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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의 신학입장과 목회관

영국신사77 2015. 12. 27. 19:25

정진경의 신학입장과 목회관

 

이신건 박사(서울신대 조직신학)


(2007년 2월 26일, 옛 서울신대 강당)


1. 출생 배경과 신앙 생활 

정진경은 1921년 9월 14일 평안남도 안주의 한 시골에서 출생했다.  

위로는 누나 한 분이 있었는데, 10대 장손이셨던 부친은 그를 낳고서야 긴 한숨을 내쉬셨다고 한다. 대가 끊길까 걱정을 많이 하셨던 까닭이다. 11대 종손인 그는 부모의 사랑을 극진히 받고 자랐지만, 집안은 매우 가난한 편이었다. 


그가 교회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동네를 오가다 본 서산리 장로교회의 우렁찬 풍금 소리와 찬송 소리, 밝은 웃음소리는 자연히 그의 발길을 교회로 이끌던 것이다. 철저한 전통 문화에 젖은 부친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여러 가지 교회의 프로그램에 매혹당한 그는 교회 출석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집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일어났던 한 사건 때문에 그의 부모는 그의 교회 출석은 묵인하시게 되었다. 


비가 몹시 오던 날, 교회에서 돌아오다가 그는 빗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 밤늦게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시던 그의 부친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돌아온 그를 보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덥석 끌어안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교회가 그토록 좋으냐?"


안주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신의주로 이사한 그는 동부 성결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과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세 분(이성봉, 한성과, 김유연) 목사를 만났다. 이 세 분이 차례로 담임한 동부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을 살찌우던 그는, 어느 날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예배당 안에서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다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책감을 느낀 그는 예수의 대속 사건을 실감 있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소한 잘못까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였다. 예를 들면, 13살 때에 나이를 12살로 속여 열차표를 반표로 끊은 것이 생각난 그가 역장에게 회개의 편지와 차액을 보내었다. 이에 감화된 일본인 역장은 그의 정직한 행위와 이를 가능케 한 기독교에 경의를 표하며 돈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런 영적 변화를 겪으며 더욱 열심히 교회 출석을 하던 그는 주위로부터 목회자가 될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 때까지 그의 소원은 외교관이나 사업가가 되는 데 있었다.


18세가 되던 1939년에 무진주식회사(은행)에 취직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소명감과 주위의 권유 때문에 그는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당시로서는 죽기 쉬운 폐병을 앓게 되었다. 몸이 점점 더 여위어 가던 그는 회사를 사직하고, 부모님에게 하직 인사를 드린 후, 정주 석봉 약수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 칩거하며 기도와 성경 읽기, 묵상에 전념하였다. 두 달 여 동안 하나님의 뜻과 병 고침을 간구하던 그는 출애굽기 15장 26절(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신유를 확신한 그는 신학교 입학의 목적으로 곧장 서울로 향하였다.


하지만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명직 목사로부터 3년 정도의 휴식과 치유를 권유받았다. 서운한 마음을 안고 신의주로 돌아 온 그는, 비관적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성경 읽기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에 그의 혈색은 좋아지고, 체중도 늘어났다. 치유를 확신한 그는 하나님에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1943년에 곽성옥 양과 결혼했으며, 해방을 맞은 1945년 9월에 다시 상경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방학을 맞아 신의주로 올라갔으나, 이미 3·8선이 그어진 상태여서 남하할 기회를 쉽게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평양 장로신학교 본과에 입학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남하를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체포와 사선(死線)을 넘는 모험 끝에 그는 남한에 도착하였다. 이 때의 경험은 후일 그가 목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48년에 서울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가 처음으로 부임한 곳은 공주 성결교회였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첫 설교를 하게 된 그가 고민하면서 마치 계시처럼 깨달은 사실은, 그 무렵의 목사들처럼 세상의 삶을 경시하고 천국 위주의 설교를 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는 소망적이고 기대감을 갖는 설교를 주로 하였다. 그리고 양반촌인 그곳에서 그는 새해 첫날 일일이 모든 어른들을 찾아가며 세배를 드렸고, 학생들에게는 영어를 가르치며 꿈과 비전을 심어 주는 목회를 하였다.


