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환교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학교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다. ‘연세춘추’ 주간을 맡았는데, 1980년대 초에는 연세대가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밤새워 기사를 쓰고 인쇄가 다 끝날 때까지 지켜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기사를 바꿔치기하는 바람에 대학신문이 나오는 날은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게다가 연세상담소 소장까지 맡아 남편은 밤늦게까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의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책임감이 강한 남편은 어느 한 가지 일도 대충 넘길 수 없었기에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남편이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하는 8일 동안은 피곤도 풀리고 아주 좋았다. 그는 퇴원을 재촉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서 잠시 쉴 틈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병원 문을 나섰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 나를 넌지시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내가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소.” 그는 쑥스럽게 웃으면서 “내가 한 가지 잘한 일이 있소. 그게 뭔지 아오? 내가 당신하고 결혼한 거.” 그러면서 하염없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 사람이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라며 넘겼다. 그러나 그 말을 하고 불과 사흘, 남편은 병원에서 준 간에 좋다는 알약을 아침, 저녁으로 13알씩 복용하면서부터 기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더니 사흘 만에 피를 쏟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우리나라 40대 과로사의 한 명에 남편이 들다니…. 그는 과로로 쓰러지고 2주 만에 손 쓸 겨를조차 없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땅이 꺼짐을 느꼈다.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이건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도저히 남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혀 죽음에 대한 준비도, 대비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졸지에 당한 일이라서 나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 하나님께 항변만 했다. 이제까지 유년시절의 무조건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했고 청소년기에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그 후 축복의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는 얼토당토않게 불의를 자행하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주님의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종을 하나님의 일을 준비만 시켜놓고 하기도 전에 불러 가시는 처사란 있을 수 없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허공을 치면서 하나님께 항변했다. 이런 불의의 하나님을 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보물을 강물에 빠뜨린 것도 같고 진흙탕에 빠뜨린 것도 같은 상실감과 허탈함에 싸여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 버림 당한 기분이 되어 참담함이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이런 나에게 정진경 목사님이 찾아오셨다. 목사님은 “김 집사, 나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하나님께서 왜 양 장로를 그렇게 빨리 하늘나라로 불러 가셨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끝까지 믿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그 뜻을 알도록 간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편을 읽어볼 것을 권면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항변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만 되뇌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