십 수억 번일 것이다. 황진이는 불세출의 융합서비스 창조의 여왕이고 선구자다. 그녀의 융복합 서비스는 아래 그림과 같이 형성되었다.
황진이의 서비스 패러다임,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에 앞서
6. 스티브 잡스 성장배경과 융복합 철학

스티브 잡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입양아로 소년 시절 말썽꾸러기였으며 대학도 1 년 안 되어 중퇴하였다. 이런 그의 반항적인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이 기존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정신적 세계를 형성하게 했을 것이다. 그는 고교 시절 전자분야 지식에 몰두, Reed 대학시절의 동양철학 공부와 서예수강 및 전자게임 직원생활을 거친 후 친구인 전자 엔지니어 위즈니악과 창업을 해 IT사업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그는 CEO 로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다가 애플 CEO로 복귀 후부터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과 연결되는 신제품을 내놓아 대성공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그를 세기적인 대성공의 반열로 올려놓은 것이다. 디자인에서 색과 모양을 중시하고 음악에 관심을 두어 아이 팟, 아이 맥을 개발하였다. 그 후 아이 폰과 아이 패드를 개발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세상을 열어가는 창조자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는 휴대용 전화기와 무선 인터넷 통신연결을 이용하여 각종 기술들을 융합하는 새로운 융복합 창조 세계를 열었다. 그의 융복합 창조능력은 어린 시절 부터의 굴곡 많은 인생 여정과 CEO 생활 실패 및 성공과, 특히 대다수 미국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동양철학과 서예공부 등의 다양한 경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융복합 창조능력 형성은 아래 그림과 같다.
황진이의 서비스 패러다임,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에 앞서
7.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과 황진이의 서비스 융복합

스티브 잡스는 자유와 벤처정신의 고장 미국 실리콘 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했고 황진이는 약 500년 전 자유가 전혀 없는 종의 신분으로 조선에서 자랐다. 자유와 첨단기술의 고장에서 성장한 스티브 잡스는 기존 고정관념을 파괴하려 했고 자유가 없는 천한 종과 기생의 신분인 황진이는 고정관념뿐만 아니라 사회규범자체를 파괴하며 목숨 걸고 자유를 추구했다. 황진이는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공부를 했고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불우한 어린 시절부터의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경험으로 융합의 창조 능력이 축적되었다. 아래 표들은 두 사람의 생애와 그들의 융복합 능력을 비교한 것이다.
황진이의 서비스 패러다임,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에 앞서
융복합 능력을 보면 황진이의 문학 및 성리학 등 문사철지식과, 음악, 무용, 기악, 그림, 서예 등 다양한 예술 독창성이 스티브 잡스보다 더 독특하다. 그리고 천민의 신분이었던 황진이의 서비스융합을 활용한 기존 고정관념의 파괴는 스티브 잡스보다 이미 500 년 앞서 있었고, 더 나아가 그녀는 당시의 시회규범과 패러다임을 홀로 전력을 다해 파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죽은 후 지배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대부분의 그녀 행적 기록과 작품들이 없어졌다. 황진이 행적과 작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녀의 평가는 더 높아 질 것이다.

8. “고객은 왕이다” 고정관념 파괴한 황진이의 융합창조 배워야

197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몬(경제학자는 아님)은 수많은 다양한 경험의 축적으로부터 경험들이 융합되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했다. 황진이와 스티브 잡스 모두 다양한 경험자들이면서 최선을 다하는 노력가였다. 이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경험들이 융합되어 창조된 서비스는 지금 한국의 외모지상주의 서비스와는 다르며, 외모보다는 독창성 있는 융합 창조능력의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는 시사점을 주고 있다. 특히 현대 서비스 조직들이 “고객은 왕이다”라고 무조건 강조하는 고정관념도 버려야 한다고 황진이 서비스는 시사하고 있다. 모든 불치병을 완치할 수 있는 의사가 있다면 환자들은 그 의사의 진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낮아질 것이다. 서비스 능력이 탁월하지 못하면 고객 앞에서 한 없이 엎드릴 수밖에 없다. 이제 고객 앞에서 낮아지지만 말고 아래 그림과 같이 한국의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무한 잠재력(무한대의 경험)으로 한국의 문사철 지식과 독창적 문화,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범절을 모든 서비스 분야에 응용 융합하는 신 패러다임의 서비스 문화를 창출하여 세계 서비스시장을 석권하자.
황진이의 서비스 패러다임,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에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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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벌 준비한 감성적 이성계는 나폴레옹의 스승 격

 
입력 : 2014.01.08 16:30

 

1. 이성계는 예의 바르고 감성적, 나폴레옹은 거칠고 오만

조선 태조 이성계는 원나라에서 관직을 받은 조상들을 배경으로 함경도에서 성장한 대륙의 사나이였다. 그는 기마와 궁술 등 무술의 천재였고 천하장사였다. 이성계는 26세 때 반란군 진압 후 약 30 년간의 수많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 불패의 맹장이다. 그는 겸손하고 부하들에게도 예의를 다했고 토지개혁으로 백성들의 인기가 높았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고려 조정 백관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도 24세 때 반란군 진압 후 승승장구했다. 그는 군사작전에 천재이나 코르시카 섬 사람 기질로 거친데다 오만하고 도덕성이 결핍된 과욕적인 사람이었다. 이성계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중국정벌을 준비했고 말년에 태상왕으로 있다가 노환으로 73세에 사망했고 나폴레옹은 영웅 심리에 빠져 정복사업을 벌이다 실패하고 체포되어 귀양가 있다 52세에 죽었다.

2. 대륙적인 정복자 기질과 환경변화에 유연한 이성계

이성계는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였다. 이성계는 1170년 고려 무신난의 주역이었던 대장군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6대 후손이다. 아래 그림은 이의방이 살해당한 후 이성계 조상의 변천과정을 요약해 그린 것이다.
중국정벌 준비한 감성적 이성계는 나폴레옹의 스승 격

이성계 부친 이자춘은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 환경을 재빨리 분석하고 민첩하게 행동하는 한편 군사력만이 집안을 살리는 길이라 하여 사병(私兵)을 양성하고 군사 훈련을 열심히 하였다. 이러한 가족적인 배경 속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북방에서 전투를 한 이성계는 매우 용맹스런 대륙인 기질과 군인의 자질은 물론 국제정세를 민감하게 파악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함께 소유하였다. 원 세력이 약화되자 부친이 부(친)원에서 친고려로 전향하자 이성계도 친고려가 되어 개경에 왔다. 북방서 성장한 이성계의 부대는 몽골족, 여진족 등 북방 기마 민족이 많이 섞여 있고 그들을 지휘하는 이성계는 고려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중원에 대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아래 그림은 이성계 부친의 부(친)원에서 친고려로 의사결정하게 된 내용을 필자가 현대경영기법인 SWOT 분석을 한 것이다.
중국정벌 준비한 감성적 이성계는 나폴레옹의 스승 격
3.전쟁 잦은 고려 말 불패의 맹장 이성계 인기 최고

이성계는 무술의 천재일 뿐만 아니라 황소 뿔을 한손으로 잡고 황소를 꼼짝 못하게 할 정도의 천하장사였다. 총이 없던 그 시절 무력으로는 그에게 당할 자가 없었다. 원을 몰아내는 전투와 왜구,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전쟁에 시달리는 고려 말에 전투마다 승리하는 불패의 명장 이성계는 조정은 물론 백성들의 인기가 드높았다. 이성계는 공민왕 때인 1361년 26세 때 반란 두목 박의를 잡아 죽여 공을 세웠다. 그해 10 만 명의 홍건적에게 점령당한 개경 탈환 공격에 이성계는 모두가 꺼리는 선봉을 자원하여 단 2,000 명의 군사로 제일 먼저 성을 깨고 진입하여 개경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27세 때인 1362년 동북면 병마사(현재 도(道)의 행정과 군사 책임)가 되어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수 만 명 군사와 싸워 승리했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활로 먼저 나하추 부하 장수의 말을 적중시켰다. 말이 비틀거리자 적장이 말고삐를 당기느라 “워 워 워” 하면서 입을 벌리는 순간 적장의 입속으로 화살을 명중시켜 죽였다. 실로 영화의 한 장면이다. 이 멋진 장면을 직접 본 병사들의 그에 대한 강렬한 충성도와 높은 인기에 비하면 요즘 연예인들이나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불꽃놀이 때 터지는 일시적인 화려함 같은 것일 뿐이다. 왜? 이성계에 대한 인기는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고 보존해 주는 대가이며 나중에 새 국가를 창업하는 중요한 기본자산이었기 때문이다.

4. 총리 아들도 중징벌, 부하들에게는 예의 다하는 감성의 맹장

감성은 논리의 반대 개념으로 타인들의 슬픔이나 기쁨 등을 그대로 받아들여 같이 공감해주는 것을 뜻한다. 중앙에 인맥이 없던 젊은 장군 시절 총리급 고관의 아들인 장수가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군법을 어기고 그에게 대들자 “너는 권력의 배경이 크니 더 맞아야 한다”하고 가차 없이 매우 심하게 곤장을 치는 위엄을 보여 힘이 없는 병사들에게는 통쾌감을 주었다. 전투 시에는 사자와 같은 맹장이고 최고 계급의 상장군(현재 육군대장)이나 부하들에게 항상 예의범절을 다해 대하였고 병사들의 고충과 애로사항을 잘 파악하고 위로해 주어 모든 병사들과 장수들이 그의 부대에 배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니 전투 시 병사들의 기상과 사기는 철벽을 부수고도 남았고 이성계와 같이 전투하는 자체가 자랑이고 기쁨이었다.