1949년 해방 후 열린 성결교회 총회에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세 명의 해외 유학생이 추천하자는 결의가 이루어졌는데, 그 속에 그도 포함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혜화동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유학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에 6.25 동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수유리 뒷산에서 숨어 지내던 그는 보안요원에게 발각되기에 이르렀다. 산 속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지 직전, 마침 지나가던 미군 비행기 때문에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며 감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대구를 거쳐 경주에 도착하자, 그는 경주성결교회의 목회자로 초빙받게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긍정적인 설교를 주로 하였다. 1952년 그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는 부산 동광성결교회로 초빙받아 목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이 수복되자, 고민 끝에 상경한 그는 다시 혜화동 교회에 시무하게 되었다. 성도 2백명의 교회로 성장시킨 그는 다시 유학의 문을 두드렸다. 수차례 입학을 시도한 끝에, 드디어 그는 35세의 나이에 단돈 15불만을 가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렌지 농장 인부와 트럭 운전사로 일하여 돈을 모은 그는 1956년에 아주사 대학에 입학하였다. 학교와 기숙사, 아르바이트 장소를 오가며, 그리고 섬머 스쿨(Summer School)까지 등록한 끝에, 그는 2년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이 염려스러웠지만, 내친 김에 그는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에즈베리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여기서도 그는 2년 반만에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준비하던 중, 그는 딸로부터 받은 편지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 위주의 삶을 고집해 온 것에 대한 자책감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는 박사 학위를 나중으로 미루고 4년 5개월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목회를 하고 싶었지만, 어른의 권유 때문에 그는 서울신학교의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목회에 대한 열망을 떨칠 수 없었던 그는 다행히 목회(장충단 성결교회)의 일까지 겸임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그는 매우 진보적인 교수로 통했다. 그것은 신학 논조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열려 있는 그의 자세 때문이었다. 1963년부터는 강의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그는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학감과 교무처장, 선교문제연구소장, 대학원장 직을 맡았다. 그 동안 그는 풀러(Fuller) 대학 선교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모교인 아주사 퍼시픽(Azusa Pacific) 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5년 동안 신학교에서 봉사해 왔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목회에 대한 소명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론을 목회에 접목할 필요성도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신촌 성결교회로 부름을 받았다. 그 당시 신촌 성결교회 교인들의 신앙 노선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있었고, 은사 운동이 강조되고 있었으며, 신앙의 생활화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저조해 보였다. 성도들도 은혜로운 설교를 주문하였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말했다. "나는 눈치로 목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과 뜻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대언한다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달할 것입니다. 저의 목회 방침은 삶의 현장에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념과 이론만의 신앙은 배제합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신학과 목회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신학은 인간의 삶에 적용되어야 하고, 목회는 사회 현실과 역사 현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은혜로부터 사회 문제와 공동체를 인식시키는 쪽으로 자주 설교의 방향을 바꾸어 나갔으며, 교육과 설교와 행정이 균형을 이루는 목회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점차로 교인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인정하는 민주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역사회를 위한 실천, 미자립교회 지원, 개척교회 설립, 해외 선교사 파송 등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하였다.


1981년에 성결교회의 총회장으로 피선된 후, 그는 점차로 교단 부흥과 초교파적인 일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목회자의 사명과 역할"에 대한 강연을 해 달라고 요청받을 때마다, 그는 목회자의 권위, 소명의식, 조화된 인격을 강조하였다. 1982년에는 서울신학대학의 이사장 직책을 맡았고, 1984년에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시야를 넓히게 되었고, 선교의 중요성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976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외항선교회(회장, 이사장)에 참여하고 있다. 그 동안 세계대회와 세미나, 선교여행을 위해 그는 50여 개국을 방문하였고, 한국교회 연합사업에도 꾸준히 참여하였다(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개신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교서회 이사장, 한국선명회 이사장 등). 1991년에 70세의 정년이 된 그는 18년 간 시무한 신촌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받았다.


