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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이수화- 현상학적現象學的 환원還元의 시詩 | 명시, 해설 감상

영국신사77 2016. 8. 4. 13:43

평설 이수화- 현상학적現象學的 환원還元의 시詩 | 명시, 해설 감상

하옥이 | 조회 31 |추천 0 | 2015.07.03. 14:23

 

평설 이수화


                현상학적現象學的 환원還元의 시詩

                     - 지은경 표제시 《유츠프라카치아》



                                (文協․Pen원임 부이사장, 한국문학비평가협회 회장) 이수화


  《유츠프라카치아》 ―결벽증이 강한 식물이라 사람이 잘못 건드리면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식물임에도 사람의 영혼靈魂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사랑해 주면 목숨이 부활復活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유츠프라카치아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때려도

        예민한 신경줄은 두려움에 떨어요

        그것은 근심 없던 시절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간 갑의 혀가

        도끼의 물어뜯은 이빨자국 같은 거예요

        이쪽은 피해자

        저쪽은 가해자

        당신의 장난은 미친개의 횡포

        파랑새의 아랫도리가 잘려나갔어요

        그녀는 연鳶을 날리며 연緣을 끊으려했지요

        6월이 되면 밤꽃 비린내의 기억이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같은 악취가

        또 한 번 목숨줄을 흔들어요


                                - 지은경, 〈유츠프라카치아〉 全文


  예시例詩 〈유츠프라카치아〉는 지은경 제8시집 《유츠프라카치아》(2014.8. 도서출판책나라 刊行)의 메타텍스트로 취택되고 있을 만큼 문제작이다. 여기 문제작이란 지표어指標語(방향을 가리켜 보이는 표지標識)는 이 텍스트가 지은경 시(문학박사 지은경 시인의 시)를 대표하리만큼 작품성을 담지하고 있으며, 식물임에도 영혼靈魂(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은 비영혼非靈魂의 소유자所有者로 치부했다)을 가졌으나 나의 이 글 모두冒頭에서와 같이 조건부 영혼의 소유자라는 콘텍스트성 등으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는 함의가 그 소이연(까닭)일 터이다.

  지은경 시 〈유츠프라카치아〉를 읽는 문제는 그래서 몇 가지 독법이 대두된다.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후기 산업자본 사회) 열풍 속에 마모되고 있는 ‘을乙’의 이야기로 읽히는 것이다. 이렇게 읽을 때, ‘을乙’(유츠프라카치아)은 우리에게 순수한 방존자放存者(하이데거와 훗설의 현상학적 환원의 순수 자아)라는 명명을 부여받게 된다.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칼을 스쳐도 예민한 신경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그녀(乙)는 도끼의 이빨자국 같은 갑甲의 혀가 그녀의 몸을 유린한 트라우마(그녀 파랑새의 아랫도리가 잘려나간 비극)가 있다. 그녀(乙)의 현상학적現象學的 환원還元(Phenomenological Reduction)의 방존放存, 즉 아랫도리가 잘려나간 그 비극에서의 해방解放이 긴요한 까닭을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이미 상처받은 그녀의 우리 사회․경제학적 한 부분의 증상인 상처 입은 영혼의 부활은 저 현상학적 환원으로써만 순수자아로 부활할 수 있음을 시인(지은경)은 이미 그 도저한 시정신詩精神(포에지)으로 예비해 놓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직관력과 예지의 촉각이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며 아울러 우리 앞에 말없이 현현顯現(명백하게 나타내는)하는 유츠프라카치아(그녀 ‘을乙’)의 현상학적 환원 지향성이야말로 지은경 시의 도저한 시정신임을 우리는 거듭 확인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은경의 詩 〈유츠프라카치아〉의 현상학적 환원지향을 꿈꾸는 시정신 소산은 또 하나, 이 시는 매우 리얼리티가 강한 느낌의 서술시敍述詩(Narrative poem)를 낳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서술시로서의 명료한 갑과 을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우리 후기 산업사회의 바닥없이 비루해질 수 있는 병리현상의 원천이란 점에서 우리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존재자들이다. 따라서 지은경의 서술시는 절망조차 그 전망이 불투명한 세계를 이 시의 서술시 집단 리리시즘을 통해 매우 간명하고 충격적인 어법, 즉 팩트(Fact)의 유의적喩義的 표상화를 성취함으로써 우리에게 비극적 아우라aura의 미학美學을 절감케 하는 묘수妙手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지은경 詩의 리리시즘조차 여여하게 주지적主知的으로 균제케하는 묘수妙手를 말하는 것으로 ‘미친개의 횡포’(갑甲)를 극복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지향성(인간의 순수의지의 지향감)을 보증하는 그의 시정신의 힘에 의해서이다. 갑과 을의 우리 세계가 아우슈비츠의 지옥이라 해도 시인은 또 한 번의 목숨줄로 대결해 보인다. 희망의 연鳶을 날리며 죽음에 이르려했던 을乙로 하여금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 끊임없이 사랑해 주면 죽지 않는 ‘유츠프라카치아’가 되도록 하이데거의 에어아이그니스(Ereignis =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존재의 금빛 현현顯現)를 꿈꾸도록 한다. 이는 훗설의 현상학적 순수 존재로의 환원還元이고,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순수 자아 회복을 지향하는 방존放存(뜨락의 잣나무의 근원적 자아)을 꿈꾸게 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생존이다. 하이데거가 스승 훗설의 현상학적 환원을 좀 더 알기 쉽게 전개한 이 현상학적現象學的 판단중지判斷中止인 이 방존설放存說(순수 자아)은, 뜨락의 잣나무에게 그 잣나무 본래 면목이면 족하지, 거기(노에마Noema)에 왜 쓸데없이 세속적 이용가치(잣이 얼마나 열리느냐, 잣나무 한 그루 값은 얼마냐)를 부여하느냐, 있는 그대로의 잣나무 그대로 ‘방존放存’하라고, 대상을 보는 자의 판단을 덧칠하지 말고 ( )속에 ‘판단중지하라’는 이야기다. 있는 그대로의 ( )속의 현상학 말씀이다. 바로 이것이, 이런 태도(stance)가 지은경의 詩 〈유츠프라카치아〉의 ‘현상학적 환원 지향’(판단중지 지향)의 시정신이다.