그는 멀리 달아나는 3 마리의 쥐들을 활로 살짝 쏘아 화살만 맞고 도망가게 할 정도로 신기(神技)의 명궁이나 활쏘기 대회에서는 상대방 실력 수준에 맞추어 비슷하게 활을 쏘아 상대방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무술 재능을 자랑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며 항상 저자세로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맞추어서 응대를 하여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이성계의 카리스마 강한 맹장의 자질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겸손과 감성의 자질이 당시 개혁을 원하는 신진 사대부들의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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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병사들에게 기쁨을 주는 감성의 위화도 회군 명령

1388년 고려 우왕과 보수파 최영 장군은 명나라의 철령 이북 땅에 대한 지배통보에 대한 고려의 반대 요구를 명나라가 거절하자 엣 고구려 땅 회복을 위해 명나라와의 결전을 위해 5만 명의 병력과 2만 필의 전투마 출병을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명령을 했다. 이성계는 출병을 4 개의 이유를 들어 반대(4대 불가론: 아래 그림 밑 참조)를 했다. 그러나 그는 우군도통사로 출병해 압록강 건너 있는 요동지방으로 진군 중이었는데 압록강에 비가 많이 와 군대를 멈추고 압록강 가운데 섬 위화도에서 진을 쳤다. 비가 많이 와 강물은 불고 병사들의 막사에 비가 줄줄 새어 막사 바닥과 옷은 다 물에 젖어 잠은 커녕 휴식도 전혀 취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역병은 돌고 식량은 부족해 병사들은 병들고 배고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다 고향에 가 있었고 탈영병이 속출했다.

이렇게 잠 한잠 못자고 추위와 굶주림과 전쟁 공포에 떨던 병사들에게 “병사들이여 기뻐하라! 우리는 전쟁터에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제군들이여 나를 따르라” 하는 회군명령이 이성계 장군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다. 정말 병사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감성의 명령이었다. 병사들은 기뻤다. 산 정상 백마 위에 높이 올라 탄 이성계 장군의 늠름한 모습은 명장을 넘어서 불쌍한 병졸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살게 해주는 고마운 하늘님의 인자한 모습이었다. “장군 고맙습니다! 우리를 사지(死地)로 몰아낸 최영을 무찌르는데 앞장서겠습니다.” 하고 회군부대는 노도 같이 수도 개경으로 진격해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세력은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내 쫒고 창왕을 새로 세웠다.
중국정벌 준비한 감성적 이성계는 나폴레옹의 스승 격

6. 백성들 기쁘게 하는 감성의 대 토지개혁

명장으로 백성들의 인기가 많다고 반석위에 서는 새 나라를 건국할 수는 없다. 반석위에 새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새로운 이념과 철학이 필요하다. 당시 고려 말 사회는 귀족들은 물론 권력의 비호를 받은 사찰들도 타락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의 농장을 소유하고 이자놀이도 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강제로 토지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는 등 귀족들과 사찰의 행패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하늘이 귀족 지주들을 죽여주기를 기대하고 살 뿐이었다. 위화도 회군 후 백성들의 바람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성계와 회군지지들인 신진 사대부들은 주자학을 정통으로 공부한 신진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불교 국가 고려를 주자학이념의 새로운 사회로 개혁하려는 사람들로 우선 토지제도의 전면적인 개혁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우왕과 창왕을 가짜 왕족이라 하여 내쫒고 허수아비 공양왕을 세웠다. 공양왕 2년(1390년)에 모든 토지문서를 개경 한복판에 모아 불태워 버리고 새로운 토지제도로 개혁을 했다. 백성들을 갈취하고 짓밟던 모든 토지문서가 불에 타 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 죽이고 싶은 귀족 지주 놈들의 땅이 없어지는 것만 봐도 속이 뻥 뚫리고 굶어도 살 것 같았다. 이성계는 이렇게 백성들의 뼈아픈 고통과 절망을 인식하여 공감해 주고 해결해주는 감성적인 개혁을 한 것이었다.

7. 감성 경영인 이성계 백성을 위해 중국 정벌 준비

1392년 7월 위화도 회군과 토지개혁으로 얻은 인심을 기반으로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됨으로서 조선이 건국되었다. 대륙기질의 이성계와 신진개혁가 정도전은 중국 중원 정복에 대한 웅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의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는 하였지만 중국(명나라)의 굴욕적인 간섭을 이기고 백성을 위하려면 오직 전쟁에서 중국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위화도 회군시의 요동정벌계획과는 전혀 달리 중국에게는 겸손하게 저자세로 대하면서 몇 년 동안 철저히 군사 훈련을 시키고 군량과 각종 보급품도 다 준비하고 국가를 전쟁의 군사시스템으로 전환했다.

1397년 중국에서 외교문서 시비로 계속 정도전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고 조선 사신들을 처형하자 이성계는 중국을 정벌하기로 결심했고 출진 명령만 내리면 되었다. 1398년 8월 출병을 결심했는데 이성계가 갑자기 중병으로 누웠다. 상황은 정벌 반대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중병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 이성계의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5남 이방원(3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중국 정벌을 계획한 정도전, 남은 등은 이방원 일파에게 모두 죽었다. 이렇게 이성계의 중국 정벌 꿈은 아쉽게 끝났다. 아래 그림은 이성계의 자질과 조선건국 및 중국정벌 준비의 그림이다.
중국정벌 준비한 감성적 이성계는 나폴레옹의 스승 격
8. 나폴레옹은 영웅 심리에 불타 계속 전쟁하다 패배

나폴레옹은 로마의 시져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와 같이 유럽의 최고 영웅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출생하여 친 프랑스파 귀족인 부친을 따라 파리에 와서 유년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24세 - 26세의 대위 시절 불란서 혁명 후 2번에 걸쳐 반란을 포병부대로 진압한 공으로 육군 소장으로 특진되어 27세 때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천재적인 군사 작전으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이집트 등을 정벌하고 승승장구하여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루소 등의 계몽가에 영향을 받아 민주공화제에 매력이 끌리기도 했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심취해 야망도 키우는 등 이중적 성격이었다.

1804년 35세 때 인민 투표로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 즉위 후 그의 영웅 심리의 전쟁욕심은 더욱 불탔으나 1805년 영국과의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패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완전 대패하고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엘바 섬으로 귀향 갔다. 그는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재기하였으나 단 100일 천하를 누리다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등 연합군에 대패해 다시 체포되어 남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에 귀양 가 있다 52세에 죽었다. 아래 표는 이성계와 나폴레옹의 인생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성계와 나폴레옹 모두 시골 출신으로 혼란기에 반란군을 진압하고 20 대에 장군이 된 군사의 천재들이며 후에 국가통치자가 되었다. 전체 인생과정을 보면 이성계가 나폴레옹보다 승리자이다.
중국정벌 준비한 감성적 이성계는 나폴레옹의 스승 격
9. 나폴레옹이 이성계를 배웠다면 패배는 없었을 것

나폴레옹은 최후에 패배했으나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장했던 공으로 프랑스 최고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성계는 무패 맹장이며 중원정벌의 꿈이 있었음에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자로 잘못 인식되어 왔다. 명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저자세였다고 사대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한국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저자세로 군사 및 경제시스템을 미국에서, 그리고 각종 과학기술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면 지금의 한국도 사대주의 국가인가?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때로는 저자세로 외국의 발달된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도자의 지혜롭고 현명한 장기 전략이다.

아래 표와 같이 이성계는 북방 대륙기질은 물론 인간성, 도덕성, 군사능력, 국제정세, 현실파악 능력, 카리스마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국가통치자의 자질과 리더십을 갖고 있었으며 불패의 세계 최고 명장이다. 그는 나라와 백성의 삶을 위하여 오만하게 간섭하는 중국을 정벌할 웅대한 꿈을 실현하려 했다. 반면에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 사람의 기질로 솔직하나 거칠며 독선적인 성격이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민의 영웅이 되고 황제가 되자 영웅이라는 인기의 과욕에 사로 잡혀 자신의 군사적 천재성만 믿고 계속 전쟁을 하다 실패한 인물이다. 나폴레옹이 이성계 인품과 리더십을 배웠다면 영웅 심리에 빠져 전쟁을 계속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원정과 워털루 전투의 패배도 없었고 엘바 섬과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살이 가는 불행도 없었고 더 위대한 영웅으로 인식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정벌 준비한 감성적 이성계는 나폴레옹의 스승 격
10. 겸손하게 준비하는 이성계 배워 통일 위한 국력 배양

이성계는 당대에 당할 자가 없는 무술과 군사작전의 천재이고 천하장사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과 예의로 대인관계를 하면서 철저한 준비를 하여 새 나라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보다 국토가 40 배 이상 크고 인구가 20 배 많은 대국 중국을 정벌하는 것은 대전쟁이다. 아주 세밀하고 용의주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저자세로 외교하는 한편, 중국 정벌을 위해 뒤에서 군사력을 증강시킨 것이다.

요즘 같은 미묘한 국제정세에 한국은 대미, 대중관계에서 겸손과 예의로 외교하면서 조용히 경제력과 국방력을 미국과 중국에 버금가게 증강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경제력과 국방력이 강하면 언젠가 국제사회의 힘의 균형이 깨질 때 통일은 물론 간도 땅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물론 개인도 기업도 이성계처럼 하면 반드시 성공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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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차고 다닌 남명 조식이 이혼당할 정도로 부부관계를 절제한 까닭

 
입력 : 2014.02.27 05:13

 

1. 이튼 학교 졸업생 세계대전에서 약 2000 명 전사…영국여왕도 공주시절 참전

남명 조식 선생 초상 /조선일보 DB
남명 조식 선생 초상 /조선일보 DB
현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공주시절인 2차 세계대전시 전투요원인 수송병으로 참전하였다. 영국 최고 명문 이튼 칼리지 졸업생들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약 2천명이 전사했는데 일 년에 250명 졸업하므로 10 년간의 졸업생 80%가 10 년간의 양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는 뜻이다. 이 2000여명 전사자의 이름이 모두 학교 본부 벽에 다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소위 명문이라 하는 학교들은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에서 졸업생 누가 전사했는지, 그리고 전사자의 수는 얼마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누가 출세했는지에만 관심이 많다. 전두환 대통령 때 6개월 복무의 소위 임관 제도를 만든 적이 있었다. 실세 장군들을 비롯한 특권층의 아들들 상당수가 이 6개월짜리 특혜 장교 군대생활로 병역의무를 약게 마쳤다. 당시 돈 없고 빽 없는 젊은이들 대부분은 자랑스럽게 3 년간의 군대생활을 전방에서 빡빡 기면서 하였다.