정진경의 삶을 되짚어 보면, 청년기 10년은 신학도로, 중년기 15년은 신학자로, 장년기 20여 년은 목회자로 지내 온 삶이었다. 마지막 노년기 동안 그는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을 후진들에게 가르치고 나누는 일에 바치고 싶어한다. 많은 목사들이 질문과 세미나를 요청한다. 그 때마다 그는 자기 관리에 충실한 목회자상을 강조한다. 즉 목회자는 급격하게 변화는 시대와 문화, 인간의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이런 현상을 복음과 알맞게 접목시켜 선교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전 영역에까지 선교 사명을 인식하고 민족 공동체 회복에 대한 공감대를 가져야 하고, 사회와 국가, 세계를 보는 시야를 가지고 복음 사업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17쪽 이하: 정진경 목사의 살아온 발자취).


지금 그는 호서대학교 이사장, 기독교학술원 이사장, 아시아 연합신학대학교 이사 등의 중직을 맡아서 수고하고 있으며, 노구에도 불구하고 선교, 구호, 교육, 연합사업에 꾸준히 헌신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신학과 목회"(1977, 성광문화사), "기독교란 무엇인가?"(1979, 성광문화사), "영원한 행복"(1990, 혜선출판사), "운명에의 도전"(1990, 성광문화사) 등이 있으며, 후진들이 그에게 헌정한 고희논문집 "신학과 목회의 만남"(성광문화사)과 희수기념문집 "목회자의 지성과 인격"(도서출판 진흥)에도 그의 삶과 인격, 신앙과 신학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2. 그의 신학 입장 

1. 교회를 위한 신학 

신학자와 목회자의 삶을 두루 경험한 정진경은 그 자신의 목회 경험을 통하여 신학과 교회의 심각한 괴리 현상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 아직까지 신학만은 전 신도, 전 교회를 위한 것이 못되고, 신학자들만의 독점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한국교회에 신학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까지 의심할 정도로 신자와 신학의 관계는 제쳐놓더라도, 목회자와 신학의 거리마저 너무 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신학과 목회의 큰 괴리의 이유를 정진경은 신학자들의 현장경험 부재와 목회자들의 신학 외면에서 찾는다: "신학이... 죽은 신학으로 끝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학적 이론이 너무 추상적이고 고답적이며 삶과 신앙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목회자나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도 신학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하고 기독교 신앙을 파괴시키거나 약화시키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점도 신학과 교회를 유리시키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은혜가 매주일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다 해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근거가 없다면 그 은혜는 허공을 치고 말 것이며, 또 오래 지속되지도 못할 것이다. 만일 신학이 신학교 강의실의 이론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죽은 신학이 될 것이다."


정진경은 칼 바르트(K. Barth)의 입장에 따라 신학을 "교회의 기능"으로 본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를 떠나서 성립되는 학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기능이며 반성이다. 바르트는 신학과 교회의 연관성을 이와 같이 강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학을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학문으로 세웠으며, 또 한편으로는 교회는 안일한 체제 유지를 목표로 한 제도가 아니라, 학문적 반성과 봉사의 실천으로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선포하는 신앙 공동체임을 천명했다. 이러한 확신 위에서 정진경은 "앞으로 한국교회에 깊고 건전한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목회가 실현되고, 그 결과로 모든 신도들의 신앙고백이 확실한 신학에 근거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240-243). 


