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정진경 목사

영국신사77 2015. 12. 27. 09:12

 

정진경 목사, 자서전 「목적이 분명하면…」 펴내

류재광 기자 입력 : 2008.04.28 14:53
  

▲목적이 분명하면 길은 열린다|홍성사|정진경 구술 이유진 글

「목적이 분명하면 길은 열린다」는 1921년에 태어나 현재 88세인 정진경 목사가

자신의 일생을 조목조목 되짚은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와 공산 치하,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 근대사 속에서 굳건히 지켜온 정진경 목사의 신앙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친구 따라 교회 갔다가 부모님 반대하는 예수쟁이가 된 사연부터 사춘기 시절 중생의 체험, 폐결핵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이야기, 부인 곽정옥 여사에 대한 애틋한 사랑, 과거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 그리고 후배 목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정진경 목사의 진솔한 사연과 신앙 여정이 가득 펼쳐진다.


책에서 볼 수 있는 정진경 목사의 ‘평생 목적’은

많은 목회자들이 바라는 부흥·명성·존경이 아니라

오직 ‘일평생 주님께 사로잡힌 삶’이었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기에,

그는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신학자로, 목회자로, 교회연합의 지도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 스승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최초 목양지는 1948년 공주성결교회였다.

그리고 마지막 목회지는 1991년 은퇴한 신촌성결교회다.

약 40년을 목회자로서 현장에 있었고,

은퇴 후에도 늘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된 목회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연합사업, 구호사역 등 평생을 걸쳐 일해 왔던 수많은 일들을 현재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 많은 직함 중 오직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라는 명함 하나만으로

자신을 내보이는 참된 겸손의 목회자다.

정진경 목사는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아내 곽성옥과 20대에 만나, 지금까지 서로를 훌륭한 남편과 아내로 존경하며 살고 있다. 정 목사의 아내를 비롯해 그를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진경 목사를 온유와 따스함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했던 내용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목회자라고 말한다.

이 책은 정진경 목사가 구술한 내용을 토대로 이유진 작가가 구성했다. 작가는 이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이 시대에 모델이 될 만한 목회자를 글로 풀어내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때마침 정 목사님을 만나 여러 얘기를 나누게 됐다”며 “공산당의 총알에서 건지신 하나님, 폐결핵에서 살리신 하나님, 평생을 연합사역을 위해 힘쓰게 하셨던 하나님 등 정 목사님의 인생 속에 역사한 하나님을 듣고 어느덧 정 목사님의 인생을 한국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서 기록으로 남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 추천사를 쓴 김상원 전 대법관은

 “정 목사님이 한국교계에 끼친 업적은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며

 “평생을 오직 예수님만을 향한, 복음적인 삶을 살아오신 정 목사님은

잘못을 저질러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서도 언제나 최고의 장점을 찾아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특유의 온화함과 겸손함으로,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평했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담임 이재철 목사는 “정 목사님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소명을 다하기 위해, 그 어떤 거짓과 불의에도 일체의 타협 없이 온유하기만 하셨다”며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때문에 정 목사님은 일평생 주님께 사로잡혀 사셨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혜 앞에 늘 깨어 있는 정 목사님을 한국 교회를 위한 신학자로, 목회자로, 교회연합의 지도자로,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 스승으로 세워 주신 것”이라고 했다.

정진경의 신학입장과 목회관

 

이신건 박사(서울신대 조직신학)


(2007년 2월 26일, 옛 서울신대 강당)

 

1. 출생 배경과 신앙 생활 

정진경은 1921년 9월 14일 평안남도 안주의 한 시골에서 출생했다. 

위로는 누나 한 분이 있었는데, 10대 장손이셨던 부친은 그를 낳고서야 긴 한숨을 내쉬셨다고 한다. 대가 끊길까 걱정을 많이 하셨던 까닭이다.


11대 종손인 그는 부모의 사랑을 극진히 받고 자랐지만, 집안은 매우 가난한 편이었다. 그가 교회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동네를 오가다 본 서산리 장로교회의 우렁찬 풍금 소리와 찬송 소리, 밝은 웃음소리는 자연히 그의 발길을 교회로 이끌던 것이다. 철저한 전통 문화에 젖은 부친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여러 가지 교회의 프로그램에 매혹당한 그는 교회 출석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집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일어났던 한 사건 때문에 그의 부모는 그의 교회 출석은 묵인하시게 되었다. 


비가 몹시 오던 날, 교회에서 돌아오다가 그는 빗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 밤늦게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시던 그의 부친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돌아온 그를 보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덥석 끌어안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교회가 그토록 좋으냐?"


안주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신의주로 이사한 그는 동부 성결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과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세 분(이성봉, 한성과, 김유연) 목사를 만났다. 이 세 분이 차례로 담임한 동부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을 살찌우던 그는 어느 날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예배당 안에서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다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책감을 느낀 그는 예수의 대속 사건을 실감 있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소한 잘못까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였다. 예를 들면, 13살 때에 나이를 12살로 속여 열차표를 반표로 끊은 것이 생각난 그가 역장에게 회개의 편지와 차액을 보내었다. 이에 감화된 일본인 역장은 그의 정직한 행위와 이를 가능케 한 기독교에 경의를 표하며 돈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런 영적 변화를 겪은 더욱 열심히 교회 출석을 하던 그는 주위로부터 목회자가 될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 때까지 그의 소원은 외교관이나 사업가가 되는 데 있었다.