북한군의 전면 불법 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에 미국 장군들의 아들들이 142명 참전했다. 그 중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 아들과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대장 아들의 전사를 포함하여 35명이 전사했거나 부상당했다. 반면 국군 전사자 수 약 278,000 명(실종 포함)중에 한국 고위층 아들이 전사한 사례는 신태영 참모총장의 막내아들 신박균 하사 단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 노블리스 오블리주 교육이 있는가? 지금은 없지만 조선시대에 그 교육을 강하게 시킨 분이 있다. 바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다.
60회 생일을 맞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그의 외아들(공군 중위, 폭격기 조종사)의 모습. 외아들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했고,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60회 생일을 맞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그의 외아들(공군 중위, 폭격기 조종사)의 모습. 외아들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했고,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2. 참모총장의 17세 아들 신박균, 사병으로 최전방에 지원하여 전사

신박균 하사(지금의 상병)는 중학 3학년 재학 중 17세의 어린 나이로 1950년 8월 한국전쟁에 참전을 지원해 포병이 되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 신태영 장군(중장 전역, 1952년 국방부 장관)은 한국전쟁 발발 전인 1949년에 이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한국 군대의 거물 중의 거물이었고 그의 큰형 신응균 장군(중장 전역)은 당시 한국군 포병사령관이었다. 신박균 하사가 포병학교 교육을 마칠 때 포병학교장은 신 하사의 큰형인 신응균 장군이 지휘하는 포병사령부로 배치해 준다고 했다.

그러나 신 하사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최전방을 지원하여 가평지구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하다가 1951년 1월 2일 17세의 어린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 신 하사는 “형이 사령관으로 있는 포병사령부로 보내 줘요” 라고만 하면 후방에서 목숨을 보전하면서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일을 버리고 겨레를 위하여 눈보라 치는 겨울 전쟁터에서 산화했다.
 
 
3. 대학자 남명 조식이 칼을 차고 다닌 이유

남명 조식은 1501년(연산군 7년)에 창녕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 때 부친 조언형(문과 장원)이 함경도 단천군수로 갈 때 함께 가서 유교경전 뿐만 아니라 병법, 무예, 천문지리, 의학 등을 공부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을 탐구하였다. 조식은 18세 때 부친을 따라 서울로 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조광조와 숙부 조언경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죽는 것을 보고 탄식은 하였으나 과거에 응시도 했다. 그러나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출세보다는 유학의 본질을 공부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조식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적 지표로 삼았는데, 경으로 내적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 집중하고 의를 갖고서 밖으로 올바른 행동을 결단한다는 주역의 말을 만고의 진리로 삼았다.

경(敬)에 충실한 그는 평생 술 한 방울도 먹지 않았고, 부인과의 성생활도 요즘 같으면 이혼을 당할 정도로 절제하였으며, 재물, 벼슬, 미인 등 어떠한 달콤한 유혹도 끝내 물리쳤다. 조식은 평소 칼을 차고 다녔다. 경상감사 이양원이 칼을 차고 있는 조식을 보고 “칼이 무겁지 않소” 하고 묻자 그는 “뭐가 무겁소, 공의 관복 금대가 더 무거울 것 같소” 하고 응대를 하여 경상감사가 부끄러워했다. 그는 “내 내장에 먼지가 있다면 칼로 배를 갈라 맑은 물에 씻어 내리라” 할 정도로 항상 칼날을 자신의 내적 마음을 향해 겨누었다. 그가 칼을 차고 다니는 이유는 아래 그림에 나타나 있다.
 
 
4. 퇴계 이황에게 “청소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사람들 속이지 말라” 훈계

조식의 인품과 학문이 전국에 알려지자 13대 명종과 14대 선조 때 여러 번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특히 1555년 명종 때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거절 상소를 올렸다. 그는 거절 상소문에서 나이 어린 왕 명종을 ‘어린 고아’라 하고 어린 왕의 생모로서 모든 권력을 갖고 있는 대비 문정왕후에 대해 ‘궁중의 일개 과부가 정치하는 썩은 조정’이라 하여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정말 목숨을 건 대단한 기개였다. 그는 당대에 학문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거물인 회재 이언적과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의 벼슬길 추천도 모두 거절했다.

조식은 퇴계 이황에게 “청소하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 입으로만 천리(天理)를 논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일은 이제 그만하라”고 서신을 보낼 정도로 현실성 없는 논리를 배척하였다. 시세말로 교육자, 학자들 대부분은 입만 살아 있어서 물에 빠지면 입만 물 위에 뜬다고 하는 맥락과 같다. 조식은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백성의 삶과 고통을 직시하고 그들의 삶에 보탬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을 바로 보고 실용과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학문적 자세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왕과 대비의 잘못에 대하여 돌직구를 던지는 기개와 유림의 존경을 받는 대학자 퇴계 이황을 “입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꾸짖는 용기야 말로 바로 지금 한국의 학자들과 교수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이다.


5. 병법과 무예 교육해 제자들 의병 활동

조식의 경(敬)의 수행 목적은 내면적으로는 바른 것만 생각해 모든 악의 달콤한 유혹을 배격하고, 외부적으로는 타인을 존중하고 어떠한 조직 권력의 방해와 위협에도 목숨을 걸고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고 그들의 삶에 혜택을 주는 의(義)를 실천할 수 있는 강한 용기와 결단력의 내적 심리자본을 함양하는 데에 있다. 다음은 조식의 경의 수행이라는 내적심리자본 함양교육과 의(義)의 실천인 제자들의 의병활동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조식은 알기만 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라 하였고 의(義)를 행할 수 있는 지식이야 말로 가치 있는 지식이라 하였다. 그리고 각자 개인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책무를 수행하는 것도 의(義)라 하며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제재를 받아야 한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주장했다. 그는 교양 공부로 과거와 자신을 반성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역사와 시사 공부를 강조했다. 그는 백성들이 전쟁으로 위태로움을 당할 때 그들을 구하기 위한 의(義)를 행하기 위해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하여 학문은 물론 무예와 병법, 천문지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학자들임에도 곽재우와 정인홍 등 50 여명이 조일전쟁(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일어나 패배만 하는 관군과 달리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아래 그림은 조식의 교양교육과 제자들의 의병활동과의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조식의 교양 교육은 지금 개인 스펙만 중시하는 한국의 학교 교육에 통찰력, 타인존중, 예절, 협동심 등 미래지향의 전인적 인격 형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
 
 
6. 조식의 내적 심리자본 함양 방식은 현대 기업경영에도 효과적

요즘 미국 경영학계에서는 개인의 긍정 심리자본이 경제적 자본보다 중요하고 우선한다고 한다. 이 긍정 심리자본의 구성요인은 자기효능감 (자신감), 낙관적 사고, 희망, 복원력 등 4개라 하며, 이 4개의 요인들이 잘 형성된 사람은 본인도 성공하고 조직에 기여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조식의 내적 심리자본 함양인 경(敬)의 수행은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위한 것이 전혀 아니며 내면을 바르게 하여 절망적 상황에서도 백성과 정의를 위한 희생을 목적으로 한다.

그의 내적 심리자본 형성인 경(敬)의 수행은 안으로 본인의 마음에 칼날을 겨누어 내면에 오는 모든 악과 유혹을 제거하면서 올바른 것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유익과 국가의 부정, 부패 제거를 위해 목숨도 버리면서 의(義)를 실행할 용기와 기백을 갖는다. 그러므로 조식의 내적 심리자본은 어떠한 권력도 파괴할 수 없어서 위대하며 미국 경영학계의 긍정 심리자본 이론을 초월한다. 그의 내적 심리자본 함양을 현대기업 경영에 적용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적용하면 조직의 부정 문제는 모두 해결이 되고, 특히 기업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성원들이 희생하여 기업을 구할 것이다. 나아가서 고객의 미래 유익을 창조하는 창조경제도 달성할 수 있다.
 
 
7. 조식 제자들 몰락당한 후 청과의 전쟁에서는 의병활동 미미

조식의 사후 20 년 뒤인 1592년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동안 경상남도에서 의병 활동을 한 학자 정인홍 등 조식의 제자들은 개혁성향의 광해군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광해군(조선 15대 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들은 권력을 잡아 전후복구와 동의보감의 편찬, 대동법의 전신인 선혜법의 실시 등 내정개혁을 하였고 국제정세에 밝아 명국과 청국 사이에서 유연한 실리 외교를 하여 전쟁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왕의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켜 조선의 통치 개념인 효를 위배하여 인조반정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조식의 제자들은 의를 실행할 수 없으면 벼슬길을 나가지 말라고 한 스승의 가르침을 잊고 정치에 나서서 보수파 서인들과 권력투쟁을 하다가 인조반정으로 패배하고 거의 몰살을 당했다.

명국에 대한 사대주의 보수파 김류, 이귀 등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명국과 청국 관계에서 중립적 실리외교를 하여 전쟁의 위기를 막았던 광해군은 쫓겨났다. 서인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반대파 북인들(조식의 제자들)을 거의 모두 죽이고 야만족 여진족이 세운 후금(후에 청)이 명을 공격하는데 도와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강한 명분론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청국은 1636년 1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으며 이를 조청전쟁(병자호란)이라 한다.