2. "창조적 다원성"을 지향하는 신학 

신학과 목회의 괴리를 지적한 정진경은 다른 한편으로 신학의 양극화를 지적하고, 이것을 한국 신학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현대신학의 위기는 다양한 신학적 조류들이 창조적 대화의 장을 포기하고 양극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에서는 다원성 자체를 거부하고 획일적 입장을 보수하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자유주의적 진보주의도 이러한 페쇄적 입장을 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배타적 획일주의를 보수주의나 진보주의 양쪽이 공유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교파의 교리를 절대화하고, 성경과 동일시하고, 교리에 잠재되어 있는 일방성을 간과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학의 이러한 양극화에 대해 정진경이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창조적 다원성"이다. "창조적 다원성"이란 우선 자신의 독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심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상대방의 독특한 신학적 노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 그 출발점을 둔다. 창조적 다원성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참여의 노력이 필요하고,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공통적인 출발점을 확보해야 한다.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양극단 사이의 중용 혹은 통전을 추구하는 정진경의 "창조적 다원성"의 원리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의 복음 이해에서 연유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교파적 협소성을 넘어선다. 즉 그의 신학적 뿌리는 근본적으로 그 어떤 교파의 교리나 주의(Ism)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선포의 핵심적 메시지로 나타났으며, 치유와 기적과 죄인들의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 속에서 이 세상에 분명하게 결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성경은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위에서 정진경은 윤리적, 합리적, 인간학적 신학으로 변질될 수 있는 진보주의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성경의 내용을 축소시켜서 한쪽만을 절대화하고 역사와 현실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는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주의의 역할도 아울러 강조한다. 몰트만(J. Moltmann)의 말을 인용하여 정진경은 "정체성(正體性)의 문제에 일방적으로 집착하면 연관성(聯關性)이 약해지고, 반면에 연관성의 문제에만 일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정체성이 약해지기 쉽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보수주의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진보주의는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양자는 치우친 상대방을 비판할 책임이 있다"고 그는 힘주어 강도한다(240쪽 이하: 한국교회와 신학).


양극단을 통합하는 정진경의 신학 입장은 그의 "통전적 영성(靈性) 이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초월자와의 인격적 관계, 변화의 성숙한 체험, 구체적 역사현장에의 참여라는 3각 도식"으로 설명된다.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란 통전적 영성으로서 모든 것과 하나됨을 이루는 과정으로, 여기에는 종교적(신비적) 영성(하나님과 하나 됨), 실존적 영성(자아와 하나 됨), 공동체적 영성(이웃과 하나 됨) 사회-역사적 영성(사회-역사와 하나 됨), 자연적(우주적) 영성(모든 피조물과 하나 됨) 등 매우 다양한 영성이 있다"(258쪽 이하: 목회자의 영성훈련). 


3. "성결교회의 신학"에 대한 그의 입장 

비록 정진경이 일평생 성결교회 안에서 신학하고 목회하였지만, "창조적 다원성"과 "통전적 영성"을 주장하는 그의 신학 입장은 성결교회의 독특한 전통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제 그가 성결교회의 신학 전통과 그 미래적 전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통전적인 그의 신학이 성결교회의 특수한 신학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정진경도 웨슬리안처럼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리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데서 나타난다. "성결교회의 신학적인 핵심 사상은 '성결'이다.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크게 보아서 웨슬리의 성결론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경은 "성결교회가 모든 점에서 웨슬리를 계승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분명히 지적한다. 왜냐하면 중생과 성결은 웨슬리의 전통에서 이어오고 있지만, 신유와 재림은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18세기의 웨슬리의 중생, 성결의 복음과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신유와 재림의 복음이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의 중생, 성결의 복음이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와 한국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이해에 그대로,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고 계승되었는지, 혹시 강조점이나 내용이 변하지 않았는지 관해서 정진경은 더 이상 주목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관심과 과제를 넘어서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정진경도 한국성결교회의 특색을 "복음주의적"인 것이라고 본다. 성결교회는 성경의 권위와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고 구원의 심층 구조(전인구원)를 선포하며 전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적 특색"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진경은 그의 통전적 신학(영성)의 입장 위에서 지난 시절의 성결교회의 협소한 선교관 혹은 신학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반성한다: "지난날 성결교회는 직접적인 전도, 개인 전도에만 역점을 둔 나머지 기독교 진리를 내면화하고 개인주의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실제적인 삶 전체와는 유리된 수직적인 신앙만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역사의식의 빈곤을 가져왔고, 사회진출의 기회를 놓쳤거나 약화시켰고 따라서 사회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소홀히 했다... 개인구원, 직접전도에만 치우친 나머지 우리 교단은 '사중복음'이란 귀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늘날 대형교단에 비하여 질적으로 뒤떨어진 이유를 겸손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진경은 성결교회의 신학을 닫혀 있거나 완결된 것으로 보지 않고, 미래의 과제를 위해 열려 있을 것을 제언한다: "성결교회는 과감하고 폭넓게 학문의 다양성을 수용하여 그 속에서 우리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90년대, 그리고 다음 세대에는 더욱 큰 문제들이 지상과제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가 새로운 변모를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407쪽 이하: 역사적 관점에서 본 성결교회의 과제와 사명). 


