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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나라 양공(襄公)-송양지인

영국신사77 2017. 6. 6. 19:33

송양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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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襄之仁

1. 개요2. 사건 전개
2.1. 정황2.2. 송양지인 발동2.3. 그 뒤의 이야기
3. 의미4. 여담5. 비슷한 사례들6. 문화 차이7. 미디어

1. 개요[편집]

고사성어의 하나. 송나라 양공같잖은 인정이라는 뜻이다.

현실판 나는 관대하다

2. 사건 전개[편집]

2.1. 정황[편집]

춘추시대,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은 병석에 누웠다. 

태자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1]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사양하였다. 

송환공이 죽은 뒤 자부(玆父)가 공위를 계승했으니, 자부가 바로 송양공(宋襄公)이다. 

송양공은 이복형인 목이를 재상으로 삼았다.

송양공 재위 7년(B.C.643), 패자(覇者)로서 군림하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승하했다.

이 때,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는데, 송 양공은 패자가 될 징조라고 좋게 보았고 야심을 품었다. 

제환공이 세상을 떠날 무렵 제나라는 제환공의 아들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는 탓에 매우 어지러웠다. 

송 양공은 제나라로 출병하여 

환공의 아들 공자 소(昭)를 도와 제효공(齊孝公)으로 세우고, 제나라를 아군으로 삼았다.

4년 후에는 송(宋), 제(齊), 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송 양공은 자신을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재상 목이가 결사반대 했음에도 양공은 기어코 전쟁을 일으켰고, 

그 해 가을에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으며, 

결국 송나라는 초나라와 격돌하게 된다.

2.2. 송양지인 발동[편집]

군대를 이끌고 출진한 송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요격했다. 

이 때 초나라는 군세가 많았고, 송나라의 군세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마침 송나라 군대가 먼저 도착하여 

강을 건너는 초나라 군대를 요격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어떤 군대라도 도하하는 도중에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엄폐를 할 수 없으므로 매우 무력해지기 때문에 

이 때 기습하면 송나라가 매우 유리하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송 양공은 초나라 군대 전군이 다 강을 건널 때까지 공격하지 않았다. 

공자 목이는 강을 건너는 동안에 기습하면 이길 수 있다고 송양공에게 진언했지만 

송양공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초나라 군대는 강을 건넜지만, 아직 진영을 갖추지 못했다. 

진영을 갖추지 못한 군대는 훨씬 약하므로 이 때를 노려서 공격하면 승산이 충분히 있었다. 

재상 목이가 참다못해 송양공에게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습니다.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하지만 송양공은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해선 안되오."

결국에는 목이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다 가다듬고 진을 친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송나라 군대는 숫자가 적었는데 

정정당당하게 싸웠으니 정정당당하게 졌다.

게다가 또 겨우 살아 돌아온 다음 목이는 분노하여 

"왜 그 때에 공격하지 않았나!" 고 추궁했다. 

그러자, 양공은 "군자는 사람이 어려울 때를 노리는 게 아니다."라고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목이는 경악하면서 

"전쟁은 그 보통과 다른 법이오! 

그런 것도 모르면서 무슨 패자가 된다고 헛된 꿈을 꾸셨소!" 라며 반박했다.

2.3. 그 뒤의 이야기[편집]

송 양공 자신도 이 전투에서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재위 14년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고, 

패자가 되려는 양공의 꿈은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그래도 공자가 패자로 쳐줬으니 꿈은 이루어 졌을지도?

송 양공의 후사는 그 아들 송성공이 이었다. 

그나마 목이의 유능한 섭정으로 피해 복구를 하면서 나라를 유지하긴 했다.

패자의 야망을 불태우기는 했으나 결과가 이따위로 끝났기 때문에 

송양공을 춘추오패로 놓는 사례는 거의 없다. 다른 패자로 놓으면 놓았지...

3. 의미[편집]

송양지인은 이렇게 쓸데없이 예의를 차린 탓에 

온갖 헛된 짓을 벌이고, 그러다가 정작 실질을 망쳐놓아 낭패를 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4. 여담[편집]

만일 재상 목이가 이 전투에서 송나라 군대를 지휘했더라면 

춘추오패에 그가 들어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목이는 송나라에서 이전부터 무능하다는 소리 듣던 양공보단 훨씬 재능이 있었기에 

많은 대신들에게 저 바보같은 양공을 제거하고 당신이 공위를 이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양공이 쓰잘 데 없는 전쟁을 벌이는 걸 막기 위하여 애간장을 태워야 했다. 

비록 서자라서 계승권이 약하다는 점이 있었으나 

양공이 말아먹은 걸 보면 대신들이 얼마나 애간장 태우면서 

재상 목이가 공위를 이어야 했다고 안타까워 했을지 알만하다.

실제로 양공이 어리석은 외교로 이 전투가 있기 2년전 

적국이던 초나라에 외교 담판을 지으러 간다고 설치다가 잡혀갈 때 

송나라를 지키던 인재가 바로 목이였다. 