그런데 조청전쟁 시에는 조일전쟁 때와 달리 의병활동이 아주 미미하였다. 국가 위기 시 백성을 위하여 희생하여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인물들은 대부분 조식의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인조반정으로 거의 죽임을 당하여 의병활동이 저조했던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조식의 교육사상의 맥이 끊어져 국가의 위기를 막지 못하고 청국과의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다음 그림은 인조반정 후 조청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8. 노블리스 오블리주 위해 공직자, 기업인, 교육자들은 군사교육 받아야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사병들이 전사할 때 “빽! 빽!” 하면서 외쳤다고 한다. 빽이 없어 일선에 끌려나와 억울하게 전사한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시 국군 장병들의 육체만 한국인의 것이고 무기서부터 숟갈까지 군수품 거의 모두에 U.S.A.가 새겨져 있었다. 미국은 10개 사단 이상의 30만 대군을 파병해 약 37,000 명이 전사했다. 미국의 총체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적화되어 우리는 지금 김정은 치하에서 온갖 고통과 기아로 신음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어떠한 전쟁도 우리만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식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교육이 필요하다. 한반도 주변지역에서 한국은 북한과는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국가와도 언제든지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

전쟁이 나면 누가 먼저 금, 보석, 돈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목숨을 내던지며 전쟁터에 나가야 할까? 말할 것도 없이 사회지도자(리더)들과 그들의 자녀들이다. 리더란 희생에 앞장선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전쟁 때와 달리 대통령 등 모든 고위 공직자, 기업인, 장군, 교수 등 사회 지도자들의 자녀들이 앞장서서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싫으면 지도자 자리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애국가의 가사와 같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 나라가 최강국으로 보존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스스로 조식의 주장대로 역사와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에 앞장 서야 한다. 그러면 그들의 자녀들과 추종자들도 자랑스럽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교육 효과는 아래 그림과 같은 과정을 거쳐 나타나 결국에는 항상 승리하는 최강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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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모친은 우대받고 정도전 모친은 조롱당한 까닭

입력 : 2014.03.04 15:18

[정도전]
세계 최초로 전농민 자영농화…소득의 10%만 세금 징수 추진
왕의 권력과 재산 제한하려다 이방원에게 피살

1. 정도전(鄭道傳):나라의 도를 전하는 사람이라는 이름 뜻대로 살아

조선 개국 일등 공신으로 조선 창업의 마스터 플랜을 설계한 사람이 정도전(鄭道傳, 본관은 봉화, 1342년 출생)이다. 그의 부친 정운경은 유학자로 이색의 부친인 이곡과 친구 사이이며, 고려 말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토호 세력 귀족이다. 정운경은 유학자로서 아들 삼형제의 이름을 정도전(鄭道傳), 정도존(鄭道存), 정도복(鄭道復)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도전은 도를 전하며, 도존은 도를 보존하고, 도복은 도를 회복시키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정도전은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도(道)에 대하여 배웠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는 평생 동안 이 도(道)를 실천하고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결국 이 때문에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태종)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이름 그대로 살다간 위대한 혁명가였다.

2. 백성이 왕보다 중요한 최고 고객…백성 행복 창출 못하는 왕은 갈아야

정도전에게 있어서 도(道)란 하늘의 뜻을 말하며 하늘의 뜻은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왕은 이 도를 위해 있으며 왕이 이 도를 행하지 못하거나 또는 자신의 권력만을 위해 통치한다면 왕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왕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는 백성의 행복을 창출하여 주어야 한다는, 즉 백성을 국가의 최고 고객으로 하는 국민고객지향의 선각자였다. 그는 고려 말의 왕실이 무능하기 때문에 더 이상 백성들의 행복을 만들어 주지 못해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의 행복을 창출할 새로운 성(姓)의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파란만장의 인생길을 거친 풍랑 속에서 오직 하나의 목표인 도(道)를 향해 항해하다 이성계의 5남 이방원(태종)에게 살해를 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도전이 권력에 탐이 나서 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멸망시켰다고 보지만, 잘못된 시각이고 식민사관의 일부다. 그는 부친 사망 후 동생들에게 좋은 것을 다 양보하고 힘없는 늙은 노비 몇 명만 가질 정도로 물욕이 없었다. 다음 그림은 정도전의 정치사상체계를 간단히 그린 것이다.
정몽주 모친은 우대받고 정도전 모친은 조롱당한 까닭
3. 오직 백성의 행복을 위해 스승 이색, 친구 정몽주와 갈라져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공부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여 부친의 친구 이곡의 아들인 대유학자 이색의 문하로 들어가 유학과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와 함께 공부를 하였고 당시 신진사대부라고 하는 박상충, 권근, 이숭인 등이 이색 문하의 정도전 학우들이다. 정도전은 도의 실천을 위해 왕조를 갈아치우는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고려 왕실을 지키려는 친구 정몽주와 이숭인은 물론 스승 이색에게도 등을 돌렸다.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스승과 갈라지고 스승을 감옥에 가도록하게 한다는 것은 정말 뼈가 시리도록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스승과 친구의 의리보다 백성의 행복이 더 중요하고 절실했다. 그는 42 세 때 북방 함경도 출신의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인 맹장 이성계를 직접 함경도로 방문해 이성계 부대 훈련 모습에 완전히 반해 야심을 감추고 있던 이성계와 새로운 국가 창업 계획을 결의했다.
삼봉 정도전(왼쪽)과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왼쪽)과 포은 정몽주
4. 정도전 모친은 종이어서 조롱당하고 정몽주 모친은 귀족으로 우대 받아

정도전과 정몽주의 스승은 이색으로 같았고 그들은 유학과 성리학을 함께 공부하여 신진사대부라는 면에서 같았으나 모친의 출생 신분이 달랐다. 정도전의 어머니 우씨는 종 출신이라는 얘기가 있어 정도전은 고려 조정의 관료들로부터 종의 자식으로 관직에 올랐다고 여러 번 비난과 조롱 및 탄핵을 받았다. 정도전은 이러한 신분 불리함의 차별 대우와 조롱을 주는 고려사회가 징그럽고 싫었다. 또한 그는 전라도 나주 천민 마을에 귀양살이 가서 8년 동안이나 천민 및 농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그들의 고통을 직접 뼈가 아프게 느끼고 경험하여 그들의 행복과 평안을 위한 신국가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인식하였다.

양친이 모두 귀족이고 젊어서부터 승승장구한 정몽주는 정도전과 같은 출생의 아픔은 물론 백성들의 고통도 직접 경험하지 못한 귀족이었다. 친구지간이었으나 출생 신분과 인생여정이 다른 그들은 같은 길을 갈 수가 없었고 죽어서도 그들은 조선 왕조로부터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았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일등공신임에도 백성근본과 왕권제한의 철학 때문에 권력의 야심가 이방원(3대 태종)에게 피살당했으며, 조선 왕조 500년 내내 푸대접을 받았다. 정몽주는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고려 왕조에 목숨 바쳐 충성하다 역시 이방원에게 피살을 당했으나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충신의 귀감으로 최고 우대를 받았다. 다음의 표는 정도전과 정몽주의 생애와 정치성향을 비교한 것이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생애와 정치성향 비교
정몽주 모친은 우대받고 정도전 모친은 조롱당한 까닭
5. 백성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 창업에 도전

원 황실의 부마였던 고려 말의 왕들은 거의 왕 구실을 못하다가 31대 공민왕에 이르러 정치를 잘 했으나 왕비 노국대장 공주가 죽은 후 미소년들과 쾌락을 즐기다가 암살을 당하였다. 공민왕 뒤를 이어 10세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심약하여 전혀 왕 노릇을 못하였다. 도처에 왜구가 침입해 와서 양민을 학살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권문세가들의 토지와 불교 사찰의 토지는 이 江에서 저 江까지, 이 山에서 저 山까지 경계선을 삼을 정도로 넓어 백성들의 땅은 송곳 심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작고 작았다.

권문세가들은 대토지를 기반으로 백성들의 거의 모든 것을 강탈하고 있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고 있었으나 이를 시정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정도전은 고려 왕실을 그대로 두고는 백성을 살려 내기는 고사하고 민족 전체가 망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고 고려 국가를 전면 뒤집어엎어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이상과 제도를 갖추고 道를 실천하는 신 국가 창업에 이성계와 함께 도전하였다. 다음 그림은 정도전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창업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정몽주 모친은 우대받고 정도전 모친은 조롱당한 까닭
6. 왕의 통치권 제한하고 재산도 못 갖게 해

정도전은 왕은 세습되기 때문에 왕이 어질고 능력이 있을 때는 좋지만 왕이 무능하거나 폭군일 때는 국가가 파탄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로 왕의 통치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물론 사유재산도 일체 보유하지 못하게 하는 국가 제도를 계획했다. 정치는 재상 중심으로 관료들이 하되 그들은 엄정한 시험과 검증을 거쳐 임명되어야 하고 그들 중 일부는 간관(諫官: 왕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여 진술하는 관리)으로 선출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반드시 통치에 반영하고 소통이 되는 국가를 계획했다. 왕과 대신들도 간관들의 언로(言路) 활동을 제한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계획이 조선의 통치제도에 반영되어 조선은 신문고 제도가 있었고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등의 언로와 감찰 기능의 소위 3사라는 기관이 발달되어 왕과 대신들의 권력 행사를 세계 어느 나라 보다 효과적으로 제한하였다.

7. 세계 최초로 전농민의 자영농화…농업 산출의 10%만 세금부과 계획

정도전은 백성들의 먹고 입는 것의 충족이 국가 통치의 모든 것에서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위화도 회군 후 백성들에게 악랄했던 권문세가들과 불교 사찰이 소유한 대토지 문서를 모두 회수하여 개경 한복판에서 전부 불태웠는데 불길과 연기가 하루 종일 치솟았다. 그런 후 전국의 모든 농토를 농민들에게 균등 분배하여 소작농을 완전히 없애고 생산된 농산물의 90%는 농민이 갖고 10%만 국가에 세금으로 내는 전 농민의 자영농제도를 계획하였다.

정도전과 조준 등은 이 제도를 조정 논의에 붙였으나 권문세가 출신들의 격렬한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색, 권근 등 중소지주 성리학자들도 반대하였고 정몽주는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이안이 부결되어 관리들에게만 토지가 지급되는 과전법의 형태로 후퇴를 하였지만 권문세가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된 백성들은 그것만으로도 대환영을 하였다.