18세가 되던 1939년에 무진주식회사(은행)에 취직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소명감과 주위의 권유 때문에 그는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당시로서는 죽기 쉬운 폐병을 앓게 되었다. 몸이 점점 더 여위어 가던 그는 회사를 사직하고, 부모님에게 하직 인사를 드린 후, 정주 석봉 약수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 칩거하며 기도와 성경 읽기, 묵상에 전념하였다. 두 달 여 동안 하나님의 뜻과 병 고침을 간구하던 그는 출애굽기 15장 26절(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신유를 확신한 그는 신학교 입학의 목적으로 곧장 서울로 향하였다.

하지만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명직 목사로부터 3년 정도의 휴식과 치유를 권유받았다. 서운한 마음을 안고 신의주로 돌아 온 그는 비관적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성경 읽기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에 그의 혈색은 좋아지고, 체중도 늘어났다. 치유를 확신한 그는 하나님에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1943년에 곽성옥 양과 결혼했으며, 해방을 맞은 1945년 9월에 다시 상경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방학을 맞아 신의주로 올라갔으나, 이미 3·8선이 그어진 상태여서 남하할 기회를 쉽게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평양 장로신학교 본과에 입학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남하를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체포와 사선(死線)을 넘는 모험 끝에 그는 남한에 도착하였다. 이 때의 경험은 후일 그가 목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48년에 서울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가 처음으로 부임한 곳은 공주 성결교회였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첫 설교를 하게 된 그가 고민하면서 마치 계시처럼 깨달은 사실은, 그 무렵의 목사들처럼 세상의 삶을 경시하고 천국 위주의 설교를 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는 소망적이고 기대감을 갖는 설교를 주로 하였다. 그리고 양반촌인 그곳에서 그는 새해 첫날 일일이 모든 어른들을 찾아가며 세배를 드렸고, 학생들에게는 영어를 가르치며 꿈과 비전을 심어 주는 목회를 하였다.

1949년 해방 후 열린 성결교회 총회에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세 명의 해외 유학생이 추천하자는 결의가 이루어졌는데, 그 속에 그도 포함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혜화동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유학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에 6.25 동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수유리 뒷산에서 숨어 지내던 그는 보안요원에게 발각되기에 이르렀다. 산 속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지 직전, 마침 지나가던 미군 비행기 때문에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며 감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대구를 거쳐 경주에 도착하자, 그는 경주성결교회의 목회자로 초빙받게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긍정적인 설교를 주로 하였다. 1952년 그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는 부산 동광성결교회로 초빙받아 목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이 수복되자, 고민 끝에 상경한 그는 다시 혜화동 교회에 시무하게 되었다. 성도 2백명의 교회로 성장시킨 그는 다시 유학의 문을 두드렸다. 수차례 입학을 시도한 끝에, 드디어 그는 35세의 나이에 단돈 15불만을 가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렌지 농장 인부와 트럭 운전사로 일하여 돈을 모은 그는 1956년에 아주사 대학에 입학하였다. 학교와 기숙사, 아르바이트 장소를 오가며, 그리고 섬머 스쿨(Summer School)까지 등록한 끝에, 그는 2년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이 염려스러웠지만, 내친 김에 그는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에즈베리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여기서도 그는 2년 반만에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준비하던 중, 그는 딸로부터 받은 편지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 위주의 삶을 고집해 온 것에 대한 자책감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는 박사 학위를 나중으로 미루고 4년 5개월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목회를 하고 싶었지만, 어른의 권유 때문에 그는 서울신학교의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목회에 대한 열망을 떨칠 수 없었던 그는 다행히 목회(장충단 성결교회)의 일까지 겸임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그는 매우 진보적인 교수로 통했다. 그것은 신학 논조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열려 있는 그의 자세 때문이었다. 1963년부터는 강의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그는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학감과 교무처장, 선교문제연구소장, 대학원장 직을 맡았다. 그 동안 그는 풀러(Fuller) 대학 선교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모교인 아주사 퍼시픽(Azusa Pacific) 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5년 동안 신학교에서 봉사해 왔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목회에 대한 소명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론을 목회에 접목할 필요성도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신촌 성결교회로 부름을 받았다. 그 당시 신촌 성결교회 교인들의 신앙 노선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있었고, 은사 운동이 강조되고 있었으며, 신앙의 생활화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저조해 보였다. 성도들도 은혜로운 설교를 주문하였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말했다. "나는 눈치로 목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과 뜻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대언한다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달할 것입니다. 저의 목회 방침은 삶의 현장에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념과 이론만의 신앙은 배제합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신학과 목회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신학은 인간의 삶에 적용되어야 하고, 목회는 사회 현실과 역사 현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은혜로부터 사회 문제와 공동체를 인식시키는 쪽으로 자주 설교의 방향을 바꾸어 나갔으며, 교육과 설교와 행정이 균형을 이루는 목회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점차로 교인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인정하는 민주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역사회를 위한 실천, 미자립교회 지원, 개척교회 설립, 해외 선교사 파송 등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하였다.