  유츠프라카치아(을乙녀)에 대한 우리 비루한 산업사회 경제학의 괄호( )속 판단중지判斷中止에 길항拮抗하는 지은경 詩의 포에지는 따라서 시적 세계관, 시적 비젼을 추동推動하는 창조력임은 말할 것도 없겠다. 주체와 세계의 동일성同一性(identity) 성취 의지에 다름 아니다. 이 주체와 세계의 일체감 성취를 위한 詩 〈유츠프라카치아〉의 화자는 유츠프라카치아라는 을乙 녀女가 두려움에 떠는 예민한 신경줄을 가진 여자女子이고 근심 없던 시절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간 갑甲의 혀에 피해자가 됐고, 파랑새의 아랫도리가 잘려나가 6월이 되면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같은 악취에 목숨줄을 위협당하는 비극적 노에마Noema(노에시스–개척자)를 의식 속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노에마는 너무나 악취가 충격적이어서 화자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또 한 번 목숨줄을 흔들’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화자의 트라우마인 셈이고, 시인에게는 그 트라우마에 길항(버티어 대항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정신이 싹튼 것이다. 그리하여 식물학적으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아니, 시인의 식물학적 발견이 아니고 창의, 창작적 발상이라면 더더욱 신묘하게도 유츠프라카치아가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는 사랑을 베풀면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애스터리스크asterisk를 첨가해 놓고 있는 것이다. 식물엔 영혼靈魂이 없다(아리스토텔레스의 지론)는 진리가 무색해지는 지은경 詩의 충격적 발상의 미학 창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문학자(시인)의 창조행위는 우리의 있는 현실 이상의 현실을 이끌어 와 부당한 현실 극복의 구원의식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선다. 따라서 지은경 시의 유츠프라카치아에 구현하고 있는 현상학적 환원지향의 구원의식은 실증적이고 사실적이며 현실적인 효력을 기대케 하는 시정신에 기반된 것이라 결론지을 수 있겠다. 21세게 초반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인문학 사유의 큰 줄기는 서양사상 쪽에서 반세기 전쯤의 실존주의에서 출발해 현상학, 이어서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로 이어졌고, 동양사상 쪽으로는 원시유학과 주자학, 양명학 그리고 노장철학과 불교사상으로 곱씹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만 해도 세계 인류는 하이데거와 니체로부터 크게 그 사상적 구원을 입었다. 니체는 유츠프라카치아의 구원이 상처를 키우는 인간이 종교에 의지해 전쟁, 성폭행, 테러의 포비아phobia恐怖로 이끌어가는 신에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음을 선포(神의 사망 선고)했고, 훗설과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판단(환원지향)을 ( )속에 유예하는 인간의 순수 자아 환원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 덕에 지은경 詩의 순수 자아를 위한 포에지는 당대 명작시 〈유츠프라카치아〉에 충격적 미학美學으로 형상화를 이룩했고, 이 세상에 많은 을녀乙女들을 스스로의 구원에 승리감을 만끽하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