8. 전국민 전투방법 배워야…장기전략으로 고구려 영토 회복

정도전은 문과 무를 겸비했다. 그는 백성의 평안과 안녕의 유지는 오직 국방력의 강화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국가 경영의 목적과 비전은 부국강병이며 장기 전략으로는 요동정벌을 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남자가 밥을 못 먹고 여자가 옷을 입지 못하면 예의고 법이고 다 무너진다고 생각하여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 다음으로 국방력 강화를 위해 백성들에게 전투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백성들에게 전투방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라 하였다. 싸울 줄 모르는 백성은 전쟁이 나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개국 즉시 군량미의 비축은 물론 군대의 훈련과 교육을 강도 높게 시키고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私兵)들을 모두 국가군대에 배속시켜 요동정벌을 7년간 준비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막내아들 이방석의 세자책봉, 정도전의 왕권제한 제도 그리고 자기의 私兵들을 빼앗겨 불만에 쌓여 있던 이방원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요동정벌계획 인사들을 모두 살해해 요동정벌 계획은 막을 내렸다.

9. 정도전의 국가경영철학이 반영된 국가의 모형

아래 그림을 보면 국가 경영철학의 핵심은 “백성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라는 인본사상이고 국가 장기전략 목적은 부국강병으로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정몽주 모친은 우대받고 정도전 모친은 조롱당한 까닭
10. 국민이 최고 고객, 국민 군사훈련, 강대국과 유연한 외교철학은 배울 점

정도전은 백성이 국가의 최고 고객이라는 백성 고객지향적 경영철학을 기초로 하여 국가조직의 모든 기능을 그의 대저서 조선경국전에서 디자인했다. 경복궁은 물론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궁궐의 모든 전각과 문들의 이름은 물론 숭례문 등 사대문의 이름도 정도전이 지었다. 정도전이 건축물에 지은 이름은 모두 나름대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국의 공공조직은 물론 대기업의 경영자들도 최고경영자의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국민이 자기들보다 더 높은 최고의 위치를 갖는 역피라미드식의 조직으로 재구축하는 리엔지니어링을 하고 고객의 유익 창출을 위한 장기 전략을 세워 경영하면 백전백승하는 조직이 될 것이다.

문무를 겸한 사상가이며 문장가인 그는 백성에게 전투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전쟁시는 물론 재난 시에도 대피 방법조차 제대로 훈련이 안 된 한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강한 국방력을 기반으로 고구려 엣 영토를 회복하려는 그의 의지는 주변 정세가 불안한 한국이 본받아야 할 자세이다.

정도전은 중국(明)과 같은 강대국과의 외교는 우리의 독립과 주권을 확실히 지키면서 정중한 예절로 대하는 유화 정책을 주장했다. 유화정책으로 좋은 것을 받아 들여 국가의 이익 창출에 활용하되 전쟁에 대한 대비도 항상 철저히 해야 한다는 매우 실리적인 외교정책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국가 경영철학을 보면 그는 사대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글로벌 경영을 위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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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입력 : 2014.04.10 02:20

나라 재정 아끼려 하루 두끼 3가지 반찬
옷 기워입고 방 도배도 아껴

1. 사도세자 죽을 때 부왕 영조의 속마음은 살려주고 싶었을 것

1762년 더위가 한창인 7월 영조(조선 21대왕)가 세자(이름 선(愃))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을 때 세자는 부왕한테 “아버님! 아버님! 이제는 말 잘 들을 터이니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을 하였다. 왕은 세자의 장인 좌의정 홍봉한이 사위를 위해 왕명을 거두라고 왕에게 간청할 것을 마음속으로 기대하였을 것이다. 좌의정 홍봉한이 목숨을 걸고 주청하면 그를 따르는 노론 대신들이 강력하게 세자를 살리라고 간청을 하게 되고 노론의 지지를 받는 왕은 못이기는 척하고 세자를 살려줄 수도 있었고 왕의 체통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홍봉한은 사위가 고통 속에 죽어 가는데도 말 한마디 없었으니 그 누구도 세자를 살려주라고 주청할 수 없었다. 영조실록에는 홍봉한이 영조의 결단에 찬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 그림은 사도세자의 생애와 죽음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28세의 젊은 세자는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쌀뒤주 속으로 들어갔다. 세자는 7월의 무더위에 1m³ 정도로 좁은 뒤주 안에서 9일 동안 허리와 다리도 못 편 구부정한 자세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고통 속에 굶어 죽어갔다. 뒤주 안에 갇힌 채 9 일이 지나 세자가 죽을 때까지 세자를 살려달라고 간청한 사람은 세자의 어린 아들 이산(후에 정조) 이외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왕은 아들이 죽은 후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였다. 정치 싸움으로 단 하나 밖에 없는 불쌍한 내 아들만 죽었고 정치하는 놈들은 천하의 악질이고 짐승보다 더 한 놈들이라고 속으로 이를 갈고 후회하였으나 스스로 저지른 엄청난 자신의 과오는 되돌릴 수 없었다.

2. 정조 모친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가 죽을 때 외면

정조의 모친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인 세자빈 홍씨는 홍봉한(본관 풍산)의 딸이다. 사도세자는 자결의 명령을 받은 당일 부왕에게 불려나가기 직전 죽음을 예견하고 학질병을 핑계 대기 위해 어린 아들(정조)의 방한모를 쓰고 부왕 앞에 나가려 하였으나 세자빈 홍씨가 반대하였다. 그러자 세자가 세자빈에게 “자네 정말 무섭고 흉한 사람이네” 라고 쏘아 붙이자 어쩔 수 없어 세자빈은 아들의 방한모를 주었으나 세자는 말없이 자기 방한모를 쓰고 나갔으며 이것이 이들 부부의 마지막 대화였다. 세자가 아들의 방한모를 쓰고 부왕 앞에 나가려 한 것은 ”제가 바로 당신이 사랑하는 손자의 아버지“라는 것을 은연중 보이면서 부왕의 부정에 호소해 용서를 받으려는 시도였다. 아래 그림은 사도세자와 부인인 세자빈 홍씨와의 부부관계를 그린 것이다.
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세자빈 홍씨는 왜 죽음을 면하려고 발버둥치는 남편의 마지막 청을 거절했을까? 홍씨 거절의 뜻은 죽으려면 너만 죽지 왜 아들을 끌고 들어가느냐 하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고 세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보통의 여인네라면 남편이 시아버지에게 죽게 된다면 아무리 시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워도 시아버지 앞에 나가 통곡을 하면서 하나 뿐인 손자를 보아서라도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홍씨의 경우 만약 남편인 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세자의 정치적 적대세력인 그녀의 친정 아비지의 목숨은 물론이고 친정 집안 자체가 풍지 박산이 날 것은 뻔하였다. 그녀는 훗날 아들이 왕이 될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남편을 외면하고 친정을 택하였다.

3. 정조, 효장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외쳐

정조(조선 22대 왕, 이름 산(祘))는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당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정조는 일생 동안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살았다. 왕가이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이 비극적인 가족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들이었다. 사도세자는 생모 영빈 이씨의 사랑도 못 받았고 아내에게 미치광이 대접을 받았으며 급기야 아버지한테 죽임까지 당했으니 정말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었다, 오직 어린 아들(후에 정조)만이 “할아버지! 할아버지! 제발 아버지 살려 주세요” 하고 애걸하였다. 정조는 비극적 죽음을 당한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사랑하고 또 사랑하였으나 이 세상에 없어 그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망령을 가슴에 부여안는 슬픔 속에 살았다.

영조의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사도세자의 유일한 적자(嫡子) 이산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사형을 당한 중죄인이라서 그 아들 이산은 왕위 계승이 어렵고 아버지의 반대당파인 노론에 의해 살해당할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이산은 다행히 할아버지 영조의 덕으로 죄인이 된 사도세자의 이복형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어 왕위 계승권을 갖는 세손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영조가 죽은 뒤 겨우 왕위에 올랐다. 법상으로는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1776년 3월 등극할 때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쳤다. 이는 사도세자를 죽게 한 세력을 보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대학자 정조는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보복은 빨리 그리고 작게 끝내고 세종대왕 이후 최대의 문예부흥을 이루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개혁하다 49세 때인 1800년 세상을 달리했다.

4. 정조의 백성을 위한 성왕 국가 경영 철학: 왕의 국가경영권 강해야

정조는 성왕(聖王)이 됨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성왕이 됨은 하늘의 뜻에 따라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을 위하는 국가경영을 말한다. 그는 왕이 백성을 위해서 일하려면 신하들이 왕을 위해 충성하고 봉사해야 한다며 왕권 강화를 주장했다. 이것은 기업이 고객을 위한 경영을 하려면 경영권 강화가 필요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왕권이 강화가 되어야 백성을 위한 효과적 효율적 국가 경영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부왕의 덕을 많이 본 세종대왕과 달리 어러셔 부친이 비극적으로 죽는 슬픔을 당했고 왕이 되어서도 적대 세력에 시달려야 했으나 아래 그림과 같이 국가 경영자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5. 정조 하루 두 끼 3가지 반찬에 옷 기워 입으며 재정 절약 위한 구조조정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조선시대의 왕이 그 드라마의 내용처럼 호화스럽게 먹으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고 믿은 조선의 왕들은 항상 가난한 백성을 생각해야 하므로 검소하게 식사를 해야 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면 비난을 받아야 했다. 특히 영조와 정조가 가장 검소한 왕들이었는데 정조는 평상복은 무명으로 지어입고 해지면 기워서 입었다.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면서 쇠고기는 금하고 반찬도 보통 3-4가지 이하로 하였다. 요즘 한국의 서민들이 220년 전 왕인 정조보다 훨씬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왕이 거처하는 방도 도배를 자주 하지 않아 벽이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배었으니 요즘 새로 이사를 가면 멀쩡한 내부를 허물고 새로 인테리어 하는 한국인들은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국가 공문서나 외교문서 등은 최고급 종이를 사용하였으나 정조가 채제공과 심환지 등 대신들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서신의 편지지는 휴지 재생지들이 많았다. 당시 조선의 궁궐안의 급여 받는 궁녀 수는 대략 500-600 명 정도였다. 정조는 궁녀제도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으나 계조모 정순왕후(경주 김씨, 영조 계비, 노론 벽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왕의 수발을 드는 대전의 궁녀 전원 100여 명만 모두 없애 버리고 하급관리 몇 명으로 대체하였다. 정조는 국가 및 궁중재정과 국가행정인력 축소의 구조조정을 위해 강력한 개혁 세력이 필요했다. 다음 그림은 정조의 개혁세력 구축과 개혁과정을 그린 것이다.
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6. 대학자인 정조 규장각을 설치, 서얼 등용해 밤새 왕과 정치 논해