1981년에 성결교회의 총회장으로 피선된 후, 그는 점차로 교단 부흥과 초교파적인 일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목회자의 사명과 역할"에 대한 강연을 해 달라고 요청받을 때마다, 그는 목회자의 권위, 소명의식, 조화된 인격을 강조하였다. 1982년에는 서울신학대학의 이사장 직책을 맡았고, 1984년에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시야를 넓히게 되었고, 선교의 중요성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976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외항선교회(회장, 이사장)에 참여하고 있다. 그 동안 세계대회와 세미나, 선교여행을 위해 그는 50여 개국을 방문하였고, 한국교회 연합사업에도 꾸준히 참여하였다(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개신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교서회 이사장, 한국선명회 이사장 등). 1991년에 70세의 정년이 된 그는 18년 간 시무한 신촌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받았다.

정진경의 삶을 되짚어 보면, 청년기 10년은 신학도로, 중년기 15년은 신학자로, 장년기 20여 년은 목회자로 지내 온 삶이었다. 마지막 노년기 동안 그는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을 후진들에게 가르치고 나누는 일에 바치고 싶어한다. 많은 목사들이 질문과 세미나를 요청한다. 그 때마다 그는 자기 관리에 충실한 목회자상을 강조한다. 즉 목회자는 급격하게 변화는 시대와 문화, 인간의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이런 현상을 복음과 알맞게 접목시켜 선교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전 영역에까지 선교 사명을 인식하고 민족 공동체 회복에 대한 공감대를 가져야 하고, 사회와 국가, 세계를 보는 시야를 가지고 복음 사업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17쪽 이하: 정진경 목사의 살아온 발자취).

지금 그는 호서대학교 이사장, 기독교학술원 이사장, 아시아 연합신학대학교 이사 등의 중직을 맡아서 수고하고 있으며, 노구에도 불구하고 선교, 구호, 교육, 연합사업에 꾸준히 헌신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신학과 목회"(1977, 성광문화사), "기독교란 무엇인가?"(1979, 성광문화사), "영원한 행복"(1990, 혜선출판사), "운명에의 도전"(1990, 성광문화사) 등이 있으며, 후진들이 그에게 헌정한 고희논문집 "신학과 목회의 만남"(성광문화사)과 희수기념문집 "목회자의 지성과 인격"(도서출판 진흥)에도 그의 삶과 인격, 신앙과 신학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2. 그의 신학 입장 

1. 교회를 위한 신학 

신학자와 목회자의 삶을 두루 경험한 정진경은 그 자신의 목회 경험을 통하여 신학과 교회의 심각한 괴리 현상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 아직까지 신학만은 전 신도, 전 교회를 위한 것이 못되고, 신학자들만의 독점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한국교회에 신학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까지 의심할 정도로 신자와 신학의 관계는 제쳐놓더라도, 목회자와 신학의 거리마저 너무 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신학과 목회의 큰 괴리의 이유를 정진경은 신학자들의 현장경험 부재와 목회자들의 신학 외면에서 찾는다: "신학이... 죽은 신학으로 끝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학적 이론이 너무 추상적이고 고답적이며 삶과 신앙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목회자나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도 신학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하고 기독교 신앙을 파괴시키거나 약화시키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점도 신학과 교회를 유리시키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은혜가 매주일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다 해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근거가 없다면 그 은혜는 허공을 치고 말 것이며, 또 오래 지속되지도 못할 것이다. 만일 신학이 신학교 강의실의 이론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죽은 신학이 될 것이다."

정진경은 칼 바르트(K. Barth)의 입장에 따라 신학을 "교회의 기능"으로 본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를 떠나서 성립되는 학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기능이며 반성이다. 바르트는 신학과 교회의 연관성을 이와 같이 강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학을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학문으로 세웠으며, 또 한편으로는 교회는 안일한 체제 유지를 목표로 한 제도가 아니라, 학문적 반성과 봉사의 실천으로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선포하는 신앙 공동체임을 천명했다. 이러한 확신 위에서 정진경은 "앞으로 한국교회에 깊고 건전한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목회가 실현되고, 그 결과로 모든 신도들의 신앙고백이 확실한 신학에 근거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240-243). 