3. 그의 목회관 

정진경은 여러 지면을 통하여 다수의 신학 논문들을 발표하였지만, 특정한 신학 사상을 강하게 주창하지는 않았다. 달리 표현하면, 그는 기독교가 고백하는 보편적인 신앙 체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오래 동안 성결교회 안에서 활동해 왔기 때문에 성결교회의 신학 전통에도 친숙하였다. 하지만 그는 성결교회의 전통에 무조건 집착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오히려 그는 현대 신학과 현대교회의 동향에 대해서도 늘 열린 자세를 갖고 이와 대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교파의 신학자들 못지 않은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성결교회 안에서도 중진 신학자로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통전적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 세월을 목회자로 살아왔으며, 신학자로 활동하는 기간 중에도 목회 현장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신학도 바로 "교회를 위한 신학"이었고, 그래서 그가 발표한 신학도 대개가 "강단을 위한 신학"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과 유리된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목회와 선교 현장 속에서 반성되고 숙성된 내용의 글들을 자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는, 타의에서든 자의에서든, 목회와 목회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자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비중 있는 주제를 선별하여,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자"이다. 목회자는 권위(외적, 형식적, 피상적 권위가 아니라 내적, 정신적, 인격적 권위), 투철한 소명의식, 조화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목회자는 꾸준히 배워야 하며, 오직 그를 선택한 그리스도에게만 붙잡혀 있어야 한다. 목회자의 헌신은 몸을 제물로 드리는 생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생활, 항상 새로운 헌신이어야 한다(205쪽 이하). 


세속화된 한국사회, 한국교회 속에서 영성운동이 긴급히 요청된다. 그리고 성서연구 운동의 대안으로서, 목회자의 지속적인 개발을 위한 훈련으로서도 영성훈련이 요청된다. 한국교회의 영성은 보수주의적 영성(개인성, 내면성, 신비성)과 진보주의적 영성(사회성, 역사성, 우주성)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통전적 영성이다. 영성훈련을 위한 구체적 제안들로서는 침묵과 명상 훈련, 학습훈련, 성례전 개발을 통한 훈련, 사회적 영성개발 훈련이 있다(258쪽 이하). 


신 중심의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은 하나님의 소명, 무조건적인 순종, 당대의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 실천적 방향으로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삶(십자가를 지는 삶)의 체득, 성령의 체험과 그 능력을 덧입는 삶,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349쪽 이하). 


현대목회에서 극복해야 할 문제들로서는 지나친 피안적 타계사상으로 인한 부정적 현실관의 극복, 지나친 개인주의의 극복, 영합주의의 극복이 있다. 한국교회의 목회 유형으로서는 전형적인 유형, 신비적-열광적인 유형, 진보주의적-윤리적인 유형이 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이제 다원화 유형의 목회가 요구된다. 그 전제조건은 역사와의 대화, 균형 있는 방향감각의 수립이다. 다원화 목회의 선교 방법론은 선교의 구조적인 조화, 전 신도의 선교 동력화, 전인사역에 대한 관심에 있다(386쪽 이하).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신건 엮음, 『성결교회 신학의 역사와 특징』, 성결신학연구소, 2000년, 3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