정조는 즉위 즉시 규장각을 설치하고 친위 개혁세력을 키우면서 문화정치를 내세웠다. 그는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등의 기능을 규장각에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왕권의 핵심조직으로 키웠다. 규장각에서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는데 특히 400년 전 조선 왕조 초기에 제정된 문물제도가 오래되어 속오례의, 국조보감, 대전통편 등을 새로 간행하여 조선후기 사회에 맞게 재정비하였다. 정조 자신이 대학자라서 조선 27명의 왕들 중 유일하게 180권 100책에 달하는 홍재전서라는 문집을 간행하였다. 그는 탁월한 성리학의 대가이어서 임금이며 스승 즉 군사(君師)라 자처하며 신하들을 리드하였다. 규장각에 신진학자들을 수혈하기 위해 검서관제도를 신설하고 검서관의 신분은 파격적으로 서얼로 하였다. 북학의의 저자이며 중상주의 실학의 대학자 박제가를 비롯한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 4명의 서자들이 검서관으로 활약을 하였다. 후에 이들은 군수 등 외방관직에도 나갔다. 정조는 이외에도 중인이하 계층의 위항인들의 위항문학도 적극 지원하는 등 사회적 신분질서의 타파를 위해 노력하였다.
정조(왼쪽)와 서자 출신의 천재 실학자 박제가
정조(왼쪽)와 서자 출신의 천재 실학자 박제가
규장각은 총 74명 정원의 조직으로 당시로는 거대 조직이었다. 규장각에선 고유 업무일지인 내각일력과 왕의 동정을 기록한 동정록을 작성하는 등 많은 책을 출판하여 문예부흥의 중추가 되었다. 규장각 관리들은 왕의 행차 시 동행하였고 왕과 밤이든 새벽이든 때를 가리지 않고 정사를 논하였고 관료의 부정도 적발하여 탄핵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그들은 삼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기능은 물론 사관과 승지의 역할까지도 담당하고 재상의 일에도 관여 하였으니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의 비서관들 이상으로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정조는 이 조직을 친위세력으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향해 강력하게 개혁해 나갔다.

7. 3년 연구하는 초계문신들 요즘 연구소나 대학보다 엄격한 연구평가 받아

1781년 정조가 시작한 초계문신제도는 세종 때 시작한 사가독서제와 비슷한 제도로서 37세 이하의 당하관(정3품 이하)들 중에서 선발하여 직무를 면제하고 3년간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이다. 3년간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1개월에 2회 구술고사와 1회 필답고사를 실시하는 등 연구평가도 확실하게 하여 지금 한국에서 실시하는 대학과 연구소들의 연구 평가관리 시스템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뛰어났다. 이 초계문신 제도 실시로 관리들에게 유학과 경전의 참뜻을 공부하게 하였고 이들의 연구를 국정에도 적용하였다. 19년 동안 정약용, 이가환 등의 대가들을 포함하여 총 138명의 초계문신들이 선발되었다. 이들 초계문신들도 정조의 친위세력이 되어 규장각과 함께 개혁과 문예부흥의 중심 고급 인력으로 활동하였다.

8. 개혁을 위한 군제개편과 화성 신도시 건설

정조는 활쏘기를 즐겼다. 단순한 즐김이 아니라 무술연마 목적으로 한 것이고 국가는 문과 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예도보통지” 등 병서와 무예훈련교과서를 많이 편찬하고 지금 현대군대가 도강 시 설치하는 부교인 배다리의 공법을 정약용을 시켜 완성했다. 개혁으로 인하여 기득권을 상실하는 권력층들의 반발을 가장 효과적으로 무마하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군 지휘체계의 장악이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이후 정권을 잡고 일사분란하게 경이적인 빠른 속도로 경제개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도 군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초까지 조선군 장수들은 병조판서(국방부 장관)의 지휘를 전혀 받지 않아 군은 장수들의 세상이었다. 정조는 전체 5군영을 3군영으로 개편하고 3군영의 모든 지휘권을 병조판서에게 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는데 규모는 5,000 명 정도로 하였고 임무는 서울과 수원 등 서울 주변의 방위 임무를 맡겼다.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와 수도군단과 같은 부대였다. 장용영대장은 어영대장과 동격으로 만들어 힘을 실어 주었다.
화성 신도시 장안문 밖의 모습
화성 신도시 장안문 밖의 모습
정조는 계획 신도시 건설을 위해 수원부를 화성으로 승격시키고 3품관인 수원 부사를 정2품관(현재 장관급)인 유수로 승격시켰다. 정1품 대신 심복 채제공을 품격을 낮추어 수원유수로 임명하고 화성 신도시 건설의 총책임을 맡겼다. 이 때 정양용이 기중기를 만들어 돌 등 무거운 것들을 들어 올려 공기단축에 큰 역할을 하였다. 1796년 단 28개월 공사에 완성된 정조의 화성 신도시 건설은 외부로부터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다는 기득권과 권력층이 뿌리를 깊게 박고 있는 서울로부터 행정기능을 신도시 화성으로 옮겨 그들을 몰아내려는 의도였다. 권력층을 제거해야만 새로운 국가를 위한 강력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고 기득 권력층 제거 후에는 화성으로 수도를 옮겨 그가 목적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했을 것이다.

9. 백성 민원 해결 위한 백성 고객 지향적 국가 경영

정조는 백성의 민원을 직접 찾아 나서기도 했다. 백성들이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서 억울한 것을 고하게 하였고 이 민원은 3일 내에 빨리 처리하게 하였다. 이것을 격쟁이라 했는데 정조가 백성에게 직접 사안을 물어보고 일일이 그것에 대한 결정을 다 챙겼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시작한 암행어사제도는 정조가 가장 많이 활용하여 재위 25년 동안 총 113회 암행어사를 파견했다. 춘향전을 보면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탐관오리 변학도를 징벌하는 통쾌한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암행어사의 활동이 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로 사헌부의 6품직이 임명되었고 감사와 같은 2품 고위직 이상의 고관도 내사하여 권한이 막강하였다.

그러나 암행어사가 임무수행 하러 가는 도중에 때로는 산적 등을 만나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길에서 병들어 고생도 했다고 한다. 특히 영조 때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충청도 서산 지방으로 갈 때는 그 지방 양반들의 텃새가 너무 강해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 충청도 쪽으로 어사 나가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라도 지방으로 가면 밥도 잘 주고 특히 밥맛이 좋아 다른 지방보다 전라도 지방으로 어사 나가기를 좋아 했다고 한다. 이는 암행어사가 초라한 민간인의 행색으로 신분을 감추어서 다녀야하기 때문에 겪는 일화의 하나이며 실제로는 상당히 어렵고 고달픈 임무였을 것이다. 다음 그림은 정조가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는 경영을 요약하여 그린 것이다.
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10. 링컨보다 62년 앞선 공노예 해방과 인권신장

조선은 조일전쟁(임진왜란)후 도망간 노비들을 잡기 위해 1655년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정조 때 와서 노비추쇄도감을 폐지하였고 함부로 노비를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노비명단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공노비 해방을 계획하고 노비신분의 상속을 아주 없애려다가 1800년 죽었으나 1801년 그의 노력의 결과로 중앙관청의 모든 공노비가 해방되었다. 조선은 초기부터 형벌에 관한 규정이 경국대전에 있었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관리들의 형벌의 남용이 심하였다. 사형수가 아닌 사람을 규격보다 큰 몽둥이를 사용하여 때려죽이거나 함부로 주리를 틀거나 불로 지져 죽이는 등 정도가 매우 심하였다.

정조는 죄수들의 고통에 대하여도 많은 생각을 하였다. 목에 씌우는 칼(형틀)을 사용 못하게 하고 심문기간에는 옥안에서 결박을 못하게 하였다. 형벌의 남발을 막고 규칙과 규격에 어긋나는 형벌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법제화하였다. 억울한 죽음을 없애기 위해 세종 때 만든 법 의학서를 1792년 중수무원론이라는 법의학서로 다시 만들어 지방감영까지 보급하여 시체 검사의 과학적 접근법과 공정성을 확보하여 수사를 과학화 했다. 다음은 정조의 서얼 출신 지식인을 중요 관료로 임명하는 인사제도 혁신과 인권신장을 위한 국가 경영을 그린 것이다.
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11. 정조 개혁은 미완성 그의 사후 조선 붕괴로, 한국 경영후계자 문제 시급

정조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주고 그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중 개혁을 완성 못하고 1800년 49세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정순왕후(영조 계비, 정조의 계조모, 노론 벽파)의 독살설이 유력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는 죽기 전 세자빈으로 자기에게 온건적이었던 노론 시파 김조순(안동 김씨)의 딸을 맞았는데 이것이 조선 붕괴의 지름길이 되어버렸다. 노론 시파이며 왕비의 친정 세력인 안동 김씨가 흥선대원군 출현 때까지 약 60년 간 권력을 독점하고 휘둘러 정조의 개혁성과는 다 증발되고 조선은 아래 그림과 같이 붕괴의 길을 달렸다. 역사상 잘못된 후계자 선정으로 패망한 국가와 조직은 많다.
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정조의 가장 큰 실책은 세자빈을 노론의 집안에서 데려 온 것이었다. 조선 후기 노론 세력의 뿌리는 너무 깊어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정조도 견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11세에 왕이 된 순조가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있었겠는가? 개혁은 중간에 끊어지면 개혁 전보다 더 참담해 진다. 정조 사후의 조선이 바로 그랬다. 개혁주도자는 개혁을 완성시킬 수 있는 후계자의 선정도 미리 세심하게 해 놓아야 한다.