2. "창조적 다원성"을 지향하는 신학 

신학과 목회의 괴리를 지적한 정진경은 다른 한편으로 신학의 양극화를 지적하고, 이것을 한국 신학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현대신학의 위기는 다양한 신학적 조류들이 창조적 대화의 장을 포기하고 양극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에서는 다원성 자체를 거부하고 획일적 입장을 보수하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자유주의적 진보주의도 이러한 페쇄적 입장을 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배타적 획일주의를 보수주의나 진보주의 양쪽이 공유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교파의 교리를 절대화하고, 성경과 동일시하고, 교리에 잠재되어 있는 일방성을 간과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학의 이러한 양극화에 대해 정진경이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창조적 다원성"이다. "창조적 다원성"이란 우선 자신의 독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심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상대방의 독특한 신학적 노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 그 출발점을 둔다. 창조적 다원성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참여의 노력이 필요하고,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공통적인 출발점을 확보해야 한다.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양극단 사이의 중용 혹은 통전을 추구하는 정진경의 "창조적 다원성"의 원리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의 복음 이해에서 연유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교파적 협소성을 넘어선다. 즉 그의 신학적 뿌리는 근본적으로 그 어떤 교파의 교리나 주의(Ism)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선포의 핵심적 메시지로 나타났으며, 치유와 기적과 죄인들의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 속에서 이 세상에 분명하게 결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성경은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위에서 정진경은 윤리적, 합리적, 인간학적 신학으로 변질될 수 있는 진보주의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성경의 내용을 축소시켜서 한쪽만을 절대화하고 역사와 현실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는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주의의 역할도 아울러 강조한다. 몰트만(J. Moltmann)의 말을 인용하여 정진경은 "정체성(正體性)의 문제에 일방적으로 집착하면 연관성(聯關性)이 약해지고, 반면에 연관성의 문제에만 일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정체성이 약해지기 쉽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보수주의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진보주의는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양자는 치우친 상대방을 비판할 책임이 있다"고 그는 힘주어 강도한다(240쪽 이하: 한국교회와 신학).

양극단을 통합하는 정진경의 신학 입장은 그의 "통전적 영성(靈性) 이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초월자와의 인격적 관계, 변화의 성숙한 체험, 구체적 역사현장에의 참여라는 3각 도식"으로 설명된다.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란 통전적 영성으로서 모든 것과 하나됨을 이루는 과정으로, 여기에는 종교적(신비적) 영성(하나님과 하나 됨), 실존적 영성(자아와 하나 됨), 공동체적 영성(이웃과 하나 됨) 사회-역사적 영성(사회-역사와 하나 됨), 자연적(우주적) 영성(모든 피조물과 하나 됨) 등 매우 다양한 영성이 있다"(258쪽 이하: 목회자의 영성훈련). 

3. "성결교회의 신학"에 대한 그의 입장 

비록 정진경이 일평생 성결교회 안에서 신학하고 목회하였지만, "창조적 다원성"과 "통전적 영성"을 주장하는 그의 신학 입장은 성결교회의 독특한 전통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제 그가 성결교회의 신학 전통과 그 미래적 전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통전적인 그의 신학이 성결교회의 특수한 신학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정진경도 웨슬리안처럼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리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데서 나타난다. "성결교회의 신학적인 핵심 사상은 '성결'이다.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크게 보아서 웨슬리의 성결론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경은 "성결교회가 모든 점에서 웨슬리를 계승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분명히 지적한다. 왜냐하면 중생과 성결은 웨슬리의 전통에서 이어오고 있지만, 신유와 재림은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18세기의 웨슬리의 중생, 성결의 복음과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신유와 재림의 복음이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의 중생, 성결의 복음이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와 한국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이해에 그대로,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고 계승되었는지, 혹시 강조점이 나 내용이 변하지 않았는지 관해서 정진경은 더 이상 주목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관심과 과제를 넘어서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정진경도 한국성결교회의 특색을 "복음주의적"인 것이라고 본다. 성결교회는 성경의 권위와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고 구원의 심층 구조(전인구원)를 선포하며 전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적 특색"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진경은 그의 통전적 신학(영성)의 입장 위에서 지난 시절의 성결교회의 협소한 선교관 혹은 신학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반성한다: "지난날 성결교회는 직접적인 전도, 개인 전도에만 역점을 둔 나머지 기독교 진리를 내면화하고 개인주의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실제적인 삶 전체와는 유리된 수직적인 신앙만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역사의식의 빈곤을 가져왔고, 사회진출의 기회를 놓쳤거나 약화시켰고 따라서 사회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소홀히 했다... 개인구원, 직접전도에만 치우친 나머지 우리 교단은 '사중복음'이란 귀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늘날 대형교단에 비하여 질적으로 뒤떨어진 이유를 겸손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진경은 성결교회의 신학을 닫혀 있거나 완결된 것으로 보지 않고, 미래의 과제를 위해 열려 있을 것을 제언한다: "성결교회는 과감하고 폭넓게 학문의 다양성을 수용하여 그 속에서 우리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90년대, 그리고 다음 세대에는 더욱 큰 문제들이 지상과제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가 새로운 변모를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407쪽 이하: 역사적 관점에서 본 성결교회의 과제와 사명). 

