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나는 국제부인회에 들어가 한 주에 한 번씩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했다. 앞서 일본인이 재패니스 팬케이크를 소개했는데 주변 반응이 시큰둥했다. 나는 불고기, 잡채, 빈대떡을 알렸다. 다들 맛있다며 외국 학생들에게 점심시간에 대접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한국인 교수 부인들과 밤새워 음식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판매했다. 모두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맛있다고 했다. 그렇게 음식을 만들어 판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보태 어렵게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을 돕기도 했다.
또 서윤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5월 30일을 ‘한국의 날’로 정해 전교생에게 한국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뉴욕의 대사관에 연락해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영상 자료를 얻으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1980년대 초 세계인들이 보는 한국이란 6·25전쟁을 겪고 고아와 과부들이 많은 아주 못사는 나라였다. 그런데도 당시 한국을 홍보할 만한 영상물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세워진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빠르게 부흥·성장했음을 전했다. 특히 1900년대 초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몸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준 헌신들이 바탕이 됐음을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축복해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우리 가족과 함께 했던 교수 부부들도 잊을 수 없다. 당시 프린스턴대 교환교수로 오신 분들은 우리 가족을 비롯해 시립대 안재영 교수 부부, 건국대 이주영 교수 부부, 동아대 성대동 교수 부부까지 네 가정이었다.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들로 대학교회를 함께 다니며 즐겁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만난 나채운 목사님은 후에 장신대 교수가 되어 ‘광나루문학’을 창간했고 지금까지도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 나 목사님은 한국문인선교회의 지도 목사로 큰 울타리가 되어주신다.
한번은 이들 교수님 가정이 모두 모여 한겨울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기 위해 ‘무모한 도전’에 나선 적이 있다. 스노타이어도 끼지 않은 채 우리들은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중간에 폭설을 만난 게 아닌가. 곳곳에 사고 난 차량들이 보였다. 움직이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쏟아지는 눈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폭설을 뚫고 눈 덮인 나이아가라 폭포를 끝내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다시 밤새워 13시간을 운전해 프린스턴대로 돌아왔다. 이어 함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인도해 주심으로 여행을 무사히 마쳤음을.
돌이켜보면 이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결혼생활 중 ‘이 시간들이 없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남편과 단둘이 떠난 유럽여행 역시 잊을 수 없다. 셰익스피어 생가를 둘러보면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졌던 추억이 아련하다. 대문호의 생가 앞 잔디밭에서 펼쳐진 즉흥 콘서트는 우리 부부를 위해 만들어 놓은 공연 같았다. 노부부들이 손을 잡고 벤치나 잔디밭에 앉아서 공연을 감상했다. 남편은 나에게 아름다운 노부부들을 보면서 말했다.
“여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아오? 백발의 노부부가 저렇게 손잡고 함께 사는 것이오. 우리도 그렇게 삽시다.” 의미심장하게 내게 던진 그의 말. 그러나 사랑하는 내 남편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