더불어 당시 목이는 

위험하다며 죽기살기로 공께서 가면 안된다, 초나라의 함정이라고 필사적으로 말렸음에도 

양공은 지 혓바닥으로 초나라를 담판지겠다고 손수 나섰다가 저 모양이 되었다. 

초나라는 공왕이 잡혔으니 송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웬걸. 

춘추전국시대 최강국이던 초나라군의 공격을 여러번 물리칠 정도로 

목이는 군사적 안목도 상당했다.

이러자 당황한 초나라에선 양공을 죽일테니 항복하라는 요구를 했으나 

송나라 여론은 "우린 이미 주군(물론 목이)이 있으니 마음대로 해라." 이럴 정도였다. 

즉 양공에게 학을 뗀 송나라 여론이나 대신들도 양공을 죽이든지 말든지 포기하고 

목이를 공으로 인정했던 것이었다. 

이러니 초나라에선 양공을 죽여도 아무런 이득도 없다며 양공을 풀어줬는데 

그렇게 풀려난 양공에게 목이는 군말없이 지휘권을 물려줬다. 

당연히 여론이나 여러 모로 반발했음에도 목이는 듣지 않았다.

양공도 감격하여 목이에게 일절 책임이니 견제도 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가 이거였다. 

이때 목이도 차라리 이 작자를 그때 추방하고 내가 공위를 이어받아야 했나! 후회 했을지도 모른다. 

이 대패로 중위권 군사력을 가졌던 송은 피해 복구 및 여러 모로 신경 써야 했기에 

목이는 그냥 재능있는 중소공국 재상으로 기억되며 전해질 뿐이다.

5. 비슷한 사례들[편집]

송양공은 화살에 맞아 골골거릴 때, 예의 차리는 사람답게 

망명해온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重耳)에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20승의 마차(1승=4마리 이므로 말 80마리)를 내려주며 환대하였다. 

하지만 중이도 송나라의 상황이 어려운 것을 보고, 

송나라에 붙어 있어봐야 영 가망이 없겠다 싶어서 

초나라로 갔다가 진(秦)의 도움으로 진(晉)에 돌아가 공위를 계승한다.


이 사람이 진 문공으로, 송양공의 아들 송성공 때 

송나라는 진나라에 붙어서 진문공의 도움으로 

초나라가 이끄는 여러 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진문공은 송양공과는 반대로 초나라에 신세를 지고 있을 때, 

만일 나를 도와주면 전장에서 초군과 싸울 때 삼사(三舎, 군이 3일간 행군하는 거리)를 물러나 주겠다고 대범한 약속을 했었는데, 

초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약속대로 군을 물려줬지만 

전투에서는 보기좋게 이겨서 실리와 체면을 동시에 차렸다.

조광조 문서에서 송양지인의 사례를 또 찾아볼 수 있다.

6. 문화 차이[편집]

송양공이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한 것은, 

춘추전국 시대 이전의 문화대로 행동하다가 춘추시대의 전쟁이 본격화 되는 환경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실제로 춘추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제후들 간의 전쟁은 상당히 의례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전차'가 중심이 되는 당시 전쟁의 특성상 평원에서 진을 치고 격돌하는 방식이 아니면 승패를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다만 춘추시대 초기부터는 점차 전장의 중심이 전차에서 보병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송양공은 이 흐름을 타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시대에 뒤떨어진 짓을 했으니, 병크가 맞다는 소리다.

특히 송(宋)은 은나라의 직계 후손으로 과거의 문화가 짙게 남은 곳이라 더욱 이러한 사례에 민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송양공은 마냥 인자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송양공은 인신공양을 하는 제사를 벌였다고 한다. 목이는 이에 대해서 "가축도 제사에 따라서 크기를 달리하여 희생제물로 삼는데 사람을 희생물로 썼으니 송양공은 패자가 되기는 커녕 제 명에 죽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상나라에서 인신공양을 즐겨 했다는걸 기억해보면 의미심장하다.

7. 미디어[편집]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당연히 깠다. 다 이길 싸움을 개폼잡다가 다 말아먹었다면서 진문공(중이)에게 특별 대우를 하라고 하던 양공 곁에 붕대 투성이로 지치고 다친 장수들을 그리면서 중이가 한심한 자라는 듯한 눈빛을 하고 대꾸조차 안하고 무시하고 떠나바렸다.

스타크래프트알다리스도 저 먼 항성계에서 송양지인의 병크를 저질렀는데, 저그정신체 을 공격하여 죽였지만 다시 살아나자, 알다리스는 무방비 상태의 적을 기습하는건 프로토스 전사가 할 짓이 아니라며 피닉스에게 근처에 경비만 세우게 하고 다른 곳을 공격한다. 결국 그로 인해 피닉스는 죽어서 용기병으로 다시 부활했다. 다만 프로토스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여유작작하며 전투를 해도 무적에 가까운 위용을 보이던 종족이었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송양공은 말만 춘추오패지 인망이든 실력이든 심각하게 처지는 주제에 터뜨린 병크라 더더욱 돋보인다.

[1] 자는 자어(子魚). 사마를 역임해서 사마자어라고도 한다. 중국 어씨의 시조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