3. 그의 목회관 

정진경은 여러 지면을 통하여 다수의 신학 논문들을 발표하였지만, 특정한 신학 사상을 강하게 주창하지는 않았다. 달리 표현하면, 그는 기독교가 고백하는 보편적인 신앙 체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오래 동안 성결교회 안에서 활동해 왔기 때문에 성결교회의 신학 전통에도 친숙하였다. 하지만 그는 성결교회의 전통에 무조건 집착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오히려 그는 현대 신학과 현대교회의 동향에 대해서도 늘 열린 자세를 갖고 이와 대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교파의 신학자들 못지 않은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성결교회 안에서도 중진 신학자로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통전적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 세월을 목회자로 살아왔으며, 신학자로 활동하는 기간 중에도 목회 현장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신학도 바로 "교회를 위한 신학"이었고, 그래서 그가 발표한 신학도 대개가 "강단을 위한 신학"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과 유리된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목회와 선교 현장 속에서 반성되고 숙성된 내용의 글들을 자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는, 타의에서든 자의에서든, 목회와 목회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자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비중 있는 주제를 선별하여,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1. 목회자의 기본자세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자"이다. 목회자는 권위(외적, 형식적, 피상적 권위가 아니라 내적, 정신적, 인격적 권위), 투철한 소명의식, 조화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목회자는 꾸준히 배워야 하며, 오직 그를 선택한 그리스도에게만 붙잡혀 있어야 한다. 목회자의 헌신은 몸을 제물로 드리는 생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생활, 항상 새로운 헌신이어야 한다(205쪽 이하). 

2. 목회자의 영성훈련 

세속화된 한국사회, 한국교회 속에서 영성운동이 긴급히 요청된다. 그리고 성서연구 운동의 대안으로서, 목회자의 지속적인 개발을 위한 훈련으로서도 영성훈련이 요청된다. 한국교회의 영성은 보수주의적 영성(개인성, 내면성, 신비성)과 진보주의적 영성(사회성, 역사성, 우주성)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통전적 영성이다. 영성훈련을 위한 구체적 제안들로서는 침묵과 명상 훈련, 학습훈련, 성례전 개발을 통한 훈련, 사회적 영성개발 훈련이 있다(258쪽 이하). 

3. 신(神) 중심의 목회전략 

신 중심의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은 하나님의 소명, 무조건적인 순종, 당대의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 실천적 방향으로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삶(십자가를 지는 삶)의 체득, 성령의 체험과 그 능력을 덧입는 삶,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349쪽 이하). 

4.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목회 형태론

현대목회에서 극복해야 할 문제들로서는 지나친 피안적 타계사상으로 인한 부정적 현실관의 극복, 지나친 개인주의의 극복, 영합주의의 극복이 있다. 한국교회의 목회 유형으로서는 전형적인 유형, 신비적-열광적인 유형, 진보주의적-윤리적인 유형이 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이제 다원화 유형의 목회가 요구된다. 그 전제조건은 역사와의 대화, 균형 있는 방향감각의 수립이다. 다원화 목회의 선교 방법론은 선교의 구조적인 조화, 전 신도의 선교 동력화, 전인사역에 대한 관심에 있다(386쪽 이하).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신건 엮음, 『성결교회 신학의 역사와 특징』, 성결신학연구소, 2000년, 31-43쪽)




故 아천 정진경 목사의 삶과 신학

조향록 목사 
(기독교장로회 전 총회장, 초동교회 원로목사)


 

저는 이 시간  먼저 가신 정진경 목사님을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김명혁 목사님께서 쓰신 추모의 글을 읽으며, 구절 구절마다 눈물을 씹으며 추모의 정을 되새겼습니다. 참으로 좋은 목사님을 동역자로, 친구로 당대에 함께 했다는 것이 저에게는 그지없는 축복이고 영광이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신촌성결교회 담임목사로서 목회의 전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계는 정진경 목사님과 신촌성결교회를 한 몸처럼 느꼈습니다. 목사님은 신촌성결교회의 중흥을 이루어 모든 목회자들의 사표가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성결교단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한 시대의 큰 지도자로서 존경과 신뢰를 받으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신촌성결교회의 목사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향력은 신촌성결교회를 넘어서 한국교회 전반에 확장 되어 갔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한국기독교 인구가 급격히 성장하던 시기에 그분의 지도력이 미치지 않은 선교 운동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결과 그분이 은퇴하실 때, 그분은 이미 한국교회의 큰 목사님이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항상 그러하셨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더욱 자신을 낮추시며 어느 자리에 가셔서도 앞에 나서지 않으셨습니다. 교계 모임의 회장단이나 고문단에는 의례히 목사님 이름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 스스로 원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자리에 연연하시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을 붙잡으려는 어떤 노력도 일절 하시지 않았습니다. 항상 겸손하시고 항상 인자하시고 항상 화평하시고 참으로 좋은 목사님이요 목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신촌성결교회의 목사님이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빛내신 목사님이셨습니다.