지금 한국 재벌 기업들은 지속적인 개혁의 글로벌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런데 경영자들 나이가 고령이 되어 가고 있어 후계자 문제가 앞으로 한국경제 발전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조직 경영에서 후계자문제의 중요성은 열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미래 한국의 국가적인 문제가 될 수 있는 경영 후계자 문제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없어 지금 무엇보다도 후계자 문제에 대한 연구가 가장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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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한명도 두지 않게 만든 조선 현종 왕비의 비결

 
입력 : 2014.05.14 11:00

현종 왕비의 경쟁력(上)

1. 명성왕후 김씨는 송시열과 적대적인 영의정 김육의 손녀딸

명성왕후 김씨는 조선 18대 현종의 정비로 청풍 김씨 김 육의 손녀딸이다. 그녀의 조부 김 육은 황 희, 유성룡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 명신이다. 16대 인조 때인 1638년 충청관찰사 재직 중 대동법의 건의는 물론 수차(水車)와 수레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보급해 당시 전후 농토복구에 기여를 많이 했다. 그는 대동법을 충청도에 실시해 성공시키고 주전 화폐유통도 활성화시켜 전후 국가 경제 발전에도 큰 공로를 세웠다.

김 육은 도승지, 대사헌, 예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1651년부터 1658년 사이에 영의정을 두 번이나 역임한 당대 최고 거물 정치인이었다. 김 육은 서인이었지만, 학풍은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퇴계 이 황의 학설도 일부 수용했다. 융통성 있는 그는 서인의 성리학과 남인의 중상주의 실학을 연결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광해군 때 북인 정인홍과 대립하다가 성균관에서 퇴교 당한 후 고향 가평 농촌에서 약 10년간 지내면서 농민들의 고달프고 가난한 삶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러한 그의 농촌 체험이 대동법의 시행과 수차의 보급으로 이어졌고 정치적인 거물임에도 그는 관직 생활 내내 농민경제 향상에 주력하였다. 그의 대동법 실시에 양반 지주 귀족들이 극렬 저항했고 보수 주자학을 주장하던 김장생의 아들인 김 집과 그의 제자 송시열 일파의 반대와 비난은 엄청났다. 김 집은 송시열, 송준길, 김상헌 등을 결집하여 김 육을 집중 공격하였다. 김 육은 농업은 물론 상공업도 진흥이 되어야 나라의 살림이 향상된다고 하여 주전 화폐 십전통보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 역시 김 집과 송시열 일당이 김 육이 상인들한테 뇌물을 받아먹고 그런 짓을 한다고 맹공격을 하여 김 집과 송시열 일당(산당)은 김 육 지지당(한당)과 완전한 적이 되었다. 따라서 김 집과 송시열은 김 육의 아들 즉 명성왕후의 부친 김우명 형제와도 적대관계가 되었고 명성왕후 김씨도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송시열과 적대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명성왕후의 친정 집안과 송시열과의 적대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후궁 한명도 두지 않게 만든 조선 현종 왕비의 비결
2. 명성왕후 원자 출산은 시아버지 상중 동침 결과라고 송시열 축하 안 해

송시열은 인조에서 숙종까지의 네 임금으로부터 무려 167회의 벼슬 제의를 받았으나 이에 응한 것은 불과 37번 이었다. 우의정과 좌의정에 세 번이나 제수되었으나 총 근무한 날짜는 불과 49일이었다. 그는 왕의 벼슬 제의를 받으면 거부하거나 설사 조정에 나가도 일주일도 근무를 하지 않은 채 왕을 비방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그 때마다 유림에서 그의 정치적인 인기는 하늘을 찌르며 날았다. 지금 자유민주주의 한국에서도 총리, 장관 등의 고위 공직자들 중 대통령이 영 마음에 안 들어 사직한다고 발표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전제 군주 왕조 국가에서 그러한 대담한 행동을 하는 그의 기개와 정치적 수완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재야에서 얼마든지 조정의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그는 임금도 두렵지 않았고 조정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18대 현종의 정비인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 2년 1661년 원자(후에 숙종)를 출산했다. 왕비가 원자를 출산했으니 국가의 최대 경사였다. 조정 모든 대소 신료들이 축하인사에 참례했는데 배짱 대단한 송시열 혼자만 참례하지 않았다. 송시열 반대파로부터 즉각 다음과 같은 비난이 나왔다. 왕비 시아버지(효종) 상중의 출산은 왕과 왕비가 상중에 동침을 한 결과이며 그것은 예에 어긋난다고 송시열이 판단해서 원자 출산 축하에 참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사실이 아니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현종과 명성왕후는 송시열이 미울 수밖에 없었다. 원자(후에 숙종)는 성장하면서 모후인 명성왕후로부터 송시열의 불경행위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성격이 강한 원자는 왕이 되면 “내가 송시열 이놈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 현종이 후궁을 안 둘 정도로 명성왕후는 매력을 융합 창조

현종은 조선의 27명의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았다. 현종은 세자 때부터 병약해서 재위 15년 동안 온양 온천에 치료차 자주 갔다. 현종은 오고 가는 도중 꼭 군사훈련을 참관하였다. 왕의 온천 여행 일정을 알 수 없는 군대는 왕의 참관에 대비해 항상 훈련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로 현종은 과단성이 있고 정치를 잘하려고 노력한 왕이었다. 현종이 몸이 약해 후궁을 두지 않았다는 얘기와 명성왕후의 성격이 사나와 왕이 눌려 후궁을 두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둘 다 아닌 것 같다. 조선의 왕들 중 많은 왕들이 병약했으나 모두 후궁을 두었다. 그리고 왕비가 성격이 사나와 후궁을 두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현종은 병약하지만 왕비가 하라는 대로 하는 유약한 왕은 아니었다. 대궐 안에서는 왕만이 남자이고 왕은 많은 미인 궁녀들의 유일무이한 남자 고객이다. 이 고객만 잡으면 궁녀 신분을 벗어나고 품계 높은 후궁이 되어 인생길이 달라졌다. 지능이 높은 명성왕후는 이 고객을 다른 젊은 미녀 경쟁자들에게 한 번도 빼앗기지 않고 독점한 것이다.

그녀는 명문가 여인답게 총명하기도 하지만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명성왕후 백부 김좌명은 당시에 가장 인물이 빼어난 조정 대신이었다고 하니 그녀도 미인이었을 것이다. 총명하면서도 적극적인 그녀는 남편과의 야밤 행사에도 체면 차리며 숨소리까지 죽이는 양반 여인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명성왕후는 아래 그림과 같이 품위와 관능미가 함께 어우러지는 성적 매력을 융합 창조하여 젊은 미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병약한 왕을 사로잡아 15년간 4명의 자녀들을 출산했다.
후궁 한명도 두지 않게 만든 조선 현종 왕비의 비결

/하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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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왕비, 아들 숙종이 장희빈에게 푹 빠지자…

입력 : 2014.05.19 10:33

조선 현종 왕비의 경쟁력(下)

☜ 상편에서 계속

4. 명성왕후의 죽음으로 장희빈이 득세

현종의 외아들 19대 숙종은 환국정치와 장희빈으로 유명하다. 숙종은 1674년 13세에 왕위에 올라 46년간 재위에 있다가 59세에 사망했다. 서인 노론 한당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김 육의 손녀딸 명성왕후는 자신의 외아들인 왕이 왕보다 나이 많은 중인 출신의 궁인 장옥정에게 푹 빠져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장옥정 집안은 인동 장씨로 친가와 외가 모두 부자 역관으로 유명한 중인 집안이었는데 나이 어려 궁에 들어가 조대비 전의 궁녀로 있었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왕보다 2살이 많으나 워낙 미색과 매력이 뛰어나 연하의 미남 청년 왕 숙종을 완전히 품안에 넣었다.

그리고 장옥정의 친정이 명성왕후 친정과 반대당인 남인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명성왕후의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명성왕후는 1680년 대비의 권한으로 장옥정이 천하다고 궁에서 쫒아냈다. 장옥정을 쫒아낸 후 3년이 지난 1683년 추운 1월 사랑하는 외아들 숙종이 괴질 병에 걸렸다. 무당을 좋아한 명성왕후는 무당이 “왕의 모친이 얇은 홑치마만을 입고 직접 물벌을 맞아야 왕의 병이 쾌차 한다”고 하여 무당의 말대로 엄동설한에 홑치마만을 입고 온 몸에 찬 물벼락을 맞았다. 왕의 병은 나았는데 그 때문에 명성왕후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그해 1월21일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명성왕후의 죽음은 25살 장옥정의 행운을 불러왔다.
장희빈
장희빈

인현왕후 민씨
인현왕후 민씨
5. 장희빈의 왕자 출산은 송시열에게 죽음의 직격탄

명성왕후 사후 장옥정은 즉시 다시 궁으로 들어갔다. 장옥정보다 무려 8살이나 어린 인현왕후는 여인으로서의 매력이 없었는지 숙종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이 많은 장옥정만 찾았다. 드디어 장옥정은 1688년 30세란 늦은 나이에 왕자를 출산하고 승승장구하여 희빈에 올랐다. 숙종은 첫 왕자를 보자 너무 기뻐 후궁의 아들임에도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남인의 사람인 장옥정의 아들이 세자가 되면 남인의 적대당인 노론은 큰 변이 아닐 수가 없었다.