이러한 정진경 목사님의 성품과 영향력은 한국교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셨습니다. 7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인구가 확장되면서 교단의 분열현상이 생겼습니다. 해방이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3개 교단이 한국교회협의회를 조직하였고(NCC), 각 교단은 동시에 세계교회협의회에(WCC)에 회원교회로 가입하여 한국교회의 연합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런데 70년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에 항거하는 교계 일부 목사님들이 한국교회협의회를 반정부운동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한국개신교회의 단일 협의기관이었던 한국교회협의회와 가맹 교파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그 결과  기존교파의 내부적 분열이 가속화되어 수 년 내에 30여 교파로 분열, 분립하게 되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과 저는 고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여러 차례 한국교회 개신교회 전반의 분열현상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를 논의하셨습니다. 당시 한경직 목사님은 NCC의 전직 회장이셨고, 저도 NCC의 부회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그 결과 NCC를 그대로 유지하는 동시에 30여 개 교파로 나눠진 교회들을 함께 묶어 협의체를 조직한 후, 이를 발전시켜 하나의 연합기구를 이루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그것이 오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탄생입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의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고 정진경 목사님의 “소리 없는 지도력”이 이러한 큰 일을 이룰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하나됨은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입니다. 나는 위에서 정진경 목사님을 “소리없는 지도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지도력이요, 그것이 바로 목사가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지도력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개신교의 교회신학의 교류를 위해 조직된 복음주의 신학협의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고, 때로 회장직도 감당하셨습니다. 이로써 성결교단이라는 한 교파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잇는 전세계 복음주의 신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세상 안에서 하나의 몸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 된 세계 교회와의 관계형성이라는 신앙고백적 일치를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을 통하여 한국성결교회의 교파신학적 특수성은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복음적 신앙고백 위에 근거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도 바울과 성 어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더욱 선명하게 선언된 복음적 신앙전통에 연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수평적으로는 역사적 교회의 신앙고백 그리고 수직적으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직결되어 주의 몸 된 교회로서 그 뿌리를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성결교단은 한국개신교회의 복음주의 신학전통을 계승하고, 또 전승하는 주체적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는 신촌성결교회가 신촌포럼을 설치한 그 발상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금번 발제를 강연을 준비하면서 그간 진행된 신촌포럼의 주제들을 읽어보면서, 신촌성결교회는 이미 한국개신교파 전체를 포함하고 대표하는 교회로서 선교의 장을 인간생활의 전영역으로 확대하여 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역은 신학적 근거가 없이는 시작할 수 없고 동시에 그 신학적 근거는 목회현장의 실험적 요망이 전제되지 않고선 시작 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정진경 목사님의 신촌성결교회 30년 목회가 그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의 목회 일생은 이렇게 신촌교회의 목사요, 한국교회를 위한 목자적 목사로 그리고 복음주의 개혁파 신학의 산 증인으로 큰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불러 세우신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퇴 후에도 그에게 건강을 주시고, 총명도 흐리지 않게 하시고, 열정도 식지 않게 하시며, 또 다른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제가 오늘 이 포럼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본론에 앞서 긴 서론을 이야기한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도들의 일반적 통념이 되고 있는 목사의 이미지는 개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로서, 교계에 대한 공헌, 사회에 대한 공헌 등은 해도 좋고 안해도 무방하게 여깁니다. 다른 한편으로 목회자 자신들도 현장 목회를 안하면 자기는 목사가 아닌 것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교회가 목사 정년제를 채택하면서부터 목사직 그 자체가 철저히 세속적 종교 직업화되어 그 본질이 변질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불러 세워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요, 주님의 종입니다. 때문에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사명을 정지할 수 없습니다. 월급이 없다고 목사직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초빙하여 주는 교회가 없다고 목사의 사명을 정지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씨 뿌리는 밭이 옥토만은 아닙니다. 옥토에도 뿌리지만, 길바닥에도 뿌립니다. 가시덤불에서도 돌짝밭에도 씨를 뿌린다고 했습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에게 받은 복음전파의 사명은 옥토에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길에도 가시덤불에도, 돌짝밭에도 뿌리는 것입니다. 목회자 사명의 영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만 국한되는 것은 유대교의 성전 중심적 종교입니다. 성전 중심적인 유대교와 같은 교회는 목사가 제사장처럼 교회 안에서 예배만 잘 인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Temple입니다. Temple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이름은 에클레시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역사 안에서 성령으로 사역하시는 그리스도 복음사역의 현존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사역의 영역은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속하셔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 과정, 그 모든 시대, 모든 곳에 목사가 꼭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신촌성결교회 담임목사, 한국 개신교회를 통합하고 이끌어 가신 목자의 사명, 그리고 한국선명회 이사장으로서 사회봉사에 기역한 업적과 평화통일 정책 자문위원회 종교분과위원으로서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우리 동포들을 규합하고 고국과의 연결 관계를 공고히 다지게 한 공적 등 온 민족적인 노고는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할 뿐입니다.

이러한 정 목사님의 사회 활동을 살펴보면 하나는 민족통일을 위한 기반조성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회사업기관입니다. 한국선명회는 6.25사변에서 부모 잃은 어린고아들을 도우려고 미국인이 시작한 사업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그 책임을 맡은 이후에 국가기관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큰 사회사업 기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불행한 민족적 수탈 시기에 고아들을 돕는 일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위로와 위안의 등불이 됨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하시면서 그 뒤를 정진경 목사님께서 이으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이 이사장으로 재임하신 기간 두 분의 실무자가 공직했습니다. 한분은 사회사업의 전문가이시고 세계 기독교 봉사기관에 크게 봉사하신 분이십니다. 국내에서 사회봉사 운동가들 중에서도 1인자이십니다. 그의 뒤를 이은 다음 분은 평신도이시지만 아세아 기독교협의회의 간사와 제네바에 소재한 교회협의회 국제 국장 등으로 재직했던 유능한 인재입니다.

저는 이 두 분의 생애 전 과정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유능한 인재를 선택하여 그 자리에 세우는 것도, 그리고 마음 놓고 그들의 지식과 경험, 꿈과 능력을 이 선한 사업에 아낌없이 쏟아 부을 수 있게 하는 일은 바로 정진경 목사님의 “소리없는 지도력”이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선명회 이사장직을 그의 목회자로서의 사명 수행의 연장으로 생각하시고 세워놓은 유능한 지도자들과 그 산하에 있는 모든 종사자들을 목회하시고 그 사업을 위해 쉬지 않는 기도로서 그 직무를 감당하셨습니다.

금번 신촌포럼에서 제가 맡은 주제는 “정진경 목사가 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입니다. 내가 아는 정진경 목사님은 어떤 일에 참여 할 때는 자신의 전부를 바치겠다는 사명감으로 임하셨으며, 그 일 속에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찾아 목사로서 충성을 다하는 분입니다. 개교회를 섬기거나 한국교회 전체를 섬기면서 또한 사회 봉사 기관을 섬기면서 그 일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구현하려는 복음전파의 사명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자각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목사직에 철저히 헌신한 분입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그분은 복음전파의 장으로 길가, 가시덤불, 돌짝밭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렸던 농부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그 어느 곳, 그 어느 일터에도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목사가 가지 못할 자리가 없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말로 끝내지 않고, 길처럼 굳어진 땅은 갈아엎어 옥토로 만들고 가시덤불이면 가시넝쿨을 뽑아내고 돌짝밭이면 돌들을 집어내어 옥토를 만들어가면서 씨뿌리는 농부처럼 가슴에 억척같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불붙이고 그 자리에 헌신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참여한 자리에는 언짢은 소리, 다툼이나 고함소리가 들려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일하시는 그 일터에서 갈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분이 지조가 없으신 분도 아닙니다. 그분은 옳고 그름이 분명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그가 참여한 일터에서는 언제나 조용하고 언제나 다정하고 언제나 평화로웠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던지 그분은 자기 마음을 비우고, 맑은 마음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소리없는 지도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진경 목사님에게 내려주신 은혜의 선물인가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과 저는 생신날짜가 틀려서 한살터울의 형제이지, 동갑친구이기도합니다. 우리 두 사람은 스물네 살이 되던 1945년 8.15 해방을 맞았습니다. 여기 앉으신 대부분은 나라 잃고 살아본 경험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나라를 잃으면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나라 없이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나라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해방된 내나라, 내 땅에서 살지 못하고 남한으로 내려와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고향 없는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한민족 최대의 불행이 무엇인가 물으면 두말도 없이, “남북 분단이요 동족상잔이였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우리 두 사람은 대한민국 정부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를 조직하면서 그 조직 속에 종교위원회를 두고 개신교회 목사로서 위원으로 참여하라는 위촉을 받았습니다. 종교위원회는 국내 7개 종단을 대표하는 위원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 모임을 시작하면서 위원 모두는 모든 종파가 각기 고유한 신앙에 대한 신앙고백도 할 수 있고 종교간 진리에 관한 학술적 토론과 논쟁도 할 수 있지만 종교 우월감이나 감정적인 타종교 배척운동 같은 행위는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만이라도 피차 자제하는 것이 민족 통일에 간접적이나마 좋은 봉사가 된다는데 일치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 한분이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대학에서 강의도 하면서, 아직 정착하지 못한 미국의 교포사회에 불멸의 불씨를 지피고 대한민국을 비방하는 거점역할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목사님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고국에 돌아와 영락교회 부목사로 몇 해 동안 복직하시고 다시 미국에 들어가신 분입니다. 그는 6.25사변 전 제가 목회했던 신사동교회에서 국내 보수계통의 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제가 섬기는 교회 유치원 보조였고, 그의 장모님은 교회 전도사님으로 봉직하면서 저와는 가족처럼 지냈던 분들이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도 그 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한경직 목사님께서 일제 말기까지 목회하시던 신의주 제2교회의 교우 자녀였던 것 같습니다.