1689년 1월 노론 영수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현재의 중전(노론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이 23세라 아직 젊어 출산 능력이 있다고 하며 극력 반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송시열에게 앙심을 품어 온 숙종은 이번이 송시열을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남인들이 이에 적극 가세했다. 왕은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송시열을 다시 국문하기 위해 한양으로 소환했다.

1689년 6월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오는 도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남인들의 말에 의하면 송시열이 사약을 먹으려 하지 않아 군졸들이 강제로 입을 벌려 입속으로 사약을 넣어 먹여 죽였다고 하면서 송시열을 비굴한 인간이라고 비하했다. 그러나 노론들은 너무 의연하게 사약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송시열의 나이는 83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 번이나 기록되어 있고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도 문묘에 배향되고 죽은 후에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의리와 주자학을 위해 순교한 것으로 승화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인 노론은 그의 사상과 주장을 계속 받들어 가다가 정조가 죽은 후 권력투쟁에서 최후 승리자가 되어 조선말 100여 년간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다가 일본에 나라를 팔았다.

6. 세월호 참사, 노론적 당파의식 버리고 이순신 장군 유비무환정신으로 극복해야

명성왕후 김씨의 적대적 감정이 그녀의 아들 숙종으로 하여금 송시열을 죽게 하였으나 송시열의 추종자들은 건재하였다. 23대 순조가 11세에 즉위한 1800년부터 부터 1910년 한일합병 때까지 송시열의 추종자들인 외척 안동김씨와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여흥 민씨 등 노론이 장악한 조선 정부의 극심한 부정과 부패로 조선 천지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채워졌다. 조선말 세상이 변하여 국가의 위기가 코앞에 와 있는데도 그들은 자기들 당파 노론의 세력유지에만 급급했다. 그들은 각종 부정과 뇌물을 즐기다 일본으로부터 귀족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나라를 팔았다. 외척 안동 김씨는 16세기부터 서울 장동에 살아서 장동 김씨라고도 한다.

이번 세월호의 참사도 나와 내 당파만 잘 되면 좋다는 노론적 사고에서 발생한 것이다. 좀 살 만하다고 우리는 조일전쟁(임진왜란) 전의 조정과 조선말의 노론처럼 위기불감증에 빠져있고 전쟁이 나도 나와 내편만 생존할 궁리만 모색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순신 장군은 420년 전 홀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세월호 사건 장소 주변 진도 일대와 남해안의 조류를 샅샅이 조사했다. 장군은 1597년 맹골수로 위 진도와 해남 사이의 명량(울돌목)에서 급속한 조류를 이용해 10 배 넘는 전선과 병력의 일본 수군을 대파했다.

지금 한국의 해양시스템 운영은 420년 전의 이순신 장군의 수군시스템보다 훨씬 못한 것 같다. 이제 이순신 장군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본받아 어떠한 위기에도 온 국민이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교육 프로그램을 아래와 같이 만들어 유치원 아동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서둘러 실시해야 한다.
현종 왕비, 아들 숙종이 장희빈에게 푹 빠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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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은 절세미녀 맏며느리와 불륜관계였나?

입력 : 2014.05.22 09:41 | 수정 : 2014.05.22 11:12

 

1. 한일합병으로 일본 귀족 작위 받은 조선 당파인 64명 중 56명은 노론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 조약 강제체결 공로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들은 모두 76명이다. 이 중 왕족을 제외하고 당파가 확인된 64명 중 노론이 56명이었고 소론은 6명, 북인이 2명이었다. 남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노론으로 훈1등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현재가치로 현금 200억~300억원), 수천만평의 토지를 받았다. 또 1919년의 3·1 운동 진압 공로로 1920년에는 후작으로 승급했다. 그의 토지 재산은 1억3천만평까지 증식되어 당시 조선 최대의 부자였다고 한다.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은 집단의 대다수는 노론세력이었다. 그들은 명국 황제를 조선 임금의 임금으로 모신 송시열의 추종자들인 노론세력이었다. 일본이 강해지자 그들은 사대(事大)의 대상을 명국 황제에서 일본 천황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한일합병에 앞장섰다. 한일합병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0년 11월 3일 친일 귀족 수작자들이 부부 동반해 도쿄를 관광 기념한 뒤 촬영한 모습.
1910년 11월 3일 친일 귀족 수작자들이 부부 동반해 도쿄를 관광 기념한 뒤 촬영한 모습.
2. 노론 매국노 이완용은 절세미인 며느리와 불륜관계였나?

이완용이 절세미인 맏며느리 임씨와 깊은 불륜관계였다는 내용은 황현의 매천야록은 물론 1910년 1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 시사평론과 1910년 2월 20일자 대한민보 시사만평(아래 그림)에도 실렸다. 이 내용은 당시 장안의 최대 화제였다. 지금 같으면 모든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살을 섞어 만리장성을 쌓는 애정행각을 두 눈으로 본 목격자는 없었던 것 같아 어떤 이들은 이완용과 며느리와의 불륜은 허위이며 당시 조선인들의 매국노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추측에 불과하다고도 한다.

독립협회 발족에도 참여했던 이완용은 25세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나가서 일찍 영어를 배우고 1887년과 1888년에 두 번이나 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서구의 실정을 조선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세력이 강해지자 그는 열강의 세력판도 분석에 열중하였고 그 세력의 향방에 따라 보신 방향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처세만을 하다가 급기야 매국까지 주도하였다. 나라도 팔아먹는 더럽고 추한 이완용이므로 미인 며느리를 보고 그냥 놔 둘리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당시 조선인들은 “아니 땐 굴뚝엔 연기가 안 난다”는 속담을 믿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절세미녀 맏며느리와 불륜관계였나?
3. 이완용 7대 직계 조상 이만성은 예학과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제자

이완용은 1858년 현재의 성남시 판교지구에서 태어났다. 우봉 이씨 판중추부사 이호준(이완용 생부 이석준과 32촌 사이)의 양자인데 이호준의 직계 조상은 대대로 노론의 거물들이었다. 이완용의 양부 이호준의 7 대조 이숙은 우의정을 했고 그 아들 이만성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제자였다. 이만성의 숙부 이영도 조선 예학의 대가이며 송시열의 스승인 김집(김장생의 아들)의 제자였다. 송시열 또한 깁집의 제자였다. 이 예학과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김집의 제자들 후손에서 매국노가 나온 것이다.

예학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중시한 노론 집안의 후손인 이완용과 그 아들 이항구는 일제로부터 매국의 대가로 각각 후작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손자 이병길은 이완용의 후작을 세습 받아 3대가 친일 작위 귀족이 되었다. 이 명문 노론의 집안에서 나라 팔아먹는 것까지도 부족해 이완용이 맏며느리 임씨와 한 이불 속에서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아래는 이완용 조상 계보이다.
매국노 이완용은 절세미녀 맏며느리와 불륜관계였나?
4. 을사조약과 한일합병 조약은 강제 불법으로 무효

1910년 8월 22일 서울에 일본 헌병들을 15간 마다 배치하고서 이완용은 형식상의 어전 내각회의를 소집하고 순종황제 앞에서 한일합병 안을 결의했다. 그날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찌 마사다케의 이름으로 한일합병이 조인되었다. 이들은 국민들의 항전이 두려워 황제의 뜻으로 속여 7일이 지나 발표했다. 국민들은 비통하지만 황제의 뜻인 줄 알고 제대로 항전을 못했다.

1905년 11월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은 고종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해 원천 무효였고 그 이후의 일본 통감부의 모든 정책과 조약도 무효일 수밖에 없다. 순종황제는 1926년 4월 26일 사망 직전 “한일합병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일본과 역신들이 멋대로 불법으로 한 것”이라는 내용의 유조를 신하 조정구에게 내렸다. 같은 해 7월 8일 미국 교민 신문 신한민보에 이 유조가 실렸다(아래 그림). 그리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또는 그 이전의 일본과의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이 재확인되었다.
1926년 7월 8일자 미국 교민 신문 신한민보에 실린 순종의 유조.
1926년 7월 8일자 미국 교민 신문 신한민보에 실린 순종의 유조.
5. 이완용, 고종 망명 정부 수립 봉쇄하고 대한독립 막기 위해 고종 죽여

국민들은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조약을 황제의 뜻인 줄 알고 속아 일제에 제대로 항전도 못했다. 이에 이회영(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친형)은 고종황제를 모시고 중국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이 사실을 고종황제가 직접 세계만방에 알리며, 일본과 전쟁을 하는 개전 조칙을 황제가 직접 내려 전 국민이 일본과 항전을 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고종도 이를 수락했다. 그는 1918년 베이징에 고종이 거처할 행궁의 임차 자금을 마련하고 동생 이시영에게 임차와 수리도 부탁했다. 그런데 이 비밀 계획이 흘러나갔는지 고종이 독이 든 음식을 먹고 급사해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이 사망하기 전날인 1919년 1월 20일 이완용 등이 숙직을 하였고 1월 21일 사망했다고 일제의 기록이 있다. 고종의 사망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완용이 앞날이 두려워 궁녀 2명으로 하여금 식혜에 독약을 타게 해 죽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이렇게 이완용은 고종의 망명 정부를 원천 봉쇄하고 대한의 독립을 영원히 막기 위해 자기가 모시던 임금 고종까지 죽였다.

악독한 이완용도 천식과 폐렴 등 병을 앓다가 1926년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화려했으나 시체는 국민들의 분노에 찬 훼손이 두려워 멀리 전라북도 익산군 남산리 벽지에 묻혔다. 그러나 묘소 훼손이 잦아 직계 손들이 1979년 파묘해 화장 처리했다. 이 때 이완용의 묘에서 일제에게 충성한 공로가 적힌 관 뚜껑(아래 사진)이 나와 원광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완용의 친척 후손인 역사학자가 가져가 불태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완용 직계 손들은 일본에도 귀화하고 캐나다로도 이민 가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이완용의 관 뚜껑.
이완용의 관 뚜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