정진경 목사님과 저는 이 문제를 계기로 우선 미국을 위시한 주변 4대국에 있는 우리 교포 사회를 자세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고국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맙게도 그 뜻을 전달받은 사무처가 우리 두 사람의 경비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미국 교포 사회는 3층 구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제1층은 해방전?후 미국에 유학을 갔던 분들이 6.25사변 등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분들로, 제1세대 즉 뿌리교포들입니다. 그분들은 일제치하에 이미 미국에 정착한 우리 교포들과도 연계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미국시민권 소유자들이었고 대부분 대학 교수나 연구기관 혹은 행정기관 등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다음 층은 6.25사변에 주한 미군들과 결혼한 한국인 신부들과 그 가정 그리고 주한 미군과의 교류를 통해 미국에 이민을 간 한국인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계층입니다. 마지막 층은 6~70년대 유신정권 출발이후 다량으로 미국에 이주해 간 우리 동포들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계층 간의 수직적 연결 관계가 단절되어있고, 계층 내에도 아직 중심점을 잡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 둘은 그 탐방을 통해 두 가지 점을 요약했습니다. 그 하나는 고국에서 교포 사회 각 계층의 중심이 될 만한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교포 사회의 구심점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국이 해외교포를 돕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 무엇이겠는가의 문제 입니다. 이미 고국을 떠나 이민을 와있는 사람들은 그 땅에서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그 땅에 정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진정으로 돕는 길은 그 나라에서 소수 민족이라는 불리한 입장에서 그 나라의 지도자 그룹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포들이 거주하는 나라와 사회에서 지도자 그룹에 진출하는 것은 그들 자신과 후손들의 성공은 물론 고국인 한국을 위해서도 가장 실질적인 공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사무처의 경비지원을 받아 미국 동, 서부와 아시아에서는 일본, 싱가폴, 유럽에서는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후에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등에서 그 지역 출신 지도자들 3, 40명과 자유스러운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그 기간 동안 진행된 행사가 교포 사회의 연대의식을 강화하여 구심점을 이루었고 그들과 고국의 관계 형성에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민족적 봉사는 정진경 목사님과 저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감사한 기회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그렇게도 애절하게 내 나라 없음을 서러워하며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나라를 찾은 후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비롯된 전쟁에서 국토가 쑥밭이 되고 수백만의 생명들이 희생당하는 시대를 지나왔으며, 유신이라는 험난한 정치사를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목회직을 은퇴한 이후 이렇게라도 나라와 민족에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됨을 지극히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러한 긴 역사의 이야기들을 짧게나마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으면 정진경 목사님의 인생 한 토막이 삭제되는 것 같은 안타까운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데로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민족의 역사 속에서 많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저는 정진경 목사님과 같은 분이 함께 하지 않았으면 사회봉사와 민족통일의 기반조성과 같은 큰 일을 이룰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모든 경우에 자신을 목사로 소개하였으며, 그가 일하는 자리에서 목사로서의 사명의식을 한 시라도 소홀히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진경  목사님은 회중 속에 앉아있는 교인들에게는 언제라도 다가가 따스하게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드는 다정한 분으로 비춰졌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교회나 목사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더 나아가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편안하게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면서 친구처럼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분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디서나 목사의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목사님으로서 거부감 없이 받아지게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그 다정함, 그 겸손함, 그 순결함, 그 진실함 자체가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이 되고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교회를 쳐다보아야할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진경 목사님 그분은 교계에서 일등 목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교회 밖에서 보는 분들에게도 일등 목사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정진경 목사님 자신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자기를 꾸미고 치장하는데 완전히 무감각합니다. 그는 자기 뒤에 지지자들이 따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분은 자기 명함에 빈틈없이 직함을 적어놓지도 않았습니다. 목사로서 그의 가장 큰 결점은 목소리가 항상 작은 점입니다. 하늘과 땅이 쩡쩡 울리도록 고함을 치지 못합니다. 그분은 옛날 선지자 엘리야의 경험처럼 지극히 작고 희미함 속에서 가늘게 들려오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그 자신이 그렇게 체험하고 사셨습니다. 그분도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분이신데 그는 제 일인자의 자리는 감히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분명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 첫째 자리에는 이미 그 자기 자신이 모시고 계신분이 앉아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목사에게 배당된 자리에는 제 일인자의 자리가 없습니다. 종으로 불러주신 예수님만이 그 자리에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일찍부터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일생동안 어디에 가시나 맨 앞자리에 나와 앉지 않았습니다. 정진경 목사님, 이 분은 교회 안에서는 선한 목자로서, 한국 교계에서는 “소리 없는 지도력”으로 화목케 하는 자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는 그 어디에서나 참 목사, 좋은 목사님의 귀감을 보이시고 가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 다시 한번 애도의 정을 표하면서 제 강연을 끝마칩니다.

 




신촌성결교회 원로 정진경 목사, 노환으로 별세

이대웅 기자 입력 : 2009.09.04 07:30
  

하나님의 말씀만 전한 참된 겸손의 목회자

▲故 정진경 목사.
신촌성결교회 원로이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한기총 대표회장 등을 역임했던 정진경 목사가 3일 오후 10시 40분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의 빈소는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 마련됐다.

故 정진경 목사는 192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공산 치하,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 근대사 속에서 굳건히 신앙을 지켜왔다. 그의 최초 목양지는 1948년 공주성결교회였고 마지막 목회지는 1991년 은퇴한 신촌성결교회다.

약 40년을 목회자로서 현장에 있었고 은퇴 후에도 늘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된 목회자로서 살아갔다. 그는 연합사업, 구호사역 등 평생을 걸쳐 일해 왔던 수많은 일들을 계속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 많은 직함 중 오직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라는 명함 하나만으로 자신을 내보이는 참된 겸손의 목회자였다.

정진경 목사는

1921년 9월 14일 평안남도 안주 출생 
1945년 서울신학교 입학 
1948년 서울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 졸업

1956년 아주사대학 입학, 
1958년 에즈베리 신학대학원 입학 
1960년 귀국 후 서울신학대학 교수로 15년간 사역

1975년 2월 9일 신촌교회 담임목사 취임 
1981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1982년 서울신학대학교 이사장 
1984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1991년 9월 15일 신촌교회 은퇴(18년간 시무) 원로추대

은퇴 이후에도 호서대 이사장, 기독교학술원 이사장,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이사, 군복음화 부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을 맡아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